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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료·논문

반틸의 변증세계

by 해찬솔의 신학 2016. 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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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 틸의 변증세계

                                                                                                                                                            글 : 김한영박사

 

 

 

                                                                               목              차

 

 

1 장 반 틸의 역사적 환경

 

1. 유년시절

2. 미국으로 이주할 때

3. 부르심을 받은 반 틸

4. 전원에서 자란 학자

5. 프린스톤 대학시절

 

 

2 장 반 틸의 사상적 세계

 

 

 

결 론

 

 

 

 

 

 

 

 

 

 

 

1 장 반 틸의 역사적 환경

 

1. 유년시절

 

 

1895년 그 아름다운 봄날에 화란에서는 특별하거나, 주목할만한 어떠한 역사적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트 반 틸의 견고하고 오래된 농장 집에서는 (이 집에는 광이 붙어 있었고 붉은 기와지붕을 가지고 있었다.) 경사가 있었다.

 

아이트의 좋은 아내인 크라지나가 그들의 6번째 아이인 코넬리우스를 낳았다. 진 실로 사람들과 나라들의 연대기는 그 작은 화란 아이의 탄생에 주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 십만의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의 책을 읽었고, 그의 복음의 확증과 믿음 의 변호를 통하여 혼돈되고 불신이 가득찬 금세기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었다. 대두분의 미국 사람들에게 있어 기억되는 것은 넓은 바다가 육지를 기대고 있는 화란은 에 라스무스, 렘브란트, 반 고호, 벨미르, 스테빈 ,휴겐스 그리고 안네 프랑크, 한스 프린크와 실 버 스켓트에 의해서 알려 졌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에서 살기 위해서 대서양을 건너 떠난 퓨리탄 들에 의해서 알려졌고 뚝에 구멍이 생겼을 때 그의 손으로 바닷물을 막은 작은 소년 에 의해서 인식되어 진다.

 

이 작고 인구밀도가 높은 나라는 철학의 어려운 분야와 신학에 대부분의 사람들 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기여를 했다. "화란은 자유의 전통적인 땅 중의 하나이다"라고 헤브로크 힐스는 썼다. "유럽의 다른 모든 나라에서 자립적 지성과 자유종교의 정신의 발현 이 막혔을 때에도 화란은 그러한 것들의 고향이다" 고대 그리이스가 철학에 기여하고, 고대 로마가 법률학에 기여한 것같이 화란이 신학에 기여했다고 단언하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종교개혁의 벽두로두터 화란 사람글의 제일 원인의 성격과 궁극적 실체의 문제 즉 아인슈타인의 "통일장 이론"을 다루는 철학의 분야인 형이상학에 대한 사랑은 혁신적인 종교모임의 탄생으로 표시되었다. 참가한 사람들은 공동생활의 형제단으로서 알려졌다. 그들 은 예배를 말없이 혹은 적은 말로서 드렸다. 이 운동의 태동기로부터 두 명의 유명한 사람 이 나왔다. 처음으로 신약의 헬라어판을 편집한 학자인 에라스무스, 그리고 단순한 수도승이 었던 토마스 아 켐피스이다. 그의 "그리스도를 본받아""고독과 숨겨진 고뇌 신뢰와 승리 의 기록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대를 통하여 인간에게 필요하고 위로를 주는 기록으로 존재 할 것이다"라고 죠지 엘리오트는 말한다.

 

가톨릭과 신교 모두 화란의 사상가들에게 계속적인 빚을 지고 있다. 트렌트 종교 회의 전에 로마교회는 교리의 일반적 체계를 갖고 있지 못했다.

 

그리고 춥고 습기차고 거칠은 화란의 환경은 바다와 바다의 요소에 대한 맹렬한 투쟁과 합해져서 제네바에서부터 전달된 활기찬 칼빈주의의 씨에 대한 가장 적합한 토양을 제공했다. 개헉파 교회들이 일어났고, 기독교 학교들이 세워졌고 프로테스탄트 신문이 널리 퍼졌고 프로테스탄트 정당이 11개 주에 결정적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개혁신앙의 부풀어 오르는 힘이 화란 시민의 성격 속에 철과 강철을 넣어주었다. 또한 개인적인 그리고 사회적 인 책임감을 자극했고 민주주의에 대한 사랑을 심었다. 개혁신학이 아래로 뿌리내리는 곳은 어디서든지 위로 열매가 열렸다.

 

신앙 개혁 시기 전에 인구의 급격한 변화와 정치적 압력은 적지않은 화란 원주민 들이 다른 해안지역으로 이주하게 했을 때 그들은 자유사회의 원리에 대한 열정적인 헌신을 그들과 함께 옮겨 갔다. 이 정신은 카나다와 미국의 생활에서도 좋은 영향을 미쳤는데 그 영향은 이주자의 숫자와 비교해 볼 때 대단히 큰 것으로 증명되었다. 과거의 화란 생활의 특이 한 점 한 가지는 생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한 사람의 개인적인 생활에 엄격한 질서가 있는 것인데 화란말로는 Verzuiling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나누기" 같은 것을 뜻한다.

 

실제 생활에 있어서 그것은 전통적으로 화란의 신교들은 신교 교회에 나가고 그 들의 자녀들을 신교 학교에 보내고 그의 세금이 신교 가구들을 돕기 위해서 쓰여져야 하고 신교 신문을 읽으며 신교 크럽에 어울리고 신교 정치 정당에 투표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로 마 가톨릭 사람과 비종교적인 사람도 비슷한 형식을 따랐다. 그러므로 화란 사람들은 서구 세계에서 가장 이상적 이고 규칙있는 사회체계를 가졌다. 아마도 이러한 전통의 부정적인 측면은 세계의 가족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신교와 가톨릭과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 이 10년동안 서로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좁은 길을 가진 같은 구역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이 다. 긍정적인 측면으로는 이러한 생활이 같은 인구를 가진 영국이나 미국에서 발견될 수 있 는 성경과 기독교의 이해에 대한 지식보다 힐씬 높은 지식을 초래한다. 이상하게 나누어진 사회에서 세계에서 가장 훈련되고 가장 헌신적이었던 기독교 사상가들의 얼마가 배출되었 다.

 

화란의 최북단지역에서는 구로닌겐 지방이 있다. 여기에는 독일말을 하는 프리 스로 알려진 족속이 살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관심과 운명에 있어서 화란 사람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강하고 자부심있고 독립적인 사고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화 란 사람들과 다른 족속이다. 기독교시대 초기에 프리스 족속은 로마에 의해서 점령되었다. 그리고 후에 독일과 프랑스에 의해서 연속적으로 점령되었다. 1523년에 오렌지공 월리암의 지휘하에 그들의 자유를 다시 얻었다. 2차 세계대전 때에 그들은 화란의 다른 거주자들과 마찬가지로 나치 침입자에 대항한 모든 유럽 중에서 가장 완강히 저항한 사람들 중의 하나 였다.

 

189553일 코넬리우스 반 틸은 "그루테가스트"란 마을에서 태어났다. 반 틸 의 가계에는 프리스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할아버지 레인더는 여러가지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는 여인숙의 주인이요 운영자로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는 기독교 철학자로 서 사색했고 그리고 그의 가족과 친구들을 신학자로서 가르쳤다. 그의 생전에 화란의 개혁 교회는 세례로 인한 거듭남의 문제로 나누어졌다. 다수의 지도자들과 사람들은 경건한 가정 에서 출생하는 것으로 인해서 언약의 자녀들은 거듭나는 것으로 당연히 믿었다. 그러므로 유아세례는 아이의 구원을 확인하는 것이 되었다. 반면에 소수의 지도자들과 사람들은 언약 의 자녀들이라도 세례를 받아야 하고 교회의 품에서 양윽되고 교회의 특권들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들은 주권적 은혜에 의해서 진정한 회개를 경험하고 구주와 그의 구속을 개인적으로 알아야만 한다고 믿었다. 여인숙 주인은 후자의 무리에 속했다. 보수적 세례 긍정론자들은 교회에서 예배보는 것을 금지 당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광이나 공공건물에서 그들의 예배 를 보아야만 했다. 이 일을 그들은 그들의 교회를 세울 때까지 확고하게 그리고 즐겁게 했 다.

 

레인더의 아들인 아이테는 근육이 발달하고 희고 흘러내리는 수염을 가진 구약의 족장의 이미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로닌겐의 대부분의 거주자들과 마찬지로 그는 우유를 나누어주고 가축을 키우고 파는 사람이었다. 또한 그의 40에이커 되는 농장에서는 정원야채, 건초 그리고 아마를 생산했다.

 

19세기의 화란사람들은 많은 가족이 있었다. 아이테와 크라지나 반틸은 세상에 8 명의 자녀들을 낳았는데 코넬리우스는 6번째 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법석대기 좋 아하는 아이로서 기억한다. 그의 어린시절 널게 퍼진 버드나무 아래에 있는 모래상자 안에 서 노는 것과 일군과 함께 아버지의 광의 건초더미 두는 곳에서 자면서 밤을 보내는 데에 그의 주요한 기쁨이 있었다. 그는 케이스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런데 이 별명은 그의 가까운 친구들에 의해서 여전히 쓰여지고 있다.

