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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집

제가 여기 있습니다.

by 해찬솔의 신학 2014. 2. 26.

 

재인용 및 복사를 금 합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출애굽기 3 : 1~12)

 

                                                                                                                                                                                         안산 성략교회 저녁설교

 

  흔히 이스라엘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의 생애를 셋으로 구분하여 말합니다. 신명기의 마지막 장인 34장에 보면 모세의 종말을 기록 하였습니다. 모압 땅에서 죽어 벳브올 맞은 편 어느 골짜기에 장사되었는데 오늘까지 그이 묘가 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모세가 세상을 떠날 때 나이 120세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20140223일 저녁 예배 시간에 우리는 출애굽기 3장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모세의 청년기 장년기에 대해서는 길게 기록하지 아니했습니다. 출애굽기가 40장인데 모세가 80세 날 때까지의 생애에 대해서는 두 장에 기록을 마치고 80세 이후 노년에 그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였습니다.

 

모세는 레위 자손 아므람과 요게벳의 아들이요 미리암과 아론의 동생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박해 당하던 시대에 나서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누구나 아들을 낳으면 조산원을 통해서 죽여 없애버리라는 바로 왕의 잔악한 정책에 따라 낳아서 석 달 동안은 왕의 명령을 어기고 집에서 키웠지만 목소리는 더욱 커져 밖에 들릴 정도가 되니 이 이상 더 숨겨 키울 수가 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생각 끝에 갈대상자를 만들어 물이 새어 들어오지 못하도록 역청을 발라 아기 모세를 그 상자 안에 넣어 나일 강변에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귀여운 어린 아기를 버리게 되는 부모의 심정을 무엇으로 어떻게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마침 바로 왕의 공주가 나일강에 목욕하러 나왔다가 버려진 아이를 발견하고 사람을 시켜 건져다가 공주의 양자로 삼고 물에서 건져냈다 해서 이름을 모세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애굽 왕 바로의 궁중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40세때 한번은 애굽의 종으로 일하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보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애굽인 감독에게 너무 비참하게 학대받는 것을 볼 때 이스라엘 사람의 피가 흐르고 있는 모세는 의분이 일어나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인 감독을 쳐 죽였습니다. 그런데 이튼날 또 나가 보았더니 이스라엘 사람끼리 싸운단 말입니다. 노예 신세로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면서 사는 것만 해도 억울해 죽겠는데 이 사람들은 왜 자기 동족끼리 싸우나? 하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습니다.

 

여보시오,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동족끼리 이렇게 싸운단 말이요!”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의 반응은 너무 기대 밖이었습니다. “남이야 싸우던 말 던 당신이 무슨 상관이요, 간섭이요? 어제는 애굽 사람을 쳐 죽이더니 오늘은 우리를 죽이려 하시오? 누가 당신을 우리 재판관으로 세웠오? , 별꼴 다 보겠네 이 말을 들은 모세는 귀가 멍하고 앞이 아찔한 것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이러다가는 애굽 사람 죽인 것이 드러나겠다. 생각하고 바로의 노함이 두려워서 미디안으로 멀리 도망을 쳤습니다. 그리고 미디안에 가서 추장이요, 제사장인 이드로의 딸 십보라와 결혼하여 40년 동안을 들에서 양을 치는 목자 생활을 했습니다.

 

이제 모세의 나이 80이 되었습니다. 무상한 세월은 흘러가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비교적 장수하던 때였습니다만 80이면 고령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래도 80살 난 모세는 오늘도 어제나 다름없이 그의 장인 이드로의 양무리를 이끌고 초장을 찾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양무리를 이끌고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그는 갑자기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 쪽 언덕 기슭에 있는 떨기나무에 불이 붙고 있었습니다. 깜작 놀라 바라보았습니다. 산불이 나서 퍼지면 이 많은 양무리는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떨기나무가 불이 활활 타는데도 나무는 없어지지 아니하고 그 불이 다른 데로 퍼지지도 아니합니다. 모세는 놀랄 뿐만 아니라 무서운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왜 나무가 불이 붙는데 타서 없어지지 아니할까? 왜 불이 저렇게 활활 타오르는데 퍼지지 아니할까?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모세야, 모세야그를 부르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모세는 두려운 마음 떨리는 마음으로 대답했습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다시 모세에게 들여왔습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이때 모세는 하나님의 음성인 것을 깨닫고 당황한 가운데 신을 벗고 얼굴을 땅에 대고 웅크리고 앉았습니다. 그런데 계속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나는 네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그러면서 모세에게 새로운 비젼을 주셨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모세의 동족인 이스라엘 민족을 바로에게서 구출해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위대한 사명이 맡겨졌습니다.

