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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료·논문

리쾨르의 신학 사상

by 해찬솔의 신학 2015.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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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쾨르(Paul Ricoeur)사상

 

                                                                                                                              : 김한영 박사

 

 

대표작 : 1.악의 상징

           2. 프로이드 해석

 

중심사상 : 자기를 먼저 알고 다음이 신을 알려고했다. 리쾨르는 해석학은  이해에 작용에 관한 이론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우리는 서양 철학에서 주체를 세우는 방법을 눈여겨봐야 한다. 사실 데카르트 이후 서양 철학의 주제는 사람의 주체성이었다. 사람을 자기와 역사의 주체로 세우고자 하는 노력은 끈질겼고 눈물겨운 것이었다. 그것으로 서양인들은 사람의 존엄성과 민주주의를 이룩했고 경제적으로는 산업 사회를 이끌어갔다. 폴 리쾨르도 크게 보면 그런 주체 철학의 전통위에 서 있다. 그러나 그가 살던 시기는 19세기와 달리 사람과 역사에 대한 낙관주의나 진보주의가 더 이상 설득력을 지니지 못하던 시기였다.

 

 20세기 초반에는 정신 분석학과 실존주의가 등장했고, 중반 이후에는 구조주의가 세력을 떨쳤다. 주체 철학은 그 본래의 목적인 인간 해방을 위해 새로운 길을 찾아 모습을 바꾸어야 했다. 마침내 근대의 주체 철학을 뒤집고자 하는 탈 현대주의(포스트모더니즘=이원론주의)까지 나타났다. 리쾨르는 탈 현대주의에 동조하지 않으면서도 주체 철학을 수정하려는 노력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초기에 그는 가브리엘 마르셀이나 엠마누엘 무니에 또는 칼 야스퍼스 같은 실존주의자들의 영향을 입었다. 그리고 그는 의식 철학에 일격을 가한 프로이드의 정신 분석학과 대화하고(해석에 관하여 프로이트연구), 또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와 대화했다. 그의 해석학은 이런 모든 대화의 과정이 녹아 이루어진 결정체요 모더니즘에 서서 모더니즘을 넘으려는 노력이다.

 

 한편 서양 철학 전통 속에서 긴장 관계를 이루어온 희랍 사상과 크리스트교 사상 사이에서 그는 좀더 역동적이고 윤리적 힘을 지닌 크리스트교 사상 쪽에서 희랍 철학을 받아들인 것 같다. 말하자면 크리스트교 세계관의 바탕에 서서 설명하는 언어는 희랍의 철학 전통을 취했다는 얘기다. 그것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종합보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나는 알기위해 믿는다)에 가깝다고 해야 하리라. 그래서 그의 해석학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진지하게 보면서도 시편과 예레미야의 탄식을 중시해 새로운 세계를 향한 상상력을 존재론 밖에서 찾는다. 한편 양쪽 전통을 이으려는 리쾨르의 모습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풀어가려는 그의 시간론에서도 나타난다. 21세기를 앞두고 대단히 의미심장한 것을 암시하는 그의 시간론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대화에서 나온 것이다.

 

 폴리쾨르는 1913년 프랑스 동남부 발레스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에게 영향을 준 개신교는 그의 사상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악의문제, 실존주의, 시간론, 파롤 중심의 언어철학과 이야기론, 말년에 관심을 가진 정의론과 정치 철학, 법 철학, 따위를 비롯해서 그는 중요한 주제를 거의 모두 다루고 있으며 그 모든 주제에 이른바 성서적 세계관이 깔려 있다고 보면 된다. 성서적 세계관이란 뿌리깊은 악 또는 죄의 현실을 파헤치면서도 비관주의로 가지 않고 사람과 세상을 바탕에서 긍정하는 세계관이다. 리쾨르가 악의 상징에서 말하는 대로, 나와 세상의(악은 뿌리깊다. 그러나 원래는 선하다). 뿌리깊은 악과 바탕의 선함 사이에서 벌어지는 긴장이야말로 리쾨르 사상 전체를 꿰뚫는 인생관이요 세계관이다. 악이 만만치 않음을 알지만 끝내 세상에 희망을 두는 바로 그 세계관으로 그는 반성 철학과 현상학을 넘어 해석학과 이야기론으로 가며, 인식론 중심의 철학을 넘어 존재론에 귀를 기울인다.

