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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집

고통의 의미

by 해찬솔의 신학 2011. 4. 11.

 

 

                                  고통의 의미

                                                                                 (본문 욥30: 31)

 

 

                                                                                                                                                                                                         설교 : 김한영 목사

 

 

 

우리 인간에게 땅위에서의 삶은 그저 즐겁고 행복한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가 생각치도 못한 불행한 사건들과 고통이 우리를 엄습해 옵니다. 만약 모든 불행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을 우리가 다 알 수 있다면 그 원인을 제거하여 미연에 막을 것입니다. 또한 혹시 우리가 과거에 저지른 잘못 때문에 불행을 당하는 것이라면 어느 정도 불행을 감수하고 삶이 한결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의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도무지 왜 고통이 우리에게 오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일평생 담배 한 개비 술 한모금 입에 안댄 사람에게 폐암이 찾아 옵니다. 이 세상에서 악한 사람은 무시무시한 고통을 당하고 착한 사람은 아주 행복된 삶을 산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살기 좋겠습니까? 그런데 악한 자는 피등피등 살찌고 착한 사람이나 사회가 꼭 필요로 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환난과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세상은 뒤죽박죽 입니다. 논리가 없습니다. 이렇게 해야할지 저렇게 해야할지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이 뒤죽박죽 비논리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더 고통을 당합니다. 운이 없어서 아무 이유없이 고통을 당합니다. 그래서 샤르크르는 "전지전능한 신이 있다면 이 세상이 왜 뒤죽박죽인가? 이 세상이 뒤죽박죽인 것으로 봐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말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아주 악한 사람의 친구일 것"이라고 아주 냉소적인 주장을 했습니다. "그래도 땅위의 삶이 그렇게 뒤죽박죽일 수는 없다. 반드시 무슨 이유가 있고 의미가 있을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무슨 이유를 들어서라도 이 세상의 부조리, 비 논리를 극복해 보려고 애를 씁니다.

 

불교나 흰두교에서도 다음 세계에서의 인과응보를 내세워 부조리를 극복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는 문제가 매우 복잡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으로서 단순히 다음 세계에서만 지배하시는 분이 아니라 이 세계를 지배하는 분이십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한 아름다운 세상이요, 땅위에 삶을 주장하시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 세상이 뒤죽박죽이고 의미없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매우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은 쉽게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것은 죄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죄를 짓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람에게는 원죄가 있기 때문에 고통과 슬픔이 있다 라고 이렇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쉽게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죄없는 사람이 더러 고통을 당합니다. 비록 죄없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더라도 어떤 사람은 특별히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고통을 당합니다. 특히 어린 아이의 고통은 무엇이라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고통을 무어라 피상적으로 쉽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거기에는 훨씬 더 깊은 뜻과 알 수 없는 신비가 숨어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문제를 다루는 것이 오늘 본문 욥기서 30장의 말씀입니다. 욥기는 우리에게 그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사람이 고통을 당한다는 쉬운 방법을 택하지 아니하고 훨씬 더 복잡하고 우리 몸에 와 닿는 밥법으로고통의 문제를 처리합니다.

 

욥은 완전한 의인은 되지 못하지만 그가 당한 고통만큼 그렇게 큰 죄를 범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욥은 큰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욥은 의인일 뿐만 아니라 큰 부자였는데 하루 아침에 자기가 가진 모든 재산을 다 잃어 버리고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열자녀를 한꺼번에 잃어 버렸습니다. 또한 자신에게는 몸에 악창이 생겨 가지고 발바닥부터 절수리까지 가득했습니다.

이 악창 때문에 견딜 수가 없어 욥은 기와조각으로 몸을 긁고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욥의 아내는 그와 함께 고난을 나누기 보다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고통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세 친구도 위로는 커녕 욥을 보고 "네가 범죄했기 때문에 그런 벌을 받는게 아니냐? 하나님은 의로우신데 의로우신 하나님이 죄없는 사람에게 벌을 주지 않는다. 벌을 받는 것을 보니까 죄가 있구나. 회개하라"고 욥에게 요구합니다. 욥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런 상황에 처했습니다. 하난님을 욕하고 죽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없는 죄를 만들어서 회개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욥기 30장은 욥의 고통의 절정입니다. 1절부터 15절까지는 사회적으로 조롱 당하는 고통을 말하고 16절과 17절은 밤낮 계속되는 육신의 극심한 고통을 서술하고 18절과 19절은 욥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고통을 주셨구나"하는 것을 믿는 자에게는 어느 정도 위로가 될 수 있지만 지금 욥은 위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20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 울부짖어도 하나님이 들은척만척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의 절망은 더욱 더 큽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고통을 주시고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응답하지 아니하시면 이제 그 고통으로부터 헤어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고통은 절망적인 고통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못받는 위로를 사람으로부터라도 좀 받았으면 좋겠으나 사람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욥은 오히려 25절에 보면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 동정을 하였습니다. 욥은 고통당하는 자를 위하여 같이 울었고 빈궁한 사람을 위하여 욥은 근심하였습니다. 욥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위해서 울고 근심하였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아니하였습니다. 심지어 그를 위로하러 온 세 친구조차 그를 위해서 울지 아니하고 오히려 지극히 당연한 소리 지극히 보편적인 소리인 "네가 범죄하였으니까 고통을 당한다. 회개하라"는 그런 뻔한 소리를 하고 욥에게 더욱 더 고통을 주었습니다. 욥의 고통은 모든 고통의 극치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딸을 한꺼번에 잃어버리고 전 재산을 잃어 버리고 자신은 병들고 혹독한 고통을 당하는데 아내도 친구도 위로는 커녕 비판하고, 그가 호의를 베풀었던 사람도 그를 배반하고 사회적으로 가장 비천한 비루들이 그를 조롱하고 침뱉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의지했던 하나님조차도 그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지 아니했습니다. 오히려 그를 더 큰 고통으로 이끌고 마침내 죽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고통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그것의 어떤 의미를 발견한다면 그래도 어느정도 참을 수가 있었는데 욥의 고통은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도무지 원인이 없습니다. 왜 욥이 고통을 당하여야 하는지 그 원인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위하여 이러한 고통을 당하는지 그는 도무지 알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그에게 뒤죽박죽입니다.