 

모세는 무슨 특별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40년을 하루같이 목자의 생활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평범한 일을 충성되게 하고 있는 사람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더구나 모세는 자기 자신이 그런 위대한 과업을 수행할 사람이라고 믿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께 사양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누구길래 애굽의 왕, 온 세상 사람이 그의 권위 앞에 떠는 그 앞에 가겠습니까? 더구나 내 동족도 사실 저를 신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낼 수 있겠습니까?”

이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정녕 너와 함께 하마, 너는 조금도 두려워 하지말라. 네가 내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 이 산에서 나를 섬기게 하련다

 

사랑하는 성략교회 성도 여러분!

모세도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불이 임하시면 권능을 얻어서 큰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모든 것을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능치 못함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했습니다. 사도행전 23~4절에 보면, 오순절에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 모인 사람들에게 임하였고 저희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고 했습니다.

 

성령 충만히 받기 전에는 그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별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눈으로 보기에는 세상의 다른 사람보다 초라하고 지식 없고 돈 없고 권세 없는 그저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불같은 능력이 임할 때 세상을 뒤집어 놓는 능력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말씀 하신 대로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는다고 했는데 여기 권능이란 말은 헬라말로 두나미스인데 다이나마이트란 말의 어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다이나마이트와 같아서 놀라운 힘을 발휘합니다.

 

히브리서 1229절에 보면,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시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모세는 떨기나무에 불이 붙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 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겨야 한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권면합니다.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고 우리는 모세의 이 말에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여러 사람에게 말씀하시지 아니하시고 나 한 사람에게 말씀 하십니다. 히브리서 11절에 잇는 말씀대로 하나님은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에게 말씀 하여주십니다어떤 때는 심한 병을 통해서 나에게 말씀 하십니다. 어떤 때는 사업의 여지없는 실패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어떤 때는 사랑하는 이와의 사별의 슬픔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어떤 때는 문학 작품을 통해서 말씀 하십니다. 어떤 때는 미술이나 예술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어떤 때는 친구의 권면을 통해서 나에게 말씀 하십니다. 어떤 때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면서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에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드릴 때 우리에게 축복이 됩니다.

 

2, 하나님은 나의 사정을 보십니다.

 

오늘 주신 말씀 7절에,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숨길 것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옛날 시편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가?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나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찌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139:7~12)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아십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나의 사정을 모를 수 있습니다. 말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사정을 다 아십니다.

 

3.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십니다.

 

시편 9115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짖을 때 들으십니다. 간구하면 응답하십니다. 미국의 어느 목사님한테서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가정의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이 자전거를 타고 싶어서 아버지한테 직접 말하지 못하고 할머니한테 말했습니다. 할머니, 나 자전거 하나 사서 탔으면 좋겠어요 아버지가 사주실까요?” 그랬더니 할머니 말씀이 얘야, 그러면 하나님께 기도해라. 하나님이 아버지 마음을 움직여 자전거를 사주게 하실거야 그래서 이 아이는 그 날부터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자전거를 타고 싶습니다. 저희 아버지 마음을 움직여서 저에게 자전거 하나 사주도록 해 주세요 며칠을 기도해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하루는 아버지 방 옆에 방에서 큰 소리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 마음을 감동케 해서 제게 자전거 하나 사주게 해 주세요크게 소리를 지르며 기도드렸습니다. 할머니가 옆에서 , 너는 뭐 기도를 그렇게 크게하니? 그렇게 크게 소리 지르지 않아도 하나님은 다 들으셔요

이때 이아이의 대답이 할머니 나도 알아요. 그런데 이 기도는 하나님도 들으셔야 하지만 우리 아버지가 들으셔야 해요

 

여러분! 우리의 기도가 혹시 사람이 들으라고 하는 기도는 없습니까? 목사님이 이 기도를 들어야 돼, 정치하는 사람이 이 기도를 들어야 돼, 아무개가 들어야 돼 하는 기도는 없습니까?