 

좋은 개혁신앙을 가진 모든 가정의 자녀들과 마찬가지로 케이스는 기독교학교에 보내졌다. 그의 형 야곱과 함께 그는 2마일 거리되는 학교에 터벅터벅 걸어 다녔다. 도중에 그들은 여러 가지 잡다한 방해물들과 작은 도랑을 나무를 짚고 넘기 위해서 자주 멈췄다. 화란의 아이들은 뾰족한 나무 신 혹은 크롬파를 신는 것이 습관이었다. 수업중에 학생들은 그 들의 신발을 옮기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학교당국은 성급한 학생들에 의해서 행해지는 어떤 행동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가끔 논쟁이 벌어 졌을 때 성격 이 폭발하고 주먹이 날고 그리고 싸움하는 학생들이 그들의 크롬파를 움직여서 서로 상대방의 머리를 세게 때렸던 것 같이 보인다. 그러한 행동은 분명히 규정을 위반하는 것이었다.

 

반 틸의 집에서나 기독교 학교에서나 성경은 중심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교리 문답 교육을 포함한 가정예배는 아이들의 영적 성장에 중요한 요소였다. 코넬리우스는 지금 도 감동적으로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의 첫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을 기억하고 암송한다. 그 질문은 "삶과 죽음에 있어서 무엇이 당신의 유일한 위안입니까?"이다. 여기에 대답은 다음 과 같은 신조였다. , "몸과 영혼을 가지고 있는 나는 삶과 죽음에 있어서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 나의 진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보혈로 내 모든 죄를 완전히 씻었으며, 그리고 나를 마귀의 모든 세력에서 구원하셨고 그래서 그가 나 를 보존하신다. 때문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카락 하나도 내 머리에서 떨 어질 수 없다. 진실로 모든 일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룰 것이다. 그런고로 그의 성령으 로서 그는 역시 나에게 영생에 대한 확신을 주시고 내가 그를 위해서 진심으로 기꺼이 살게 만드신다. )라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주일에 검은 나무로 된 크롬파를 신은 아이들과 함께 기도의 집으로 엄숙 하게 걸어가는 반 틸의 가족을 마음 속에 생생하게 그려 볼 수 있 ;.

 

반 틸씨는 예배드리려고 가는 길이나 예배시간에 작난과 한눈파는 것을 책망하는 것을 참지 못하곤 했다. 그와 그의 가족은 성스러움의 아름다움 안에서 그리스도이신 위대 한 왕에게 예배드리는 동일한 귀한 믿음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모였다. 영광의 주님에 합당한 경외심을 손상시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만약에 집으로 가는데 비가 오면 작은 달팽이들이 땅에서 움직이기 시작해서 아이들에게 기쁨을 주었다. 그러면 아이들이 오래된 화란 속담인 "너는 모든 달팽이에게 소금을 뿌려서는 안된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아버지는 긴장을 풀고 미소를 짓는다. 속담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 교훈은 "너 자신을 너무 가늘게 펴지 말아라 : 인생은 너무 짧다"는 뜻이다.

 

거기서 우리는 아이테와 크라지나 반틸의 경건한 가정생활을 형성 하는데 결합된 요소들을 발견한다. 그들의 후손에게 그들은 루비보다 더 귀한 사랑을 엄격하나 편견 없는 훈련을 칼빈 신학의 풍요로운 유산을 알게 함을 하나님 중심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그 리고 행복한 가정에 대한 향기로운 추억들로 가득찬 마음을 남겼다.

 

누구라도 인생의 황혼기에 있었던 코넬리우스 반 틸이 자주 그로닌겐의 그 황금 시절로 돌아가 살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의 그리운 단어를 반복한다면 그의 향 수에 대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사랑하여도 갈 수 없는 곳 내 철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 나그네는 아직도 고통하네 축복이 불어온 시발점이여 기념할만한 축복이 주어진 곳.

 

2. 미국으로 이주할 때

 

 

케이스가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후 반 틸의 가족은 드릭크 마을로 옮겼는데 그 마 을은 그로닌겐과 프리스랜드 지방 접경에 위치해 있다. 그곳에 20에이커의 농장이 있었고, 아이테는 많은 양의 홍당무, 양배추, 감자, 그리고 꽃, 양배추를 키움으로 그의 형편을 개선 할 수 있었다. 습기 차고 비옥한 땅은 이탄도 산출했는데 이탄은 가족들이 힘들여 땅에서 얻어서 후한 가격에 팔았다. 이탄은 시대에 뒤떨어진 물질로서 보통 8평방 인치의 넓이에 3내 지 4인치의 두께를 가진 인료로도 또 비료로도 쓰여지는 물질이다. 아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최고의 기쁨 중 하나는 봄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크고 달콤하고 즙이 많은 딸기를 모으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들을 그들은 열심히 갖고 먹었는데 어떤 때는 땅에서 난 날 것 을 어떤 때는 크라지나에 의해서 맛있는 파이나 혹은 달콤한 과일이든 파이로서 먹었다. 반 틸의 가족은 드릭크에 산지 오래지 않아서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나이 많은 아들 중의 하 나인 헨드릭은 화란 군대에 징집되어서 드렌타 지방에 있는 앗센에 머물러 있었다. 헨드릭 과 다른 아들들의 오랜 군대 생활에 대한 염려가 가정위에 암영을 던졌다.

 

반 틸 내외는 소년들이 하나씩 하나씩 집을 떠나서 군인이 되는 것을 보고 새롭 게 장래를 생각했다. 그러면 누가 농사를 지을 것인가?

 

아버지의 동의와 함께 케이스보다 열 한 살이 많은 레인더는 결혼했고 그의 신부 와 함께 화란을 떠나서 미국으로 향했다. 그들은 하몬드 남쪽 10마일에 있는 인디아나 하이 랜드에 가까운 농장에 정착했다. 레인더는 한 에이커당 5 달라씩에 40에이커를 빌렸고 두 마 리의 노새를 사고 그리고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그의 부모에게 그를 따라서 기회있는 땅에 부모들이 오도록 종용하는 편지를 썼다.

 

1905년 봄에 갈등하는 감정을 가지고 헨드릭을 뺀, 반 틸의 가족은 조국을 떠날 준비가 되었다. 그 땅에서의 그들의 뿌리는 깊었다. 이주는 친척과 친구와 아는 사람들과의 이별과 문화적 배경과 오래 계속된 전통 뿐만 아니라 교회적 결합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아이테의 마음에 화란에서의 계속되는 삶의 불확실함에 대한 새 세계의 삶의 보 도 된 이점들은 변화를 위한 결정적인 요소였다. 쟁기를 손에 잡았을 때 그는 돌아서지 않 았다. 그들은 로텔담까지 기차로 가서 화란 미국간의 증기선을 타고 뉴욕으로 항해했다. 그 들의 배는 케이스의 10번째 생일을 보내고 13일 후인 1905519일에 도착했다. 결핵증 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던 반 틸 여사는 배에 있을 때, 건강이 호전되는 것을 경험했고 결과 배가 도착 했을 때에는 건강을 완전히 회복한 것같이 보였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73세 까지 살았다.

 

뉴욕시에서 가족들은 하은드까지 그들을 데려다줄 이라이철도 기차를 탔다. 그것 은 지치고 꼬불꼬불 돌아가는 여행이었다. 26시간 동안의 여행은 특별히 그당시 팔에 안긴 어린아이였던 작은 시에프코에게는 힘든 것이었다. 마침내 그들은 하몬드에 도착했다. 정거장에 레인더가 마중 나왔다. 재회의 기쁨은 큰 것이었다. 레인더는 피로에 지친 여행자들과 짐들을 말이 끄는 거대한 마차에 태웠다. 그들은 하이랜드까지 이르는 포장되지 않은 10마 일 이상의 길을 가는 동안 요동했다. 아이들은 미국 전원생활에 경치와 소리에 호기심과 흥 분으로 가득찼었다. 우는 가축들, 부드러운 모습을 가진 말들, 광대한 광들과 곡간들, 아담한 농장 집들, 평평하고 나무로 된 시골이었다.

 

당시의 하이랜드는 주요한 도시는 아니었다. 6개의 건물들이 그곳의 경치를 장식 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우체국, 기독교 개혁교회, 학교, 대장간, 철도, 사무소 그리고 살롱 등 이 있었다. 레인더는 가족들이 셋집으로 가도록 주선했다. 그래서 새로운 환경, 새로운 문화, 그리고 생소한 언어에 대한 적응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반 틸 가족은 교회에서 교인들과 어울리는데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교회의 사역자는 셀다 목사였다. 그런데 자주 주인 "the domine"이라고 불리웠다. 그들은 그가 경건 하고 사랑이 있는 사람인 것을 알았다. 그는 반틸의 아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케이스의 장래 계획에 말로 다할 수 없는 도움을 주었다.

