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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료·논문

성경의 죽음에 관하여

by 해찬솔의 신학 2016. 11. 1.





                                                             성경의 죽음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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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 : 김한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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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죽음은 벌이며, 아담의 죄 때문에 기인한다.

 

1. 처음 사람들이 타락해서 죽을 신세가 되었다.

 

우리의 현재 세계의 출현과 인류의 시초에 관해서 심히 어려운 문제들을 처리했으므로, 다음에는 주제의 논리적 순서에 따른 처음 사람의 또는 처음 사람들의 타락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의 죽음의 기원과 확산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천사들과 같이 만드신 것이 아니다. 곧 죄를 짓더라도 결코 죽을 수 있도록 만드신 것이 아니다. 사람의 경우에는 순종의 의무를 다하면 천사들과 같은 영생과 영원한 행복을 얻어, 죽음이 개입하는 때가 없으며, 불순종에 대해서는 죽음으로 공정한 벌을 받도록 창조하셨다. 나는 이점을 말하고자 한다.

 

2. 영혼의 죽음과 몸의 죽음.

 

그러나 나는 죽음에 대해서 더 자세히 설명해야 될 줄은 안다. 우선 사람의 영혼이 영생불사하리라고 하는 것은 바른 말이지만, 거기에도 독특한 죽음이 있다. 영혼이 영생불사 한다고 하는 것은 영혼의 생명과 감각은 아무리 미약하게 되어도 결코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와 반대로 몸이 죽는다는 것은 몸에서 생명이 완전히 떠날 수 있으며, 몸 자체에는 독자적인 생명이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영혼을 버리시면 영혼이 죽는 것과 같이, 영혼이 몸에서 떠나면 몸은 죽는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영혼이 몸을 떠날 때에는 영혼과 몸, 곧 사람 전체가 죽는다. 이럴 때에 영혼은 하나님에게서 생명을 얻지 못하여, 몸도 영혼에게서 생명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펠라기우스는 사람은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어도 죽도록 창조되었다고 주장했다;Aug., De Haer.,88).

그뿐 아니라, 사람 전체가 이렇게 죽으면 둘째 사망으로 가게 된다. 이것은 성경의 권위가 인정하는 용어다(2:11; 20:6,14 21:8).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10:28)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이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렇게 죽기 전에는 반드시 몸과 영혼이 결합되어서 전혀 분리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므로, 몸이 고통을 당할 때에 영혼이 몸을 떠나지 않고 생명과 감각을 주고 있는데, 어떻게 몸을 멸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 이상하게 여길 수 있다. 저 최종적이며 영원한 벌에 대해서 나는 적당한 곳에서 더 자세히 말하겠지만 그 벌을 받는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얻을 수 없으므로,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 바르다. 그러나 여기서는 몸이 영혼으로부터 생명을 얻고 있는데, 어떻게 죽음을 말할 수 있는가? 참으로 영혼으로부터 생명을 얻지 않는다면 몸은 고통을 체험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부활 후에는 반드시 이 감각이 있기로 정해져 있다. 그러므로 대답은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곧 어떤 종류의 생명이라도 생명은 선한 것이며, 고통은 악한 것이므로, 영혼이 몸에 있는 목적이 살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럽게 만들려는 것일 때에, 우리는 그 몸을 살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은 선하게 살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다. 하나님이 영혼 안에서 선을 행하시지 않으면 선한 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혼이 몸 안에 있으면,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얻든 얻지 못하든 간에 몸은 영혼에게서 생명을 얻는다. 불경건한 사람들의 몸에 있는 생명은 그 영혼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몸에서 온다. 영혼은 죽은 때에도, 곧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때에도 그들의 몸에 생명을 줄 수 있다.

영혼 자체의 생명은 아무리 미약할지라도 그 영생불사의 근원이 되며, 그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으로 벌을 받고 있는 존재는 생명이라기보다 사망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감각이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 감각에는 즐거운 쾌감이나 건전한 안정감이 없고, 고통스러울 뿐이므로 벌이 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과 영혼 또는 영혼과 몸이라는 결합되었던 두 본질을 분리시키는 처음 사망이 있은 후에 있기 때문에 둘째 사망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첫째 사망 즉 몸이 죽는 것은 선한 사람들에게는 선이되며 악한 사람들에게는 악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둘째 사망은 선한 사람들에게 오지 않는 것이므로 물론 아무에게도 선한 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3. 처음 사람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겪게 된 죽음은 성도들 의 경우에도 죄에 대한 벌이되는가?

 

그러나 여기서 무시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긴다. 영육을 분리시키는 죽음은 선한 사람들을 위해서 참으로 선한 것인가 하는 문제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죽음을 죄에 대한 벌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처음 사람들이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물론 이 죽음을 당하지 않았겠기 때문이다. 그러면 악한 사람들이 아니면 당하지 않을 죽음이 어떻게 선한 사람들에게 선이 될 수 있는가? 반대로, 악한 사람들에게만 오는 죽음이라면, 선한 사람들에게 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없어야 할 것이다. 벌을 받아야 할 일이 없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벌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처음 사람들은 참으로 죄만 짓지 않았더라면 어떤 종류의 죽음도 당하지 않았을, 그런 본성으로 창조되었지만, 그들이 처음 죄인이 되었을 때에 사형 언도를 받은 데는 조건이 있어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곧 그들에게서 나는 후손들도 모두 같은 벌을 받으리라는 것이다. 그들과 같은 후손만을 낳겠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들이 받은 그들의 엄청난 죄책과 정비례한 것이었으며 그들의 처음 본성을 악화시켰다. 그 결과로, 처음 사람들의 죄에 대한 벌로써 출발한 것이 그 후손들에게는 타고나는 결과로써 나타난다.

이렇게 된 것은 사람이 흙에서 난 것과 사람에게서 나는 것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흙은 사람을 만드는데 사용된 재료가 되었지만, 사람은 스스로 어버이가 되어서 사람을 낳는다. 따라서 육신은 그 재료가 된 흙과 다르지만, 자식인 사람은 어버이인 사람과 똑같은 존재다. 그러므로 첫 부부가 결합되어 하나님의 처벌 선언을 받았을 때에, 여인을 통해서 생산될 인류 전에의 본성이 처음 사람 안에 포함되어 있었고, 그 후로 사람이 낳는 것은 창조된 때의 사람이 아니라, 죄를 짓고 벌을 받게 된 때의 인간이었다. 적어도 죄와 죽음의 기원에 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처음 사람은 죄나 처벌 때문에 어린 아이들과 같이 마음이 우둔하며 몸이 연약하게 된 것이 아니었다. 이런 특성들이 어린이들에게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 부모를 동물과 같은 수준의 생활과 죽음으로 떨어뜨리셨기 때문이다. 성경에 사람은 존귀에 처하였으나 깨닫지 못하였고, 깨닫지 못하는 짐승과 같이 되었도다라고 하였다(49:12. 20, 70인역). 다만 유아들은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다른 동물들의 아주 어린 새끼들보다도 사지의 운동이나 쾌감이나 불쾌감이 약하다. 이것을 보면 사람의 능력은 억제되었기 때문에 다른 동물들보다 더욱더 높이 솟아오른다고 생각할 수 있다. 화살을 뒤로 당겨 활을 굽히면 쏠 때에 긴장력이 더 센 것과 같다.

처음 사람은 부당한 자만심으로 공정한 벌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린이 같은 미숙한 상태로 퇴화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인간성이 심히 부패하고 변화해서, 그 자체에 복종하지 않고 반항하는 정욕이 생기며, 죽어야 하는 필연성으로 결박되며, 따라서 죄와 벌로 말미암아 이렇게 변한 자기와 같은 후손을, 곧 죄를 짓고 죽을 후손을 낳게 되었다. 만일 중보인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유아들이 죄의 결박에서 풀린다면, 그들은 영육을 분리시키는 죽음만을 겪을 수 있고, 죄의 결박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영원한 벌을 받는 둘째 사망으로는 가지 않는다.

 

4. 중생(重生)의 은혜로 죄를 용서받은 자들도 죽음, 곧 죄에 대한 벌을 면 하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만일 첫째 죽음까지도 죄에 대한 벌이라면, 은혜로 죄책이 말소된 사람들이 그 첫째 죽음을 당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른다. 나는 유아세례에 대해서라는 제목이 붙은 저서에서 이 문제를 이미 논했으며 해결되었다고 한다. 거기서 내가 주장하는 요점은 다음과 같다. 죽음과 죄와의 관련은 없어졌지만, 영혼이 여전히 몸을 떠나게 한 것은, 중생의 성례전을 받은 후에 즉시 신체의 영생불사가 따르게 된다면, 믿음 자체가 약해지겠기 때문이다. 믿음은 현재 눈앞의 사실로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중에 기다릴 때에 참으로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이기려면 믿음의 힘으로 싸워야 했다. 적어도 옛날에는 그랬고, 우리의 거룩한 순교자들의 운명에서 특히 현저한 실례를 볼 수 있다. 중생의 씻음을(3:5) 받은 후에는 몸이 죽을 수 없다면, 죽음에 대한 이 싸움에서 승리나 영예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처음부터 전혀 싸움이 없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몸에서 떠나지 않기 위해서 어린이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은혜로 세례를 받으려고 달려가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그래서 행함으로써 즉시 상을 받게 된다면, 믿음은 보이지 않는 상을 위해서 시련을 받는 일이 없게 되며, 참으로 믿음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구주께서는 더욱 크고 더욱 놀라운 은혜로, 죄에 대한 벌을 개조해서 의를 얻는 데에 이바지하도록 만드셨다. “네가 죄를 지으면 죽으리라고 하시던 것이, 지금은 순교자에게 너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죽으리라고 하신다. “계명을 어기면 너는 정녕코 죽으리라”(2:17) 하시던 것이 지금은 네가 죽기를 거절하면 계명을 어기게 되리라고 하신다. 전에는 죄를 방지하기 위해서 무서워하던 것을 지금은 죄를 피하기 위해서 환영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형언할 수 없는 자비로, 실패에 대한 벌이 그대로 덕성의 무기가 되며, 심지어 죄인이 받는 벌이 의인이 받는 상이 된다. 전에는 죄를 짓고 죽음을 받았는데, 지금은 죽음으로써 의를 실천하게 된다. 믿음을 버리거나 죽음을 달하라고 위협하는 박해자와 맞선 순교자들의 경우가 그러했다. 악했던 처음 사람들이 믿음이 없어서 당한 그 죽음을 의인들은 믿음을 위해서 도리어 선택한다. 처음 사람들은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죽지 않았을 것이지만 의인들은 죽지 않으면 죄가 될 것이다. 따라서 처음 사람들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었는데, 의인들은 죽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는다. 처음 사람들은 죄를 짓고 벌을 불렀으나, 의인들은 벌을 받고 죄책을 피하게 된다. 이렇게 되는 것은 전에 악하던 죽음이 선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극히 위대한 은혜를 믿음에 주셔서, 생명의 반대로 인정되는 죽음이 사람들을 생명으로 넘어가게 하는 수단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5. 악인들이 선한 율법을 악용하는 것처럼 선이들은 악한 죽음을 선용한다.

