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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료·논문

칼빈의 하나님 형상이해

by 해찬솔의 신학 2015.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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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울의 관점에서 본 칼빈의 하나님 형상이해

                                                                                                                  글 : 김한영 박사

 

 

(패러다임 변화와 연관하여)

Calvins Concept of Imago Dei as the Mirror, as for the change of his Paradigm

19997Grand Rapids in Michigan

Kwon, Ho Duck(Dr.the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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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목차-

0. 들어가면서

1. 문제제기

2. 연구 목적과 연구방법

 

I. 칼빈의 경우 하나님의 본체를 반영하는 거울로서 형상 개념

1. 자연만물은 하나님 형상이다

2. 하나님 형상으로서 성경

3. 하나님 형상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4. 하나님 형상으로서 창조된 인간

 

II. 칼빈의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인간이해

1. 칼빈의 하나님 형상의 정의

) 존재론적 하나님 형상론의 흔적

) 하나님 형상과 영혼 사이의 관계

) 관계론적 하나님 형상론 그리고 패러다임의 변화

2. 하나님 형상이 반사하는 내용

3. 하나님 형상의 반사 채널

4. 패러다임 변화의 열매

 

III. 맺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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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제제기

 

칼빈의 하나님 형상에 대한 연구는 이미 여러 전문가들에 의해 깊이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문제에로 직접 들어가 해석을 시도했다. 이를테면 W. Niesel 그의 저서 Die Theologie Calvin's(Menschen: Kaiser Verlag 1938)의 제 4창조와 섭리부분에서 창조의 주된 작품으로서 인간을 다루되 인간의 구성요소와 본질문제를 다루면서(60이하) 곧 바로 하나님 형상인 인간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간다(62이하). 그는 여기서 모양’(similitudo)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관계적 하나님 형상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T.H.L. Parker은 그의 저서 Calvin: An Introduction to his thought (Westminster/ Johnknox Press: Louisville, Kentucky 1995)에서 인문주의자들의 인간관과 비교하면서 곧바로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으로 들어간다. Donald Treat McIntosh는 그의 논문 The Doctrine of man in Calvin's Institutes(submitted in partial fullfilment of the requirements for the degree of Master of Sacred Theology 1947)에서 인간을 창조, 타락, 구원 그리고 회복의 관점에서 다룬다(14-). McIntosh는 칼빈의 하나님 형상론을 거울의 관점에서 열거하기보다는 타락이전의 아담의 상태를 중심으로, 말하자면 인간문제에 국한시켜 논한다. 그는 칼빈의 기독교강요 제 1(영역208)에 의거한 칼빈의 하나님 형상에 대한 그의 정의가 그것을 말해준다. “‘하나님 형상이라는 용어는 아담이 바른 오성으로 구비되었을 때 지닌 완전성을 나타낸다; 즉 그의 감정이 이성의 통제를 받았고 모든 감각이 통제를 받아 질서를 지키고 있었으며 그의 본성이 탁월성을 드러내는 가운데 자기의 창조자를 닮았던 그 때”. 물론 McIntosh는 칼빈의 경우 하나님 형상이 택자의 삶에서 부분적으로 보여질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16) 거울의 의미를 담고 있지만 토란스만큼 거울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해석하지 않는다. McIntosh가 인간의 타락문제와 더불어 하나님의 형상을 언급한 내용을 보면 그가 칼빈의 하나님 형상론을 존재론적인 관점으로 바라보았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그는 관계적인 관점에서 해석한 칼빈의 형상론을 간과하고 있다. “하나님 형상은 완전히 파괴되었거나 근절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부패하여 남아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지독하게 기형적이 되어 버렸다”(15).

Stuermann, Walter E.는 그의 논문 The image of man. The perspectives of Calvin and Freud(in Interp 14[1960] 28-42)에서 인간의 형상을 두고 칼빈과 프로이드를 비교한다. 이 논문은 단순히 이 두 사람의 인간관을 비교한 것이기 때문에 본 논문의 관심사와는 거리가 멀다.

James M. Kennedy 그의 논문 A brief study of Calvin's concept of the Image of God”(submitted in partial fullfilment of the requirements for the degree of Master of Theology in Columbia Theological Seminary 1969)에서 두 가지 관점에서 칼빈의 하나님 형상론을 논한다. ) 피조물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발견되는 형상(25). Kennedy는 이것을 우주적 형상(Universal Image)이라 부른다.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발견되고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사역을 통해 구원을 받은 자들 속에 형성된 형상(25). 말하자면 케네디는 구원론과 연관시켜서 칼빈의 하나님 형상론을 해석한다. 그는 칼빈의 경우 거울로서 하나님의 향상이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님을 지적한다.(37). 동시에 그는 구원론적인 관점으로 보는 경향으로 기울어진다. 그는 타락한 인간이 자연계시를 못 본다는 사실과(41) 이런 인간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됨을 주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케네디는 칼빈의 하나님 형상론을 존재론적인 동시에 관계론적으로 해석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칼빈의 하나님 형상 이해에 상당히 접근해 있다고 본다. 다음과 같은 그의 발언은 이 사실을 요약해준다. “영적인 인간, 영혼은, 인간 내부에 있는 모든 것 곧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과 이웃에 관계하는 사회적 존재로서 관계를 지닌다”(50)

David Cairns은 그의 저서 The Image of God in man(SCM Press LTD London)IX 장에 나오는 The image of God in John Calvin(128-)에서 칼빈의 기독교강요의 순서에 따라 하나님 지식과 인간지식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고 칼빈의 하나님 형상론을 거울의 관점에서 그리고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열거한다. 그는 칼빈의 시편 19편 주석을 참조하여 우주의 기능은 매 순간 하나님의 영광을 그림처럼 비추는 것(129)라고 말하고 동시에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 형상을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거울과 같은 것으로 해석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인해 그 분께 감사와 영광을 드리고 순종함을 통해 하나님께 발견되지 않으면 결코 진실된 의미의 자신이 아니다”(128f.) 카이른스는 여기서 인간의 이런 기능이 어떻게 타락했으며 다시 회복되었나를 설명한다. 사실 그의 이런 윤곽은 칼빈의 신학 전체를 요약한 것이다.

Heiko Augustinus Oberman은 그의 논문 The Pursuit of Happiness: Calvin Between Humanism and Reformation(IN Humanity and Divinity in Renaissance and Reformation: Essays in Honor of Charles Trinkaus. Studies in the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Vol. 51. New York: E.J. Brill, 1993:253-83./ O'Malley John W., ed.)에서 칼빈이 자기의 대적들과 가진 긴장 속에서 나온 발언들을 중심으로 그의 하나님 형상론을 해석하되 칼빈에게 있어서 획기적인 패러다임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면서 심리학적 관점으로 인간을 해석한 사실을 주목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여기서 칼빈이 인간을 구원문제와 연관하여 진화론적인 관점으로 해석하고 있다고 본다는 점이다(272-). 그에게 있어서 칼빈의 인간관이 인간의 행복추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거울의 의미는 간과된다.

Anthny A. Hoekema는 그의 저서 인간론(Created in God's Image, Grand Rapids: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86)에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하면서 칼빈의 하나님 형상론의 특징을 간략하게 정리했다. 그는 여기서 다섯 가지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칼빈의 견해를 정리했다.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 형상은 어디서 발견되는가(42) 하나님 형상은 원래 무엇으로 되어 있나?(42) 타락한 인간이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의미가 있는가?(43) 인간이 타락해서 범죄 속으로 들어온 것은 하나님 형상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45) 하나님 형상은 인간 속에 어떻게 회복되는가?(46) A. Hoekema는 여기서 인간론을 중심으로 다루기 때문에 자연이나 율법의 하나님 형상의 의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의 열거내용은 하나님의 영광을 발산하는 주체로서의 하나님 형상의 관점에 이 문제를 다루되 창조 타락 구원 그리고 회복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사실 A. Hoekema가 이해한 창 1:26-28은 인간이 하나님을 대리하여 만물을 다스릴 때 그리고 남자와 여자로서 조화를 이룰 때 하나님을 잘 반영한다는 것이다.(13-14). 말하자면 A. Hoekema는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을 반영하는 인간의 관점에 맞추어 해석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칼빈에 가깝다. 비록 그가 칼빈과는 달리 만물 통치 행위를 하나님 형상과 연관시키지만 말이다.

Richard Prins는 그의 논문 “The Image of God in Adam And The Restoration of Man in Jesus Christi”에서 칼빈의 하나님 형상을 하나님을 반영하는 그 무엇으로 보는 관점에서 해석을 시작한다. 그는 하나님의 본체를 반영하는 대상으로서 율법 내지 성경은 제외하고 자연과 인간 이 둘 만 언급한다. 그런데 그는 즉시 칼빈이 말한 하나님 형상의 내용에 대해 상론하되(35-) 칼빈의 신학 전체 윤곽을 따라 창조 타락 구원 회복의 관점에서 논한다. 즉 그는 칼빈의 논리 흐름에 따라 인간론과 기독론 그리고 성령론을 연결시키면서 하나님 형상론의 내용을 규명한다. 흥미로운 것은 Prins가 여기서 칼빈의 하나님 형상관을 관계적인 차원과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설명하려고 한 것이다.(36ff.). 이것은 그가 칼빈의 하나님 형상관에서 역동적인 면을 보았음을 뜻한다.

Albrecht Peters는 그의 저서 인간론”(Der Mensch)의 한 부분에서 칼빈의 인간론을 하나님 형상의 관점에서 해석을 시도했다. 그는 칼빈의 인간론이 Imago Dei를 중심으로 엮어져 있음을 잘 지적했다(76, 94). 심지어 그는 칼빈에게 있어서 창조’, ‘타락’, ‘구원그리고 회복이런 중요한 내용이 Imago Dei를 뼈대로 열거되고 있음을 지적했다(82,94). 사실 인간에 대한 해석은 이 네 가지가 논리적으로 조직화될 때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해결과 더불어 수행되는 것이다.