 

아무 논리도 질서도 의미도 업쇼는 그저 우연이 지배하는 그 우연에 소위 재수없이 걸려서 고통을 당하는 것으로 그에게 나타났습니다. 그의 세 친구는 그래도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범죄하니까 고통당하는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무질서하지 않다. 그들은 하나님편에 서 있는 것처럼 하나님편에 서서 욥을 책망합니다. 그러나 욥은 그것을 받아 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에게 숨은 죄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회개하려고 찾아봐도 죄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욥의 친구들은 "너는 교만하다"고 또 욕을 합니다. 욥은 그래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욥은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죄를 범하지 아니햐였는데 왜 나에게 혹독한 고통을 주십니까? 왜 이 세상이 부조리가 가득하고 삶이 의미가 없습니까?" 하면서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욥의 고통과 혹은 욥과 비슷한 고통을 당하는 사람의 그 이유를 피상적으로 그렇게 쉽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고통은 너무 신비스럽고 원인은 너무 복잡합니다. 욥은 끝까지 그 원인을 알지 못했습니다.도무지 하나님이 왜 그에게 고통을 주시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가 끝에 발견한 것은 "자기가 참 무식하구나 하나님의 신비스런 지혜를 자기는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을 뿐 왜 그가 고통을 당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가 회개한 것은 하나님의 오묘하고 신비스러운 세계를 몰랐고 모르는 중에 너무나 떠들었다는 것을 회개하였을뿐 그가 무슨 죄를 지었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였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끝에 가서 하나님께서 결코 그를 버리지 아니한다는 사실만 발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울부짖음을 들으셨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하나님임을 욥은 발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욥의 건강을 회복시키셨고 과거보다 더 많은 자녀와 재산의 축복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욥이 그것을 발견하는데는 많은 인내가 필요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오묘하신 뜻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어떤 때는 수세기가 걸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무 쉽게 간단하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자기 임의대로 해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우리의 고통에 대하여 잘 모릅니다. 다만 야고보서 5장 11절 말씀과같이 인내할 뿐입니다. 욥은 적어도 그런 인내를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채찍을 한번 받아 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받기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고난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본 사람가운데 그 고난이 없었기를 바라는 사람은 또한 아무도 없습니다. 다른 말로 말해서 진실로 믿는 사람은 고통이 지나간 후에 말하기를 "역시 그 고통이 좋았구나!, 그 고통이 없었다면 훨씬 더 좋았을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고통을 당할 때는 너무너무 어렵지만 고통이 지나간 후에는 "아하!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계셨구나"말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는 "고난은 우리를 연단케 하기 위함이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1절은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한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라고 말 합니다. 고통을 당한 사람은 더 연단을 받아서 나중에는 과거에 감히 맛볼 수 없었던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우리의 고통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줄이고 다른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대신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통의 의미요 고통의 특별한 사랑의 의미입니다. 대부분의 우리의 고통은 이런 점에서 사랑의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가 고통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이 경고를 받을 수 있고 우리가 고통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이 위로를 받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줄일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고통의 가장 전형적인 예는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입니다. 그것이 우리 기독교의 가장 신비스러운 요소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고통을 극복해주는 종교가 아니라 고통에 구세주가 스스로 고통을 당함으로 고통의 문제를 해결 합니다. 이것은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참 신비스러운 방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은 어떤 원인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두고 당하는 고통입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은 자발적이었고 다른 사람의 영원한 고통을 대신하는 것이었습니다. 고통이 자발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이것이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고통도 바로 그런 고통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고후 1:4-6절의 말씀처럼 모든 환난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줄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의미를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인내하여야 합니다. 인내를 한 뒤에야 비로서 하나님의 오묘하신 뜻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고통은 결단코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의 눈에서 눈물을 씻겨 주시고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한 영원한 나라로 우리를 이끌어 나가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욥의 고통과 욥과 같이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에 무한한 의미를 제공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다는 사실에 오히려 기쁨을 느끼고 감사할 줄도 알아야 하겠습니다.

 

 

 

                                                                                                                                                주후 2011년 4월 10일 주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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