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집

뜻밖의 사건

by 해찬솔의 신학 2012. 1. 1.

 

 

 

  주후2012.01.01일 주일                             뜻밖의 사건

                                                                        (본문 : 4:18 – 26)

 

                                                                                                                                                                                                                                                                                                                                                설교 : 김한영 목사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 하신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아기였을 때, 바로의 명령을 따라 사내로 태어난 아이들이 모두 나일강에 수장되던 때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또 왕자로 왕궁애 있을 때 민족애가 살아나서 애굽사람을 쳐 죽인 후, 바로가 모세를 죽이려고 찾던 때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모세를 죽이시려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모세가 하나님을 몰랐던 때가 아니고 분명히 하나님을 호렙산에서 뵈온 후의 일이었기에 더 충격적입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거룩하게 받아들고 애굽을 향해 떠난 길목에서 이 사건은 발생합니다.

 이 사건은 잘 알려진 사건이 아닙니다. 어쩌면, 아주 짧게 기록된 사건이요, 모세의 혁혁한 믿음의 전과에 감추어졌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는지 모르겠고, 또 한편으로는 본문이 해석하기 까다로운 부분이기 때문에 자세히 다루어지지 않아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그 사건 속으로 믿음의 여행을 떠나 보려고 합니다. 오랜 세월을 넘어서서 바로 그 역사적 현장 속으로 동행하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011년도에서 2012년도로 또 한해가 바뀌면서 우리는 새로운 사명의 길에 나섰습니다. 사명이 있다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 합니다. 하나는 우리가 살았다는 증거요, 또 하나는 그 사명의 길은 꼭 이기고 결과를 가지고 돌아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초라한 사람이 있다면, 사명이 없는 사람입니다. 새해가 왔는데도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목표가 없습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뭔가를 하기는 하는데, 먹고사는 일 외에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보람도 의욕도 없습니다. 그저 시간에 끌려 다니며 살 뿐입니다.

 또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뜻을 잃은 분들도 있습니다. 세계적인 문제이지만 우리나라도 실업자에서부터 청년 실업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국가적으로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실업자 문제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실직할 때도,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대개 그런 순간에 사람들은 의기 소침하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주저앉게 됩니다만,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혹 실패했어도, 또 어느 순간 실직했다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서 주시는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을 가슴에 분명히 새기고 있는 한 그는 결코 실패자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실패한 현실이 아니라 그 속에서 주어진 새로운 사명입니다. “사명이 내 안에 있는가?” 이 점이 중요합니다.

 모세를 보십시요. 그는 사람 앞에서 실패자요, 세상에서 실직자였습니다.  비록 양자이긴 했지만, 왕궁에서의 모세는 남부러울 것이 없었는데, 사람을 죽이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갔다가 거기서 양을 치는 이드로의 사위가 되어 처가살이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옛말에 겉보리 서말 만 있어도 처가살이는 안 한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처가살이가 처량맞다는 의미인데, 애굽왕자에서 하루아침에 냄새나는 양이나 몰고 다니면서 처가살이를 하고 있으니 얼마나 처량합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실패자인 모세를 불러 그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내 백성을 구해내라!”

 

 이제 소망이라곤 그저 장인의 양이나 치며 자식이나 낳고 살다 가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엎어진 모세를 향한 특별한 계획을 갖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실패자인 모세에게 사명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도 직업의 형편과 현재의 상황에 상관없이 사명을 주십니다. 혹 실패자라해도 실직자라해도 하나님은 분명한 사명을 주십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들이 서 있는 또 한 해가 시작된 이 자리에서 내 삶의 방향을 잡아야 할 나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내 안에서 나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바로 사명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명이 우리 안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면, 그 다음은 열매입니다.

 입으로만 외치고 끝나버리는 사명은 사명이 아닙니다. 목숨을 걸고 할 일이기에 사명입니다. 내가 살아있는 이유이기에 사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명을 완수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모세의 경험으로 돌아가 봅시다. 모세는 실패자로서의 무능함을 벗지 못하고 의기소침해져서, 하나님께서 사명을 부여하시는 것을 여러 차례 거절한바가 있습니다.