Peters는 그의 칼빈의 하나님 형상론에 대한 글을 먼저 어떤 신학자 또는 사상가들이 칼빈의 하나님 형상론 영향을 끼쳤나를 스케치한 다음(75-76) 하나님 형상의 좌소인 영혼의 구조문제를 논하면서 영혼과 Imago Dei 사이의 관계를(77-81) 논한 후에 Imago Dei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룬다. Peters는 칼빈의 영혼 이해에 플라톤 등 고대 철학자들의 인간 이해가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80). Peters는 칼빈의 하나님 형상론이 성경의 발언과 그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의 견해가 어떻게 종합되어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물론 이런 발언은 칼빈을 교조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에게는 납득이 잘 안 갈 것이다.

그러면 Peters는 칼빈의 하나님 형상론을 어떤 관점에서 열거했을까? 그는 그것을 인간이 타락했을 때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상실했는가 아니면 부분적으로 상실했는가 하는 차원에서 해석하되(83) 하나님의 본질이 인간 속에서 발산되는 거울의 관점에서도 해석한다(84). 그가 칼빈의 하나님 형상론을 존재론적으로만 해석할 수 없고 역동적인 그 무엇으로 해석을 시도한 것은 잘 한 일이다. 그런데 그는 칼빈의 해석에 혼선이 온 것에 대한 원인을 규명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뒤에서 언급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Peters의 해석 속에서 칼빈의 하나님 형상에 대한 가장 종합적인 해석을 볼 수 있다.

필자가 보기에 칼빈의 하나님 형상관을 칼빈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정리한 인물은 T.F. Torrance인 것 같다. 그는 자기의 저서 Calvin's Doctrine of man(Lutterworth Press London 1949)에서 인간의 자신에 대한 지식을 논하고(13이하) 창조 속에서 인간의 위치(23이하)에 대해 논한 다음 넉 장에 걸쳐 칼빈의 하나님 형상론을 논했다.

Torrance는 그 첫 부분에서(3) 칼빈이 Imago Dei를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한다는 기독교 강요 부분을 열거함으로 시작한다. 즉 자연과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한다는 의미에서 Imago Dei라는 말이다(35). Torrance는 칼빈이 주로 인간론에만 치중하는 Imago Dei 개념을 광범위하게 사용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지적했다(36). 특히 칼빈이 Imago를 거울의 개념으로 간주한다는 Torrance의 지적은 매우 정확한 것이다. 그런데 Torrance는 칼빈의 경우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율법이 형상과 연관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그는 여기서 말씀은 인간이 자연 속에 반사된 하나님의 형상을 읽는데 도우는 안경 정도로만 지적하고 넘어간다(41). 또 하나님의 참 형상인 그리스도가 아담 속에 새겨진 하나님 형상의 근원이라는 칼빈의 말을(Inst II,12,6) 언급하고 넘어간다(42). 그럼에도 rectitudo 개념을 중심으로 칼빈의 관계적 형상론을 정리한 것은 평가할만하다. 에써 교수가 Reuter의 비판을 근거로 지적한대로 토란스는, 칼빈을 창조사역의 내면성에 근거하여(werkimmanent) 해석했다는 비판을 받지만, 칼빈의 하나님 형상론을 근사하게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

칼빈의 하나님 형상론을 평가할 때 가장 높은 위치에서 조감도를 보고 평가한 인물은 독일의 칼빈 전문가인 에써 교수일 것이다. 그는 하나님 형상과 관계되는 구절들에 대한 칼빈의 해석과 현대 주석가들의 이런 구절에 대한 해석의 관점에서 칼빈 당시의 새로운 면이 무엇이며 또 그의 발언이 어떤 배경에서 이루어졌는지를 점검하며 칼빈의 하나님 형상론의 약점과 장점을 정리했다.그는 칼빈의 하나님 형상론을 규명 하나님 형상관계론적 하나님 형상이 두 가지로 명쾌하게 설명한다.

 

2. 연구목적과 연구방법

 

본 논문의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의 상태를 그림(도식)을 그리듯이 열거하고 그것이 칼빈의 신학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키는데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규명하는 데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 앞에서 관계적인 차원에서 구조가 어떤 것인지를 밝히는 동시에 이로 인한 결과가 신학의 틀을 형성하는데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이것은 칼빈의 하나님 형상론에 대한 이해를 전제한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서 칼빈의 하나님 형상론을 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던져야 할 질문은 두 가지이다. ) 우리는 어떤 관점에서 칼빈의 하나님 형상론을 보아야 하는가? ) 구체적으로 칼빈이 말하는 하나님 형상으로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첫 번째 질문에 대해 우리는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의 본체를 반영하는 실체라는 관점 관점에서 설명을 시도한 것으로 대답할 수 있다. 그러면 칼빈의 하나님 형상론을 하나님의 영광을 발산 내지 반영하는 거울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될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한 마디로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보면 그가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 형상론을 해석하는 시도가 매우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면 칼빈은 하나님의 본체를 반영하는 것은 무엇으로 보는가?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그 내용을 잘 열거했다: 자연만물(I,5-6), 성경말씀(I,7-9), 예수 그리스도(I,11-14), 인간(I,15,3-8). 이것은 칼빈의 기독교강요에 나오는 imago Dei를 포함한 모든 구절들을 분석함을 통해 얻은 결과이다. 즉 필자는귀납적 방법으로 이 연구를 시작한 것이다. 필자는 이 분석작업을 위해 현대 컴퓨터 문명의 利器를 이용했다. 필자는 칼빈 대학의 헨리미터 센타가 개발한 ‘Calvin's Institutes Latin-English Search and Browser Programs’(1999)을 이용하여 라틴어판과 영역판을 비교하면서 모든 imago Dei구절을 분석했다. 그 다음 칼빈 전문가들의 견해를 이것과 비교하면서 그들의 견해를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더러는 참고하면서 필자의 관점으로 얻은 결과를 열거했다.

1부에서는 칼빈이 이해한 거울로서 하나님 형상의 대상들의 순서에 따라 점검하고 제 2부에서는 인간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어 인간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 나름대로의 대답을 시도한다. 따라서 우리가 인간 속의 하나님 형상에 대한 칼빈의 견해를 살펴보기 전에 하나님 형상으로서 거울의 역할을 하는 대상들을 먼저 개괄함이 좋을 듯하다.

 

 

I. 칼빈의 경우 하나님의 본체를 반영하는 거울로서 형상개념

 

1. 자연만물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명확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질문에 대답한다. 칼빈은 왜 자연만물을 거울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나? 이 거울은 도대체 무엇을 반영하고 있는가? 인간은 어떻게 이 반영 내용을 인식할 수 있을까?

그러면 칼빈의 경우 어떤 의미에서 자연이 하나님의 형상인가? 칼빈은 기독교 강요 제 15-7장 사이에서 이 문제를 열거했다. 물론 그는 여기서(I,5,1,7) 가시적인 자연만물을 직접 imago라는 말로 표현하지 않고 극장’(spectacula) 또는 거울 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칼빈은 I,5,14[3]에서 자연만물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simulachra vocat rerum invisibilium”(불가시적인 것들의 형상 또는 그림자) 즉 칼빈은 이 세상을 거울로 보고 우리는 이 거울로 하나님을 본다고 한다. 칼빈은 자연이 거울로서 하나님의 본체를 너무나 명확하게 반영하기 때문에 어떤 변명도 허용하지 않음을 강조한다(I,5,1의 제목). “……우주의 전 창조 속에서 매일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은 눈을 뜨기만 하면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I,5,1). “더우기 무엇보다도 먼저 눈을 어디로 돌리든지 이 세계에는 적어도 하나님의 영광의 섬광이 빛나지 않는 곳은 하나도 없다”(ibid.). 이런 내용은 그의 시편 8편 주석에도 잘 나타나 있다(93이하).

어떻게 자연만물이 하나님의 본체를 반영하는가? 칼빈은 이 자연만물이야 말로 하나님의 모습이 찍혀 있는 것으로 표현했다. 하나님이 자연을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모든 창조물 위에 영광의 명백한 표적을 새겨 놓으셨으며……”(I,5,1). 우리는 여기서 존재론적 차원에서 하나님 형상의 개념을 본다.

이 거울은 도대체 무엇을 반영하나? 칼빈은 시편과 히브리서 그리고 로마서 등에 근거하여 두 가지 차원 곧 비공유적 속성의 차원과 공유적 속성의 차원에서, 한편으로는 자연은 우선 하나님자신, 권능과 지혜의 영광 그리고 신성을(I,5,1-3) 반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칼빈은 시 8편 주석에서 이 두 가지를 잘 요약했다. “그러나 그는 이 주제에 대해 이른바 지나치듯이 살짝 보고 대체적으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인자하심을 주장한다”(93). “비록 하나님의 무한하신 위엄이 천체들 가운데 빛나지만 그리고 사람들의 눈길이 그것을 묵상하는 일에 고정되지만 그의 영광은 특별한 방법으로 인간을 향하신 큰 은총 가운데, 그리고 그것이 그들을 향해 나타나는 선하심 가운데 보여진다.”(99)

인간은 어떻게 이 반영 내용을 인식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미 자연인도 핑계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신성을 볼 수 있다는 칼빈의 주장을 지적했다. 여기서 말하는 인식은 감사와 찬양까지 이르는 인식을 의미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신인식과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하는 행위가 항상 함께 간다는 등식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의 저서에 이런 등식에 관한 내용은 너무 많아서 다 열거할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칼빈의 신학 전체를 공통적으로 꿰뚫고 있는 그의 진리 인식방법을 보게 된다.