 

 그는 라뇨나 라슐리에 같은 프랑스 반성 철학자들의 사상을 공부하면서 철학 수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프랑스 반성 철학자체가 독일과 달리 관념론으로 빠지지 않을 새로운 길을 찾고 있었다. 반성이란 데카르트 이후 서양의 관념론을 대표하는 낱말로 말 그대로 자신에게 돌리는 의식 작용이다. (자기 대 자기)에서 모든 것을 처리하는 반성 철학은 사람을 주체로 세우면서 사람 바깥의 것을 모두 객체로 세운다. 그것은 귄위의 근거를 사람 바깥에서 찾는 존재론을 버리고 인식론 위주의 철학이 되어갔다. 존재론에서 인식론으로 전환하는 것이야말로 근대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그런 작업은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사람 대 사람 바깥의 관계에서 사람이 주체가 됨)에서 잘 드러나는데 칸트의 비판서들이야말로 근대 세계의 낙관론을 떠받치는 기둥이었다. 그러나 리쾨르는 프랑스의 칸트 철학자 장 나베르에게서 인식론 차원과 실존 차원을 구분하는 것을 배웠다.

 

 실존의 문제.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자신만만한 주체요 목적으로 내세웠던 의식 철학의 추상성에서 벗어나 구체적 삶의 현실로 돌아오는 문제였다. 스트라스부르 대학 철학 교수로 간 직후인 1950년에 나온 박사 학위 논문 <의지 안의 것과 의지 밖의 것>은 그의 스승이자 크리스트교 실존주의자인 가브리엘 마르셀에게 증정되었다. 마르셀에게 그는 <삶의 문제>를 배웠다. 삶은 지성과 의지를 넘어서는 것이요, 논리를 넘어 존재하는 신비이다. 구체적 삶으로 돌아오면 사람의 악과 사람이 만든 세상의 악이 문제가 된다. 거기서 <이해한다>는 것은 용서하는 것이요 감싸 안는 것이다. 이해는 더 이상 인식론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나와 남 사이)의 문제다. 반성은 단순히 의식의 인식 작용이 아니라 내 존재 전체의 돌이킴이다. 교만한 주체는 겸손해졌다. 한편 새로운 시대를 위해 하이데거는 이해를 존재론으로 풀려고 했다. 그것은 인식론 중심의 철학을 극복하려는 큰 전환이지만 리쾨르의 해석학은 이해를 무엇보다 텍스트 이해로 본다. 텍스트의 이해. 그것은 글에 들어 있는 남의 삶을 이해하며 자기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제 직접적인 자기 이해는 없다. 나는 남 안에 있고 남은 나 안에 있다. 커뮤니케이션이고 화해이다. 화해 없이 리쾨르의 해석학은 없다. 이해는 의식의 인식 작용도 아니요, 존재 이해도 아니며 남의 이해를 통한 자기 이해요, 자기 이해를 통한 남의 이해이다. 존재 이해는 그 다음이다. 그래서 리쾨르의 해석학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경청하지만 길을 훨씬 돌아 윤리를중시한다(해석의 갈등).

 

 사실 그가 후설의 현상학을 마음에 둔 것도 반성 철학을 넘는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어떻게 보면 실존의 문제에서 가브리엘 마르셀과 후설이 만났다. 자기와 자기의 관계를 일차로 보는 반성 철학에 대해 후설의(지향성)은 자기와 자가 바깥의 관계를 일차로 보는 관점을 제시했다. 반성이 일차 의식이 아니라(반성 이전)이 있다. 후설이 말한 판단 정지는(뜻하기 위해 거리를 두는 것)이다. 후설의 현상학은 을 중시했고 그것은 구체적인 삶의 현실을 묻는 물음이었다. 그가 말한 (삶의 세계)도 그걸 가리킨다. 그러나 가브리엘 마르셀과 달리 후설의 뜻은 홑뜻이다. 뜻이 홑뜻인 한, 다시 데카르트의 의식 철학으로 돌아간다. 삶의 뜻은 나의 뜻 안에 갇히고 만다. 지형성은 다시 주체의 의지 문제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여러 겹의 뜻을 가진 상징, 리쾨르는 먼저 거기에 해석학의 자리를 두었다. 삶은 상징으로밖에는 표현되지 않는다. (상징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때의 생각은 주체의 반성이아니다. 생각하는 생각이 아니라 생각나는 생각이다. 이제 상징을 푸는 해석을 통해(성경해석 상징적 : 리쾨르사상은 상징이 생각을 일으킨다고 주장) 리쾨르는 주체 철학을 새롭게 자리 매김할 가능성을 본다. 그리고 그것은 현상학을 넘어 해석학으로 가는 길을 열어놓는다. 그러나 여전히 생각하는 주체는 중요하다. 그래서 리쾨르는 구조주의의 공시성보다는 통시성 곧 역사를 중요시한다. 삶은 주어진 것이면서 여전히 사람이 일구는 것이다. 말을 랑그 중심으로 보는 구조주의를 넘어 파롤 중심으로 간다. 기호는 중립이지만 상징은 실존이다. 중립은 의미 상실이요, 구조주의에서 리쾨르는 현대인의 희망 상실을 본다. 리쾨르가 밴베니스트의 언어학을 따라 술부에서 일어나는 상상력을 보려고 하는 것 역시 주체성의 여지를 두려고 하는 것이다.