 하다 못해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다는 궁색한 변명까지 들이대며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 하나님이 얼마나 단호하게 말씀 하셨습니까?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하는 자나 못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4:11-12)

 

 결국 피할 수 없는 사명을 모세세는 겸허하게 받아들입니다. 남아있는 자기 인생의 사명이 바로 그것임을 확인하고 가족을 설득하여 사명의 길을 나섭니다.

 

 그런데, 사건은 이렇게 길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일어났습니다. 당시의 광야 길에는 군데군데 상인이나 여행자들이 잠깐 쉴 수 있는 휴식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종일 여행한 모세 일행이 이 숙소에서 쉬려고 할 때였습니다. 다짜고짜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무엇을 가지고 어떤 방법으로 죽이려 하셨는지는 자세히 기록되지 않아 알 수가 없지만, 십보라의 다급한 행동을 보면 당시의 상황이 대단히 두럽고 긴박한 상황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본문 24절에 쓰여진 만나다라는 단어를 보아도 그 때의 분위기를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에는 만나다라는 단어가 두 개 있는데, 그 중 카라라는 단어는 친밀하고 따뜻한 만남을 의미할 때 쓰여졌고, 다른 하나인 파가쉬라는 단어는 거칠게 적대관계로 만날 때쓰여지는 말입니다. 감정이 격해져서 씩씩대며 만나러오는 그런 의미로 쓰여지는 단어인데, 오늘 본문에 쓰여진 것이 카라가 아닌, 파가쉬라는 단어입니다.

 만나러 오실 때부터 모세의 마음을 떠보시려는 의도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사명을 향해 떠나는 모세의 모습에 무언가 무척이나 편치 못하신 내용이 있으셨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사명을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작할 때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될 성부른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시작할 때의 모습을 보면 대충 짐작이 가는 겁니다. 처음부터 플어진 모습으론 일년의 경주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의 육신은 꽤나 피곤한 모습인데, 마음마저 그러하다면 결과는 뻔하지 않겠습니까?

 

 십보라가 돌칼을 집어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져 놓자 그제서야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놓으시고 사건은 그 자리에서 일단락 되었습니다.

 이 돌발적인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합니까? 사명을 앞에 두고 떠나는 소심해진 모세를 격려하셔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 오히려 죽이려하시다니, 겨우 순종하며 나가는 모세의 죽이시려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의아한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일까?

 일이 이렇게 된 원인이 이렇습니다. 출발하기 얼마 전 모세는 둘째 엘리에셀을 낳았습니다. 길을 떠날 채비로 마음이 분주했었는지, 아니면 이방인 부인이었던 아내의 반대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기한인 8일이 지나도록 아이의 할례예식을 치르지 못한 채 길을 떠났습니다. 노중에서 할례를 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모세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여행을 계속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할례는 아브라함 때부터의 하나님과의 변개할 수 없는 약속이었습니다. 할례는 사내아이의 생식기 끝 부분을 덮고 있는 표피를 낳은 지 8일째 되는 날 잘라내는 의식입니다.

 당시의 이방인들에게는 그저 살 덩어리를 조금 떼어내는 것에 불과했고, 또 주님의 은혜로 신약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할례는 포경수술에 불과하지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할례는 목숨보다 귀한 여호와 하나님과의 언약의 증표였습니다.

 이 언약이 어떤 언약입니까? 할례를 통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기업이 되는 것입니다.

 , 양피를 베어내는 것은 단순히 건강상의 이유로 필요 없는 부분을 베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확인하는 언약의 표징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17장에는 할례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엿음이니라

 

 여러분, 할례는 하나님과의 언약의 표징입니다. 하면 유익이 되고, 하지 않으면 약간의 손해가 오는 그런 차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건강의 문제도 아닙니다. 생명의 문제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능력이 이 언약을 이행함으로서 생겨난다는 말씀입니다. 할례가 없으면 하나님과 끊겨지는 것인 동시에 모든 것의 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아들의 할례를 치르지 못한 것은 아마도 아내 십보라의 고집스런 반대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하실 때, 곧바로 아들의 양피를 베어 던진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왜 이러시느냐고 묻는 과정도 없었습니다. 무엇이 원인인지를 살피는 절차도 필요치를 않았습니다.