 

형제들은 교실이 두 개인 학교에 갔다. 그들은 영어를 빨리 익혀 나갔다. 1학년에 입학한 케이스는 영어를 너무 잘 터득하여서 그 해에 5학년으로 월반했다. 선생님은 케이스 에게 "큰 크롬파"라는 그리고 야곱에게는 "작은 크롬파"라는 별명을 붙였다. 후에 그들의 형 들 중의 하나인 크라스가 학교에 들어갔을 때 선생님은 그를 두 개의 크롬파스의 형이라고 불렀다. 다른 두 형제들은 학교에 다니지 않고 대신에 농장에서 그의 아버지를 도왔다. 처음 에 아이테는 양파를 재배하려고 노력했다. 그 실험은 실패했다. 양파가 빨리 자라서 씨를 맺고 딱딱하게 되어서 쓸모없게 되어버렸다. 그는 작은 오이를 재배해서 더 나은 성공을 기 두었다. 이것들을 그는 한 부쉘에 50센트씩 리비와 멕네일에게 팔았다. 아이테는 지금까지도 코렐리우스에게 분노를 일으킨다. 그처럼 비참한 가격에 한 부쉘마다 등이 부서질 것같은 노동이 들어간 것을 생각할 때, 분노에 몸이 떨리게 된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대체적인 상황은 화란에서의 그것보다도 향상되었다.

 

아이테는 여러 가지 종류의 야채를 경작할 수 있었고 들의 포도나무에서 포도주를 만들 수 있었다.

 

3. 부르심을 받은 반 틸

 

 

케이스 반 틸에게 있어서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의 부르심은 하늘을 가로질러 일 련의 번쩍이는 줄같은 순간적이고 극적인 섬광에 의해서 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그 경험 은 강제, 끊임없는 당김, 발전되는 설득이라고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의 남자와 여자 와 젊은이들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의 필사적인 필요성 속에 서서 세속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피곤하고 지친 사람들에게 '자유케 하는 말씀을 가지고 가서, 주님의 언약의 백성을 강 하게 세우려는 소원이 엿혼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케이스를 붙잡았다. 마침내 그는 바울과 같이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 말할 수 있었 다. 고린도 전서 9:16

 

찰스 스펄죤은 그의 대학의 학생들에게 이러한 충고를 주곤했다. "젊은이들이여 만약에 여러분이 복음의 사역 밖에 머무를 수 있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가 뜻하는 바는 물론, "만약 선지자적인 충동이 당신들을 잡지 않는다면, 당신의 인생에서 다른 것을 하십시 오" 농사를 포기하고 성스러운 사역을 준비하기 위한 발걸음을 시작하는 결정은 19세가 된 반 틸에게 있어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잊혀지지 않는 이사야의 말인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6:8)하는 말이 그의 심령에 새 겨졌다. 그는 그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 바를 수행하기 위해서 그의 얼굴을 부싯돌같이 세웠다.

 

한동안 미시간 그랜드 래피즈는 기독교 개혁 운동의 신경 중심인 예루살렘처럼 기능을 발휘했다. 그 부산한 화란 사회에 칼빈 예비 학교와 대학 그리고 칼빈신학교가 젊은 남자와 여자들이 그들의 생의 사역을 위한 훈련을 위해서 설립되어 있었다.

 

케이스는 유럽이 제1차 세계대전에 뛰어들었던 해인 1914년 가을에 문스터를 떠 나 예과에 들어갔다.

 

그랜드 래피즈에서의 처음에 몇 개월동안 인디아나 주에서 온 그 학생은 그의 배 움에 대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잃고 풀이 죽어 있었다.

 

아주 심한 향수병이 그를 괴롭혔다. 그의 생각은 끊임없이 가까이 결합된 반 틸 가족에게로 향했다. 그는 그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사랑스런 레나를 그리워했다. 그는 뮨스터의 좋은 땅, 말과 가축들, 잔디에 입맞춤, 일하면서 들과 정원에서 하나님을 관찰하는 즐거움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했다. 그는 사기면에서 특별히 침체되었으므로 그의 믿음은 흔 들렸고 그리고 그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은 기반을 잃어버렸다. 그는 그의 학문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갈 것을 고려했다.

 

그러나 코넬리우스 반 틸은 학교를 그만두려 했던 생각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솔 직히 우리들에게 말할 것이다. 그의 원숙한 나이 때에는 그는 주목할만한 형이상학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 뛰어난 철학자가 되었다. "당신이 피곤하거나 혹은 낙심했을 때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 말라"고 그는 그의 갈색 눈을 깜박이며 말할 것이다. "내가 거의 그 럴 뻔 했다. 그리고 만약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나는 뜨거운 물 속에 빠져 버렸을 것이다" 세 가지 요소들이 그를 요동치 않게 했다. 레나의 편지로부터 그는 상당한 위로와 격려를 받았다. 또한 그는 그의 가족중에 처음으로 정상적인 교육을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부모님들과 형제들은 "큰 크콤과"가 목사가 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만약에 그가 한 순간의 약함으로 항복해 버린다면 그가 어떻게 그의 머리를 들 수 있단 말인가? 마지막으로 고난을 위해서 태어난 형제인 두 번째 사촌 헤르만 모에스 가 중요한 고비에 그와 친구가 되어서 그와 길게 이야기 했고, 그래서 그를 절망의 수렁에 서 건져내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 무렵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왔고 반 틸은 그의 예비교육 을 방해하는 모든 생각을 떨쳐버렸다.

 

그 결정 뒤에 큰 안도감이 따랐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예과교육과 대학 기간은 정신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용광로에서 시험받는 기간이었다. 재정적인 위기로 인하여 그는 시간제의 일을 구해야만 했다. 일주일에 방값과 음식 값이 4달라 들었다. 기독교 개혁교회 학생 기금에서 제공하는 제한된 장학금을 보충하기 위해서 그는 기숙사에서 그 건물을 관리하는 일을 얻는데 성공했다.

 

다른 많은 학생들이 그들의 여가를 운동, 법정, 그리고 사회적 활동을 즐길 때 케 이스는 결코 덜하지 않은 기쁨과 흥분을 가지고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헤겔, 그리고 쇼펜하우어 등의 어려운 책들을 탐구했다.

 

철학은 추상적인 것을 다루는 배움의 한 분야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것들의 특성 을 다루는 죤 번연과 같은 사색가들과 집필가들 에게는 경이의 근원이다.

 

그러나 코넬리우스 반틸에게는 그것은 이상하고도 놀라운 매력을 주었다. 이러 한 흥미는 아마도 보수적 세례 긍정론자들촤 관련된 얼마간의 학자들의 영향 때문이거나 혹 은 스스로 분명한 사상가였던 그의 할아버지로부터 얻은 것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떻든 간에 전제와 삼단논법과 그리고 모하며의 관처럼 하늘과 땅사이에 매달려 있는 수백 가지의 다른 문제들은 일찌기 케이스 반 틸의 맛있는 음료와 음식이 되었다.

 

아마도 그의 분석적인 마음은 언제나 비기독교 학자들의 전제에 도전 할 기독교 철학의 구조의 철학들이 결합되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가 가지고 있던 기독교 철학 체계는 헬만 도이벨트나 볼렌호벤, 그리고 반 리센과 차이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스피어 나 엘 깔스베이끄, R.H.나쉬 등처럼 "우주법 체계"에 접근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반 틸은 아브라함 카위퍼와 헬만 바빙크의 계시철학에 영향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특별히 클라우스 스킬더의 영향도 막대하다.

 

4. 전원에서 자란 학자

 

 

코넥리우스 반틸의 신학교 예과 훈련을 받는 동안 그랜드 래피즈의 예과의 교육 수준은 높았다. 초기의 몇몇 신학회 교수들이 교수단을 배가했다. 그러나 소위 "실천과정"이 라 불리우는 것들은 아직 채택되지 않고 있었다.

 

학교의 설립자들은 화란에서 가르쳐진 수업과정을 따랐다. 개인의 다양함의 여지 는 거의 없었다. 선택과목은 없었다. 큰 크롬파가 좋아했던 두 분의 선생님은 클라스 스콜랜드와 그 교수 아래서 그는 4년 동안 고전 헬라어를 배웠다. 그리고 화란 역사와 문학을 가 르친 반 안델교수가 있었다. 반 안델 교수를 학생들은 "진정할 인격자"라고 부르곤 했다.

