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에 보내는 ‘삐라(전단) 풍선’ 현장 (1)
- 북한 폐쇄사회 뒤흔드는 ‘자유의 바람’
북한민주화운동본부에서 수시로 살포… 표현이나 내용 완벽하게 북한식으로 호소력 커
“탈북자 중에서 읽었다는 사람 크게 늘어”… 정부 삐라는 DJ정부 때 없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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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5일 오후 2시쯤 인천 광역시 강화군 월계리 야산에 승합차 두 대가 도착했다. 북한민주화운동본부와 기독탈북인연합회 관계자 6명이 나눠 탄 승합차였다. 이들은 이날 아침 기상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바람 방향을 확인한 뒤 오전 11시쯤 서울에서 출발했다. 승합차 한 대에는 수소가스를 농축해 집어넣은 가스통 7~8개와 ‘삐라’ 부대 수십 개가 실려 있었다.
남자들은 먼저 가스통을 조심스럽게 운반한 뒤 비닐풍선에 수소를 주입했다. 풍선에 수소가 주입되면 탱탱해져 풍선의 길이는 12m쯤 된다. 두꺼운 줄로 주둥이를 동여매고 여기에 삐라가 담긴 부대를 3개 매단다. 이 작업을 전담하는 사람은 북한민주화운동본부 박상학 대표와 박영학 북한민주화운동본부 애드벌룬팀장. 삐라 부대를 매달고 날려보내기 직전 짤막한 기도를 올린다. 비닐풍선과 삐라 부대 3개의 무게는 7~10kg. 삐라 부대 3개에 보통 1만장 이상의 삐라를 넣는다. 삐라는 물에 젖지 않고 썩지 않는 비닐에 인쇄되었다.
북한민주화운동본부(대표 박상학)와 기독탈북인연합회(대표 이민복)가 이날 강화도 야산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북한에 날려보낸 풍선은 20개. 박상학 대표와 이민복 대표는 이에 앞서 1월 31일 경기도 포천 DMZ 근방에서도 삐라 풍선을 날려보냈다. 이들은 삐라 풍선을 ‘자유의 풍선’이라고 부른다.
언론자유와 인터넷, DMB 등 최첨단 언론환경 속에 사는 우리는 탈북자의 이런 행동을 이상하게 바라볼 수도 있겠다. 개성공단과 금강산을 마음대로 오가는 시대에 1970년대식의 ‘삐라 풍선’이 무슨 효과가 있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현재 자유북한방송(FNK)에 근무하는 김기혁 기자는 1999년에 탈북했다. 그의 고향은 평안남도 성천. 이상(李箱)의 산문 ‘성천기행’에 나오는 바로 그 성천이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남한에서 날아오는 삐라를 접했다. 그는 “평안남도 성천군에선 가랑비처럼 삐라가 내리곤 했다”면서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어 갈갈이 찢어서 버렸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의 뇌리 속에는 김영삼 대통령 취임식 사진, 김영삼 대통령 해외순방 사진, 탈북자가 해수욕장에서 노는 사진 등이 각인되었다. 김기혁 기자는 남쪽에서 날아오는 삐라를 접하면서 서서히 자신의 의식이 바뀌어가는 것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 ▲ 북한민주화운동본부 관계자들이 강화도에서 비닐 풍선에 삐라 부대를 매달고 있다.
- “남한의 1인당 국민소득이 얼마냐는 데서는 머리가 돌았시요. 그때 내가 본 삐라에서는 1만달러라고 써 있었지요. 그래서 북한 노동자의 수입과 대비를 해보았어요. 80%를 거짓말이라고 해도 2000달러가 되더라구요. 남조선에서 주장하는 것이 조금만 사실이라고 쳐도 우리보다 낫다는 데 생각이 미쳤시요.”
김기혁 기자는 “대학 다닐 때에도 머리가 안 돌았다”고 말한다. ‘머리가 안 돌았다’는 말은 ‘의식이 바뀐다’를 뜻한다. 그는 “삐라를 통해 (비로소 바깥 세상일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궁금해지기 시작하면 그 다음 몰래 라디오를 듣게 됩니다. 라디오라는 게 중독성이 있어서 한 번만 들으며 자꾸자꾸 듣고 싶어지잖아요. 그 다음이 탈북자를 통해 소식을 듣는 것이디요. ‘중국에 가니까 이팝(쌀밥)도 개를 주더라’ ‘찬밥은 먹지도 않는다’는 말을 전해 들으면서 북한을 탈출하겠다는 꿈을 키우게 됩니다.”