기도는 하나님이 들으셔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와의 대화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골방에서 기도하라 했습니다. 왜요?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손을 들고 아름다운 단어를 써가면서 듣기 좋은 말로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을 향한 연설은 될지 몰라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아닙니다. 금식하면서도 세수하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 다른 사람이 모르게 하라고 은밀한데 보시는 하나님이 갚으시리라 했습니다.

 

요사이 나와의 어려운 문제를 놓고 많은 성도가 하나님께 여러 가지 모양으로 기도합니다. 어떤 사람은 단식을 하는데 신문기자들을 불러놓고 내가 단식기도를 시작한다고 알립니다. 단식은 가장 절박한 상황에 드리는 기도의 형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는 단식이 값이 있는 것 이지 사람 앞에 알리고 시위하는 단식기도는 옛날 바리새인의 기도보다 못한 기도라고 생각 합니다.

 

4. 하나님은 우리의 우고를 아십니다.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이해하십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는 때로는 본의 아닌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두 이시고 바로 아시기 때문에 오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014절 이하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어려운 문제를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을 모두 아십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의 형편을 알아서 바로 인도하고 지켜주고 먹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삼는 사람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시편 1391절 이하에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속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오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형의 말을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나이다.”

 

5. 내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종살이하며 고생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부터 인도하여 자유케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영적인 면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애굽과 같은 종살이에서 인도하여 자유케 하시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역사는 반드시 사람을 통해서 하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도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들어 쓰셨습니다. 오늘 우리 서울에만도 아직 어두움의 권세 밑에서 죄의 종이 되어 불쌍하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무리 권세가 있어도 죄 범하면 죄의 종이 됩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죄 범하면 죄의 종으로 이리 저리 끌려 다닙니다. 아무리 지식이 많은 사람이라고 해도 죄 범하면 죄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불쌍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제 너를 보내서 믿지 않는 서울 시민을 어두움의 권세에서 죄의 세력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여러분 이 음성을 들으십니까?

하나님의 뜻은 그의 백성을 구원하는데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고을에 가서 예수님께서 어떤 여인과 우물가에 앉으셔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동리에 들어가서 점심 준비를 해가지고 왔습니다. 선생님, 식사 하십시오할 때 예수님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 제자들은 아마 우리가 없는 사이에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린가보다고 생각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예수님의 양식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의 백성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아무쪼록 몇몇 사람이라도 구원할려고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아야 합니다.

 

6.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주저하는 모세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모세의 손에는 지팡이뿐이었습니다. 양치는 때 쓰는 지팡이, 값도 안 나가고 모양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있는 대로 보였습니다. 그것을 땅에 던지라고 하셔서 던졌더니 뱀이 되었습니다. 다시 잡으라고 하셔서 잡았더니 여전히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을 잘 이용할 때 그것이 유익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조종하지 못할 때 뱀과 같이 우리를 해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도 하나님의 능력의 장중에 붙들려 있을 때 유익하게 쓰여지지만 그 손을 벗어 날 때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사회와 민족을 해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쳐 죽인 것을 보세요. 하나님이 그를 들어 쓰셨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 당시 마틴 루터는 담대하게 일했습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라고 그는 고백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오늘 저녁에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쓰십니다. 모든 주의 종들을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저녁 시간 하나님은 다른 사람아닌 나를 부르십니다. 모세는 40날 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알았었습니다. 다른 40년 동안에 그는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40년 동안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진리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십니다.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십니다. 나의 문제와 고민을 아십니다. 내 겨레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손안에만 있으면 무엇이던지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여기 있아옵니다. 저를 보내 주시 옵소서하고 대답하시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주후 2014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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