 

사도는 은혜가 돕지 않을 때에 죄가 어느 정도까지 해를 끼칠 수 있는가를 알리기 위해서, 죄를 금지하는 율법까지도 죄의 권능이 된다고 주장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다”(고전 15:56). 이것은 옳은 말씀이다. 의에 대한 사랑이 강해서 의를 기뻐하기 때문에 죄에 대한 욕망을 극복하게 되지 않는 곳에서는, 금지하는 일일수록 더욱 동경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정한 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기쁨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 이외에 도움을 받을 곳이 없다.

그러나 율법을 죄의 권능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율법을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사도는 다른 곳에서 비슷한 문제를 생각할 때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 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12:13). “심히 죄 되게 한다고 사도가 말하는 것은 죄에 대한 욕망이 더하여 율법까지도 멸시할 때에 범행이 더욱 흉악하기 때문이다.

내가 무슨 까닭에 이 말을 여기서 할 필요를 느꼈는가? 율법은 죄인의 악한 욕망을 더하지만 악이 아니며, 이와 같이 죽음은 의인의 영광을 더하지만 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의를 위해서 율법을 버리면 범법자가 생기고, 진리를 위해서 죽음을 당하면 순교자가 생긴다. 율법은 죄를 금지하므로 선이며, 죽음은 죄의 삯이기 때문에 악이다(6:23). 그러나 악인들은 악한 것뿐 아니라 선한 것도 악용하는 것과 같이, 선인들은 선한 것뿐 아니라 악한 것도 선용한다. 그래서 율법은 좋은 것이지만 악인은 율법을 악용하며, 죽음은 악한 것이지만 선인은 선한 죽음을 죽는다.

 

6. 서로 결합되어 있는 영혼과 육체를 분리시키는 죽음은 대체로 악하다.

 

그러므로 몸이 죽는다는 것은, 곧 영혼과 몸을 분리시키는 것은, 당장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서는 선이 아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서 서로 긴밀히 결합되어 있는 두가지 것을 떼어낸다는 것은 부자연한 느낌을 주며 신경에 거슬리는 일이다. 이것은 영혼과 몸이 하나가 되어 있기 때문이며, 이 느낌은 감각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계속된다. 육신이 큰 타격을 받거나 영혼이 갑자기 졸도할 때에는 이런 고민이 짧게 끝나며 고통을 느끼지도 못한다.

죽어가는 사람의 감각 능력을 제거하며 슬픔을 느끼게 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경건한 마음으로 견디는 사람에게는 인내의 미덕을 더하지만, 그렇더라도 이라는 말을 없애지 못한다. 이와 같이 처음 사람의 후손으로서 죽음은 모든 사람이 타고난 벌임을 의심할 수 없지만, 경건과 의를 위해서 죽는다면 그것은 사람이 재생할 때에 영광이 된다. 죽음은 죄에 대한 값일지라도, 죄에 대한 값을 치르지 않게 하는 데에 성공하는 때도 있다.

 

7. 세례를 받지 않고도 그리스도의 신앙을 고백하기 때문에 죽는 사람들에 대하여.

 

세례를 받지 않고도 그리스도를 인정하기 때문에 죽는 사람들은 거룩한 세례반()에서 씻음을 받은 것과 똑같이 죄의 용서를 받는다. 물론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물과 영으로 다시 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3:5)고 말씀하셨지만, 다른 곳에서는 내가 말하는 것과 같은 사람들에 대해서 예외적으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라”(10:32)고 일반적인 말씀을 하셨고, 다른 곳에서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16:25)하셨다.

그러므로 성도의 죽는 것을 주께서 귀중히 보시느니라는 말씀이 성경에 있다(116:15). 참으로 모든 죄가 용서를 받게 하며, 더 많은 공로를 쌓아두기에 합당한 죽음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다. 죽음을 미룰 수 없어서 세례를 받아 모든 죄를 용서받고 이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죽음을 연기할 수 있으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살아서 세례를 받는 것보다 그리스도를 시인하고 곧 죽는 편을 택한 사람들을 공로로써는 당할 수 없다. 이 사람들이 살아남았다고 하더라도, 세례식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한 죄까지 용서를 받았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죽인 자들도 세례를 받으면 그 흉악한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나 만일 임의로 부는”(3:8) 성령의 풍성한 은혜가 없었으면, 그들은 어떻게 그리스도를 그렇게까지 사랑해서 죽을 위험성이 있으며 용서받을 큰 소망이 있는데도 그리스도를 부인할 수 없게 되었겠는가?

그러므로 성도들의 경우에 죽음은 귀중한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앞서간 모범으로 삼았다. 그 모범에서 큰 은혜가 흘러 나왔기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스스로 죽음을 값으로 치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전에 죄에 대한 벌로 정해졌던 것이 선용되어, 의의 열매를 더욱 풍성하게 생산하는 수단이 되었다는 것을 그들의 죽음이 증명했다. 그렇더라도 그 때문에 죽음을 선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죽음이 유익한 것으로 변한 것은 그 자체의 공덕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그래서 원래는 범죄를 방지하기 위한 무서운 위협으로써 죽음을 보여주었지만, 지금은 범죄를 방지하며, 지은 죄가 용서를 받으며, 위대한 승리에 마땅한 의의 상이 돌아가게 하기 위한 필요한 시련으로 우리 앞에 제시되는 것이다.

 

8. 진리를 위해서 첫째 사망을 당하는 성도들은 둘째 사망에서 해방된다.

 

참으로 더 자세히 생각해 보면,사람이 진리를 위해서 충성을 지키면서 영광스럽게 죽을 때에, 그는 죽어도 죽음을 피하는 것이다. 그는 죽음의 일부분을 당하고 그 전체는 당하지 않으며, 끝이 없는 둘째 사망도 피한다. 영혼이 몸에서 분리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이 먼저 영혼에서 분리되시는 것을 방지하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 전체의 첫째 사망이 완전하게 되며, 영원한 둘째 사망이 따를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죽음은 죽어가는 사람이 겪고 있을 때와 그를 죽게만들 때에, 아무에게도 선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선한 것을 보존하거나 얻기 위해서 견디면 영광이 된다. 그리고 이미 죽었다고 인정된 사람들이 죽은 상태에 있을 때에는, 죽음은 악인에게는 악이며 선인에게는 선이라고 하는 말에는 잘못이 없다. 몸에서 분리된 의인들의 영혼은 쉬고 있으며, 악인들의 영혼은 벌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는 계속해서 의인들의 몸이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으며, 악인들의 몸이 부활하여 영원한 둘째 사망을 받게 될 때에 이른다.

 

9. 생명 감각이 없어지는 때 곧 죽는 떼를 죽어가는 때라고 할 것인가 또는 죽은 때라고 할 것인가?

 

그러나 몸에서 분리된 영혼들이 선한 상태나 악한 상태에 있는 때를 우리는 사망 후라고 할 것인가 또는 사망 중이라고 할 것인가? 그것을 사망 후라고 한다면, 선하거나 악한 것은 지나가 버린 죽음이 아니라 죽음 뒤에 있는 영혼의 생활 상태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죽음은 그것이 현실로 있었을 때에는 악이었다. 바꿔 말하면,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경험했을 때에 그들에게 슬픔과 고통이 있었으므로, 죽음은 악한 것이었다. 이 악을 선인들은 선용한다. 그러나 일단 죽음이 완전히 끝나면 그것은 이미 없어졌는데, 어떻게 선하거나 악한 것이 될 수 있는가?

그뿐 아니라, 더 자세히 관찰한다면, 죽어가는 사람에게 슬픔과 고통스러운 감각이 있게 만드는 그 과정도 죽음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게 된다. 그들이 감각이 있는 동안은 확실히 살아있다. 아직 살아 있다면 죽음 속이 아니라 죽음 전이라고 해야 한다. 죽음이 가까워질 때 있던 고통스런 감각은 죽음이 오면 제거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망이 임박해서 이미 최후의 고통으로 신음하면서도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을 죽어간다고 형용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이미 임박한 죽음이 실지로 온 때에는 그들을 죽어간다고 하지 않고 죽었다고 하므로,(그 죽기 전에는)죽어간다고 하는 것이 옳다. 따라서 살아 있는 사람만이 죽어갈 수 있다. 생명의 종점에 가까워져서 숨을 거두게 되었다고 하는 사람도 숨이 없어지지 않은 동안은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같은 사람이 살아 있기도 하고 죽어가기도 한다. 죽음에 가까워지는 동시에 생명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영혼이 몸 안에 있으므로 그는 생명 안에 살아 있으며, 영혼이 아직 몸에서 떠나지 않았으므로 그는 죽은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영혼이 몸을 떠난 때에도 죽음 안에 있다고 하지 않고 죽음 후에 있다고(“죽은 뒤”)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는 언제 죽음 안에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아무도 동시에 죽어가기도 하고 살아 있기도 할 수 없다면, 대체로 죽어가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영혼이 몸 안에 있는 동안은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의 고정이 이미 시작된 사람에게 죽어간다고 말한다면, 또 아무도 동시에 살이 있기도 하고 죽기도 할 수 없다면, 그렇다면 대체로 사람은 언제 알아 있는 것인가?

 

10. 죽을 신세인 인간들의 생명은 생명이라기보다 죽음이라고 할 것인가?