베스트셀러 ‘평양의 수족관’을 쓴 탈북자 출신 조선일보 기자 강철환씨. 그는 1977년부터 10년간 함경남도 요덕수용소 구읍지구에서 수용소 생활을 했다. 강철환 기자 역시 요덕수용소 시절 삐라를 수없이 보았다.
“산에 하얗게 삐라가 떨어지곤 했어요. 근데 삐라가 찢어도 안 찢어지고 태워도 안 타고 쪼그라들기만 했습니다. 처음엔 삐라가 떨어졌을 때 긴장했어요. 주웠다가는 반동으로 몰릴까 봐. 하지만 나중엔 무감각해졌습니다. 처음 수용소에 들어오는 애들한테는 보위부원이 삐라를 주우면 갖다 바치라고 겁을 줍니다. 그래서 처음에 삐라를 주워다 바쳤습니다. 북한 인민은 삐라통을 주우면 횡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안에 약재, 내의, 비타민제, 라면 등이 들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삐라 풍선이 뜨면 그걸 주우려고 산을 따라 오르기도 합니다.”
굶주림에 내몰린 수용소에서는 일단 삐라통이 떨어지면 버리는 게 거의 없다고 한다. 삐라는 밑씻개로, 비닐은 창문유리 대용으로, 풍선을 묶었던 밧줄은 소밧줄 등으로 각각 사용된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남쪽에서 보내는 삐라는 사실상 큰 효과가 없었다고 한다. 김일성이 살아 있던 당시만 해도 북한체제가 지금보다는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강철환 기자는 “1989년 동구권에서 유학 중이던 김지일 남명철 정현씨 등이 북한을 탈출해 남한으로 갔다는 소식이 삐라를 통해 알려졌을 때 북한의 충격은 정말 컸다”고 말한다.
강철환 기자와 김기혁 기자가 북한에서 받아본 삐라는 대부분 우리 정부(국방부)에서 체제선전용으로 DMZ 근방이나 해상에서 북한에 날려 보낸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가 햇볕정책을 추진한 이후 정부 당국에서 보내는 삐라는 사라졌다. 김대중 정부는 남북정상회담 직전인 2000년 4월 ‘삐라 살포를 금지해 달라’는 북한 측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현재 북한에 삐라를 보내는 곳은 탈북자가 주축이 된 북한민주화운동본부(www. nkgulag.org)다. 삐라는 A4용지 크기와 B5용지 크기 두 종류다. ‘사랑하는 북녘 동포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B5용지 삐라에는 새남선교회, 자유조선연합, 북한민주화운동본부 3개 단체 명의의 글이 실려 있다. 소제목을 보면 ‘남조선은 정말 북조선보다 독재적?!’ ‘헐벗고 굶주린 남조선?!’ ‘김일성 주석 사망원인’ ‘신천대학살의 주범은 누구인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녀자’ ‘녀배우 성혜림과 김정일’ ‘공화국에 인권이 있습니까?!’ 등이다.
- 북한에 보내는 ‘삐라(전단) 풍선’ 현장 (2)
- 북한 폐쇄사회 뒤흔드는 ‘자유의 바람’
북한민주화운동본부에서 수시로 살포… 표현이나 내용 완벽하게 북한식으로 호소력 커
“탈북자 중에서 읽었다는 사람 크게 늘어”… 정부 삐라는 DJ정부 때 없어져
- ▲ 비닐에 인쇄된 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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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민주화운동본부가 북한에 ‘풍선 삐라’를 보내기 시작한 것은 2004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북한민주화운동본부를 이끌고 있는 박상학 대표는 일가족 5명이 1999년 가을 탈북해 2000년 봄 한국에 들어왔다. 북한민주화운동본부 애드벌룬팀장 박영학씨는 박 대표의 친동생이다. 기독탈북인연합회 이민복 대표는 북한 농업과학기술원 출신의 과학자로 1995년 탈북했다.
북한민주화운동본부 측은 처음에는 문방구에서 파는 풍선을 이용했다. 북풍(北風)이 불 때 DMZ 근방에 접근해 풍선에 삐라 봉지를 매달아 날려보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인력과 비용이 많이 드는 데 비해 효율성이 떨어졌다. 풍선이 기류를 타기 위해서는 3000~5000m 상공까지 올라가야 하는데 이 풍선은 중간에서 터지는 경우가 발생했다. 국방부에서는 대형 풍선을 만들어 띄우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궁(窮)하면 통(通)한다고 했던가. 대형 풍선을 띄우는 방법을 개발한 사람은 과학자 출신의 이민복 대표였다. 수소가스를 이용해 대형 비닐로 애드벌룬을 만들었다. 헬륨가스를 이용하면 더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비용 때문에 포기했다. 이 대표는 삐라 부대가 3단계(단거리, 중거리, 장거리)로 터지도록 타이머를 개발했다. 공중에 떠오른 지 30~40분 지나 터지는 게 1단계로 DMZ 부근의 인민군용이다. 2단계는 DMZ를 너머 평양 이남에서 터지도록 되어 있고, 3단계는 평양 시내 한복판을 겨냥한다.