그 방법은 한 마디로 인간의 이성이 주체가 되어 하나님을 객체로 만들어 놓고 인간 중심적으로 분석 비판하는 헬라적 인식방법과는 달리 하나님의 관점에서, 순종하며 수용하는 자세에서 이루어지는 히브리적 인식방법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탐구하는데 있어서 가장 완전한 방법이요 가장 적절한 순서는 다음과 같은 것임을 알게 된다. 곧 하나님은 주의 깊게 탐색해야 할 분이기보다 경배 받으셔야 할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나친 호기심에서 하나님의 본질을 탐구하려고 시도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사역에서,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가까이 하시며 친밀히 하시며,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을 전달하신 그 사역에서 하나님을 숙고해야 하는 것이다”(Inst I,5,9). 그러면 이런 인식이 이루어지려면 인간 내부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할까? 칼빈은 여기서 성령의 조명을 말한다. “곧 보이지 않는 신성이 이와 같은 거울 안에서 나타나게 되지만, 하나님의 내적인 계시에 의하여 믿음으로 조명되지 않는 한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Inst I,5,14). 우리는 이것을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성령의 조명을 통한 성경본문의 이해의 경우에도 볼 수 있다.

 

하나님

성령의 조명

 

자연 거울 나

이 말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고는 자연이라는 거울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본체를 볼 수 없다는 말이다. 칼빈은 간접적이기는 하나 여기서 사고방식의 전향을 암시한다. 즉 하나님을 바로 인식하지 못하는 자연인의 사고방식에서 인식할 수 있는 사고방식으로 바꾸어야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칼빈은 자연인의 잘못된, 고장난 사고방식은 어떤 것일까? 우리는 그것을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유물론적, 이원론적, 그리고 범신론적 사고방식. 칼빈은 물론 이런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사실 그 당시에는 아직 이런 용어들이 사용되지 않았을 뿐이다. 유물론은 감각세계를 초월한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칼빈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들을 가리켜 기괴한 정신의 소유자들이라고 그들의 행위를 광란으로 몰아 세우는 무리들이 여기에 속함을 본다.(Inst I,5,4). “그들은 만물의 창조자이신 분을 자연으로 대치시키고 하나님의 이름을 삭제해 버린다”(Ibid.). 이런 발언은 물질을 신으로 여기는 유물론과 일치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범신론적인 사고방식이다. 우리는 칼빈이 피조물과 창조주를 혼동하는 무리들을 비판하는 내용 속에서 이것을 볼 수 있다. “세계에 생명을 불어넣으며 그것을 움직인다는 우주 정신에 대한 그 빈약한 사색이, 인간의 마음에 경건을 일으키며 키우는 일에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이러한 사상은 또한 위와 같은 원리에서 연역해 낸 추악한 루크레티우스(Lucretius)의 모독적인 詩句에서 더욱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이 시는 실로, 우리가 마땅히 두려워하고 찬양해야할 참되신 하나님을 몰아내기 위하여 影像的인 신격을 고안해 낸 것이다”(I,5,5). 칼빈은 자연을 신으로 보는 이들에 대항하여 명백하게 자연을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라고 못박는다(ibid.).

그 다음 또 하나는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이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와 피조물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사고방식이다. 다음과 같은 칼빈의 발언은 이런 사고방식의 문제점을 잘 지적한 것이다. “오히려 창조주를 무시하고, 나태하게 앉아서 그의 사역을 바라다보고만 있지 않는가?”(I,5,11) 칼빈은 이들이 하나님의 섭리의 지배를 받지 않고 맹목적이며 무분별한 운명론에 사로잡혀 있음을 지적한다(ibid.). 칼빈은 기독교 강요 I,5,12에서 실재의 예를 들어가면서 인간이 이런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는 한 자연이라는 거울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암시했다. “여기서 명백한 것은, 인간이 본성으로만 가르침을 받는다면, 확실하고 건전하며 명료한 지식을 갖지 못하고, 다만 혼란한 원리에 매여, 마침내 알지 못하는 신을 예배하게 된다는 사실이다(17:23)”.

칼빈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나 발산하는 형상을 자연 속에서만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한 걸음 나아간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연이라는 거울에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영원한 왕국을 아무 명백하게 보여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어리석음 때문에 우리는 그 뚜렷한 증거들을 보면서도 점점 어두워져서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하기때문이다. 칼빈은 타락한 인간의 영적인 눈이 얼마나 부패했나를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런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다른 거울로 눈을 돌린다. 칼빈은 자연만물이 하나님의 임재를 명백하게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이런 약점 때문에, 또는우주의 가장 아름다운 형성에 찍혀진 자신의 모습이 충분한 효과를 나타내지 못할 것을 아셨기 때문에”(I,6,3) 말씀의 도움을 마련하셨다고(ibid.) 말하고 또 그러나 우리에게는 정확히 우리를 우주의 창조자 앞으로 인도할 다른 훌륭한 조력자가 첨가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성경이다.

 

2.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성경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질문에 대답함을 통해 그 의미를 규명하려고 한다. 성경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가?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을까? 이런 인식의 목적하는 바는 무엇일까?

성경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Eric Kayayan이 칼빈을 해석하면서 기독교 강요의 제 2권에서 성경을 거울에 비유한다는 점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이 가시적으로 성경 위에 나타나 있다고 말한다. 다음과 같은 칼빈의 발언은 성경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내포되어 있음을 명백히 말해준다. “그가 성경에 찍은 형상에 따라 자기를 인정해 주기를 바란다”(I,9,2). 이런 발언은 하나님의 율법을 하나님의 본질이 찍힌 도장으로 본 콜부뤼게와 그의 제자 에드와드 뵐의 견해와 매우 일치하는 것이다. 우리는 칼빈이 성경을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묘사하지 않으나 내용으로 그러함을 묘사하는 구절을 수없이 찾을 수 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명백한 표시를 보게 된다”(I,7,4) 또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온 우주의 구조와 모든 피조물에게서 아주 명백하게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씀에서 더욱 생생하게 더욱 상세하게 계시되었다”(I,10,1), “나는, 경건한 사람들에게 일종의 목록 정도를 마련해 주어 그것으로 특별히 성경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게 되고”(I,10,1), “실로 성경의 어떤 구절들은 하나님의 속성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마치 하나님의 참된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εικονικχως”(I,10,2) 그리고 요컨대, 지혜와 권능과 의에 있어서 이해할 수 없으며 우리 눈으로서는 감히 볼 수 없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산 형상을 보여주는 거울로서 모세의 역사를 우리 앞에 두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자”(I,14,1). 사실 성경신학자인 칼빈의 신학 전체는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을 증거 하려는 열심히 가득 차 있음을 본다.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을까? 그러면 누구든지(자연인을 포함하여) 성경을 읽으면 즉시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는가? 칼빈은 성령의 조명을 전제로 그러함을 말한다. “만일 순결한 눈과 건전한 정신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하나님의 위엄은 즉시 우리 시야에 나타나서, 우리의 대담한 거절을 억제하면, 우리들이 순종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Inst I,7,4). 이 구절의 앞부분을 보면 순결한 눈과 건전한 정신은 성령의 조명을 전제한다. “성령이 우리에게 조명하면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된다, 즉 그의 형상 속에서, 말하자면 말씀 속에서 인식한다”(in sua imagine, hoc est in verbo, recognoscimus)(Inst I,9,3)

그러면 성령이 우리 마음을 조명할 때 우리 속에 어떤 반응이 생기는가? 우리는 여기서 인간이 자연만물 속에서 하나님을 인식할 때와 동일한 반응을 볼 수 있다. 즉 조명, 믿음 그리고 인식 이 세 가지의 상호관계를 볼 수 있다. 칼빈은 성령의 조명이 있으면 우리 마음에 말씀에 대한 완전한 신앙이 머물러 있으며, 또한 우리가 그의 형상을 따라, 곧 그 말씀을 따라 그를 인식할”(Inst I,9,3)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인식의 목적하는 바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에 대한 대답을 다음과 같은 칼빈의 말에서 분명하게 찾아 볼 수 있다. “실로 성경에서 설명하고 있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모든 피조물에 새겨져 빛나고 있는 지식과 동일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 이 지식은, 먼저는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고 다음으로는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한다. 이 지식으로 우리는 완전 무결한 생활과 거짓없는 순종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동시에 그의 선하심에 전적으로 의존하기를 배우게 된다”(Inst I,10,2). 사실 성경은 이런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윤리 내용이나 공허한 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다른 종교의 경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3.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그리스도

 

칼빈은 기독교 강요 I,11,1-16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시적으로 만들어 세우는 문제를 열거한 다음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그리스도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칼빈이 이해한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잘 이해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답한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그리스도는 거울의 의미를 지니는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우리는 이런 거울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그리스도는 거울의 의미를 지니는가? 칼빈이 하나님의 말로 다할 수 없는 그의 형상 속에서 빛난다”(11:3) 했을 때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의 본체를 가장 잘 반영하는 거울과 같다는 말이다. 사실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발산하는 빛의 덩어리를 본 것이다. “그 자신은 그의 아버지의 살아있는 형상이다. 그 속에는 그의 영광의 충만한 광채가 우리에게 비추어진다”. 이런 표현은 칼빈이 성경에 대해 논하면서 옛날 유대인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 형상이신그 독생자가 알려졌다는 표현을 사용한다(II,9,17,19). 또 칼빈은 믿음에 대해 논하면서 고후 4:6에 의거하여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만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에게 전해짐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이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빛나며, 그 지식이 우리에게 비친다고 하였다” (Inst III,2,1). 또 그는 히 1:3에 의거하여 그러므로 아버지께서는 계시하시려는 모든 것을 독생자 그리스도에게 맡기시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은혜를 전달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의 진정한 형상을 표현하게 하셨다”(Inst III,2,1,16)라고 말했다. 이런 표현은 분명히 거울로서 하나님 형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물론 그를 통해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참된 신지식을 얻는다는 의미를 지닌다. 칼빈에게 있어서 이 신지식이 구원에 이르는 수단인 믿음과 깊은 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이미 많이 연구된 바이다. 우리는 칼빈이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그의 신학의 몸통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데 그 중요성을 감지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Randall C. Zachman이 성부의 형상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칼빈의 신학의 중심 테마로 본 것은 통찰력 있는 분석으로 여겨진다. 그의 논문은 칼빈의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그리스도에 이해가 딤전 3:16에서 출발하여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선한 사역을 설명하는 것으로 구조되어 있다(46f.). 말하자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발산하여 그가 누군지 알려주는 거울의 역할 뿐 아니라 불가시적인 하나님 자신이 죄인을 위해 이 세상에 등장하여 우리 눈앞에서 구원사역을 하신 분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런 거울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의 영광을 발산하는 하나님의 형상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인식하지 못한 사실은 성경에 명백히 증거되어 있다. 이를테면, 아기 예수가 태어났을 때 단지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그를 인식한 점이나(동방박사, 목자들, 사가랴와 엘리사벳), 고향사람들이 그를 인식하지 못하여 배척한 사실, 유대인들이 그를 인식하지 못하여 자주 표적을 보여달라고 한 점이나(12:38f; 16:1,4),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지 몰라 그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인 일(3:13-17; 고전 2:8) 등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이 세상에 왔어도 모든 사람이 다 인식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요한 이런 인간의 문제를 단적으로 잘 묘사했다: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 (1:9)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으나