 

 이제 주체는 어떻게 되는가?  리쾨르의 주체는 무엇보다 (텍스트 앞의 주체)이다. 리쾨르의 상징 개념은 상징어에서 모든 텍스트로 확대된다(텍스트에서 행위로). 텍스트 앞의 주체는 말 뜻을 풀며 삶의 뜻을 찾는다. 그것은 남의 이해를 거친 자기 이해이므로 반성 철학의 자신만만한 주체가 아니다. 더구나 텍스트의 말 뜻을 푸는 자아는 전통에(귀속)되어 있다. 그러나 그 귀속은 종속이 아니다. 귀속과(전이해)는 분명 한계이지만 주체를 제치고 활동하는 것은 아니다. 뜻을 찾기 위해 두는(거리)가 있다 그 거리 때문에, 말 뜻을 푸는 것은 삶의 뜻을 찾는 주체적 노력이다. 삶은 주어져 있지만 내가 이룩하는 것이다. 주체와 존재의 순환, 앎과 믿음의 순환이다. 한편 남의 이해를 거쳐 자기 이해를 하는 텍스트 앞의 자아는 남에 대한(응답)이 자기 이해보다 먼저이다. 그렇다면 나의 정체는 동일성이 아니다. (정체)를 묻지 않고(다름)만 말하는 레비나스와 달리 리쾨르는 동일성 이상의 정체를 말할 수 있다고 본다(남 같은 나). 이는 리쾨르 철학이 주체성의 한계를 말하면서도 포스트모더니즘과는 방향이 다른 것을 말해 준다.

 

 (시간은 이야기로 엮일 때 비로소 인간적 시간이 된다) (시간과 이야기) 시간은 때이다. 때는 언제나 무엇을() 때이다. 이미 리쾨르는 해석학2에서 텍스트를 확장했다. 이제 이야기는 행위의 모방이요 삶을 옮기는 것이지만 역시 삶과 거리를 가진 상징이요 픽션이다. 상징은 한계이면서도 언제나 희망이다. 시간 앞에서 흩어지고 분열된 자아(아우구스티누스,)는 이야기를 통해 흩어진 시간 체험을 다시 묶어 삶의 뜻을 찾는 자아가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말없는 우주 앞에서 말을 함으로써 뜻 있는 삶을 일구는 주체의 행위이다.

 

 주체를 제한하면서도 주체를 인정하려는 그의 철학은 결국 악의 현실 속에서도 세상을 바탕에서 긍정해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세계관의 열매이다. 학생시절 사회주의에 심취했으며 이후 스트라스부르 대학과 소르본 대학의 교수를 거쳐 직접 파리 10대학의 행정 책임을 맡기까지 실천하는 지성인의 모습이 그이 해석학에 들어있다. 그는 파리 대학과 시카고 대학의 겸임 교수로 있가가 은퇴했으나 여전히 활발하게 학문 활동을 하고 있다.

 

 

주요 저작

1.     악의 상징, 양명수 옮김(문학과 지성사, 1994).

2.     Du Volontaire er de I  involontaire(Paris Aubier, 1950.

3.     De l interpr tation, Essai sur Freud(Paris: Seuil, 1965).

4.     Le conflit des interpretations(Paris: Seuil, 1969).

5.     La metaphore vive(Paris: Seuil, 1976).

6.     Temps et recit 1(Paris: Seuil, 1983).

7.     Temps et recit 2(Paris: Seuil, 1984)

8.     Temps et recit 3(Paris: Seuil, 1985).

9.     Du texte a l action(Paris: Seuil, 1986)

10.  Soi-meme comme un autre(Paris: Seuil, 1990).

11.  Lectures 1(Paris: Seuil, 1991)

12.  Lectures 2(Paris: Seuil, 1992).

13.  Lectures 3(Paris: Seuil, 1994).

 

 

 

 

 

 

 

                                                        주후 20151025일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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