 

참으로 죽을 신세인 이 몸 안에 사람이 존재하기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죽음이 접근해 오지 않는 시점은 없다. 사람이 이렇게 죽음을 향해서 전진하는 것은 금생의 순간순간에 그에게서 일어나는 변화의 결과이다. 그래도 우리의 금생을 생명이라고 할 것인가? 1년 전보다 1년 후에 죽음에 더 접근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죽음은 오늘보다 내일, 어제보다 오늘, 지금보다 조금 후, 조금 전보다 지금 더 가깝다. 이렇게 된 까닭은 우리가 살아 있는 기간이 얼마든지 간에, 그것이 우리의 수명에서 감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은 세월은 날마다 점점 줄어들며, 우리의 금생은 죽음을 목표로 달음질하는 것에 불과하다. 잠깐도 쉬거나 조금도 속도를 늦출 수 없는 달음질이며, 모든 사람이 일제히 같은 방향과 같은 속도로 밀려가는 달음질이다. 이와 같이, 더 짧은 일생을 마치는 사람이 더 긴 일생을 사는 사람보다 하루라도 더 속히 지내보내는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의 생애에서 같은 수효의 순간들이 같은 속도로 제거되는 것이므로, 한 쪽 사람이 자기의 목표에 더 가깝고 다른 사람은 더 먼 것이다. 먼 길을 걷는 것과 느린 속도로 걷는 것과는 문제가 다르다. 죽기까지 오랜 세월을 보내는 사람은 전진 속도가 느린 것이 아니라, 걷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뿐 아니라, 죽음의 과정이 사람 안에서 시작될 때부터 죽기 시작하는 것 곧 죽음 안에 있는 것이라면, 확실히 사람은 이 몸 안에 생존하기 시작한 때부터 죽음 안에 있는 것이다. 생명이 줄어드는 것이 죽음이기 때문이다. 줄어들어서 생명이 없어진 때에는, 사람은 죽음 후에 있는 것이며, 죽음 안에 있다고 할 수 없다. 참으로 생명이 모조리 소비되고 죽음이 완전하게 되며, 생명이 줄어들어가던 죽음 안의 기간이 다음에 오는 죽음 후의 기간으로 넘어가기까지, 그 동안에 날마다, 시간마다, 순간마다 있는 것은 죽음뿐이 아니고 무엇인가? 따라서 사람이 동시에 생명과 죽음 안에 있을 수 없다면, 그는 살았다기보다 죽어가는 이 몸 안에 있기 시작할 때부터 생명 안에 있는 때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동시에 생명 안에 있으며 또 죽음 안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생명이 전적으로 소모되기까지 생명 안에 있으며, 동시에 그는 생명이 소모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죽어가므로 죽음 안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죽음 안에 있지 않다면, 생명이 소모된다는 것의 본질은 무엇인가? 몸엣 생명이 완전히 소모된 때를 죽음 후라고 말하는 것은 옳다. 생명이 소모되는 것이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생명이 모조리 소모된 때에 그 사람의 상태가 죽음 안이 아니라 죽음 후라면, 그가 죽음 안인 것은 생명이 소모되어가는 때가 아니고 언제이겠는가?

 

11. 동시에 살아 있으며 또 죽을 수 있는가?

 

그러나 사람이 죽음에 도달하기 전에 이미 죽음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은 아마 어리석은 말일 것이다. 만일 그가 이미 죽음 안에 있다면, 그는 살아 있는 순간에 무엇을 향해서 접근해 가는 것인가? 이런 말이 어리석게 여겨질 것은 사람이 동시에 살아있으며 또 죽었다고 하는 것이, 사람이 동시에 잠이 들었으며 또 깨어 있다고 하는 것과 같이 변태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그는 죽어가는 사람이냐고 물어야 한다. 죽음이 오기 전에는 그는 죽는 중이 아니라 살아있다. 그러나 죽음이 온 때에는 그는 죽는 중이 아니라 죽었다. 그래서 죽음이 오기 전은 아직 죽음 전이며 죽음이 온 때는 죽음 후이다.

그러면 그는 언제 죽음 안에 있으며, 죽어간다고 할 수 있겠는가? 죽음 전과 죽음 안과 죽음 후라는 세 가지 때가 있다. 이것은 각각 살아 있는 때와 죽어가는 때와 죽은 상태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언제 죽어 가는가 곧 죽음 안에 있는가 하는 것을 확정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그 때에는 살아 있지 않는 것이며, 죽음 전이 아니고 또한 죽은 것, 죽음 후도 아니며, 죽어가는 때, 곧 죽음 안에 있기 때문이다. 영혼이 몸 안에 있을 때, 특히 감각이 있을 때에는, 영혼과 몸을 가진 사람은 물론 살아있으며, 따라서 그는 아직 죽음 안이 아니라 죽음 전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영혼이 몸을 떠나고 감각도 전부 제거된 때에는 그는 죽음을 지났고, 죽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두 상태 사이의 중간이 곧 죽어가는 때, 또는 죽음이 진행중인 기간은 사라져 버린다. 아직 살아 있다면 그는 죽음 전이요, 살지 않게 되었다면 이미 죽음 후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어가는 때, 죽음 안이라고 생각되는 때가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지나가는 시간 중에서 우리는 현재라는 순간을 찾아도 얻을 수 없다. 현재가 차지하는 깊이가 전혀 없고, 미래에서 과거를 옮아갈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추리 방법에 따라 신체의 죽음은 없다고 말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죽음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언제인가? 죽음은 어떤 것 안에도 있을 수 없으며, 아무도 죽음 안에 있을 수 없다. 아직 생명이 있으면 아직 죽음이 없다. 생명은 죽음 전의 상태요 죽음 안의 상태가 아니다. 반대로, 생명이 끝났다면 그때에는 죽음은 이미 없다. 이 때의 상태는 죽음 안이 아니라 죽음 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어떤 것의 앞에나 뒤에 죽음이 없다고 한다면, 죽음 전이니 죽음 후니 하는 말은 무슨 뜻인가? 죽음이 없다면 이 두 가지 표현도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낙원에서 선한 생활을 해서 죽음이 없이 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현실에는 죽음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어려움을 일으키기 때문에, 설명할 말도 없고 피할 재주도 없다.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는 상식적인 표현으로 죽음이 있기 전을 죽음 전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성경에서도 사람이 죽기 전에는 칭찬하지 말라고 한다(집회서 11:28). 또 죽음이 있은 후에는 누가 죽은 후에이러이러한 일이 있었다고 하자. 우리와 같은 시대에 대해서도 될 수 있는 대로, 예컨대 그는 운명할 때에 유언을 했다.”“운명할 때에 누구 누구에게 이러이러한 유산을 주었다고 하는 식으로 말하자. 그러나 역시 그가 살아 있을 때가 아니면 이런 일을 전혀 할 수 없었을 것이며, 참으로 그는 죽음 안이 아니라 죽음 전에 그렇게 한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쓰는 말을 쓰자. 성경은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 죽은 후라고 하지 않고 죽음 안이라고 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라고 한다(6:5). 그들이 부활하기까지는 사망 중에 있다고 하는 것이 옳으며, 깨어나기 전에는 수면 중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렇더라도 수면 중인 사람을 자고 있다고 하는 것처럼, 이미 죽은 사람을 죽는 중이라고 할 수는 없다. 몸을 이미 떠난 사람들은 아직도 죽어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런 말은 신체의 사망에 대해서 하는 것이며, 우리는 지금 이것을 화제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내가 말을 단정할 수 없다고 말한 그것이다. 어떻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았다고 하거나, 이미 죽은 사람들을 죽은 후 까지도 여전히 죽음 안에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아직 죽음 안이라면 어떻게 죽음 후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특히 우리는 그런 때에 그들을 죽어간다고도 하지 않는다. 수면 중인 사람은 자고 있다고 하며, 피곤한 중에 있는 사람은 피로하다고 하며,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은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하며, 생활하는 사람은 살아 있다고 하는 것과 다르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부활하기까지 사망 중에 있다고 해야 하며, 죽고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의도가 아니라 아마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라틴어의 문법학자들이 그는 죽는다”(moritur)라는 말을 다른 비슷한 말들과 같이 변화시킬 수 없었던 것은, 부적당하거나 부조리한 일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일어난다”(oritur)에서 그는 일어났다”(ortus est))라는 과거형이 생기듯이, 비슷한 동사들은 모두 완료분사를 쓴다. 그런데 모리투르(moritur)라는 동사의 과거형을 알아보면 모르투스(morituus)로서 “u"자가 겹친다. mortuusfatuus(미련한), arduus(가파른,험한), conspicuus(보이는)등등과 같이, 과거의 뜻이 없다는 형용사로서 시제 구별이 없이 변화하는 말들과 같이 사용된다. 그뿐 아니라, mortuus라는 형용사는 시제가 있을 수 없는 데서 시제를 만들어내듯이, 과거분사 대신으로도 사용된다. 그 결과로 이 동사가 표시하는 행동이(죽음이) 실생활에서 회피될 수 없는 것과 같이, 이 동사는 언어 사용에서 변화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구주의 은혜로 도움을 받아, 적어도 둘째 사망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영혼과 신체가 분리되는 사망이 아니라, 영원한 벌을 받기 위해서 둘이 결합되는 사망은 모든 악 가운데서 가장 나쁜 악이기 때문이다. 거기서는 죽음 전이나 죽음 후의 상태에 있을 것이 아니라, 항상 죽음 안에 있을 것이며, 따라서 결코 살아 있거나 죽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참으로 죽음 안에 있는 사람은 죽음 자체가 죽지 않을 때보다 더 불행할 수 없다.

 

12.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면 죽으리라고 하나님이 처음 사람들에게 경고하 신 것은 어떤 죽음이었는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명을 지키지 않으며 순종을 유지하지 않으면 죽으리라고 하나님이 처음 사람들에게 위협하신 것은 어떤 죽음이었느냐고 묻는다면, 곧 영혼의 죽음이었는가, 몸의 죽음이었는가, 사람 전체의 죽음이었는가, 둘째 사망이라고 하는 것이었는가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그 모든 것이라고 대답해야 한다. 첫째 사망은 두 가지 죽음, 곧 모든 죽음을 포함한 전적 죽음이기 때문이다. 지구 전체에 여러 나라들이 포함되며, 교회 전체에 여러 교회들이 포함되는 것과 같이, 죽음 전체에는 모든 죽음이 포함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사망에서는 영혼의 죽음과 신체의 죽음이 포함되어, 사람 전체의 죽음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신체를 잃은 영혼이 얼마 동안 벌을 받는 죽음이다. 그러나 둘째 사망은 영혼이 하나님을 떠나서 몸과 함께 영원한 벌을 받는 때에 있다. 따라서 낙원에 두신 처음 사람에게 금지된 식물에 대해서 하나님이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2:17) 하셨을 때에, 그 위협에는 첫째 사망의 처음 부분, 영혼이 하나님을 빼앗기는 그 죽음뿐 아니라, 몸이 영혼을 빼앗기는 두 번째 부분도 포함되었으며, 또 하나님과 몸에서 분리된 영혼이 벌을 받는 그 첫째 사망 전체뿐 아니라, 맨 마지막 죽음, 곧 둘째 사망이라고 하는 것까지 포함된다.

 

13. 처음 사람들이 죄를 짓고 당한 첫 번째 벌은 어떤 것이었는가?

 

처음 사람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서 떠났을 때에 그들은 즉시 자기 몸이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했다. 당황한 그들이 우선 잡은 것이 무화과 나뭇잎이었든지, 그들은 그것으로 부끄러운 곳을 가렸다(3:7-10). 이 지체들은 전과 같았고, 전에는 지금 같이 부끄럽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그들의 육신이 복종하지 않게 되어, 전에 없었던 움직임을 보였을 때에,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그들 자신의 불순종에 대해서 이를테면 보복이며 벌이 된 것이다.

참으로 영혼은 이제 자기가 악을 행할 수 있는 그 자유를 기뻐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멸시하기 때문에, 몸이 전과 같이 순종하지 않게 되었다. 자기가 위에 계신 주인을 일부러 떠났으므로, 자기 밑에 있는 종이 자기의 뜻에 순종하지 않게 되었다. 영혼이 하나님께 계속 순종했다면, 육신도 모든 점에서 영혼에게 계속 순종했을 것이나, 이제는 그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육체의 소욕이 성령을 거스리기시작한 것이다(5:17). 이것은 우리가 타고난 갈등이다. 저 처음 범행이 원인이 되어 우리 속에 죽음의 씨가 생겼으며, 우리는 우리의 지체와 병든 존재에서 육신의 반항과 심지어 그 승리를 짊어지고 간다.