 

가능할 때면 언제나 그는 플랑드로 지방의 예술과 역사의 빠르고 열정적인 특이한 점들을 연구함에 의해서 화란말의 명사변화와 동사체 계의 딱딱함을 피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음악적 재능을 가진 그는 오르간을 연주하고 그의 학생들의 민요를 인도함으로 순수한 기쁨을 맛보았다. 어느 날 누군가가 그를 그의 화란말 문법에 대한 지식의 결핍으로 인하여 비난했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심술궂게 대답했다. "무엇이라구요? 내가 그들 모두에게 A학점을 주었습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오늘날 반 틸 박사는 어떻게 반 안델 교수가 그의 학생들에게 상상력 을 불어 넣어 주었고 그들의 조상의 나라의 위대함에 대하여 그들의 인식을 증가시켰는지를 말한다. 그는 스페인의 통치에 대항하기 위해서 무장한 화란 군사들이 생명을 곁코 투쟁한 것을 자세히 이야기하곤 했다.

 

두 나라간의 80년 전쟁의 정점에서 화란이 자유를 얻을 기회란 진정으로 거의 없는 것처럼 보였다. 회의주의자들은 네델란드의 일을 말했다.

 

"가능성 없고 감각 없고 그리고 희망없는" 그러나 오렌지공 월리암의 용감한 지도력 아래서 화란은 스페인이 자랑하는 함대인 'the siver fleet'를 격파했고 굉장한 승리를 얻어냈고 압박된 국민을 그들이 증오 하는 적으로부터 자유케 했다. 케이스가 위대한 아딘라함 카위퍼의 책들 을 광범위 하게 읽기 시작한 것은 그가 그랜드 레피즈 학교의 학생들이었을 때였다.

 

카위퍼(18371920) 박사는 보통사람 열명이 해날 수 있는 일을 했다. 그는 라이덴(Leiden) 대학과 라이덴 신학교에서 교육받았는데 그 때는 독일의 파괴적인 성경비평의 운동이 화란의 신학교에도 침입해 들어오고 있을 때였다. 그 운동은 계몽(the Aufklarung)이라고 알려졌다. 젊은 카위퍼는 그것이 이성에 호소하는 힘 때문에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그는 초기 사역에서 자유주의 설교에 헌신했고 때문에 복음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교회에 있었던 여성도를 통하여 그리고 기독 교 소설인 "레드크립(Redcliffe)의 상속인"을 읽음을 통해서 그의 눈은 열려서 진정한 그리스도의 구속적 아름다움에 대항하는 그의 교리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회심했고 중심에서부터 손끝까지 완전히 변했다. 그후로 그의 칼같이 날카로운 마음은 역사적이고 초자연적인 기독교를 위하여 싸웠다. 그의 업적의 기록은 한 사람의 "누가 누구인 가"(Who's Who)를 읽는 것 같다. 그는 두 개의 신문을 편집했고, 국회의 원으로 뽑혔고 암스텔담(Amsterdam)의 자유대학을 설립했고 기독교 보수사역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19011905년까지 네델란드의 수상으로 봉직했고,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그리고 대학에서 강의했으며 또 정기적으로 설교했다. 게다가 200권이 넘는 책을 그의 여가 시간에 집필했다.

 

여기에는 일반은총(Gemene Gratia)에 대한 3권의 기념할만한 책들과 하이델베르그(Heidelberg) 교리문답 강해, 신학백과사전, 중동까지의 여행기록인 "고대 세계를 돌아서" Pro Rege "왕이신 그리스도를 위하 여" 지금은 불행하게도 인쇄되지 않는 놀랄만큼 부요하고 통찰력 있는 일련의 헌신적인 설교들인 "하나님께 가까이"등이 있다. 그의 주요한 명제는 성경에서 확립된 기독교는 유일하신 하나님이 게시된 종교라는 것과 칼빈주의가 그 종교에 대한 내용면에서나 그리고 인생과 세계에 대한 표현에 있어서나 가장 명백하고 또 가장 일치하는 표현이라는 것이 다.

 

그래서 반 틸(Cornelius Van Til)은 그의 계통적 서술 중의 얼마의 배경이 문제될 때 그가 아브라함 카위퍼 (Abraham Kuyper)의 어깨위에 서 있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한다. "개혁자들의 뒤를 따라가기를 원하기 때문에 내가 나 이전의 나와같이 그렇게 하려했던 사람들의 작품을 읽고 그리고 감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고 그는 말한다. "나는 처음에 카위퍼와 다음에 바빙크의 업적들을 이용했다." 그들의 관점은 얼마나 기본적이고 넓었던가! 그들은 말하기를 "성경의 생각은 그것의 메시지 와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반 틸 박사가 어떤 중요한 점에서는 아브라함 키위퍼와 다른 입장에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리차드 개핀 씨가 "예루살 렘과 아덴"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반틸은 성경신학자 게할더스 보스를 흠모하고 따라서 카위퍼의 "성경기자에 대한 수평적 취급" 그의 "이름 뿐 아닌 개념까지의 성경신학에 대한 반대" 그리 고 그의 "성경 기자들과 뒤따르는 기독교 세대 사이의 불연속"에 도전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 가 결코 화란의 가장 뛰어난 정치가 겸 신학자에 대한 그의 찬양, 존경 그리고 애정을 감소시키지 않았다. 이 거인의 실제적인 영향이 반 틸의 믿음의 생활에서 뿐 아니라 그의 설교에서 발견되는 약간 고풍적이고, 어느 정도 화려한 구사력에서 그리고 그의 책 중 얼마에서 발견되는 고전적인 냄새에서도 보여진다.

 

그의 학생시절에 케이스(Kees)는 언제나 거의 흥분된 마음을 가지고 농장에서의 여름응?기대했다. 그 날들은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재회를, 작열하는 인디아나 태양 아래서 거칠기는 하나 반가운 토양과 다시 만나 는 것을 그리고 그의 떨어지는 재원을 다시 공급하는 기회를 의미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도 그 날들은 레나(Rena)와의 축복으로 가득찬 시간을 의미했는데 위에 장식용 천을 단 빛나는 작은 2인용 마차를 타 고, 전혀 시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혹은 번개와 폭풍우의 일시적인 위험도 모른 채 잎으로 덮인 시골길을 다녔다.

 

은퇴한 그 변증학 교수는 "연인의 젊은 꿈보다 인생에서 반 만큼이라 도 즐거운 것은 없을 것이다"는 것에 진심으로 동의할 것이다. 1921년에 반틸은 칼빈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마침내 적어도 한 학기는 지방교 회를 목회할 것을 바랐다. 그는 어느새 화란말, 그리고 영어 뿐 아니라 라틴어, 헬라어, 그리고 히브리어까지도 알게 되었다.

 

지적인 수준과 안목에서 그는 아마도 대부부의 그의 친구보다 앞섰을 것이다. 여기에 네델란드에서 그의 어린 시절을 보낸 청년이 있다. 네델란드의 언약의 자녀로서 그는 엄격한 프로테스탄트 학교에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다녔고, 프로테스탄트 대기(大氣)에서 숨을 쉬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볼 때 이점이 많았다. 이러한 종류의 환경에 부산물은 그들이 무엇을 그리고 왜 믿는가를 안다는 것이다.

 

그들은 권위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경험으로 훈련이 무엇인지를 안다. 그들은 인생의 모든 면을 하나님의 안목으로 볼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았다. 그들은 그들의 방향이나 목적없이 혹은 소경처럼 흔들리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미국으로 건너온 후에 반 틸의 안목은 넓어졌다. 그는 네델란드에서의 그의 생활도 감사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복잡하고 복수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아는 사람들은 색다른 파장으로 생각했고 느꼈고 충격을 받았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파괴로부터 아직 회복되지 못했다. 국민의 대부분은 정처없이 당황하고 혼란 속에 절망하며 방황했다. 반 틸은 생각 했다. "농부 출신인 내가 어떻게 상처투성이인 세계에서 가치관의 외과 의사로서 봉사할 수 있을 것인가?"그리고 "하나님이여 내게 알게 하여 주옵소서"하고 기도하였다. 반틸은 루이스 벌코프, 사무엘 볼베다, 월리 암 헤인즈, 텐 호르, 제레마와 같은 학자들에게서 교육받는 자신을 행복 하다고 느꼈다.

 

5. 프린스톤 대학시절

 

 

반 틸은 칼빈신학교에서 1학년을 수료했다. 그는 칼빈신학교에 남아서 신학교육을 끝마치고 지방 교회의 목회자가 되는 것과 뉴저지에 있는 프린스톤 신학교에 원서를 내서 그곳에서 계속 공부를 하는 것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복음블 선포하고자 하는 열망은 타오르는 불꽃같았으며 그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주께서 자신을 강대상으로 인도하시리라는 것이다. 그는 이 문제를 기도로서 결정짓고자 하였다. 감정적인 면에서는 그랜드 래피즈에 머무르고 싶었다. 그는 그의 가족과 보다 가까이 있을 수 있었 기 때문이었다. 그는 칼빈신학교에 다니면서 훌릉한 교수님들의 가르침 에 감사드렸고 캠퍼스 둘레의 화란사람들애게서도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를 동부로 펀학시킨 겉정적인 두 가지 이유중 하나는 프린스톤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프리스톤은 가장 뛰어난 교육기관의 하나로서 알려졌고 철학과의 유명한 교수들을 자랑했다. 두 번째 이유는 프리스톤 신학과 교수들은 성경적인 신학자들이라는 것이었다. 게할더스 보스, 핫지, 월리암 암스트롱, 로버트 월슨, 오스왈드 알티스, 그리고 그레샴 메이첸 등이 그 교수님들이었다.