반면에 그를 인식한 사람들도 있었다. 아기 예수가 할례를 받으러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을 때 그를 알 본 안나(2:34-35)와 시몬(2:36-38)나 베드로(16:16) 그 외에 그를 구주로 믿은 자들이다. 그러면 칼빈은 이런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하나? 우리는 여기서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 또는 메시아로 인식하는 문제로 국한한다. 구약 속의 그리스도나 신약 속의 그리스도를 인식하는 길은 오직 성경을 통해서라고 칼빈이 못박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인식은 이미 위에서(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성경) 언급한 내용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시몬과 안나가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고 아기 예수를 알아본 시몬과 안나를(2:34이하) 주목한다. 칼빈은 베드로의 신앙고백 문제를 다루면서 보통사람에게는 그리스도 안에 숨겨진 하늘 지혜의 비밀을 인식하는데 필요한 총명(sagacity)이 결여되어 있음을 전제하고 하나님이 우리 눈을 열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기의 영광을 인식할 때까지 인간의 모든 감각은 이런 면에서 불충분하다고 말함으로써 성령의 조명을 필수성을 암시한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인간의 한계를 다루면서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특별한 계시였음(16:17)을 지적하고(Inst II,2,19) 또 믿음을 논할 때 마 16:17을 언급하면서 성령의 감동이 없으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함을 분명하게 지적한다(Inst III,1,4; III,2,1). 우리는 여기서, 칼빈의 경우, 인간이 성령의 조명을 받고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나 성령의 조명으로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과 똑 같은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인식할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성령신학자로서 칼빈을 엿볼 수 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반사 또는 발산한 것은 무엇인가? 이미 위에서(1) 언급한 내용은 이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한다. 우리는 여기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 칼빈에게 물어 보려고 한다. 칼빈은 요 1:14을 주석하면서 그리스도 안에는 충만한 은혜가 있는데 이 은혜는 우리 모두가 길러야할 샘물과 같은 그 무엇이라고 했다. 칼빈은 조금 더 나아가 이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하나님의 영적인 왕국에 속하는 모든 것으로서 그가 구원자 또는 메시아임을 보여주는 모든 것의 충만이 그 속에 있었고 발산되었다는 것이다(ibid., 48). 칼빈은 골로새서 1:15을 주석하면서 이 보다 더 구체적으로 그 내용을 언급한다. 칼빈은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자기의 완전한 지혜, 선하심, 의로우심, 능력 말하자면, 그 자신 전체를 보여주었다라고 주석한다.

 

4.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아담의 실존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거울임을 매우 분명하게 말한다. “………그때 그는 자신의 탁월함을 창조주께서 그에게 주신 예외적인 은사에서 기인된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의 주요 좌소가 가슴과 마음, 혹은 영혼과 그 능력에 있다고 하더라도(Divinae imaginis in mente et corde, in anima), 그러나 인간의 어느 부분에도, 심지어는 육체 자체에도 그 광채의 얼마가 빛나지 않는 곳은 없다”(Inst I,15,6). 그리고 다음과 같은 발언도 이 사실을 명백하게 증명한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시고 그 속에 자기의 모양의 특징을 새겨 넣으심으로서 그 형상 안에서 자신을 반사하게 하셨다”(Inst II,15,3,11) 또는 하나님은 아담에게서 마치 거울에 비치듯이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기를 원하셨다”(Inst II,12,6,7). 그리고 아담은 하나님 형상을 반사한다”(창세기 주석 영역,136). 말하자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그 실존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거울과 같다는 말이다. 칼빈은 인간을 이런 관점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면 칼빈의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인간을 거울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한 이유는 무엇일까? 칼빈의 기독교 강요의 경우 거울의 은유법은 중심적인 이미지의 특징(the characteristics of a central image)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위의 세 가지 경우 처럼 질문하지 않는다. 단지 칼빈의 경우 하나님 형상론을 거울의 관점에서 봐야 되는 당위성만 집고 넘어가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 이유는 제 II 부에서 구체적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II 칼빈의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 이해

 

위에서 살펴본 대로 자연, 성경,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니나 각기 구별되는 점이 있다. 여기서는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 형상으로 국한하여 살펴본다.

 

1. 칼빈의 하나님 형상의 정의

 

) 존재론적 하나님 형상론의 흔적

인간 속에 있다는 하나님 형상에 대한 칼빈의 이해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 이 하나님 형상은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그 무엇인가? 말하자면 칼빈은 존재론적인 하나님 형상관을 가졌는가? )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 또는 본체를 반영하는 장비에 불과한가? ) 하나님 형상과 영혼의 구조 사이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칼빈이 인간의 하나님 형상을 존재론적으로 표현한 흔적은 많이 있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형상(eius imaginem)을 지님을 통해 그의 자녀로 인정되듯이”( Inst I,14,18,[19]) 또는 하나님 형상의 보좌는 영혼 속에 있다”(Inst I,15,3,[2]),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시되 그 속에 말하자면 그 자신의 형상과 모양이라는 표시에 의해 그에게 인상 지워지도록 만들었다”(Inst I,15,3,[10]).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 속에 놓여져 있다. 여기엔 무언가 대조가 있다. 즉 인간은 무지로부터 구분시키고 그를 다른 모든 피조물 위로 높이는”(Inst I,15,3,[27]), “이 세상의 모든 부분에 하나님의 영광의 어떤 윤곽(생김새)이 보여진다는 것은 확실하다. 따라서 우리는 추론할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 속에 놓여져 있다. 여기엔 무언의 대조가 있다. 즉 인간을 무리로부터 구분시키고 그를 다른 모든 피조물 위로 높이는”(inst I,15,3,[27]), “비록 우리가 하나님 형상이 아담 속에서 제거되거나 파괴되지 않았음을 인정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부패하여 남아있는 어떤 것도 지독하게 기형적이다”(Inst I,15,4,[14]). 말하자면 하나님 형상은 인간 실존 속에 그 좌소를 지니는 무엇이라는 말이다.

거울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본체를 반사하는 중간 장비의 개념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이미 자연과 성경이 하나님의 본체를 반영하는 거울 곧 중간 장비의 개념을 지님을 보았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형상의 좌소가 마음과 영혼 그리고 그 기능들 속에 자리잡고 있지만 거기에는 영광의 어떤 광채를 발하지 않는 몸의 어떤 부분도 없다.”(I,15,3[26]) ..... 또 그가 인간으로 하여금 탁월하게 만들며 하나님의 영광의 거울로 여겨지게 하는 ....”(Inst, I,15,4[1])라고 한 말은 중간 장비의 개념을 내포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칼빈의 하나님 형상론을 다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비록 칼빈의 하나님 형상론에 존재론적인 흔적이 있다해도 그가 신학적인 패러다임을 겪은 다음이기 때문에 우리는 칼빈의 이해를 중세 로마 카톨릭의 존재론적인 이해와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문제를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영혼과 하나님 형상 사이의 관계를 살펴본 다음 관계론적인 개념으로 넘어가야 될 것이다.

 

) 하나님 형상과 영혼 사이의 관계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과 영혼의 구조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 질문은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인가라는 질문과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 형상은 영혼의 기능인가? 사실 우리는 칼빈에게서 이 두 가지를 칼로 베듯이 명확하게 나누는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는 여러 시각으로 말해서 때로는 일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칼빈이 영혼 위에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졌다(창세기 주석 2:7)고 한 표현은 이 두 가지가 구별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R. Prins는 칼빈의 창세기 주석(2:7)에 의지하여 그의 논문에서 인간의 창조과정을 삼단계로 나누고 둘째 단계인 영혼창조 다음에 그 영혼 위에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졌음을 지적함으로써 영혼과 하나님 형상은 구별됨을 보여준다.

다음과 같은 토란스의 지적은 이 둘이 구별됨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인간의 부패한 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고쳐지는 과정은 하나님의 형상이 영혼의 어떤 자연적인 요소가 아니라 거룩, , 지식과 진리 속에서 영적인 반영임을 보여준다.”

또 칼빈이 오시안더를 비판할 때 그가 하나님의 형상을 몸과 영혼까지 확대해서 해석한 것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을 보면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과 영혼을 구별함이 틀림없다(Inst I,15,3[6]}. 칼빈은 육체적인 특징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여겼다.(I,5,3[3]) 그러나 칼빈은 몸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거나 영혼 그 자체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외적인 표시들을 통해 확실히 보이는 하나님의 형상은 영적이라고 말함으로써(I,15,3[5]) 이 두 사이의 등식은 부정한다.

칼빈은 아담이라는 존재 전체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보는 점에서는(I,15,3[22]) 영혼과 하나님 형상은 구별할 것이 아님도 암시한다. 또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다른 동물을 초월하는 인간의 본성 전체에 미치는 그 무엇으로 영혼의 관점에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 부른다(I,15,3[24])

말하자면 하나님의 형상과 영혼은 너무나 결합되어 있어서 마치 동전의 앞뒤와 같이 어느 한쪽을 제외하고는 상대방이 이해가 안된다. 이 둘은 함께 정의해야 할 것이다(). 마치 빨갛게 달아오른 쇳덩어리 쇠와 불(, , 에너지)이 한 덩어리가 되어 있으나 쇠는 분명히 불과 구별된다. 칼빈의 경우 영혼과 하나님 형상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함이 옳을 것이다. 좀 다른 비유를 든다면, 우리는 칼빈의 경우 하나님의 형상은 구름 사이에 펼쳐진 무지개(태양의 본체를 반영함)와 같아서 분명히 눈으로는 보이는데 손으로 잡으려면 잡히지 않는 그 무엇과 같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무지개는 태양과 관계가 절단되면 이미 사라진다. 인간도 하나님과 관계가 절단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일은 사라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관계적 하나님 형상이해로 넘어가야 할 것이다.