 

14.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은 어떠했으며, 사람은 자기의 의지를 행사함으로써 어떤 상태 에 빠졌는가?

 

하나님은 모든 자연적 존재를 창조하시되, 그 결함을 창조하신 것은 아니므로, 사람도 똑바르게 지으셨다. 그러나 사람이 자진해서 부패하고 정죄된 후손을 낳았다. 처음 남자가 죄를 짓기 전에 그의 옆구리 뼈로 만드신 여자를 통해서 남자가 죄를 지었을 때에, 우리는 모두 그 사람이었고 그의 안에 있었다. 우리는 아직 각 개인이 창조되었거나 쓰고 살 몸을 받은 것이 아니었지만, 우리를 낳을 근본적 본질은 이미 그의 안에 있었다. 이 본질이 죄로 말미암아 낮아지며 공정한 정죄를 받아 사망의 족쇄로 매인 후로는, 아무도 그와 다른 상태로 날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자유의지가 악용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재난이 연쇄적으로 계속하게 되었고, 인류는 마치 썩은 뿌리에서 출발한 듯이 그 처음 타락으로부터 끊임없이 계속된 불행 속을 인도되어 왔다. 이 길은 결국 끝없는 둘째 사망으로까지 가고야 말 것이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을 받은 자들은 이 운명을 면한다.

 

15. 아담은 죄를 지으려 했을 때에, 하나님이 그를 버리시기 전에 그가 먼 저 하나님을 버렸으며, 하나님을 버린 것이 그의 영혼의 첫째 사망이 되었다.

 

그런데 창세기 2:17네가 정녕 죽으리라를 직역하면 네가 죽음을 죽으리라가 된다. 이것은 네가 죽음을 죽으리라고 하셨지 죽음들을죽으리라고 하시지 않았다. 그러면 여기서는 영혼이 그 생명인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을 때에 생기는 죽음만을 말씀하신 것으로 해석하자. 하나님이 먼저 형혼을 버리시고 다음에 영혼이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라, 영혼이 먼저 하나님을 버리고 그 다음에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당한 것이다. 영혼의 의지가 우선 자기에게 해로운 일을 했다. 그러나 영혼을 창조하신 분의 의지는 우선 영혼에게 유리한 일을 하셨다. 아직 없는 영혼을 창조하시며, 타락해서 멸망한 영혼을 개조하셨다. 따라서 먹는 날에는 네가 죽음을 죽으리라고 하신 말씀은 마치 네가 불순종으로 나를 버리는 날에는 네가 죽음을 죽으리라고 하신 말씀은 마치 네가 불순종으로 나를 버리는 날에는 내가 공의로 너를 버리겠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 죽음을 예고하신 것으로 해석되지만, 하나님은 이 죽음을 말씀하심으로써 거기에 반드시 따를 저 다른 죽음들도 경고하신 것이 확실하다.

복종하지 않는 영혼의 육신에 복종하지 않는 움직임이 나타나서 우리의 처음 조상들이 부끄러운 지체들을 가렸을 때에, 그들은 한 가지 죽음, 영혼이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당하는 죽음을 경험했다. 두렵고 당황해서 숨어버린 아담에게 하나님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3:9) 하신 말씀에는 이 죽음이 암시되었다. 물론 하나님이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니라 책망하신 것이며, 하나님이 그의 안에 계시지 않게 된 지금 그에게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하라고 경고하신 것이다.

그러나 긴 세월이 지나고 노년이 되어, 썩고 지친 몸을 드디어 영혼이 버렸을 때에, 사람은 또 다른 죽음을 경험했다. 하나님이 그의 죄를 벌하셨을 때에, 이 죽음에 대해서도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3:19)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이 두 가지 죽음이 저 첫째 사망으로 인간 전체의 죽음이 되었다. 은혜로 해방을 받지 않은 사람에게서는 결국 둘째 사망이 따르게 된다. 흙으로 된 몸은 스스로 죽지 않으면, 곧 그 자체의 생명인 영혼에게 버림을 받지 않으면 흙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정통 신앙(마니교의 이단과 다른 신앙)을 지닌 그리스도교인들은 몸이 죽는 것도 자연법칙의 명령이 아리라고 믿는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죽음이 있을 본성을 창조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음은 죄에 대한 보복으로 가해지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아담 안에 있었을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은 죄에 대해서 벌을 주신 것이다.

 

16. 영육의 분리는 벌이 아니라고 철학자들은 생각하지만, 플라톤은 최고신 이 낮은 신들에게 그들이 몸을 빼앗기지 않으리라는 것을 약속했다 고 한다.

 

우리는 철학자들의 중상에 대항해서 이와 같이 하나님의 도성, 곧 교회를 변호하는 것이지만, 그들은 영혼과 육체의 분리를 벌이라고 하는 우리 주장도 냉소하면서 스스로 지혜롭다고 믿는다. 영혼이 몸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단순한, 이를테면 벌거숭이로 홀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순간에 가장 충만한 행복을 얻는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나는 이 믿음을 반박할 재료를 그들의 저술에서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몸이 영혼의 짐이 되는 것은 단순히 몸이기 때문이 아니라 부패한 몸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 더 어려울 뻔했다. 성경에 썩을 몸이 영혼의 무거운 짐이 된다는 말씀(지혜서 9:15)의 배후에는 이러한 뜻이 담겨있다. 이 현인(賢人)썩을이라는 말을 첨가함으로써 모든 몸이 다 영혼을 내려누르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고 벌을 받게 된 몸이 짐이 된다고 한다. 이 말을 첨가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다른 뜻으로 해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아주 분명한 말로 최고신이 창조한 신들에게 영생불사 하는 몸이 있다고 언명하며, 최고신이 그들에게 큰 은혜를 약속했다고 한다. 신들은 영원히 그 몸과 결합되어 있어서 죽음 때문에 분리도는 일이 결코 없으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모든 사실을 볼 때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괴롭히려는 저 철학자들이 자기들이 잘 알고 있는 것을 모르는 체하며, 끊임없이 우리에게 반대하기 위해서 자신들과 모순되는 짓이나 말을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플라톤 자신의 말을(Plat.,Tim.,41 A-B) 키케로가 라틴어로 번역한 것을 인용해 보겠다. 그는 최고신이 신들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신들의 계통에서 난 그대들은 잘 들으라, 어버이와 창시자가 된 존재들은 내 뜻을 어기면서 해체되지는 않을 것이다. 결합된 것은 모두 해체될 수 있지만, 이성에 의해서 결합된 것을 풀려고 하는 것은 좋지 않다. 너희는 생겨났으므로 영원불사하거나 멸망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너희는 결코 멸망되지 않으며, 필연적인 죽음이 너희를 말살하거나 나의 목적보다 더 강력하지 못할 것이다. 너희가 생겨났을 때에 너희를 결합한 그 유대보다, 너희를 계속 존재하게 하려는 나의 의지가 더 강하다.”이와 같이 플라톤은 두 가지 점을 말한다. 신들은 영혼과 신체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죽을 신세이며 그러나 그들을 만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있기 때문에 영원불멸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영혼이 몸과 - 어떤 종류의 몸이든 간에 - 결합되어 있는 것이 영혼에 대한 벌이라면, 무슨 까닭에 하나님은 마치 신들이 죽음, 곧 몸에서 분리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이, 영생불사하리라고 약속해서 안심시키려고 하는 것인가? 그뿐 아니라, 이 약속의 근거는 단순하지 않고 복합체인 그들의 본성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불가항력의 의지인 것이다. 하나님은 그 의지로 시초가 있는 것들이 소멸되지 않게 하며, 퇴화하지 않고 영원히 보존되도록 하시는 권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별들에 대해서 한 플라톤의 이 말들이 옳으냐 하는 것은 문제가 다르다. 낮이나 밤에 하늘에서 물질적인 빛을 발하는 저 발광체 또는 발광구체 들에 자체의 영혼이 있어서 그것에서 생명력과 이해력과 행복을 얻는다고 인정해야 한다는 결론은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우주 전체에 대해서 이 말을 역설한다. 우주는 가장 큰 생물체며, 모든 다른 생물들을 내포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것은 별개의 문제이며 지금은 논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플라톤 파인 것을 또는 그 이름을 자랑하며 그래서 그리스도교인이 되기를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이 정도만 거론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만 군중과 한 이름을 공유하면 그리스식 겉옷을 입은 그들의 위신이- 소수이기 때문에 있는 위신- 떨어질까 해서 그들은 그 수효에 반비례해서 더욱더 부풀어 오른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교리에서 어떤 흠을 찾으려고, 그들은 몸의 영원불멸을 매도한다. 영혼의 행복을 구하면서 동시에 영혼이 영원히 몸 안에 있기를 원하는 우리에게 어떤 모순이 있으며, 영육의 결합이 반드시 비참한 사슬인 듯이 말한다. 그러나 신들을 만든 최고신이 그들에게 죽지 않으리라는 은혜를 주었다. 다시 말하면, 그 자신이 그들과 결합해 준 그 몸에서 결코 분리되지 않는 은혜를 허락했다고 말한 사람은 그들의 선생이며 그들의 학파를 건설한 플라톤이다.

 

17. 지상적인 몸은 영원불멸하게 만들 수 없다고 주장하고 사람들에 반대한 다.