북한민주화운동본부 측에 따르면 북한 당국은 지난 1년간 한국 정부에 10차례 ‘삐라 풍선’에 대해 항의했다고 한다. 이민복 대표는 “이런 반응은 그 어떤 것에도 꿈쩍하지 않던 (북 당국이) 삐라 풍선으로 치명상을 받고 있다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남북한은 40년 이상 서로가 서로에게 체제선전용 삐라를 날려보냈다. 탈북자의 말을 종합하면, 그 동안 군 당국이 날려보낸 삐라는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원인은 두 가지다. 하나는 앞서 언급한 대로 1970~1980년대 북한체제가 나름대로 안정되어 있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삐라의 내용이 북한 실정과 맞지 않게 기술되었거나 지나치게 자본주의 냄새가 강했기 때문이다.
이민복 대표는 “특히 삐라의 내용에 영어식 표기를 남발했다는 것이 문제였다”면서 “이것은 오히려 북한 주민으로 하여금 남한이 미제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북 당국의 주장을 믿게 했다”고 말한다.
Hungary를 우리는 ‘헝가리’라고 표기하지만 북한에서는 ‘웽그리아’라고 쓴다. 또한 World Cup을 한국에서는 월드컵이라고 하지만 북한에서는 ‘세계축구선수권대회’라고 쓴다. 그 동안은 북한에서 실제 쓰는 언어로 삐라를 만들지 못했다는 얘기다. 실제로 과거 대북 삐라를 작성하는 군 당국에 탈북자 출신은 한 명도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현재 탈북자가 작성한 삐라는 어떻게 다른가. 북한민주화운동본부가 만든 삐라에서 ‘녀배우 성혜림과 김정일’의 일부 내용을 옮겨본다.
1970년 인기영화 ‘한자위단원의 운명’을 기억하시죠. 주인공 갑룡(엄길선)의 약혼녀(성혜림)가 그 후 나타나지 않지요. 1960년대 인기영화 ‘분계선마을에서’ ‘백일홍’ 등의 주역으로 모두 알고 있던 그녀가 왜 갑자기 사라졌을 가요?!
- ▲ 한자리에 모인 '삐라 풍선' 주역들. 왼쪽부터 박영학 팀장, 박광일 사무국장, 박상학 대표, 이민복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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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문예총련맹 위원장 리기영의 아들 리평의 안해였습니다. 그러나 김정일은 강제 리혼시키고 아들(김정남)을 낳았습니다. … 김정일과 성혜림 관계 당시는 당 5차대회로선인 ‘온 사회의 혁명화, 로동계급화’로 남녀가 련애만 해도 간첩 잡듯 투쟁하던 시기였지요. 특히 예술인들은 7일 생활총화를 2일로 강화한 때입니다. 이런 시기에 지도자동지의 뒤면은 참으로 놀랍지요. 그 당시 인기영화 <목란꽃> 주인공 우인희 인민배우를 부화했다고 죽인 지도자 동지는 과연 녀자문제가 깨끗한가 말입니다.
삐라의 내용은 완벽하게 북한식이다. 북한 사람 입장에서도 어색하거나 거북한 대목이 없다. 이민복 대표는 “레이더에도 안 잡히고 소리 없이 하늘로 날아가는 풍선만이 폐쇄사회인 북한을 자유롭게 뚫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면서 “폐쇄문화는 구전문화를 발달시켜 삐라 한 장이 수천, 수만의 입이 되어 저절로 전파된다”고 말한다. 박상학 대표는 “삐라는 북한 주민에게 인권의 눈, 민주화의 눈을 키워준다”면서 “최근 탈북해 온 사람은 우리가 날려보낸 삐라를 읽어봤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삐라 풍선 하나를 북쪽으로 날려보내는 데 드는 비용은 10만원 선. 북한민주화운동본부는 모든 경비를 후원금으로 운영하고 있다. 박상학 대표는 앞으로 북한 주민에게 삐라와 함께 달러도 동봉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여건이 허락되면 비닐 삐라 속에 1달러를 넣어 보낼 생각입니다. 1달러는 북한에선 3000원에 거래됩니다. 3000원이면 북한인민들 한달 월급이에요. 삐라 내용보고 좋아, 한 달 월급 벌어 좋아. 이거 얼마나 좋습네까?”
조성관 주간조선 차장대우 mapl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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