사실 칼빈은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이 형상을 존재론적으로 규명하는 시도를 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그 무엇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이것은 관계적 차원으로 설명해야 분명해 질 것이다.

 

) 관계적 하나님 형상론 그리고 패러다임 변화

만일 우리가 이런 존재론적인 개념으로만 칼빈을 본다면 그를 불완전하게 이해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 형상을 영혼의 본질적인 그 무엇’(substanzartige Beschaffenheit der Seele) 또는 영혼 속에 새겨진 상’(Eingemeisseltsein des Bildes in der Seele)으로 보는 동시에 플라톤적인 빛형이상학의 관조’(Anschauungen aus der platonischen Lichtmetaphysik) 보기 때문이다. 이 후자는 이미 앞에서 열거한 대로 거울 개념과 통한다. 사실 만일 칼빈이 인간을 존재론적으로만 해석했다면 그는 중세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칼빈이 이 개념과 더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그가 관계론적인 하나님 형상 이해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오버만은 이런 변화를 칼빈의 패러다임 변화’(paradigm shift)이라고 명명했다.

그러면 칼빈의 이런 패러다임 변화가 일어난 것은 언제일까? 우리는 그것을 그가 그의 가장 초기의 저서인 일종의 심리학저서인 영혼 수면설’(Psychopannycia)을 저술한 시기인 1534년으로 잡을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1536년에 저술된 기독교강요 초판이나 1539년에 저술된 그의 첫 주석서인 로마서 주석 그리고 1550년 여름에 저술을 시작한 창세기는 이미 변화된 패러다임으로 하나님 형상을 열거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따라서 기독교 강요나 그의 성경 주석에 나오는 존재론적인 표현은 중세 로마 카톨릭적인 존재론적인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를테면 칼빈은 아담이 범죄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다고 할 때 그는 그것을 존재론적으로 어떤 실체를 상실한 것이 아니라 방향’(orientation)에 있어서 잃어버림을 당한 것으로 해석했다. 오버만이 따라서 칼빈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형상이 말씀 선포와 성례를 통해 다시 방향을 찾는 일(reorientation)을 제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한 것은 칼빈의 의향을 잘 간파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면 칼빈이 존재론적인 패러다임에서 건너온 패러다임은 무엇인가? Oberman은 그것을 심리학적인 패러다임으로 표현했다(같은 논문, 265). 우리는 그것을 관계적 패러다임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은 인간을 해석할 때 타락전 아담을 하나님과 교제하는 인간으로 표현한 반면에 타락한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으로 표현했다(같은 논문 265). 즉 인간을 타락할 때 인간 속으로 악한 요소가 들어갔기 때문에 또는 인간 속에 있는 그 무엇이 변했기 때문에 타락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이 해석에서 중요한 관건은 인간이 하나님과 가지는 관계이다. 칼빈은 그의 저서 Psychopannychia에서 창 1:26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됨을 인간의 방향이 하나님을 향하여 그의 좋은 것에 참여하는 것으로 해석했다.이 패러다임 변화는 인간이 하나님과 믿음의 관계를 가지는 상태와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상태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을 상태 중심으로 이해하는 쪽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사실 칼빈의 저서 전체는 이런 패러다임을 중심으로 열거되어 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는 뒤에 가서 다시 열거할 것이다. 하나님 형상에 대한 칼빈의 이런 관계론적인 패러다임 때문에 그의 존재론적인 표현이 이해하기가 애매할 때가 많았던 것이다.

칼빈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패러다임은 후대 신학자들이 자기들의 신학을 전개할 때 사용했다. 이를테면 바르트가 예수 그리스도가 낯선 곳으로 들어왔다고 할 때 또는 폴 틸리히가 인간을 본질적 상태소외된 상태로 나누어 해석한 것 등은, 비록 그 구체적인 부분에 있어서 해석은 다르지만, 칼빈의 이런 이해와 무관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칼빈의 이런 패러다임을 가장 명백하게 신학적으로 정리한 것은 콜부뤼게와 그의 제자인 에드와드 뵐일 것이다. 비록 후자가 창 1:26에 나오는 מלצב에 대한 이해는 칼빈과 전혀 다르지만 말이다. 칼빈은 우리의 형상대로에 보이는 전치사 를 안이라는 말로 해석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래서 형상 안에서그리스도안에서와 연관시키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본다(I,15,3[11]). 이런 점에서 그는 그들의 신학의 관건이 이 둘을 연관시키는데 있는콜부뤼게나 에드와드 뵐의 주장과는 구별된다. 즉 에드와드 뵐의 인간론은 전치사 ב이라는 공간으로 해석하는 것을 중심으로 인간의 상태를 설명한다.

 

 

 

원시상태 육의 상태

타락전 상태 타락후 상태

 

그러면 관계론적 하나님 형상론에 대한 칼빈의 견해를 살펴보자. 칼빈은 인간이 계속적으로 하나님께 부합하여 살지 않으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요구하는 바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 속에 유지되지 않는다고 말한 내용은 관계적 하나님 형상관을 암시한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우리가 완전에 도달하기까지 하나님의 형상이 계속 우리 속에 그 조짐이 나타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않으면 우리의 생명은 공허한 형상이 될 것이다. 이것은 칼빈이 하나님 형상의 역동적인 성격을 감지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면 칼빈이 이해한 관계론적 하나님 형상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인간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놓여 있음을 통해 영혼과 몸 전체에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이란 영원한 생명과 관계된 모든 것을 포함한다. 이런 발언도 관계적 하나님 형상을 뜻한다. 칼빈의 경우 인간이 그의 이성이 성령의 조명을 받으면 그의 의지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쪽으로 고정되면 그의 삶의 바른 방향(orientation) 또는 하나님을 닮음이 거기서 보여진다는 것이다. 칼빈은 이런 상태의 인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믿음과 사랑 그리고 의롭고 거룩하게 살고 싶은 욕망과 소원으로 특징지워졌다”.

칼빈의 관계적 하나님 형상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무엇일까? W. Niesel는 그것을 similitudo에 대한 이해로 본다. 거의 대부분의 칼빈 전문가들은 imagosimilitudo 사이의 관계에 대한 칼빈의 이해를, 이 둘 사이를 구분하는 로마 카톨릭에 대항하여, 이 둘은 내용상 아무런 차이가 없고 후자가 전자를 재해석한다는 칼빈의 해석에 근거하여 그 구분을 그만둔다. 그런데 W. Nieselsimilitudo를 새로이 정의함으로써 칼빈의 관계적 형상론을 설명을 시도한다. 우선 W. Niesel이 의미하는 similitudo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니이젤은 칼빈의 경우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거울의 역할을 하기 위해 하나님과 관계가 정상화되어야 함을 주지시킨다. 니이젤은 인간의 바른 방향으로 향함모양’(his likeness to God, similitudo)으로 보고 이 모양’(similitudo)은 인간이 계몽된 오성으로 구비되어 있음과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순종하는 자세에로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 속에(CR 10a,166) 보여진다고 한다(ibid.). 여기서 니이젤은 적절하게 칼빈의 말 이때 인간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믿음과 사랑 그리고 의롭고 거룩하게 살려는 욕망과 그것을 실행하는 특징을 지닌다”(Inst II,2,12)라는 말을 인용한다. 말하자면 similitudo는 인간이 그의 창조자에 대한 바른 태도와 또 이로 인한 다른 모든 피조물에 대한 바른 태도를 의미한다(ibid.). 다른 말로 표현하면 similitudo는 원시 인간 속에 있는 영혼의 기능들 이를테면 이성과 의지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그에 대해 순종하는 쪽으로 온전히 향한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이다(ibid., 68).

그러면 칼빈은 그의 저서에서 similitudo에게 이런 의미를 부여했는가? Niesel은 기독교 강요 II,2,12에 근거하여 그렇다라고 한다. 그런데 칼빈은 여기서 자연적인 은사와 초자연적인 은사를 언급하면서 인간의 범죄와 더불어 자연적인 은사는 부패해 버렸고 초자연적인 은사는 빼앗겨 버렸다고 하며 이 초자연적인 은사는 영생을 얻기에 충분한 여건인 믿음과 의의 빛으로 이해했다. 니이젤은 이 초자연적 은사를 similitudo와 연관시키는 것이다. 물론 니이젤은 이 similitudo가 몸과 영혼에 부가된 본질이 아님을 주지시킨다(ibid., 68; CR 10a,166). 이런 의미에서 니이젤이 말하는 similitudo는 이것을 존재론적으로 해석한 로마 카톨릭의 그것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니이젤은 이 similitudo는 상실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본다(81). 물론 이것은 존재론적인 상실이 아니라 관계적 차원의 상실을 의미한다. 니이젤은 칼빈의 similitudo을 해석하면서 반복적으로 그것이 하나님과 가지는 온전한 관계의 상태임을 주지시킨다. “인간이 원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전체 영혼과 육체의 존재가 그렇도록 형성되었다”(68)는 것이다. 니이젤에 의하면 신적인 similitudo는 인간이 주인 되시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지니느냐에 달려 있다(69). 인간은 이 관계를 포기할 때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었다고 한다(69).