 

이 철학자들은 또 지상적인 몸들은 영원할 수 없다고 논한다. 그러나 그들은 지구 전체가 그들의 신의 중심적인 그리고 영원한 지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여기서 그들의 신이라고 하는 것은 최고신이 아니라, 이 우주 전체를 그들은 한 위대한 신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그들이 신이라고 생각하는 이 우주를 최고신이 창조해서, 자기 아래 있는 신들보다 상위에 두었다. 그 뿐 아니라 이 신은 살아 있으며 영혼을 가졌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그 영혼은 이성적 또는 지성적이며, 그 방대한 몸 안에 갇혀 있다고 한다. 또 최고신은 네 원소를 몸의 물질적 지체와 같이 확정해서 각기 적당한 곳에 배치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의 이 위대한 신이 결코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 원소들의 결합은 해체할 수 없었으며 영원하다고 한다. 이 모든 주장을 인정하며, 저 크고 살아 있는 존재의 몸에서 이를테면 중심적 지체인 지구가 영원하다고 한다면, 지구에 속한 다른 살아 있는 존재들의 몸이 영원할 수 없다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생물들의 지상적인 몸은 흙으로 된 것이며,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 몸들은 그 근원인 지구로 - 꾸준하고 영원한 지구로 - 돌아가기 위해서 분해되며 소멸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불에 대해서 비슷한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천상적 존재들을 창조하기 위해서 저 우주적인 불에서 취한 몸들은 다시 그 불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그가 주장한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플라톤이 말한 최고신의 입으로 이런 신들에게 약속한 영생불사는 이 난폭한 논법으로 취소되는 것이 아닌가? 최고신의 의사를 꺾을 힘은 없다고 플라톤이 말하며, 그 최고신이 원하지 않기 때문에 철회될 수 없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지상적인 몸에 대해서도 같은 일을 할 권능이 하나님에게 없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특히 플라톤은 시작이 있는 것은 소멸되지 않게 할 권능이 하나님에게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가? 또 결합된 것이 해체되거나, 원소로 만든 것이 원소로 돌아가거나, 몸 안에 정주하게 된 영혼이 몸을 버리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영혼이 몸과 함께 영생불사와 영원한 행복을 즐기게 할 권능이 하나님께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지상적인 것들이 소멸되지 않도록 할 권능이 하나님께 없겠는가? 하나님의 권능은 그리스도교인들이 믿고 있는 것보다 위대하지 못하고, 플라톤파가 주장하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목적과 권능에 대해서 저 철학자들은 알았고 예언자들은 몰랐다는 것인가? 사실은 정반대였다. 하나님의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께서 적당하게 보신 정도까지 그의 뜻을 계시한 것은 예언자들이었고, 철학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고 했을 때에 인간적인 억측 때문에 오도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무지하고 완고하더라도 이 철학자들 같이 명백한 자기모순에 빠지는 과오는 범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한 편으로, 행복하려는 영혼은 지상적인 몸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몸과 접촉이 없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신들의 영혼은 지극히 행복하지만, 영원한 몸과 결합되어 있다고 한다. 즉 천상적인 영혼들은 불로 된 몸과 결합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우주와 동일시하는 유피테르 자신의 영혼은 물질적 원소들의 전체 속에 - 천지를 포괄한 전체 구조 속에 - 완전히 내포되어 있다고 한다.

유피테르에 대한 플라톤의 생각을 보면, 그의 영혼은 지구의 가장 깊은 핵심부, 기하학자들이 말하는 중심으로부터 지구의 모든 부분을 통해서 하늘의 가장 멀고 가장 높은 곳까지 음악적 비례로 확산되어 있다. 이와 같이, 이 우주는 한 영원한 생물이며, 가장 크고 가장 행복한 생물이다. 그 영혼에 지혜의 완전한 행복이 있으며, 자체의 몸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몸은 영혼이 영원히 살리며, 단순한 것이 아니라 많고 큰 몸들로 구성되어 있으면서도, 영혼을 굼뜨거나 게으르게 만들 힘은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철학자들은 마음대로 이렇게 많은 사변을 하면서, 무슨 까닭에 하나님의 뜻과 권능이 지상적인 몸들도 영생을 얻게 만들 수 있으면, 영혼들도 죽음 때문에 몸에서 분리되거나 몸의 무게 때문에 압박을 받는 일이 없이, 그 몸 안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겠다고 하는가? 그들은 그들의 신들이 불로 된 몸 안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하며, 신들의 왕인 유피테르도 물질적 원소들의 전체 속에서 이렇게 산다고 주장한다. 만일 영혼이 행복하기 위해서 모즌 종류의 몸을 피해야 된다고 한다면, 그들의 신들부터 그 몸인 별들에서 도망하며, 유피테르도 하늘과 땅에서 도망하게 하라.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신들은 불행하다고 단정하라. 그러나 이 철학자들은 어느 쪽도 인정하지 않는다. 신들이 몸에서 분리된다고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은, 죽을 신세에 불과한 신들을 믿는 것이 되겠기 때문이며, 신들에게 행복이 없다고 한다면, 자기들의 입으로 신들이 불행하다고 인정하는 것이 때문이다. 따라서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모든 몸을 피할 필요까지는 없고, 썩고 거추장스러운 것, 짐이 되고 죽고야 말 것만을 피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이 큰 은혜로 처음 사람들에게 만들어 주신 것과 같은 몸이 아니라, 죄에 대한 벌이 그들에게 강요한 것과 같은 몸을 피해야 한다.

 

18. 지상적인 신체는 자연적 무게 때문에 지상으로 끌리므로, 천상에 있을 수 없다고 하는 철학 사상에 대하여.

 

이 철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지상적인 몸은 필연적으로는 그 자연적 무게 때문에 지상에 억류되어 있거나, 지상으로 끌리며, 따라서 하늘에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저 처음 인간들이 지상에서 살았던 곳에는 나무와 과실이 풍부했으며, 그곳을 낙원이라고 불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입고 승천하신 몸이나 성도가 부활시에 입을 몸을 설명하려면, 우리는 이 이론에 대한 대답을 찾아야 하겠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이 지상적 무게라는 문제를 더 자세히 고찰해야 한다.

철은 물 위에 놓으면 곧 가라앉는 법인데, 인간의 기술로 철선을 만들어 물에 띄우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기술은 얼마나 더 믿을 만하며 더 신비롭게 역사하겠는가? 하나님의 전능하신 의지는 시작이 있는 것들이 소멸되지 않으며, 결합된 것들이 해체되지 않도록 한다고 플라톤은 주장한다. 그뿐 아니라, 어떤 물체와 물체가 결합되는 것보다 비물질적인 존재들은 물질적인 것들과 더욱 놀랍게 결합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확실히 지상적인 물체들이 무게 때문에 아주 낮은 곳으로 끌리는 것을 막을 뿐 아니라 영혼들이 몸과 함께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으며, 또 어디든지 원하는 곳에 몸을 두거나 움직일 수 있게 만들 수 있다.

또 천사들이 이렇게 할 수 있으며, 어디서든지 원하는 곳에서 동물들을 집어다가 원하는 곳에 내려놓을 수 있다면(외경의 벨과 용), 그들이 이렇게 할 때에 그 들고 다니는 것의 무게를 느낀다고 믿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성도들의 영이 하나님의 섭리로 완전하고 행복하게 된 때에, 그 몸을 쉽게 어디든지 원하는 곳으로 옮길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어떤 물체를 들고 다닐 때에 그 무게는 질량에 비례하며, 질량이 적은 것보다 많은 것이 더 무거운 것이 보통이라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육신의 기관들은, 건강하고 힘찰 때에는 쇠약하고 위축될 때보다 영혼에게는 가볍게 느껴진다.

건강하고 튼튼한 사람은 여위고 허약한 사람에 비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더 무겁게 느껴지지만 건강한 사람 자신은 앓거나 먹지 못해서 허약한 때보다, 건강하고 체중이 알맞을 때에 더 쉽고 민첩하게 몸을 움직일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지상적인 몸을 쓰고 있을 때에도, 그 몸은 썩으며 죽을 것이지만, 결정적인 것은 그 질량에서 오는 무게가 아니라 그 건강 상태이다. 또 우리의 현재상태에서의 소위 건강과 미래상태의 영생 사이에 방대한 차이를 누가 능히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몸의 무게에 대한 철학자들의 이론은 우리의 신조를 논박하지 못한다. 지구 전체는 그 어떤 것 위에 놓여 있지도 않다(26:7). 그런데 철학자들은 무슨 까닭에 지상적인 몸이 하늘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고는 묻지 않겠다. 우리의 견해에 반대하는 더 그럴 듯한 논법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주에 중심점이 있으며, 모든 무거운 물체가 그것을 향해서 모인다는 사실에서 출발하는 논법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이것이다. 플라톤은 작은 신들이 사람과 동물들을 만들었다고 하며, 불에서 그 타는 속성을 제거하고 그 밝은 빛만이 눈을 통해서 번쩍이도록 남겨 두었다고 한다. 우리가 이것을 인정한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플라톤도 말하듯이, 최고신의 의지와 권능이 시작이 잇는 것들의 소멸을 막으며,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이 결합되었을 때에 그것들이 분리되거나 해체되는 것을 막는다면, 하나님이 영생을 베풀어 주시는 사람의 육신이 썩지 않게 하시리라고 인정하는 것을 우리는 주저할 것인가? 육신의 다른 속성들은 건드리지 않고 남겨두며, 지체들 사이의 조화도 그대로 보존하며, 무게로 인한 번거로움은 제거될 것이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라면 나는 이 저서의 끝에 가서 죽은 자의 부활과 그들의 몸의 영생에 대해서 우리의 신념을 더 자세히 논할 생각이다.

 

19. 처음 사람들이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영생했으리라는 것을 믿지 않고, 영혼은 몸이 없이 영원히 산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견해를 반박한다.

 

이제 우리는 저 처음 사람들의 몸에 대해서 다시 논하겠다. 그들이 죄에 대한 공정한 보복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면 죽지 않았을 것이다. 죽음은 선한 사람들에게는 선한 것이라고 하지만, 총명이나 신앙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당하는 것이며, 영혼을 몸에서 분리하기 때문에 분명히 살았던 것의 몸이 분명히 소멸되고 만다. 의롧고 거룩한 사람들이 죽은 후에 그들의 영혼이 평안히 산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건강한 몸을 가지고 산다면 그만큼 더 행복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몸을 완전히 벗어버려야만 완전히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까지도 그와 반대되는 주장을 해서 자기의 신념을 반박하고 있다.

그들은 아직 살아 있거나 이미 죽은 현인들을 - 이미 몸이 없거나 곧 몸을 버리게 될 현인들 - 영생한다는 신들보다 위에 두지 않을 것이다. 플라톤은 최고신이 신들에게 해체될 수 없는 생명, 곧 영원히 몸과 결합되어 사는 막대한 특권을 약속 했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또 지상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산 사람들은 몸을 떠날 때에 가장 좋은 상을 받아, 몸을 버리는 일이 없는 신들의 품으로 영접된다고 한다. 그것은 모든 것을 잊고 하늘의 둥근 거처를 다시 찾으며, 머지않아 다시 몸에서 살 뜻을 가지기 시작하기위해서라고, 베르길리우스는 사상을 훌륭하게 표현했다.