 

조용한 프린스톤 대학촌에서 공부한 경험이 있는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 학교는 명상하고 집중하기에 도움이 되는 분위기는 없다고, 누릅나무와 단풍나무가 쭉쭉 뻗어 있는 넓은 길, 독립전쟁 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고상한 역사, 잊혀지지 않는 교수들, 나무로 가득찬 사랑스런 캠퍼스들은 공동체의 끈들을 하나의 신비스런 사상의 탱크로 녹인 다.

 

1차 세계대전 후의 10년간, 1920년대 독일의 대학들은 깨어진 주지 주의의 잿더미 속에서 타고 있었다. 그 당시 미국의 상아 리그 학교에서 는 대조적으로 생동적인 자유주의 위에 서 있었다.

 

전 세계로부터 지적으로 굶주린 젊은이들이 세상지혜의 샘으로부터 물을 마시기 위해 그들의 학교로 떼지어 모여들었다. 하바드대학 예일대 학, 그리고 프린스톤 대학들이 그 매력적인 이름들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이름을 언급할 때 거의 경외심을 가졌다.

 

독일의 대학들과 상아 리그 학교들의 대조가 뚜렷한 것이었다면 프린 스톤 대학과 프린스톤 신학교 사이의 차이 또한 뚜렷한 것이었다. 대학교는 상대주의 위에 서 있었고 신학교는 절대주의 위에 서 있었다. 대학 교는 궁극적인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신학교는 신구약 성경을 최종 적인 권위로 인정했다. 그리고 또 우주가 하나님 솜씨로 지어진 것을 믿고 하나님의 중재적인 왕,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리의 초석이요, 구세 주 안에 모든 지식과 지혜의 보고가 놓여 있음을 확신했다.

 

신학교 당국은 반틸이 칼빈신학교에서 이적해서 2학년으로 편입하는 것을 허락했다. 화란계 학생들은 그들의 강한 칼빈주의적 훈련으로 다른 학생들보다 한 단계 위로 평가되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

 

케이스(Kees)는 대학에서 철학을 수강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철학과 의 과장은 보우만이었는데 그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자였다. 개인주의는 주관적 이상주의의 이론인데 그것은 인격을 실체 해석의 열쇠로서 간주 한다. 보우만과 반 틸은 그들이 인정하는 견해에서 크게 달랐지만 그럼 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따듯한 인격적 관계를 유지했다.

 

1920년대에 반주지주의 조수가 기독교 사회에 몰려들었다. 이러한 경향에서 비기독교적 생각을 이해하는 것을 점차 용납하지 않게 되었 다. 이러한 경향은 다음과 같이 말 한다 "왜 단순한 복음을 세상에 전파 해서 그것을 퍼지도록 하지 않는가?"

 

크레샴 메이첸은 재빨리 이러한 생각을 분석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 경고했다. 그는 바울이 아덴의 아레오바고에서 스토아, 그리고 에피쿠로 스 철학자에게 복음을 전파했을 때 그가 아라투스와 게린투스로부터 인용함으로 그들 자신의 작가들에 대해서 알고 있음을 보였던 것을 기독교인들에게 상기시켰다.

 

메튜 헨리는 그 점을 확실히 하였다. "바울은 원래 학자였다. 하지만 그의 인간적인 배움은 복음 사역자에게 장식이 되고 또한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특별히 배움 없는 자를 확신시키는데 있어서 그는 그들 자신의 무기로 자신을 패배시킬 수 있게 했다. "

 

반 틸이 언젠가 휘두르게 된 양날 선 칼은 프린스톤 신학교의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뿐 아니라 프린스톤 대학의 지성적인 환경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이 젊은 인디아나주의 주민은 대조적인 소용돌이 속으로 돌입했다.

 

그것은 인생행로에 있어서 세 가지 준비 단계를 표시한다.

 

첫째로 네델란드에서의 나누어진 문화단계가 있었다. 둘째로 그랜드 래피즈에서의 경건하고 강렬한 칼빈주의가 있었고, 세째로 프린스톤에 서 세련된 자유주의적 지식세계의 이해와 보수주의적 신앙방어 능력윽 함께 얻게 되었다.

 

그가 그의 짐을 풀고 그의 재원을 평가하며 긴 숨을 쉬며 미래를 직면 하면서 신학교 교정 의 알렉산더 홀에 자리 잡았을 때 그는 어떻게 느꼈는가?

 

"나는 비록 미국의 얼마간의 위대한 인물들에게 배우기 시작한 시골 소년 이었지만 나는 나 자신의 것을 잡을 수 있윽 것을 확신했다. 나는 제레마 박사 아래서 철차적드로 배웠던 것들에 의해서 잘 교육을 받았다"고 그는 말한다. 두 개의 길이 갈라졌다.‥‥‥ 그리고 그는 작은 사람 들이 간 길을 택했고 그것이 모든 차이점을 만들었다. 그는 뚜럿한 주체 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 월간현대사조, 198110월호19824월호, 발췌 요약 인용.

 

 

 

2 장 반 틸의 사상적 세계

 

 

코넬리우스 반틸의 변증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저서로는 "변증 학" (Apologetics; 1951), "기독교 유신론적 험증학" (Christian Theistic Evidences; 1952), 그리고 "신앙의 변호"(Defense of the Faith. 196 3) 등이 있다.

 

물론 그의 "조직신학서론"(An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 1971)"기독교 유신론적 윤리학"(Christian Theistic Ethics;1980) 등에서도 그의 전제주의 방법론과 특별계시인 성경 의존적 신학사상이 진술되어 있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그의 변증론만을 다루기 위하여 변증학 분야의 세 책을 주로 인용할려고 한다.

 

월리암 화이트(Willam White)에 의하면 반틸은 기독교를 변증함에 있어서 전제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다. 1)

 

그런데 그 방법은 더 정확히 표현해서 전제주의적 변증의 방법론이며, 그것은 아브라함 카위퍼(Abraham Kuyper)의 방법에 기초를 둔 것인데,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성경에 그 기초를 둔 것이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성경의 어느 곳에도 하나님의 존재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의 진실을 성립시키는데 있어서 인간의 이성적인 방법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먼저 전제하고 있다. 창세기 1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증거와 히브리서 116절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 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는 증거들은 모두 하나님의 존재를 먼저 전제하는 말씀들이지 이성론자들처럼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하여 이성적인 추론을 하지 않고 있다. 2)

 

(1) 말씀 계시에 대한 절대 의존적 전제주의

 

노르만 가이슬러(Norman Geisler)에 의하여도 반틸은 전제주의( Presuppositionalism) 적 변증방식을 사용하는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3) 변증의 방법론에 있어서 전제주의자인 코넬리우스 반 틸은 말하기를 "나의 삶에 대한 전 해석을 그것으로부터 절대 권위있는 계시로 간주하 는 그 근원으로서의 성경에서 아주 진실하게 출발한다"는 것을 인정한 다고 술회하고, "나는 성경이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과 우주에 대한 그의 계시를 그 자체의 권위 위에서는 의심할 여지없이 참이라고 생각한다." 4) 고 밝히므로서 성경계시 의존적 기독교 세계관을 피력하였다.

 

물론 반 틸의 전제주의적 방법론은 귀납식 추론 방법을 일삼는 이성주의자들이나 실증주의자들에게 불만의 요소가 되는 것이 사실이며, 순환논리로서 단정되고 있는 것도 사실인 것이다. 그러나 알고보면 이성주의자들 에게도 전제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이 이성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비 기독교인들도 기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나름대로 전제들을 가지고 있다. 5) 즉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의 차이점은 진리를 변증하기에 앞서 전제를 하되 무엇을 전제하느냐 하는데 있는 것이다. 기독교 인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고로 성경의 계시 없이 실재를 알 수 없다는 전제하에 움직인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진리를 변증하기 전에 성령으로 영감 된 하나님의 말씀의 귄위를 전제하고, 비기독교인은 진리를 변증하기 전에 신적인 권위의 존재를 부인함과 동시에 이성의 자율성을 전제한다. 6)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전제에 의한 변증방식을 통해서 비 기독교인을 설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요, 조금도 모순되기나 억지 논리가 아닌 것이다.

 

죤 에드워드 카넨 (John Edward Carnell)도 반 틸의 전제주의에 동의 하여 말하기를 "기독교인은 먼저 사실을 연구하고, 후에 하나님을 발견 하려고 하지 않고, 처음부터 하나님에서부터 출발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에서부터 출발하지 않고서는 모든 사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할 수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7) 고 하였다.