니이젤은 칼빈은 인간의 similitudo가 그의 존재가 창조주를 향하여 원래대로 바른 방향을 취함에 있음을 어떻게 알았을까?’라고 묻고 칼빈은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과정이 그 원래의 상태를 보여줌을(CR 23,26; Inst I,15,4; II,2,12) 주목한다(69). 다음과 같은 칼빈의 말을 인용한 내용은 그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 분 안에서 우리가 어디로부터 타락했는지 인식한다; 우리는 하나님 형상 자신인 그 분을 통해 회복되며 다시 창조주와 참된 관계를 정립하게 된다”(69). 그런데 여기서도 칼빈이 직접 similitudo를 정의하는 말을 언급하지 않는다. 칼빈은 단지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게 하는 외적인 탁월성을 similitudo로 보았다. 그러나 similitudo를 중심으로 칼빈의 관계적 하나님 형상론에 대해 니이젤의 해석은 칼빈의 인간론을 벗어나지는 않는 것 같다. 니이젤의 이런 해석은 similitudo가 수직적인 차원과 수평적인 차원의 관계정상화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매우 놀라운 사실은 similitudo에 대한 니이젤의 발언은 콜부뤼게와 그의 제자인 에드와드 뵐의 발언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필자가 짐작하기로는 콜부뤼게 신학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니이젤은 이들의 시각으로 칼빈의 견해를 해석한 것으로 풀이된다.

니이젤처럼 칼빈의 관계적 형상론을 장구하게 열거한 사람은 T.F. Torrance이다. 토란스는 니이젤과는 달리 rectitudo 개념을 중심으로 그것을 열거한다. 그러면 토란스는 이 rectitudo를 어떻게 정의하는가? 그는 칼빈의 경우 형상-관계’(imago-relation)를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관계 그리고 아담과 하와 사이의 관계, 후자가 전자를 순종하는 관계로 보고 그것이 rectitudo로 본다. 토란스에 의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거울의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rectitudo가 전제됨을 강조한다(47ff.). 따라서 토란스는 칼빈의 하나님 형상론의 핵심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로 본다(59). 사실 이것은 니이젤이 언급한 similitudo와 일치한다. 다음과 같은 칼빈의 발언은 토란스의 견해를 지지한다. “처음엔 영혼의 모든 부분은 rectitude로 형성되었다. 따라서 거기에는 선한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마음의 건전성과 의지의 자유가 있었다”(Inst I,15,8[13]).

이때 토란스는 하나님의 형상을 정의하면서 이 양자간에는 매우 역동적인 움직임이 있음을 파악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께서 말씀에 의해 자기 진리를 인간 속에 각인시키는 행위와 인간이 이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교통하는 행위에 있다”(57). 다음과 같은 토란스의 발언은 이 역동적인 관계를 더욱 생동적으로 표현한다: “Imago dei는 죽은 형상이 아니라 살아있는 형상이며,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벙어리 같은 표현이 아니라 인간을 부르셔서 자기와 교제하도록 만드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야기된 증거하는 형상이며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로우시며 계속 주시기를 기뻐하심에 대해 응답하여 그 자체 본질적인 움직임이다”(71). 토란스는 이때 인간의 감사행위가 하나님 형상으로 하여금 멸절되지 않게 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말한다(71). 우리는 칼빈의 하나님 형상론 속에 복음의 핵심이 들어있음을 볼 수 있다.

위의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도식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

인간의 감사

하나님의 개입, 은총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

인간

수평적 관계

 

 

 

수직적 관계

칼빈에게 있어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발산하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려면

이런 상태에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 형상의 개념이 관계적으로 해석해야 될 이유는 중생의 목표가 되는 것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을 목표로 하여 형성하신다는 표현에서 드러난다. 즉 아담이 범죄한 다음 아담 속에 존재한다는 어떤 형상이 상실되고 다시 밖에서 상실된 것이 그의 실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중생사역을 통해 인간의 삶의 자세와 사고방식이 하나님과 관계하여 하나님 중심으로 재정비된다는 의미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이 이런 상태에 있을 때 반사하는 내용은 무엇인지 알아볼 차례이다.

 

2. 하나님 형상의 반사 내용

 

인간이 위와 같은 상태에 있을 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무엇을 발산 또는 반사할까? 칼빈은 그의 창세기 주석에서 인간은 영육간에 아울러 모든 부분에서 어떤 섬광을 발산했음을 지적한다(창세기 주석 1:26). 기독교 강요 제 1권 인간 창조부분에서(I,15,3[26])에서 아담의 몸은 영광의 빛을 발했음을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은 지식의 마음의 바름그리고 영육간에 모든 부분의 건전성의 빛에 의해 빛났던 것이다(I,15,4[10]). 그러면 이 빛남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이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광채 내지 빛에 불과했을까? 앞에서 이미 살펴본 내용을 토대로 우리는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한 것이다.

칼빈은 창세기 주석에서 imago dei의 내용이 참된 거룩을 포함한 하나님의 본체를 반영하는 다른 무엇임을 암시한다. 그 다음 즉시 그는 범죄로 인해 잃어버린 과정과 또 하나님 형상을 회복하는 과정과 관련하여 그 내용을 밝힌다. 칼빈은 인간이 거울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한다고 할 때 핵심 되는 단어를 중심으로 그 대답을 다양하게 한다. 그 핵심 되는 단어가 , 거룩이다. 먼저 칼빈은 하나님 형상의 참된 본성은 그리스도를 통한 회복하는 내용을 통해 추출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그 내용은 지식, 참된 의, 그리고 거룩이라고 지적한다(I,15,4). 다른 한편 그는 인간이 타락할 때 제거된 인간의 장식 내용을 열거하여 그 내용을 암시한다: 지혜, , 정의, 진리, 거룩.(II,2,5,[6]). 중생의 은혜에 의해 회복된 내용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 그리고 이웃에 대한 인애, 의와 거룩함에 힘씀등이다(II,2,12,[4]). 이 중에, W. Niesel의 용어를 빌린다면, similitudo에 속하는 앞의 두 가지(수직, 수평)를 제외하면 하나님 형상의 내용은 의와 거룩이 된다. 이 내용은 회개의 열매와 일치한다: 하나님에 대한 경건(수직), 이웃에 대한 사랑(수평), 거룩과 삶의 정결(III,3,16[1]).

또 칼빈은 그리스도 안의 중생을 논하면서 새사람이 의와 진리의 거룩으로창조되었음을(III,3,9,[6]) 말한 다음 고후 4:4과 엡 4;24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형상은 참된 거룩과 의로 되어 있다고 말한다(III,3,9,[10]). 즉 칼빈은 그 구체적인 내용은 인간이 타락했다가 구원을 받는 과정에서 분명해진다고 한다. 3:10 주석에서는 인간은 영혼 전체의 정직성과 온전성이 이루어질 경우 하나님의 지혜, , 선하심을 반영한다고 한다. 매우 흥미로운 것은 칼빈이 새로운 피조물의 특징을 거룩자주 이 두 가지로 말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그의 성령으로 우리를 거룩로 형성시키신다( III,11,12, [21]). 또 하나님이 자기 왕국을 세우실 때 성령의 능력으로 백성들의 의지를 어거하여 자연적인 본성에 따르지 않고 그의 공의의 규율에 따라 거룩으로 기울어지도록 하셨다(II,5,14,[20])고 할 때도 그렇다. 또 신자의 삶이 거룩로 형성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함이다(III,17,5,[7])

위의 내용을 정리한다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이 발산하는 내용의 주된 요소가 , 거룩, 지식 등임을 알 수 있다. 토란스는 칼빈의 주석 창 2:9, 4:23, 3:9f에 의거하여 하나님 말씀에 대한 지식이 하나님 형상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본다(58). 알브레히트 피터스도 같은 의견을 가진다. 칼빈이 앞에서 지적한대로 인간이 발산하는 내용은 분명히 이 세 가지로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인간으로부터 발산되는 내용은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속성과 연관시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자연만물이 거울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한다고 할 때 칼빈은 그 내용을 하나님의 속성으로 열거했다는 데 있다. 또 그는 하나님의 속성을 요약 정리하는 부분에서 출 34:6-7과 시 145편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속성을 크게 영원성, 자존성 그리고 완전성 세 가지로 나누고 또 우리에 대하여 어떤 분인가를 나타내는 완전성을 다시 인자하심, 선하심, 자비로우심, 공의, 심판 그리고 진리로 나눈다.그는 또 렘 9:24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속성을 인애(misercordia), 공평(iudicium), 정직 또는 의(iustitia” 셋으로 나눈다. 이런 내용들은 하나님 형상으로서 인간이 반사하는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의 주장을 해석하면서 아담은 하나님의 탁월한 두 가지 속성(지혜와 의)의 살아있는 형상이라고 말한 에써 교수의 지적은 매우 어울리는 것이다.

그러면 칼빈에게 있어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발산한다는 것은 어떤 의의가 있는가? 첫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역동적인 관계이다. 인간을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에게 속한 것을 반사하고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바라보시며 그와 관계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생동적으로 표현한다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창조주는 아담 속에서 그 자신의 영광을, 마치 거울 속에서처럼 보기를 원하셨다는 것이다. 칼빈의 신학에서 의와 성화가 매우 강조되는데 특히 새로운 피조물이 이를 위해 애를 쓸 것을 매우 자주 말하는데 인간은 단순한 거울이 아니라 그의 삶 자체를 통해 하나님께 의와 거룩을 바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다음과 같은 Prins의 지적은 적합하다: “칼빈의 경우 인간이 하나님과 교통하려면 바로 이 하나님 형상이 있어야 된다고 했는데 그 내용은 관계적인 특성을 지닌 , 거룩, 참지식이라고 한다”(36f.) 칼빈은 이 의와 거룩이 기독인의 삶 속에 나타나지도록 힘써야 됨을 매우 강조한다. 우리는 여기서 칼빈의 경우 하나님의 은총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기독인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자기 속에 있는 의와 거룩이라는 하나님 형상을 하나님을 향하여 발산해야 됨을 볼 수 있다. 사실 이것은 칼빈의 성화론의 뼈대를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

 

인간

 

 

둘째는 자연만물을 관리하는 자 또는 지상의 하나님 대리자로서 아담의 의의이다. 위의 언급한 칼빈의 발언에 의하면 아담은 지상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귄위를 반사하는 존재이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피조물들은 아담을 볼 때 마치 하나님을 본 듯했을 것이다. 사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미 아담을 이 땅의 자기 대리자로 세우신 것을 암시한다. 그런데 칼빈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통치권을 주신 것은 아담이 이 세상 통치 기관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로 행동하기 위함이라는 크리소스톰의 주장을 반박한다. 칼빈은 이 통치행위가 하나님 형상의 작은 일 부분임을 주장한다.그러나 그 의미를 축소해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의 통치에 대한 칼빈의 발언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거울로서 아담이 하나님의 지상 대리자의 역할이 두드러지게 나타남을 볼 수 있다.