이와 같이 플라톤은 죽을 인간들의 영혼이 항상 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불가피한 죽음으로 몸에서 해방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영혼들은 언제까지나 몸이 없이 살아가는 것도 아니며, 사람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끊임없이 옮겨가면서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현인들과 여타 사람들 사이에 구별이 있는 것 같다. 현인들은 죽은 후에 별들이 있는 하늘로 운반되어 각각 적당한 별에서 비교적 오랫동안 안식한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그러다가 이전의 불행을 잊어버리고 다시 몸을 가지고 싶어지면, 그 별을 떠나 죽음의 비참함과 세상사로 돌아간다. 그와 반대는 미련한 생활을 한 사람들은 아주 짧은 시일이 지난 후에 다시 윤회의 길에 오르며, 그 행적에 따라 지정되는 대로 사람이나 짐승의 몸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플라톤은 선하고 어진 영혼들에게도 이와 같이 심히 가혹한 운명을 배정했다. 그들은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몸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몸을 영원히 차지하고 있을 수도 없고, 몸이 없이 영원히 순결하게 살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교 시대에 산 포르피리오스는 이 플라톤 사상을 난처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의 영혼이 짐승의 몸과 결합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현인들의 영혼은 몸의 결박에서 완전히 풀려나기 위해서 일체의 몸을 버리고 아버지 앞에 영원히 보존된다고 했다. 이와 같이 그는 성도들에게 영생을 약속하신 그리스도에게 지지 않으려는 듯이, 순결하게 된 영혼들은 다시 이전의 불행으로 돌아가지 않고 영원히 행복한 곳에서 산다고 했다. 그와 반대로 그는 그리스도에게 반대도 하려는 듯이, 썩지 않는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영혼들은 지상적인 몸뿐 아니라 일체의 몸이 없이 영원히 살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포르피리오스는 이런 신념을 가졌으면서도 몸을 가진 신들을 이 영혼들이 경건하게 높여서는 안 된다고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왜 그랬는가? 몸을 가지지 않은 이 영혼들이 저 신들보다 더 높다고 믿지 않은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면서도 영원한 몸과 결합되어 있는 신들에 비해서 감히 인간의 영혼들을 상위에 두려는 것이 이 철학자들의 생각이 아니라면 - 나는 그렇지 않다고 믿지만 - 무슨 까닭에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인 처음 사람들이 창조되었을 때에는 죄를 짓지 않았다면 죽어서 몸을 떠나게 되는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하는 가르침을 그들은 어리석다고 생각하는가? 처음 사람들은 꾸준히 순종했더라면 그에 대한 상으로써 영생을 선물은 받았을 것이며, 몸과 결합되어 영원히 살았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성도들이 부활할 때에는 금생에서 쓰고 살면서 고생하던 바로 그 몸을 다시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몸은 퇴화나 장애가 없으며 슬픔이나 불행이 없이 행복할 것이다.

 

20. 지금 소망 가운데 쉬고 있는 성도들의 육신은 범죄 전의 처음 사람들의 육신보다 더 높은 상태로 회복되리라.

 

마찬가지로 세상을 떠난 성도들의 영혼은 지금도 사망 중에서 아무 슬픔도 없다. 죽음으로 말미암아 영혼과 몸이 분리되었으며 모든 감각이 없어진 후에 여러 가지로 학대를 받은 것 같을지라도, 그들의 육신은 소망 중에 쉬고 있기 때문이다(16:9). 그들의 영혼이 몸을 동경하는 것은 플라톤이 말하듯이, 잊어버렸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받은 약속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약속하신 분은 아무에게도 실망을 주지 않는 분이며, 그들의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으리라고 보장하셨다(21:18). 그래서 그들은 간절한 기대와 인내로 몸의 부활을 기다린다. 몸을 입고 있었을 때에 당한 고난이 많았지만, 앞으로는 아무 고통도 받지 않겠기 때문이다.

참으로 육신이 연약해서 그들의 목적에 반대하려고 하므로 영의 법으로 그것을 억제하려고 했을 때에도 그들은 그 육신을 미워하지 않았으니(5:29) 육도 영적인 것이 되려는 지금은 그 육을 얼마나 더 사랑할 것인가! 영이 육의 소욕을 따를 때에 그 영을 육적이라고 하는 것이 부당하지 않다면 육이 영을 섬길 때에 그것을 영적이라고 하는 것도 마땅할 것이다. 이것은 육이 변해서 영으로 되기 때문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라고 한(고전 15:44) 성경 말씀에서 이런 결론을 얻는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라 육이 영에 순종하겠기 때문이다. 완전하고 놀랍고 흔연한 순종을 보이며, 그 부동의 결심을 실천해서 확고한 영생에 이르면서, 조금도 어려움을 느끼지 않으며, 퇴화나 무거운 짐의 가능성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육은 지금 몸이 가장 건강한 때의 상태와도 같지 않으며, 저 처음 사람들이 죄를 짓지 않았을 때의 상태와도 같지 않을 것이다. 처음 사람들은 죄를 짓지 않았으면 죽을 필요가 없었지만, 인간으로서 그 몸이 지상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곧 아직 영적이 아니고 생물체였기 때문에, 영양소를 섭취했다. 그들의 몸은 늙고 병들어 필연적으로 죽을 운명이 아니었으며, 이 특권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생명의 나무에서 온 것이었다. 그것은 저 금지된 나무와 함께 낙원의 중앙에서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외에도 취하는 영양이 있었다. 다만 금지된 한 그루의 나무만은 예외였다. 그 나무 자체가 악했기 때문이 아니라,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인 순종을 가르치시기 위한 것이었다. 창조주 아래 있는 이성적 존재에게는 이 순종이 가장 위대한 덕성이다. 악하지 않으면서도 금지된 것을 건드렸을 때에는 그 불순종만으로도 죄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처음 사람들이 취한 다른 영양은 그들의 생물적인 몸이 기아로 인한 고통을 받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와 반대로 그들이 생명의 과실을 먹은 것은 수명대로 살고 노쇠해서 죽거나, 다른 어떤 원인으로 불의에 죽게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모든 다른 음식은 영양을 위한 것이었고, 생명나무는 일종의 성례전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물질적 낙원에서 생명나무가 한 일은 영적 또는 이지적 낙원에서 하나님의 지혜가 하는 일에 해당했다고 볼 수 있다. 성경에 지혜가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고 한 말씀이 있다(3:18).

 

21. 낙원에 대한 영적인 해석과 그 역사적 진리는 상충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낙원 이야기 전체를 상징적으로 해석한다. 성경의 진실한 기록에 인류의 조상인 처음 사람들이 살아 있었다고 하는 낙원을 그렇게 해석할 뿐 아니라, 거기 있었다는 나무들과 과수들을 인생의 덕성과 관례라고 한다. 이야기의 세부적인 것은 눈에 보이는 물체들이 아니고 영적인 사실들을 상징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말이나 글로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낙원을 영적인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고 해서 물질적인 낙원은 있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다.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사라라는 두 처가 있었고, 여종에게서 난 아들과 자유한 여인에게서 난 아들이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사도가 그들은 두 언약을 의미한다고 말했다고 해서(4:22-24 ; 16:4 ; 21:2). 아브라함에게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하는 것과 같다. 또는 모세가 반석을 쳐서 물이 솟아난 데 대해서(17:6 ; 20:11), 같은 사도가 그 구절을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4)고 해서, 반석에서 물이 난 일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원을 복받은 사람들이라고 비유적으로 해석하며, 거기서 흐른 네 강을 지혜와 용기와 절제와 공의라는 네 가지 덕성이라고 하며, 거기 있었던 나무들은 모든 유용한 연구라고 하며, 나무의 과실들을 의인들의 행위, 생명나무를 온갖 선의 어머니인 지혜, 선악을 아는 나무를 계명을 위반함으로써 오는 경험이라고 해석하더라도, 아무도 그것을 막지 않는다.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벌을 지정하셨을 때에, 그것이 공정한 벌이었으므로 하나님은 선한 일을 하신 것이지만, 사람이 이런 경험을 한 것은 그 자신에게 유익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이 일들을 교회와 관련시켜서 해석함으로써 장차 있을 일들에 대한 예언이라고 보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 특히 아가서에 있듯이(4:12-15), 낙원은 교회 자체를 가리킬 수 있으며 낙원의 네 강은 네 복음서, 과수들은 성도들, 그 열매는 성도들의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생명의 나무는 지성소로서 확실히 그리스도 자신이며, 선악을 아는 나무는 자기의 의지에 대한 지배력을 의미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멸시할 때에는 그 하는 일이 자기를 해할 뿐이므로, 이런 방법으로 그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선을 고수하는 것과 자기의 이익만을 기뻐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 결과를 가져 오는가를 깨닫게 된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그 자신에게 맡겨져서, 그 결과로 두려움과 슬픔에 압도되어, 자기의 불행을 느끼며 시편에 있는 것과 같이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나이다”(42:6, 70인역)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바르게 원상을 회복한 때에는 내가 주를 위하여 내 힘을 지키리이다”(59:9, 70인역)라 할 것이다. 낙원에 대한 비유적 해석과 관련해서는 이런 말과 더 적당한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며, 아무도 금지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조건이 하나 있다. 사건들에 대한 가장 충실한 기록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저 이야기에 대해서 우리는 그 역사적 진실성도 믿어야 한다.

 

22. 성도들의 부활 후의 몸은 영적일 것이나, 그 육이 영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가진 몸은 병이나 노령으로 인한 죽음을 방지하기 위해서 어떤 나무가 필요하거나, 기갈로 인한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다른 물질적 영양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침범할 수 없는 확고한 영생의 은사를 받겠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먹을 권능이 있으므로 원할 때에만 먹겠으나, 불가불 먹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천사들도 보이는 형상, 만질 수 있는 형상으로 나타났을 때에, 같은 식으로 행동했다. 먹을 필요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먹기를 원했고 먹을 수 있었다. 자기들의 임무를 다할 때에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있도록 인간적 속성을 가짐으로써, 스스로를 적응시킨 것이다. 그들이 사람에게서 대접을 받았을 때에(18:8 ; 19:3), 외형상으로 먹은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물론 그들이 천사인 줄을 몰랐을 때에는, 우리와 같이 필요해서 먹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토비트서에서 천사는 그대는 내가 먹는 것을 보았지만 그것은 그대의 눈으로 본 것이다라고 말 한다(토비트12:19). 다시 말하면, 내가 그대와 같이 몸의 기운을 회복할 필요가 있어서 음식을 먹는다고 그대는 생각했다 하는 뜻이다.

하여간 천사들에 대해서는 더 그럴듯한 견해를 주장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리스도교의 믿음은 구주 자신이 부활 후에 하신 일에 대하여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 때의 그의 몸은 사실은 육신이었지만, 또한 영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며 마셨다(24:42-43 ; 10:4). 미래의 이런 몸에 서 제거되는 것은 먹고 마시는 필요성이며, 그 능력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몸은 몸이 아니게 되겠기 때문이 아니라, 지탱해 주는 영, 곧 생명을 주는 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적일 것이다(고전 15:44-46).

 

23. 육적인 몸과 영적인 몸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며, 아담 안에서 죽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나는 것은 누구인가?

 

살아있는 영혼(anima)을 가졌으나 아직 살리는 영(spiritus)을 가지지 못한 몸을 영혼을 받은”(animale) 몸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내가 설명한 저 다른 몸들은 영적인”(spiritale) 몸이라고 부른다. 영적인 (신령한) 몸들은 살리는 영을 가졌기 때문에 육의 짐스러움과 썩음을 면하지만, 육을 본질로 가진 몸이 아니라고 믿어서는 안된다. 그 때에 사람은 지상적이 아니라 천상적인 존재가 될 것이나, 흙으로 만든 몸이 그렇지 안게 되겠기 때문이 아니라, 하늘 은혜로 하늘에서도 살기에 적합하게 되겠기 때문이다. 그 본질은 없어지지 않고, 그 속성이 변할 것이다.