문제가 생기자 바로 행동이 나옵니다. 그만큼 문제의 원인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 전에 얼마나 실랑이를 벌였으면 바로 해답이 나왔겠습니까?

아마도 이방인이었던 십보라는 모세가 할례의 중요성을 누차 강조하며 설명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의 동족을 들먹이며 반대했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방인들에게 할례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저 괴로움이 수반되는 의식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택하신 백성에게 할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된 사람들에게 할례는 필수조건입니다. 하나님과 나를 이어주는 매개체요, 그 이어짐을 통해서 모든 것이 오고 갑니다. 그것이 끊기면 모든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살았으나 죽은 것과 진배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기본이 되어 있지 않음녀 사명은 무의미합니다. 그 언약의 이어짐이 없이는 성골할 수가 없습니다. 거기서부터 세상을 이길 능력이, 바로 볼 수 있는 지혜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믿음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할례를 받아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격이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할례는 무엇입니까? 신약에서의 할례는 그리스도의 보혈과 십자가로 그 의미를 확정합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2:28-29)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료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렇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로 할례는 마음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피를 흘린 할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로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명을 향하여 나가는 길에 끊을 것은 단호히 끊어버려야 합니다. 불필요한 우리의 모습을 잘라내는 것이 바로 마음에 하는 이면적 할례인 것입니다.

 

# 어떤 사람이 야심한 밤에 처음 가는 산길을 홀로 가게 되었답니다.

한참을 가다보니 어스름한 달빛에 아래로는 깊은 절벽이 내려다보이는 낭떠러지를 통과하게 되었는데, 그만 실족하여 떨어지면서 엉겁결에 나무뿌리를 부여잡게 되었습니다. 이젠 목숨이 나무뿌리에 달렸습니다. 사람살리라고 소리쳐 보지만,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손목과 팔의 힘이 점점 빠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더 버텨보았지만 이제는 정신력마저도 잃어가기 시작합니다. 이제까지 살아온 세월들이 주마등 처럼 스쳐 지나가고, 가족들의 얼굴이 떠오르는가 싶더니 이젠 죽었구나하는 순간 나무뿌리는 손아귀를 빠져나가고, ! 하는 비명과 함께 몽이 쿵!하고 떨어졌답니다.

 그런데 죽을 줄 알았는데 떨어진 곳은 수십 길 낭떠러지가 아니고 겨우 1미터 높이의 바위였답니다. 그런것을, 손만 놓으면 죽는 줄 알고 겨우 1미터의 높이에서 그 길고 긴 시간을 나무뿌리를 잡고 두려워 떨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놓치면 죽기라도 하는 것처럼 결사적으로 잡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놓을 것을 놓아야 마음 졸이는 환경들이 사라지고, 끊을 것을 끊어야 평안속에 살 길이 열릴텐데 그렇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할례는 칼질 입니다. 단호하게 쳐내지 못하면 사명은 일그러집니다. 또한 칼질은 고통을 수반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여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 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5:29-30)

 

오늘 본문에 기록된 이 뜻밖의 사건으로 죽음의 일보직전까지 갔었던 모세는 귀중한 진리를 배웁니다. 주어진 사명은 할례 없이는 갈 수 없는 길이란 사실입니다.

요즘은 사명을 너무 쉽게 말하고, 너무 쉽게 던져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사명이 아닙니다

 

2011년도에서 2012년도로 또 한해가 바뀌면서 우리는 새로운 사명의 길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길에 서있는 우리에게 할례와 같은 언약의 증표가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그 보혈의 은혜에 감격하는 마음이 여러분 마음속을 가득채우고 있지 않으면 결코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하나는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요, 또 하나 그 사명의 길은 반드시 이기고 결과를 가지고 돌아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으로 사명을 감당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후2012 0101일 주일예배

 

뜻밖의 사건.docx

뜻밖의 사건.docx
0.02MB

'설교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떻게 시간을 관리할 것인가?  (0) 2016.04.16
회개와 보상  (0) 2016.03.06
제가 여기 있습니다.  (0) 2014.02.26
연말을 정리하는 올바른 태도  (0) 2011.12.10
보물이 있는곳에 마음도  (0) 2011.04.17
고통의 의미  (0) 2011.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