아담의 거울의 역할과 하나님의 지상 대리자 역할을 조화시킨 사람 중에 후크마가 대표적일 것이다. 후크마는 문화 명령과 연관하여 아담이 만물에 대한 통치권을 수행함에 있어서 만물에 대한 대권을 지니신 하나님 처럼 되어야 할 것을 말하면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임을 다음과 같은 사실로 증명하려고 했다: )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의 교제를 나룰 수 있는 남녀로 창조하신 것. ) “하나님이 결단을 내릴 수 있고 또 통치할 수 있는 인격으로서 여기 계시되는 것 같이, 인간도 동일하게 결단을 내릴 수 잇고 통치할 수 있는 인격이다”. 후크마의 경우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특징을 거울의 성격과 지상의 하나님 대리자의 성격을 분명히 지적한다. 우리는 후크마의 이런 발언이 아담이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를 부여함을 암시하는 것이다. 칼빈은 인간실존 전체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이 비친다는 말을 자주 한다(Inst I,15,3.)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아담이 거울의 역할을 통해 반사하는 내용과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가 반사하는 내용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칼빈은 하나님 형상으로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 아담과는 전혀 다름을 지적했다. 그런데 칼빈은 그리스도의 형상이 무엇인지 정리하지 않았다. 또 그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아담 속의 형상과 어떤 점에서 다른 것인지에 대해서 명백하게 열거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칼빈의 경우 창조 차원에서 하나님 형상의 내용을 잘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육신 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구원 통한 회복의 차원에서 인간 속의 하나님 형상의 내용을 아는 일로 만족할 수밖에 없을까? 만일 칼빈의 기독론의 근거가 하나님이 육체 가운데 나타나셨다”(딤전 3:16)라는 사실에 근거한다면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삼위일체의 자기 계시문제와 연결해서 설명해야 할 것이다. 사실 칼빈은 골 1:15을 주석에서 그 당시 정통신학자들이 아리안주의자들과 논쟁에서 하나님의 본질문제만 다룬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면서 형상개념이 부자 관계를 설명하는데 효과적임을 지적했다. 여기서 칼빈은 하나님이 우리가 거울 속에서처럼 하나님을 볼 수 있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만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셨다고 지적하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의, 선하심, 지혜, 능력 즉 그 자신 전체를 보여주었다고 했다. 이런 의미에서 골 1:15과 연관하여 에써 교수가 칼빈의 고후 4:4 주석인 그리스도의 경우 그가 하나님과 본질이 동일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은 본질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그가 우리에게 아버지를 나타내기 때문에 우리에 대한 그의 관계도 본질적인 것이다라는 해석을 인용한 것은 매우 적절하다. 에써는 여기서 하나님을 대리자로서 그리스도의 하나님 형상은 관계적인 차원에서 계시적인 의미가 강함을 지적한다(ibid.). 이런 지적은 토란스의 지원을 받는다. 따라서 우리는 만일 하나님 형상인 인간이, 칼빈의 경우,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거울에 불과하다면 그리스도는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는 자로서 하나님 형상이라는 차이점을 인식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이 아무리 위대하다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대리자인 그리스도를 인식할 수 있고 그의 완전하심을 체험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을 뿐 인간이 반사하는 내용은 그리스도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자신으로서 하나님을 계시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장비로 하나님의 거울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할 뿐이다.

 

3. 하나님 형상의 반사 채널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거울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자동적으로 반사하는가? 물론 넓은 의미에서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칼빈의 경우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들도 짐승과는 다르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문제로 제한한다. 만일 인간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한다고 여긴다면 인간을 기계론적으로 본 결과일 것이다. 매우 놀라운 사실은 칼빈의 경우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 내지 본체를 반사할 경우 채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다루는 주제는 바로 이 채널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미 앞서 W. Nieselsimilitudo개념으로 그 채널을 암시했다. Torrancerectitudo개념으로 그 채널이 있음을 암시했다.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그러면 칼빈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보는가? 우리는 위에서 W. NieselT.F. Torrance를 통해 칼빈의 경우 인간이 수직적인 차원의 관계와 수평적인 차원의 관계를 지닐 때 하나님의 형상의 역할을 함을 보았다. 사실 모든 칼빈 전문가들이 인정하는 대로 칼빈의 하나님 형상의 핵심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총체적인 관계에 있다. 칼빈은 인간이란 생명과 죽음의 주인이신 창조주의 말씀과 뜻에 의해 무존재에서 존재와 생명에로 계속 부르심을 받는다는 의미에서 그 존재의 매 순간 소모되고 새로워지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즉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면 그의 존재는 무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R. Prins는 칼빈의 경우 의 거룩, 참 지식이 image의 주요 요소들인데 이것들은 성격상 관계적이며 이 세 가지 있어야 하나님과 함께 한다(Prins 36f.)는 발언을 같은 의미인 것이다.

동시에 칼빈은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하나님 형상과 연관됨을 지적한다. 토란스가 칼빈을 해석하면서 인간은 하나님과 그런 교제와 교류를 가지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들 간에 교제를 나누고 사회를 이루어 정직성으로 특징 지워지는 그들의 공동체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형상화 해야한다”(35)라고 한 말이나 이 목적을 위해 모든 인간은 하나님 형상의 거룩한 결속에 의해 함께 묶어지며(주석 시 8:5) 하나님 형상의 안에서처럼 서로 간에 교제 안에서만 상대방을 대해야 한다”(45)는 말은 매우 맞는 말이다. 칼빈은 이 같은 인간 사이의 관계문제는 이미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사실 속에서 인간의 본질문제로 다룬다. 칼빈은 창 1:27을 주석하면서 하나님이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한 것을 직접 하나님 형상과는 연관시키지는 않지만 인간은 혼자로서는 불완전하며 둘이 하나가 될 때 둘이 보완됨을 말한다(AGES 48). 2:21 주석에서는 남 자와 여자가 둘 다 한 근원에서 나왔기 때문에 시기 질투가 없이 사랑의 관계를 지니며 서로 보완함을 지적하는 동시에 이 두 부부의 관계는 우리와 하나님의 아들과 가지는 연합과 비슷함을 지적한다(AGES, 73). Oberman에 의하면 칼빈은 재세례파에 대항하여 인간의 본질이 사회적인 성격을 띰을 강조한다. 우리는 칼빈의 하나님 형상론에서 인간이 수직적인 차원과 수평적인 차원에서 장식을 볼 수 있다. 사실 칼빈에 의하면 이 두 가지가 이루어질 때 인간의 존재의의가 이루어짐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성경의 인간은 이 두 가지 차원 속에서만 살고 있는가? 성경은 여기에 또 하나의 차원을 보탬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시간적인 차원이다. 우리는 성경의 인간이 세 가지 차원의 관계로 살고 있음을 귀납법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두 가지 명령은 수직과 수평의 차원을 말하는 동시에 시간적인 차원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문화명령은 인간이 시간 속에서 이루어야 할 과제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수직적인 차원에 집중한 나머지 이 문화명령 속에 시간적인 요소를 간과해 버리는 것 같다. 헤르만 바빙크는 이런 명령들과 관계하여 수직과 수평에 대해서는 확실히 말하지만 시간적인 차원은 간접적으로 암시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되 시간속에서 살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에 성경은 이 사실을 밝히 보여주는 것이다.

또 성경의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매우 명백하게 이 세 가지 차원의 관계를 지니고 살았다는 사실이다. 아브라함은 수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믿음으로 살았고 그의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살았다. 또 미래에 이루어질 약속을 바라보며 소망 가운데 살았다. 이런 점은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의 경우에도 해당한다. 또 다윗의 삶도 이 세 가지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 가지가 가장 두르러지게 나타난 삶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볼 수 있다. 그는 수직적인 차원에서 항상 아버지의 뜻만을 이루는데 마음을 쏟았고 사람들을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했다. 그리고 그의 눈길은 항상 십자가를 질 순간과 재림하는 사건을 내다보았다. 바울의 삶도 그러했다. 바울은 심지어 그리스도인의 삶을 믿음 소망 사랑으로 요약했다. 사실 그의 서신은 이 세 단어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로 자주 언급했다. 이 세 가지는 그 성격상, 우리가 지상에 머무는 동안, 항상 함께 간다. 결코 서로 떼어질 수 없다.