그러나 저 처음 사람은 땅에서 났고 흙에 속한 존재였으며(고전 15:47), 그것을 형성하는 것은 살아 있는 영혼이었고 살려주는 영이 아니었다(고전 15:45). 살리는 영은 그가 순종하는 공적으로 받게 될 때까지 보류되었다. 그래서 그의 몸이 영혼적(animalis “육적”)이며 영적(spiritalis)이 아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 몸은 기갈의 고통을 면하기 위해서 먹고 마실 필요가 있었고, 필연적인 죽음을 막으며 청춘 상태에 머무르기 위해서 생명나무의 도움을 받았다. 아직 절대로 완전하고 견고한 영생은 얻지 못했다. 죄를 지으면 정죄를 받으리라고 하나님이 예고하셨으므로, 죄를 지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결코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 후에 그는 낙원 밖에서도 영양을 얻을 수 있었지만, 생명나무에는 접근할 수 없게 되었으며, 따라서 세월이 지나고 나이가 많아지면 그의 생명이 끝나기로 되었다.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낙원에서 계속적으로 기력이 갱신되면서 살 수 있었을 그 생명은 끝나게 되었다. 순종에 대한 상으로 영적인 몸이 될 때까지 육적인 것에 불과한 몸이었을 것이지만, 그 몸도 끝나기로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네가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2:17) 하셨을 때에 영혼과 몸을 분리시키는 죽음을 포함시키신 것이라고 우리는 해석하겠지만, 그렇더라도 금지된 치명적인 과실을 먹은 그 날에 처음 사람이 즉시 그 몸에서 분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순이라고 할 필요는 없다. 그들의 몸도 필연적으로 죽게 된 것은 결국 그날이었고, 우리도 이 필연성을 타고나게 되었다. 이것은 그들의 자연적인 몸이 퇴화하며 상처를 입었으며, 생명나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완전히 정당한 금지가 있었던 결과였기 때문이다. 사도가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을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인하여 생명 이니라”(8:10, 각주)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 다음에 사도는 첨가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의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8:11).

이와 같이 그 때에 몸과 살리는 영과의 관계는 지금의 몸과 산 영혼과의 관계와 같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도는 지금의 몸이 이미 죽을 필연성에 굳게 매여 있기 때문에 그것을 죽은 것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낙원에서는 몸이 살리는 영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산 영혼을 위해 있었지만, 그러나 죽은 것이라고 하는 것은 적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죄를 짓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3:9)고 하심으로써 그가 아담의 영혼을 버리셨을 때에 그 영혼이 죽었다는 것을 알리셨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3:19)고 하신 것은 영혼이 몸을 떠날 때에 몸이 죽으리라는 뜻이다. 그러나 둘째 사망을 말씀하시지 않은 것은 신약의 경륜을 위해서 계시하지 않기로 결정하신 것이라고 우리는 믿어야 한다. 신약에서는 둘째 사망이 아주 분명히 선포되었다(2:11; 20:6,14; 21:8). 이와 같이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첫째 사망은 죄의 결과인 것이 - 저 한 사람 안에서 모든 사람이 함께 지은 그 죄의 결과인 것이 - 우선 밝혀졌다. 그러나 둘째 사망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예외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에 대해서 사도는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한다(8:28-29).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중보로 말미암아 둘째 사망에서 구제되었다.

그러므로 사도가 가르치는 대로, 처음 사람이 창조되었을 때에 그 몸은 육적인 것에 불과했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적인 몸과 부활시에 가지게 될 영적인 몸을 구별하기 위해서 사도는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라고 한다. 그 다음에 이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 한다(고전 15:42-44).그리고 무엇이 육의 몸이냐 하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혼(생령)이 되었다고 함과 같다”(고전 15:45; 2:7). 사도의 이 말씀은 무엇이 육의 몸이냐 하는 것을 알리고자 한다. 다만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음으로써 처음 사람 아담이 육의 몸이 되었다고 하지 않고, “생령”(산 영혼)이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사도는 첫 사람은 산 영혼이 되었다고 하는 성경 말씀이 사람의 육의 몸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신령하다”(영적이다)라는 말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알리기 위해서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다고 첨가했다(고전 15:45). 사도는 물론 이런 말씀으로 그리스도를 의미했다. 그리스도는 이미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그 후로는 완전히 죽음을 면하신 분이다(6:9). 사도는 계속해서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자니라고 한다(고전 15:46). 여기서 사도는 더욱 명백히 성경 해석을 밝힌다. 처음 사람이 산 영이 되었다는 것은 육의 몸을 의미하며,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다고 하는 그의 말씀은 신령한 몸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처음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죽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가 죄를 지은 후에 가지게 된 것은 육의 몸이었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몸도 이런 것이다. 아담이 죄를 지은 후에 몸이 변하고 죽을 운명으로 결정된 것같이, 우리 경우에도 몸의 본성이 변하고 썩었다. 그리스도께서도 처음에는 우리를 위해서 이런 몸을 가지셨다. 가지셔야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럴 권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머리이신(4:15) 그리스도가 이미 입고 가신 것과 같은 신령한 몸이 앞으로는 우리에게도 있을 것이다. 그이 지체인(고전 12:27) 자들에게는 앞으로 죽은 자들이 궁극적으로 부활할 때에 바로 이런 몸이 있을 것이다.

사도는 다음에 이 두 사람 사이의 아주 명백한 차이점을 말한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7-49). 사도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중생의 성례가 지금 우리에게서 실현되기를 원한다. 다른 곳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3:27)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일이 참으로 우리에게서 실현되는 것은 우리에게서도 타고난 육적인 것이 부활로 말미암아 신령한 것이 된 때뿐일 것이다. 다시 사도의 말씀을 인용한다면,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8:24).

우리가 출생하면서 떠맡게 된 유산이 좌와 죽음이며, 이 유산을 혈통에 의해서 옮겨 받음으로써 우리는 땅에 속한 사람의 형상을 입는다. 그러나 우리는 용서와 영생의 은혜에 의해서 하늘에 속한 사람의 형상을 입을 것이다. 이것은 거듭남으로써 받겠지만,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인 인간 예수 그리스도(딤전 2:5)로 말미암아 받게 된다. 그리스도에게서 하늘에 속한 사람을 발견하라는 것이 사도의 의도다. 땅에 속한 죽을 몸을 입으려고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은 그 몸에 하늘에 속한 영생을 입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사도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하늘에 속한이라는 말을 쓴 것은 그들이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기 때문이며(12:5; 고전 12:27; 5:30), 그래서 머리와 몸이 결합되듯이, 그리스도가 그들과 결합되시기 때문이다.

사도는 같은 편지에서 이 점을 더 분명히 말한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한다(고전 15:21-22). 그리고 그 때부터는 살려주는 영에 합당한 신령한 몸으로 살 것이다. 그런데 아담 안에서 죽는 사람이 반드시 모두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리라고 할 수 없다. 영원한 둘째 사망을 당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겠기 때문이다. 두 구절에서 사도가 모든사람이라는 말을 쓴 것은 육의 몸으로 죽는 사람들이 예외 없이 아담 안에서 죽는 것과 같이,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게 되는 사람들도 예외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받게 되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처음 사람이 죄를 짓기 전에 가졌던 것과 같은 몸을 부활 때에 가지게 되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다라고 하는 말씀도 죄를 지은 후에 있었던 일에 비추어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처음 사람은 죄를 짓기 전에 신령한 몸을 가지고 있었는데, 죄 때문에 그것이 변해서 육의 몸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우리의 위대한 사도의 말에 너무도 유의하지 않는 것이 된다. 사도는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영혼)이 되었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다(고전 15:44-45). 이 일은 사람의 처음 상태였으므로, 물론 아담이 죄를 지은 후에 있은 일이 아니다. 사람의 이 처음 상태에 관해서 바울은 율법의(2:7)이 증언을 인용하면서, 육의 몸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한 것이다.

 

24. 하나님이 처음 사람에게 숨을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신 것과 그리스 도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은 무슨 뜻 인가?

 

여기에 관련된 다른 점에 대해서도 어떤 사람들은 너무 성급하게 생각했다. 성경에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라는 말씀이(2:7) 있는데, 그들은 이 말씀을 해석하기를, 그 때에 처음 사람에게 영혼을 주신 것이 아니라 영혼은 이미 그의 안에 있었는데 성령에 의해서 살아난 것이라고 한다(마니교의 이단설). 그들이 말하는 이유는 주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20:22) 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저 옛날에 있었던 것과 같은 일이 여기서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마치 복음서 기자가 계속해서 그리하여 그들이 생령이 되니라고 말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인데, 만일 이런 말을 사실로 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해석할 것이다. 하나님의 영(Spiritus)은 어던 의미에서 영혼(anima)들의 생명이며,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비록 몸 안에 이성적 영혼이 있어서 몸에 생명을 주는 것같이 보일지라도, 그 영혼들은 죽은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야 된다. 그러나 성경의 풍부한 증언은 사람이 창조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흙으로(땅의 먼지로) 사람을 지으셨다고 한다(2:7).

어떤 사람들은 이 점을 더 분명히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하나님이 땅의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셨다고 번역한다. 바로 그 앞에 샘이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2:6, 70인역)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 수분과 흙을 섞은 진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에 하나님이 땅의 먼지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말씀이 있다. 라틴어 성경의 원본인 그리스어 성경(70인역)에서 eplasen(지으셨다)(라틴어로) formavit로 번역하거나 finxit로 번역하는 것은 - 비록 뒤의 말이 더 직역이더라도 -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formavit를 택한 사람들은 모호한 번역을 피하려고 한 것이다. 거짓 구실로 무엇을 조직한다고 할 때에(finxit의 원형인) fingere를 쓰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땅의 먼지 또는 진흙으로 만들어진 사람, 성경의 분명한 말씀대로 이땅의 먼지가 영혼(anima)을 받았을 때에 우리가 사도에게서 배우는 바와 같이 “animale"(“영혼을 받은”, “생물적인”, “육의”)몸이 되었다. 성경의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는 말씀과 같이, 흙으로 사람이 만들어진 다음에 그 흙이 생령 곧 산 영혼이 되었다.

그러나 사람에게 이미 영혼이 있었으며, 그렇지 않았다면 아담은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사람은 몸이나 영혼뿐만 아니라, 몸과 영혼을 겸비한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은 참으로 옳은 말이다. 영혼은 인간의 전부가 아리라 인간의 더 좋은 부분이며, 몸도 인간의 전부가 아니라 몸의 낮은 부분이다.

영혼과 몸이 결합된 것을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렇더라도 이 두 부분을 따로따로 써서 사람을 표시한다. ‘그 사람은 죽어서 지금 평안히 쉬고 있다’, 또는 벌을 받고 있다고 할 때에, 이 말은 그 사람의 영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지만, 일상용어로는 이런 말을 금지하지 않는다. 또는 그 사람은 어디어디에 묻혔다고 할 대에, 이것은 그의 신체에 대해서만 하는 말이다.