 

그는 또 말하기를 "기독교인은 하나의 전제 아래서 움직이는데, 그 전제란 성경에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의 존재인 것이다." 8) 라고 하였다. 반 틸의 전제주의는 외롭지 않다. 전제주의자 반 틸은 기독교인들은 터툴리안(tertullian)이 수힝했던 바와 같이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기 위하여 "반대자들의 입장이 가지고 있는 원리들과 필연적으로 교리적 논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사실상 기독교적인 입장의 유일한 증거는 그 진리가 전제되지 않으면 어떤 것도 입증할 가능성이 전혀 없게 된다." 9) 라고 하였다.

 

필자의 생각에도 계시종교의 특수성을 설명하는 방법은 별 수 없이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Kerygula)에 의하여 본체적 하나님을 증거 해야 된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그가 나타낸 계시에 의존하지 않고서 올바& #47480; 인식과 신앙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반 틸과 같이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하고, "하나님께서 선포한 계시의 역사성"을 일단 인정해야만 기독교 신학이 출발할 수 있고, 변증의 첫번째 과제와 대상이 사실로 수용되어야만 기독교 신앙의 변증이 시작될 수 있기 때문 에 그의 변증방식은 원리적으로 타당한 것이라 믿는다. 만일에 그렇지 않고 버틀러(Butler)처럼 이성적인 유추를 해서 기독교의 하나님을 설명하려고 했다면 데까르트(Descartes)의 유신론증과 평행을 달리며 똑같이 본체론증(The ontological Argument)으로 끝나버렸을 것이다.

 

사실 본체론적 논증은 형이상학적 연역적 논증으로서 중세 스콜라 철학시대에 이르러 안셀름(Anselm, 1033-1109)에 의하여 시작된 논증 방식인데, 다른 유신론증과 구벽되는 점은 인과율(因果律)을 통한 귀납 식 추론을 하지 않고, ()의 관념자체를 가지고 그대로 신존재(神存 株)를 증명하였기 때문에, 일단은 신()의 존재가 전제되지 않으면 신()의 속성이 나 관념 이 거론될 수 없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본체론증 자들은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은 우리가 사유 (사색)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것이 못되기 때문에 완전한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10)고 규정한다. 본체론적 논증을 평한다면 이 논증은 관념에서 반드시 존재가 생기지 않는다는 점과 더 나아가서 창조주이신 신()을 피조물인 인간의 이성으로 규정 할 수 없다는 점을 모르는 소치라 할 것이다. 그들은 궁여지책으로 "하나님의 관념은 전혀 독특한 관념이어서 필연적으로 존재의 특질을 내포하지만 다른 관념들 은 그렇지 않다." 11) 고 철학적 독단론에 빠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논증방식은 박형룡 박사에 의해 "사상의 기초적 필연적 원리로부터 인출(引出)하는 선험적(業驗的) 증명" 12) 이라고 판정되었고, 박 아론 박사에 의하면 "형이상학적(刑而上學的)이며 관념주의적 (觀念主義的) 논증" 13)이라고 명명되었다. 따라서 필자가 주장하는 바는 이성주의자나 논리주의자에게 있어서도 이미 연역식 전제주의 방식이 있었다고 하는 선례를 철학사 A 내지는 변증학사적인 B 측면에서 지적하면서 코넬리 우스 반 틸(Cornelius Van Til)의 전제주의(Presuppositionalism)가 일반적인 논리방식에서도 하자(error)가 없다는 점을 천명한다.

: A Bertrand Russell, 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B Avery Dulles, A history of Apologetics.

 

(2) 이성에 대한 계시의 우위성

 

반 틸은 화란 자유대학의 아브라함 카위퍼와 헬만 바빙크 그리고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의 찰스 핫지와 비 비 워필드가 이어온 칼빈주의 신학체계를 게승 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이성에 대한 계시의 우위"를 주장하고 확립한 변증신학자로서 탁월한 본보기가 되었다. 14) 그렇기 때문에 그의 변증학 체계는 버나드 램(Bernard Ramm) 15) 의 체계를 훨씬 뛰어 넘어서, 그레샴 메첸(J. Gresham Machen) 박사의 "신앙 이란 무엇인가?"(What is faith, 1925) 보다도 말씀계시의 우위성을 고조시켰다. 결국 그의 견해는 이성이 가능하도록 계시진리를 전제할 필요성을 특이하게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앞에서도 거론한 것처럼 전제주의 신학사상으로 불리운다. 왜 그가 그와 같은 입장을 가지게 되는가 하면 "이성의 법칙과 과정을 창조하고 유지하고 있는 기독교의 하나님 '영원부터 자존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없다면 인간의 사고 그 자체 도 불가능해질 것이기 때문" 16) 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반 틸의 경우에 이성의 위치는 하나님의 계시에 근본적으로 또 실제적으로 의존되고 있다.

 

(3) 이성의 적용문제에 관한 그의 입장

 

반 틸은 "이성에 대한 계시의 우위성"을 말하면서도 극단적인 측면에 서 이성사용의 불가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연이성을 가지고 는 구원사역에 종속할 수 없고 "성령으로 중생한 이성으로 변화될 때만 이 계시에 의한 윤리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 17) 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사상 속에는 "계시의 진리를 전제하고 하나님은 자신의 계시를 초월하기 때문에 논리가 계시에는 적용되지만 하나님 자신에게는 적용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18) 즉 반틸은 중생한 이성을 계시의 종으로서 사용하며, 그의 저서 중의 하나의 제목을 빌어 말한다면, "신앙을 변증하 는데"(In defense of the faith) 중생한 이성을 사용한다. 19)

 

결국 반 틸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이성을 이성답게 사용하는 법은 피조물로서의 이성, 자충족성이 없는 이성의 제한성, 더 나아가서 부패 한 자연이성에서 성령으로 중생한 이성 그리고 계시를 수용하고 수종드 는 이성으로 깨닫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합리주의자나 알미니안 주의자 그리고 토미즘주의자는 이성을 그릇되게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철없는 이성을 지나치게 추켜 세우므로써 이성자체를 교만하게 만든 장본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창세기 3장에 나타났던 유혹자 뱀과 같은 충동이었다.

 

마땅히 이성은 서야 될 자리에 서야 되고, 앉아야 될 자리에 앉아야 되는데, 잘못된 추종자들 때문에 도리 이상으로 높은 자리에 앉아서 오랜 역사를 군림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구데타로 집권한 이성을 하나님 말씀으로 재혁명(개혁)하여 우상의 자리에서 끌어내려서 계시의 말씀을 권위적인 상좌에 모시고 거듭나고 변화된 이성으로 백의종군하라는 것이다. 얼마나 반 틸의 신학이 탁월하고 장엄한가!!

 

반 틸은 나의 신조(My Credo)라는 그의 입장을 요약해 놓은 간결한 요약서에서, 다른 기독교 사상가들이 충분히 이성적이지 못했다고 지적 한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이성을 충분히 견지해 나가지 못했다는 것이 다. 어떤 사상가들은 반 틸의 사상을 오해하여 맹신주의라고 꼬집고 있으나 그것은 반 틸의 신학체계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는 그에 대하여 논평할 때, 이성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이성에 대해 단지 계시의 우월성을 부여하는 사람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마도 가장 객관적이고 공명정대한 평가일 것이다.

 

(4) 기독론적인 유신론

 

반 틸은 바울신학C 의 경우처럼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을 말한다. 사실, 신학에 있어서 기독론적 이해 없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속성과 사역을 올바르게 논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그런 측면 에서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물론이요, 종합주의적인 로마 가톨릭교와 급진주의, 자유주의 신학과 종교 보편주의 운동은 기독교적인 궤도를 많이 이탈한 엉뚱한 신학사조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가 단지 학문적 범주에 머무는 종교라고 생각하면 나름대로 어떠한 접근방식이든지 허용될 수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기독교는 학문 이상의 신앙세계이며, 그 신앙은 상대적인 차원에서의 신앙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순수한 신앙은 절대적인 차원에서의 신앙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즉 바른 신앙은 절대 신앙에 근거한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일무이한 성경적 이해가 아닌 제멋대로의 무책임한 접근방식이나 "예수의 십자가가 없는"(The empty cross of Jesus) 20) 종교적 발상은 구속론적 측면에서 볼 때, 허구이며 무용한 철학적 유신론으로 떨어진 다. 그러므로 필자의 견해는 반 틸의 사상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한다. 진정으로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의 생의 의미는 기븐적으로 "창조-타락-구속"의 도식에서 본 새로운 세계관이 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이라는 전제가 없이는 우리는 하나의 사실조차도 올바르게 해석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없는 사실들은 맹목적인 사실들이 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서 아무런 이해 가능한 관계를 가지지 못할 것이 다." 21)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해와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시는 거룩한 사역이 무엇 인가?를 분명히 인식할 때만이 기독교의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이라 고 생각된다. 반틸은 이러한 기독론적 하나님 이해를 분명히 피력하고 있다. 22)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올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정확한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사실 신정통주의자인 칼 발트(Karl Barth)는 불트만(Bultmann)이나 부룬너(Brunner)와는 달리 철저하게 기독론적으로 그의 "교회 교의 학"을 다루었다고 반 틸은 보았다. 23)

 

오로지 기독론적인 신학만이 참으로 살아있고 충분히 능동적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교제)를 바로 말할 수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발트의 기독론은 모든 참 신학의 연구에 열쇠가 된다 고 반 틸은 보았다. 24)

 

그러나 반 틸은 곧 발트의 기독론을 비판하기 시작한다. 물론 발트는 17세기의 정통주의 신학에로 다시 접근하기 위하여 18세기와 19세기에 팽배했던 계몽주의 사조에 따른 자유주의와 고등비평주의와 대항하여 그의 교회 교의학을 집대성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를 가리 켜서 신정통주 의자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발트에게 있어서 성육신 사건은 역사성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물론 기독론적으로 구성된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 안의 은혜의 신학 (A theology of grace)D이며, 하나님은 그의 존재를 인간과 공존재 (共 存在) 안으로 확장하신다.