또 하나님의 형상으로 요약될 수 있는 율법도 이 세 가지 차원을 내포하고 있다. 이를테면 십계명은 1-3계명은 수직적인 차원의 계명이다. 4계명은 시간적인 차원을 내포한다. 5-10계명은 수평적인 차원의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는 십계명의 해석인 산상보훈도 이런 식으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율법의 요약인 큰 계명도 수직과 수평을 말하면서 이 두 가지가 지켜질 때 미래의 상태를 내다 본다. 성경이 추구하는 인간은 이 세 가지 차워의 관계를 지닌 존재인 것이다. 이 세 가지가 정립될 때 인간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인간이 된다는 말이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이라는 거울에 반사되려면 이 세 가지가 설치되어야 된다는 말이다. 즉 이 세 가지 차원이라는 채널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이 반사된다는 말이다. 사실 칭의 문제나 성화문제는 이 세 가지 차원의 관계로 해석이 명확하게 되는 것이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분을 처음으로 교의학에 도입한 인물이다.이 삼직분이야말로 인간의 존재의의를 설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우리는 아담에게도 이 세 가지 직분을 분석할 수 있고 나아가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가 지적한대로(31-32) 기독인들의 삶에도 이 세 가지 직분이 적용될 수 있다.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제사장직분은 믿음의 차원에, 교회에 은총을 베푸는 왕의 직분은 사랑의 직분에 그리고 미래를 내다보고 백성들의 갈 길을 제시하고 책망하는 선지자 직분은 소망의 차원에 일치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삼직분으로 오셔서 구원을 이루신 것은 인간의 이 세 가지 관계를 회복하기 위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칼빈이 이 삼차원을 하나님 형상을 해석하는데 적용하지 못했는지 이해가 안 된다. 짐작하기로는 그 당시 칼빈에게 있어서는 로마 카톨릭에 대항하여 수직적인 관계가 가장 시급한 문제였던 고로 거기에 매달렸기 때문일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삼차원을 표현하는 입체적인 좌표가 아직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

 

 

Y

Z 시간

인간

X 수평

인간

수직

 

우리는 이 채널을(삼차원의 관계) ‘관계적 하나님 형상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사실상 칼빈이 의도한 하나님 형상은 바로 이것으로 풀이된다. 콜부뤼게와 에드와드 뵐이 의미하는 하나님 형상의 상태는 사실상 관계적 하나님 형상을 정의한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경우 이 관계적 형상론을 명확하게 열거하지는 못했다. 그러면 칼빈의 신학이 삼차원의 관계를 완전히 간과했다고 볼 수 있을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신학이 성경에 근거한 신학이기 때문에 그가 비록 명확하게 삼차원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신학 전반은 이것과 관계한다고 본다. 이 문제는 다시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4. 패러다임 변화의 열매

 

위와 같은 패러다임의 변화가 칼빈의 신학 체계에 어떤 의의를 지닐까? 이 패러다임의 변화는 인간을 해석할 때 네 가지 상태로 해석하도록 암시한다. 칼빈은 매우 명백하게 상태 변화의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형상을 발산하는 상태를 전제하고 우리가 첫 사람들 안에서 우리의 원래의 상태로부터 타락했다고 할 때, “아담이 그 원래의 상태에서 타락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다고 할 때 그리고 생명에서 죽음으로 전락했다거나 창조주의 율법으로부터 타락했다” (III,6,3,[4])라고 할 때의 표현도 분명히 상태를 바꾼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또 타락하여 떨어진 그 상태에 대한 묘사도 하나님의 형상이 비정상적으로 되었음을 매우 언급하며 또 이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상태를 잘 묘사한다. “후손까지지 끌어들여 같은 불행에 잠기게 만들었다고 할 때(II,1,5) 그리고 죽음에 대한 표현은 이 비참한 상태를 묘사한다. 즉 칼빈의 죽음에 대한 이해도 그의 하나님 형상이해와 상태 개념과 더불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말하자면 여기에도 파라다임의 변화가 큰 역할을 한 것이다. 오버만에 의하면 칼빈은 성경이 정죄하는 사망을 무존재(nonbeing)의 한 형태인 임상적인 죽음 또는 존재론적인 죽음으로 이해하지 않고(266) 심리학적인 차원에서 불행하고 비참한 삶(miseria) 그 자체로 이해했다(267)고 한다.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결과, 특별히 여기서는 오관이 마비된 몸에 비유하여 인간의 영적인 비참한 상태를 말한다. 동시에 칼빈은 죽음을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 어떤 실체로 이해하는 동시에속박된 상태를 나타낸다.

또 이런 사망의 상태에서 구원을 받는 것을 상태가 바꾸어지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는 로마서 8:21을 주석하면서 하나님은 이 세상을 완전한 상태로 회복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라고 표현했다. 칼빈은 구원을 하나님 형상의 회복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우리가 회심 한 이후에 처한 상태는 이 회복의 과정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중생, 회개의 유일한 목적은 우리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하는 데 있다(Inst III,3,9[4]) 한 칼빈의 말은 하나님의 형상의 모든 상태 속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함을 보여준다.

칼빈은 고후 3:18을 주석하면서 이런 과정은 거친 인간은 마침내 영광의 완전한 상태에 이름을 말한다. “우리가 주의 영광을 거울 속에서처럼 열린 얼굴로 보다가 그와 동일한 형상으로 변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른다”(Inst III,2,20[5]).

이제 우리는 하나님 형상론이 기독교 강요 전체에 걸쳐 나오는 이유가 칼빈의 신학사상이 인간론 특히 하나님 형상을 중심으로 열거되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기독교 강요가 외형상 그 구조가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으로 열거되었기 때문에(1권 창조주 하나님, 2권 구속의 하나님, 3-4권이 구원의 하나님) 이 두 가지 도식을 합하면 기독교 강요의 내용은 아래와 같은 도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의 신학 전체가 이런 도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도식은 기독교를 다른 모든 종교와 구별시키는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열거해 준다.

 

 

 

 

삼위일체 하나님

 

[세례]

에덴의 심판 이신칭의심판 최후의 심판

 

 

창조(원시상태) 타락 그리스도와 연합/구원 완전회복 상태

사망/육의 상태 그리스도 안

 

III. 맺는 말

 

1. 칼빈의 신학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의 하나님 형상론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적 차원에서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이 관계는 수직, 수평 그리고 시간 이 삼차원의 관계와 더불어 계속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성경의 인간관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통해 명확하게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의 하나님 형상론은 이 길로 갈 수 있도록 안내를 한다.

2. 칼빈의 하나님 형상관은 기계론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현대인들에게 반성을 요구한다. 현대인들은 생명공학의 발달로 유전인자 내지 DNA를 조작하여 심지어 현재의 인간을 초월하는 인간을 만들 수 있게 되면 인간의 자율성은 한 층 더 심화될 것이다. 2003년에 인간 게놈프로젝트가 완성되면 태아의 유전자를 검사하여 사전에 질병을 고치고 2050년에는 인공자궁이 널리 사용되며 용모와 지능까지 조절할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창조주로서 하나님 자리에 앉으려 할 것이고 자기의 이런 능력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관계를 필요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자율성). 인간은 이런 능력으로 행복한 세상을 건설할 것으로 볼까? 사실 혜안이 있는 사람들은 이미 그 치명적인 위험을 알고 있다. 그래서 19971111일 파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제29차 총회에서는 인간 게놈과 인권에 대한 보편적 선언?186개 회원국 전원의 찬성으로 채택됐다. 이 선언문에는 유전 연구가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보다 우선할 수 없다고 명시돼 있다. 그러나 한 번 연구되고 공개된 것들은 언젠가는 히틀러와 같은 미친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어 인류를 해칠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의 자율성이 극대화되는 바로 거기에 이런 위험이 온다는 역사의 가르침이다.

칼빈의 하나님 형상론은 이런 인간의 자율성으로 비롯된 모든 악에 대항하는 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기독교라는 종교단체를 지키기 이전에 인간을 지키는 운동의 결정적인 처방이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현실문제와 연관하여 칼빈의 관계적 하나님 형상론은 계속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3. 이미 살펴본 대로 칼빈의 하나님 형상론은 인간의 창조, 타락, 구원, 그리고 회복까지 과정을 설명하는데 매우 좋은 도식을 제공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이 도식이 그의 기독교강요의 뼈대를 이루며 나아가 그의 신학 전체의 뼈대가 될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이 발산되는 상태와 그 영광을 상실한 상태를 보여주고 동시에 이것이 고쳐지고 회복되는 상태도 암시하기 때문이다. 사실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인간문제는 인간의 고장난 부분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처방을 가하는 것이 가장 순리적인 것이다. 칼빈의 하나님 형상론이 이런 측면에서 인간의 진단과 처방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그의 업적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그가 위의 네 가지 상태에 대한 이해와 또 그가 가한 처방이 얼마나 효과를 발휘할지 그의 주석을 현대 주석과 비교하여 연구하는 일은 또 하나의 과제일 것이다. 우리는 16세기에 칼빈이 이해하고 주석한 부분을 20세기라는 다른 상황에서 더 깊이 연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칼빈의 주장을 가장 잘 이어 받은 학파는 독일과 오지리의 콜부뤼게와 그의 학파(에드와드 뵐)인 것 같다. 이들의 신학은 인간문제를 다룰 때 매우 명백하게 하나님 형상이 발산되는 인간의 상태, 거기서 타락한 상태인 육을 말하는 동시에 육의 상태에서 구원을 받은 상태 곧 성령의 인도를 받는 상태, 그리고 완전히 회복된 상태를 말하기 때문이다. 물론 칼빈과 이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칼빈의 경우 버첼렘라는 전치사에 무관심하고 이런 상태를 말한 반면에 콜부뤼게의 학파는 이 를 중심으로 인간의 상태를 논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 출발점이 다를지라도 칼빈이 매우 심각하게 생각한 점을 이들이 체계화했다는 점에서 이들이야 말로 칼빈을 잘 이해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위의 네 가지 상태가 성경적인 것으로 확인되는 경우 하나님 형상 안의 상태와 그리스도 안의 상태 사이를 등식화한 콜부뤼게 학파의 주장은 인정을 받아야 할 것이다. 칼빈은 이 두 상태 사이를 연관시키는 것을 도외시했다.

또 영미 계통의 Gordon J. Spykman의 새로운 교의학 시도 “Reformational Theology, A New Paradigm for Doing Dogmatics”(Eerdmans, 1992)은 칼빈의 이런 관심을 정식으로 도식화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만하다. 사실 이 도식이 성경을 바로 이해하도록 만드는 수단이 될 것이다.

4. 만일 누가 이데올로기적인 신학의 안목으로 바르트의 관계적 하나님 형상론에 대해 알레르기성 반응을 한 나머지 칼빈의 하나님 형상론을 존재론적으로만 이해하고 관계론적인 형상론에 대하 이해가 없다면 그는 칼빈의 신학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신학은 로마 카톨릭 신학에 가깝지 않으면 이단적인 신학사상을 가졌음에 틀림 없을 것이다. 이단들의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론적인 아니면 범신론적인 사고방식에 빠진 데 있다. 단적으로 말한다면 기독교가 다른 종교가 다른 점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 관계에 있기 때문에 관계적 형상론을 부정하는 자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매우 흥미로운 것은 왜곡된 보수주의 신학자들 가운데 이런 자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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