성경은 보통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고, 그들은 말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성경은 우리 편을 들며, 심지어 두 요소가 결합해서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도 그 요소들의 하나를 사람이라고 부른다. 영혼을 속사람”, 몸을 겉 사람이라고 해서(고후 4:16) 이 둘이 한 사람을 이루지만, 마치 두 사람이 있는 것같이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사람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사람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앞의 말은 이성적인 영혼을 가리킨다. 하나님이 이것을 사람 속에 두셨다. 사람의 몸 안에 불어 넣으셨다. 숨으로 불어 넣으셨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뒤의 말은 하나님이 먼지로 지은신 그 몸을 가리킨다. 곧 영혼을(anime)를 받아서 생물이(animaie)된 것이다. 말하자면 사람이 생령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제자들을 향해서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20:22)고 하신 것은, 성령이 성부뿐 아니라 또한 독생자의 영이라는 것(성령은 또한 성자의 영이라는 교리로서 filioque라는 표현으로 나타난 교리를 아우구스티누스가 역설하는 것임)을 알려주려고 하셨음이 분명하다. 성부와 성자, 이 두 분의 영은 한 영이시다. 그리고 성부, 성자, 성령은 삼위일체를 이루시며, 피조물이 하니라 창조주시다. 그리스도의 육신의 입에서 나온 물질적인 숨은 성령의 본질이나 본성이 아니고 한 상징이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 공통된다는 것의 상징이었다. 그것은 성부와 성자가 각각 다른 영을 가지신 것이 아니라, 두 분이 동일한 영을 가지셨기 때문이다.

이 영을 성경에서는 으레 프뉴마(pneuma)라는 그리스말로 표시하며, 예수께서도 방금 인용한 구절에서 자기의 물질적인 숨을 상징적으로 제자들에게 주셨을 때에, 이 단어를 쓰셨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다른 단어로 표시한 예를 나는 회상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라고 하는 말씀에서 그리스어 성경은 성령을 표시할 때에 보통 쓰는 프뉴마를 쓰지 않고 프노에(pnoe)라는 말을 썼다. 이 말은 창조주보다 피조물에 관해서 더 자주 사용된다. 그러므로 구별하기 위해서 어떤 라틴어 성경 번역자들은 프노에를 spiritus라고 하지 않고 flatus()라고 했다.

마찬 가지로 그리스어 성경의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이 내가 모든 pnoe를 만들었다”(57:16, 70인역)고 하시는 것도 확실히 모든 영혼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pnoe는 라틴어로 flatus(), spiritus(“생기의 기), inspiratio(불어 넣음), 또는 aspiratio(향해서 내쉼) , 하나님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로 번역된다. 그러나 프뉴마는 언제나 spiritus 라고 번역한다. 사람에 대해서 사용되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사도는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spiritus) 외에는 누가 알리요라고 하며(고전 2:11), 짐승에 대해서 쓸 때에도 솔로몬은 인생의 영(spiritus)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영(spiritus)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3:21) 한다.

물질적인 공기의 운동인 바람에 대해서도 시편에서는 불과 우박과 눈과 얼음과 광풍이라고(148:8, 70인역) 할 때에 ’(바람)spiritus라고 번역했다. 끝으로 주께서 복음서에서 자기의 물질적인 입에서 나오는 숨을 상징으로 삼아 성령을 받으라”(20:22)고 하셨을 때와 같이,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인 영에 대해서도 spiritus 로 번역한다. 이 마지막 사용법은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28:19) 하신 말씀에도 있다. 이 구절에서는 삼위일체가 아주 뚜렷하고 명백하게 표시되어 있지만, 이 밖에도 하나님은 영이시라”(4:24)등등 성경의 많은 구절에서 spiritus 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이 모든 구절에서 그리스어는 프노에가 아니라 프뉴마이며, 따라서 라틴어는 flatus가 아니라 spiritus 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으셨다”,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셨다고(2:7) 할 때에, 그리스어로는 프노에 대신에 프뉴마를 썼지만 그 영을 반드시 창조주이신 영, 즉 삼위일체의 한분이신 성령과 동일시할 필요는 없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프뉴마는 창조주뿐 아니라 피조물에 대해서도 쓰기 때문이다.

그러나 논쟁을 일으키는 자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성경이 spiritus라고 할 때에, 그 영이 성령리라고 해석되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면, ‘생명이라는 말을 첨가하지 않을 것이며,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할 때에도, 만일 성령의 선물로서 영혼에게 생명이 주어졌다는 뜻이 아니라면, ‘’()이라는 말을 첨가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혼은 그 독특한 방법으로 살아 있는 것인데, 만일 성령을 통해서 생명을 받았다고 우리에게 알리려는 것이 아니었다면, 무슨 필요가 있어서 이라는 말을 첨가했을 것이냐고, 그들은 논한다. 이것은 인간의 추측을 옹호하는데 열심히 있고, 성경을 보는 데는 무관심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더 멀리 갈 필요도 없고, 같은 책의 조금 앞에 있는 말씀을 간단히 읽어 보면 된다. 땅의 모든 동물들이 창조된 대목에서,“땅은 생령을 내라는 말씀이 있다(1:24, 70인역). 역시 몇 장 뒤의 여전히 같은 책에서 생기를 가진 것과 육지에 있는 것모두 죽었더라”(7:22, 70인역)는 말씀을 읽을 수 있다. 이 구절은 지상에 있던 생물이 모두 홍수로 죽었다는 것을 알린다.

이와 같이 모든 생물에게는 생령과 생기가 있으며, 성경에서는 이것이 정상적인 표현 방법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방금 인용한 생기를 가진 모든 것이라는 구절에서 그리스어는 프뉴마가 아니라 프노에라는 말을 썼다. 그러면 우리는 무슨 까닭에 묻지 않는가: “영혼은 살아 있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인데, 무슨 필요가 있어서 영혼은 살아있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인데, 무슨 필요가 있어서 살아 있는”(‘생령’)이라는 말을 첨가하거나, ‘생기에서 곧 생명이라는 말을 첨가하는가? 그러나 성경이 보통으로 생령과 생기라는 말을 써서 동물을 의미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동물은 animata(살아있는) 몸들을 가졌고, anima(영혼)를 통해서 감각이 있다. 그런데 반대로 사람이 창조된 대목에 와서는 성경의 표현방법을 우리는 잊어버리지만, 성경은 그 정상적 방법으로 우리를 가르친다.

사람은 이성적인 영혼을 받았으며, 이것은 다른 동물들의 영혼과 같이 몸과 물과 흙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숨으로 창조되었지만 다른 동물들과 같이 동물적인”(animale) 몸에서 살도록 되어 있으며, 이 몸은 영혼(anima)이 그 속에 살고 있을 때에 창조된다. 성경은 다른 동물들에 대해서 땅은 생령을 내라고 하며(1:24, 70인역), 생기를 가졌다고도 한다(6:17; 7:15, 22, 70인역). 다른 동물들의 경우에 그리스어는 프뉴마가 아니고 프노에이며, 여기서 성경은 이 단어로 성열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동물들의 영혼을 언급하는 것이다.

반대론자들은 대답하기를, 하나님의 숨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되며, 또 만일 그 숨을 영혼과 동일시한다면, 지혜도 나는 가장 높으신 이의 입에서 나왔노라고 하므로(집회서 24:3), 우리는 그 지혜와 영혼을 같은 본질을 가지고 동등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며, 이것은 논리적이다. 그러나 지혜는 하나님의 입에서 내뿜어진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숨을 내쉴 때에, 우리를 사람으로 만드는 그 본질을 내뿜는 것이 아님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주위에 있는 공기를 들이쉬었다가 다시 내쉴 뿐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은 그의 본질이나 그보다 낮은 어떤 피조물에서 온 것이 아닌 숨을 내보내실 능력이 있다. ()에서도 숨을 만드실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 숨을 사람의 몸속에 두신 것을 그의 속에 불어넣으셨다고 말한 것은 아주 적합한 표현이다.

하나님이 물체가 아니신 것과 같이, 이 숨도 물체가 아니지만 그는 변하시지 않는데 이 숨은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창조되지 않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의 용어에 유의하지 않고 성경을 논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본질이 동일한 것뿐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 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읽는 것이 좋겠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하셨다(3:16).

그러므로 사도가 하는 아주 알기 쉬운 말씀에 우리는 찬성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육적인 몸과 우리가 장차 입게 될 영적인 몸을 구별하기 위해서 사도는 말씀한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영혼, anima)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spiritus)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spiritale)자가 아니요 육 있는(animale)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4-19). 사도의 이 모든 말씀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 말했다.

따라서 사도의 말씀과 같이, 처음 사람 아담이 창조되었을 때에 입은 육의 몸은 전혀 죽을 수 없게 만든 것이 아니라, 죄를 짓지 않으면 죽음을 당하지 않게 만든 것이었다. 그 몸이 앞으로 살려 주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령하며 영원불멸하게 되며, 영원불멸하도록 창조된 영혼과 같이 전혀 죽지 않게 될 것이다. 영혼도 죄를 지음으로써 죽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때에 영혼은 어떤 종류의 생명, 즉 하나님의 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영혼은 현명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원래 영원불멸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불행하게 되었으면서도 독특한 일종의 생명을 계속 가지고 있다. 반역 천사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그들은 죄를 짓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일종의 죽음을 당했다. 하나님에게서 마심으로써 그들은 현명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원래 영생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생명과 감각을 완전히 빼앗길 정도로 죽을 수는 없었다. 마찬가지로, 최후 심판으로 둘째 사망 속에 거꾸로 던져진 후에 그들은 거기서도 생명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거기서 고통을 받을 때에 그들에게 감각이 없지 않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 속하며 행복한 생명을 보존한 거룩한 천사들과 같은 시민인 사람들은 신령한 몸을 받아 입어, 그 후로는 죄를 짓거나 죽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다. 그들이 받아 입을 영원불멸은 천사들의 영원불멸과 같이, 죄로 말미암아 빼앗기는 일이 없을 것이며, 그들의 육신의 본질은 변하지 않겠지만, 육신의 부패성이나 나태성은 흔적도 없을 것이다.

다음에 반드시 다뤄야 할 문제가 있으며, 이것은 진리의 하나님에게서 도움을 받아 반드시 해결해야 되겠다. 처음 사람들이 불순종이라는 죄를 짓고 하나님의 은혜를 잃었기 때문에, 그 결과로서 우리의 지체에 불순종과 정욕이 생겼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 결과로 그들의 눈이 자기의 벌거벗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 다시 말하면 더욱 엄밀히 관찰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리고 그들의 의지에 따르지 않고 지체가 흉하게 움직이므로, 그들은 흉한 것을 가렸다. 그러므로 만일 그들이 창조된 그대로 죄없이 살아갔다면 어떻게 자녀를 생산했을까 하는 문제가 생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책을 끝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뿐 아니라, 그런 중대한 문제를 간단히 처리해 버릴 수 없다. 따라서 문제를 차기로 미루어 더 편리하게 다루겠다.

 

 

 

주후 201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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