: D Berkouwer"칼 발트웨 신학에 있어서 은총의 승리"에서 그를 옹호함.

 

그는 자기의 존재를 인간의 존재와 동일시하시고, 인간의 존재를 거룩 한 존재에 참여하는 존재로 변형시킨다.

 

한 완전한 주격 전도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기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본래 은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발트는 말하기를 "은혜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의 마음대로 줄 수도 있고 거두 어갈 수도 있는 하나님이 아니고, 그것이 하나님에게 속할 수도 있고, 속하지 않을 수도 있는 단지 한 속성(屬性)에 불과하다" 25) 고 하므로써 초절주의적인 은혜관을 가졌다. 이러한 점을 반 틸은 비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반 틸의 기독론은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가운 데 성경적 기독론을 주장하고 있으며, 그가 주장하는 성경적 기독론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고 그의 속성과 사역을 이해하자는 것이 다. 그런 까닭에 반 틸에게 있어서 성육신되신 역사적 예수는 하나님의 계시이며, 하나님의 속성과 사역을 표현한다고 보았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초월성)을 표현하였고, 예수 그리스도? 84; 통한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였으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한다.

: C Nerman Ridderbos, Paul, An outline of his theology.

 

(5) 존재론적 삼위일체(ontological trinity)

 

반 틸이 주장하는 삼위일체 교리는 존재론적으로 본질이 동일한 위격 들을 설명한다.

 

그는 "성육신하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라." 26) 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부 하님과 더불어 영원 전부터 함께 계신 존재론적 삼위일체 내의 제 이위(第二位)이시라"는 성경적 진리를 피력 하고 있다.

 

그런데 반틸의 기독론은 게노시스 교리(Kenosis doctrine) 27) 처럼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실 때, 자신이 가지신 신성(神性)을 버리셨다던 가 또는 그리하여 하나의 인간이 되셨다는 말이 아니라고 단언하여 말한 다. 그는 또 "그리스도께서 신적인 인간이 되셨다는 말도 아니라" 28) 고 말한다.

 

그리고 반 틸은 계속해서 그의 기독론을 전개한다. 그가 본 성육신 사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가 지닌 신성과 인성이 구별없이 하나로 뒤섞여 버렸다는 뜻도 아니다.‥‥‥ 신성을 항상 지니고 계신 그리스도께 서 이미 그가 가지고 계신 신성에 인성을 또 취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인성은 그가 이미 지니고 계신 신성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그리스도의 양성(兩性)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는 것이다.

 

정녕 칼케돈(Chalcedon) 신조(주후 451)29)는 이 모든 사실들을 정리 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서로 혼동되거나 또는 변화되거나 혹은 분열되거나 분리됨이 없는 두 개의 성품으로서"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었다고 표현하였다.

 

반 틸은 성령에 관하여 설명할 때에도 기독론적인 차원에서 전개한 다. 그의 구원론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구속사역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적용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 30)

 

그래서 반 틸은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복종시키심은 그의 성령을 통하여 일어나는 일이며, 그리스도께서 행하여 놓으신 일을 취하 여 그것을 우리들에게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 이시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반 틸의 주장은 그리스도가 바로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이며, 성령도 다른 분이 아니시며 하나님의 영이시며, 그리스도의 영이시니 본체론적으로 삼위(三位)는 한 분이신 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의 속죄사역 을 통해서 이룬 것이며, 이것을 우리들에게 주관적으로 적응시키시는 성령께서도 역시 그 자신이 존재론적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필연적으로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셔야만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모든 구원사역이 하나님의 단독사역이 아닌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시 그의 비공유적 (절대적) 속성들을 끝까지 손상시키지 않으려면, 구원사역에 있어서 주도권이 인간이 아리라 바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되셔야만 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자명한 정통 진리인 것이 다. 31)

 

(6) 메이첸 스타일의 탁월성과 보수성

 

반 틸은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성경지식에 풍부한 신학자들을 만났다. 가장 큰 영향을 입은 성경신학자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 를 비롯하여, 핫지(C.W. Hodge)와 암스트롱(William Park Armstrong), 로버트 월슨(Robert Dick Wilson), 오스왈드 알티 스(Oswald T. Altis), 그리고 특별히 그레샴 메이첸(J. Gresham Machen)을 만났다.

 

1차 세계 대전 후의 10년간인 1920년대에 독일의 대학들은 깨어진 주지주의(主知主義)의 잿더미 속에서 허덕이므로 미국의 기독교계에도 반주지주의(反主知主義)의 물결이 몰려들었다. 이러한 경향 때문에 "복음습?단순성"이란 신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여기에 대해서 그레샴 메이첸은 재빨리 대처하여 그 거한 운동의 좁은 생각을 분석해서 그들에게 경고했다. 32) 훗날 이와 같이 반 틸이 휘두르게 된 양날 선 복음의 칼은 프린스톤 신학교의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뿐 아니 라 프린스톤 대학교의 이성적인 환경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결국 반틸이 가지게 된 변증학적 탁월성과 보수성은 세 가지 준비 단계가 있다.

 

첫째로 네델란드에서의 나누어진 경건한 문화적 단계가 있었고, 둘째로 그랜드 래피즈에서의 강렬한 칼빈주의적 단계가 있었으며, 세째로 프린스톤에서 학문적으로 세련된 지적능력 함양의 단계가 있음으로 해서 자유주의에 대한 평가 능력과 보수주의적인 입장의 정립이 형성되어졌다. 실제로 코넬리우스 반틸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준 4명의 저명 한 학자는 죤 그레샴 메이첸, 게할더스 보스, 아브라함 카위퍼 그리고 클라우스 스킬더 (Klaus Schilder)였으나 33) 그 중에도 변증적인 날카로 움은 메이첸의 영향을 받았다. 어떻게 반틸 같은 변증학자가 두 명의 성경신학자와 신약학자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입어서 변증학적인 칼잡이 가 되었는지는'하나님의 경륜에 속한다고 볼 수 밖에 없다.

 

(7) 워필드 보다 더 강한 성경의 권위와 영감성

 

반 틸은 오로지 성경의 권위로만 기독교의 진리를 바르게 변증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반 틸애게 있어서 성경의 위치는 신적 인 권위를 가지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믿고 있는 성경의 영감은 어디 까지나 완전영감(Plenary Inspiraton)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완전 영감설에 있어서 가장 탁월하다고 널리 인정되고 있는 프린스톤 신학교의 워필드까지도 변증학에 있어서만큼은 불신자와 더불어 중립적 영역에 서서 그리스도인의 중생한 이성이 아닌 측면에서의 "바른 이성"(right reason)을 가지고 자연계시를 본질 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했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반 틸이 지적한 바에 의하면 구 프린스톤의 변증적 방법론은 대두된 영국의 버틀러의 유추론(Analogy)에서 인용한 것이며, 그리고 러틀러의 변증학적 방법론은 더 올라가서 토마스 아퀴너스의 자연신학과 종합주의에서 따온 것이다.

 

결국 반 틸의 변증학에 있어서 이성적인 유추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 가 없다는 사실을 천명한 것이다. 반 틸은 아브라함 카위퍼를 좋아하면 서도 "카위퍼가 자연적 원리와 특덜원리(초자연적 원리)를 엄연하게 갈라놓고, 이 두 개의 다른 원리들이 상호간에 파괴적임을 들어서 자연 인과의 논쟁의 무용성을 결론으로 삼는 점에 대해서 반대하고 있다. " 34)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의 변증학(Apologetics)에서 개혁신학적인 접촉점(The point of Contact)을 모색하여 로마서 119절로 20절에 증거된 신지식(神知識)을 기독효인과 비기독교인의 접촉점으로 제시하고 있다.

 

반 틸은 말하기를 "우리는 비기독교인과의 접촉점을 말할 때 이성이 나 경험에서 찾으려고 하지 않고 비기독교인도 가지고 있는 신의식(神意識) 속에서 발견함으로서 기독교적 진리를 변증하는 일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 35) 고 했다.

 

이와같은 접촉점 문제에 관한 반 틸의 견해는 성경에 입각한 견해라 할 것이다. 반 틸이 말한 것처럼 로마 가톨릭 교회의 견해나 알미니안파의 견해는 성경을 벗어난 이성의 충족성과 궁극성을 옹호하는 견해인 것으로 성경적 견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적인 죤 칼빈과 칼빈주의 신학자들인 찰스 핫지, 워필드, 카위퍼, 바빙크에 의하여 구상된 개혁신학은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부터 유래함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성경이 시사하고 있는 바와 같이 신의 계시와 자연적으로 접촉하며 신의 계시에 의하여 둘러 싸여져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아의식은 어디까지나 신의식을 전제로 존재한다. 결국 그런 까닭에 인간이 나면서부터 선천적으로 신의식을 소유함은 불가피한 사건인 것이다. 36)

 

이렇게 반 틸의 성경적 입장은 변증의 방법론이나 "권위와 이성"이라 는 논술에서도 확연하게 들어나고 있다. 그는 원자적 방법론을 거부하고 철두철미 처음부터 성경적 증거에 의한 방법론을 주장하면서, 비기독교 인이 그들 철학의 2대 원리를 삼는 인간이성의 자율성(자충족성)과 우연론을 규탄하면서,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을 절대적 권위로 내세운다. 그는 분명히 칼빈과 같이 성경적이며, 게할더스 보스처럼 성경신학적인 변증학을 정립한 20세기의 거장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그의 변증학(Apologetics)책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우선 제일 먼저 주시해야 할 중요한 문제점은 성경에 나타난 계시가 우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 37) 고 했다. 따라서 "우리가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개혁신학적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개혁신학적 성경교리에 의해서 만 가능하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반 틸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인용한 것을 보면 "인간은 원래 행위언약의 조건으로 이 지상에 살게 되었으나 그것을 파기하였고 그래 서 하나님께서 다시 은혜언약을 수립하여 그 새로운 언약에 의하여 행위 언약의 목적을 이루시기를 기뻐하셨는데, 이외같이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언약 관계를 기록하여 표현한 것이라"는 것이다. 반틸은 이처 럼 그 교리문답서는 한층 더 성경에 관한 개혁신학적 교리라고 말하며, 계시의 필요성, 계시의 권위성, 계시의 충족성, 게시의 확실성이라는 제목 하에 서술한 것을 밝히면서, 계시의 필연성 내지는 필요성은 인간이 행위언약을 파기하였다는 사실 속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가 생각한 "계시의 권위는 성경이 부여하는 계시의 성격 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계시의 필요성과 권위와 충족성에 최종적으로 그 계시의 확실성이 첨부되어야 한다. 38) 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믿고 있는 "하나님의 존재는 자신에게 전적으로 명확하기 때문 에 죄인에 대한 그의 계시 역시 본질적으로 명확하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계시는 평범한 진리와 평범한 수단에 의해서라도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무식한자)가 다함께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은총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함으로써 차원 높은 지식인만이 이해할 수 있도록 끌어올린 발트의 계시관을 여지없이 몰아붙인다. 그러면서 그는 "칼빈이 묘사한 바와 같이, 죄인인 인간이 성령의 증거를 통하여 새로운 영의 눈을 뜰 때, 인간은 그 때부터 성경 1060; 증거하는 새 빛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라." 39) " 설명한다. "죄인이 자신의 하나님에 대한 거부반응까지를 포함해서 볼때, 자연의 모든 현상이 성경의 하나님을 계시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즉 성령의 은혜 에 의한 것이라." 40) 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반 틸은 성령와 영감성과 더불어 성령의 내적 조명(Illumination)의 궁극적 필요성을 강조하였 다

 

결 론

 

 

이상에서 논술한 바와 같이

 

반 틸은 개혁신학 체계로 발전된 변증학 체계를 가질려고 애써왔다.

 

그의 체계의 하나님 중심사상은 죤 칼빈의 사상체계와 같았다.

 

비록 반틸이 어거스틴을 기독교 형이상학과 기독교적 인식론을 시도 한 최초의 기독교 신학자였다고 인정 했을 찌라도 그는 분명히 죤 칼빈과 같은 사상적 맥락을 가지고 있었다. (Apologetics, p. 82)

 

그의 보다 직접적인 변증학적 관계는 카위퍼와 바빙크와 같은 위대한 화란의 사상가들과 핫지와 워필드와 같은 유명한 미국 칼빈주의자들과 연계되어 있다. 그는 말년에 암스텔담의 자유대학교에서 볼렌호벤과 도이벨트에 의해서 발전된 칼빈주의 철학에 크나 큰 열정을 가지고 있었 다. 그러나 그는 카위퍼나 바빙크의 사상과 아주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반 틸은 철학사의 과정과 흡사한 폭넓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 그는 탈레스로부터 죤 듀이에 이르기까지 철학적 다양성들을 자주 언급한 다. 그러나 힝상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고 그는 모든 철학체계들에 대하 여 반대한다. 그는 플라톤주의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입장에서 기독교 를 주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실재주의나 이상주의 혹은 경험주의나 이성주의에서 기독교 신앙을 방어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반틸의 강한 칼빈 주의적 하나님 중심의 입장은 그의 신학에 대한 변증학의 중요성 혹은 변증학에 대한 신학의 중요성에 관한 토론으로 말미암아 밝혀진다.

 

바빙크와 카위퍼는 변증학 위에 신학의 우선권을 내세우며 워필드는 변증학의 중요성을 내세운다.

 

바빙크와 카위퍼는 유신적 진리 체계를 먼저 가지고 나서 변증을 하려 고 한다.

 

워필드는 말하기를 실제로 기독교를 먼저 방어해야 하고, 나중에 우리 가 신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안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반 틸 은 바빙크와 카위퍼의 주장을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에 의하면 조직신학은 중심에 있고, 변증학은 주변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최선의 변증학적 방어는 최선의 성경진리 체계를 아는 사람에 의하여 반드시 만들어질 것이라고 반틸은 주장한다.

 

 

 

 

 

 

1) 월간 현대사조, 1982, 1월호 p. 36.

 

2) 같은책, 같은쪽,

 

3) Norman Geisler, Christian Apologetics, 위거찬역 Baker Book House, Grand Rapids, Michigan. p.78.

 

4) 같은책, 같은쪽 Van Til, Apologetics에서 인용.

 

5) Ibid, p. 79.

 

6) 조봉근, 변증학 개론, p. 111.

 

7) John Edward carnell, "An Introduction to Apologetics," p. 175.

 

8) J. Edward Carnell, Ibid, 같은쪽.

 

9Van Til, "My Credo" C 5. in Jerusalem and Athens, p.258.

 

10) Joseph Butler, "The analogy of Religion Natural and Revealed to the constitutlon and course of Nature" p. 1736. 참조

 

11) 박아론, 기독교 변증학, p. 178., 박형룡, 기독교 변증학, pp. 6365, 요약

 

12) 박형룡. Ibid, p. 61.

 

13) 박아론, Ibid, p. 177.

 

14) Normon Geisler, Introduction to philosophy, 위거찬역, p.296.

 

15) Bernard L. Ramm, A christian appeal to reason, 1972.

 

16) N. Geisler, 기독교 철학 개론. 같은책, 같은쪽.

 

17) Van Til, Christian Theistic Ethics, 위거찬역, p. 172.

 

18) 가이슬러, 같은책, p.297.

 

19) 같은책, 같은쪽.

 

20) Michael Green, The empty cross of Jesus, The Jelus Library, 1984, pp. 151~167.

 

21) Van Til, Defense fo the faith, p. 11. 69. 86.

 

22) Van Til, The defense of the faith, 신국원역, 기독교문서선교회, 1985, pp. 234236.

 

23) C. Van Til, 칼 발트의 기독론 비판, C. L. C., 1977, p. 15.

 

24) 반 틸, 발트의 기독론 비판, 같은책, 같은쪽.

 

25) 반 틸, 같은책, p. 16.

 

26) 반 틸, The defense of the faith, 신국원역, p.29.

 

27) Louis Berkhof, The history of Christian Doctrine, 신복윤역, 기독교교리사, 총신 대학 출판부, 1979, p. 137.

 

28) 반 틸, 신앙의 변호, 신국원역, 변증학, 같은책.

 

29) 벌 코프, 기독교 교리사, 신복윤역, p. 121.

 

30) 반 틸, 같은책, p. 32.

 

31) 같은책, 같은쪽.

 

32) 월간현대사조,198111월호 pp.2325. 요약발췌

 

33) 같은책, 같은쪽.

 

34) 반 틸, 신앙의 변호, 신국원역. p .316.

 

35) 조봉근, 변증신학개론, p. 101.

 

36) 조봉근, 같은책, p. 100

 

37) 반 틸, 변증학. 이창우 역. 기독교문화사, 1986, p. 64

 

38) 반 틸, 기독교 변증론, 이창우역, p. 65.

 

39) 반 틸, 같은책, p. 81.

 

40) 같은책, 같은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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