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요리·음식

[스크랩] 고구마순 멸치볶음

by 해찬솔의 신학 2007. 5. 24.
고구마순 멸치볶음

⊙준비할 재료
고구마순 300g, 굵은 멸치 100g, 들깨 2큰술, 물 ⅓컵, 다진 마늘 ½큰술, 다진 파 1큰술, 국간장 1큰술, 참기름· 깨소금 1큰술씩, 식용유 약간
⊙만드는 방법
① 고구마순은 질긴 섬유질을 벗겨낸 후 끓는 소금물에 푹 무르게 삶아 건진 다음 찬물에 담가 식혀 먹기 좋은 길이로 자른다.
② 굵은 멸치는 머리와 내장을 제거한 후 가늘게 찢는다.
③ 들깨에 물을 붓고 분마기에 곱게 간다.
④ 볼에 삶아낸 고구마순과 다진 마늘, 다진 파, 국간장을 넣고 조물조물 무친다.
⑤ 뜨겁게 달군 넓은 팬에 참기름과 식용유를 두른 뒤 ④의 양념한 고구마순을 넣고 볶다가 손질해둔 굵은 멸치를 넣어 다시 볶는다.
⑥ 멸치가 충분히 볶아져 맛이 나면 갈아둔 들깨를 넣고 뚜껑을 덮어 잠시 뜸을 들인다.
⑦ 뜸이 충분히 들면 깨소금과 참기름을 넣고 잘 섞어 낸다.
⊙TIP
섬유질을 벗겨낸 고구마순을 끓는 소금물에 넣어 푹 무르게 삶는다. 삶아지면 찬물에 식혀 건져낸다.
출처 : 고구마순 멸치볶음
글쓴이 : 홍이 원글보기
메모 :
21세기 인류문화의 새로운 좌표를 짚어본다


장회익

△1938년 경북 예천 출생 △1961년 서울대 물리학과 졸 △1969년 미국 루이지애나주립대 물리학 박사 △1969∼1970년 미국 텍사스대 물리학과 연구원 △1971년 서울대학교 조교수 임명 △1981년 서울대학교 교수 △주요 저서로 ‘과학과 메타과학’(90년),‘삶과 온생명(98년) 등이 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50년전 두 개의 질문을 던졌다.그는 “1백년 후 역사가들에게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건을 말하라고 하면 무엇을 지적할 것인가” 하는 것과 “천년 후의 역사가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를 물었다.

첫째 물음에 대해 그는 “서구 문명이 주변 세계에 부과한 충격을 지적할 것”이라고 말했다.이 답변에 대해서는 50여년이 지난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이 별 이의를 품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대답은 다소 의외였다.“서구 문명의 희생자들이 침략자에게 부과한 놀랄만한 반사 효과에 대해 주목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서구 문명의 영향이 당장은 크게 부각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서구의 충격을 받은 주변 문명들 가운데 등장할 그 어떤 문명사적 지각변환이 인류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리라는 것이다.토인비는 주변 문명에 머물던 인도와 동아시아 문명 속에서 무엇인가가 싹틀 것임을 내비쳤다.

우리는 지금 서구 문명의 엄청난 충격과 압도적 영향력 속에서 아직 혼돈을 겪고 있다.그동안 신성시되던 각종 이념이나 가치들은 무너져내렸지만 새로운 가치는 좀처럼 그 모습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무엇인가 크게 잘못 되고 있다.

‘월드워치 연구소’가 펴낸 ‘1999년도 세계현황’ 보고서를 보면 우리가 현재 인류 문명사의 어떠한 지점을 통과하고 있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현생 인류는 ‘문명’ 시작 이전까지 오랜 기간 동안 약4백만명의 인구를 유지하다가 문명을 이루면서 서서히 그 숫자가 증가하여 기원 원년 경에 대략 1억명이 됐고 다시 기원 1000년에는 3억5천만명,그리고 오늘날 60억명에 이르고 있다.

인구 증가와 이에 따른 물자의 증산이라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엄청난 번영이라고 할만하다.그러나 이는 오직 생태계 파괴라는 무서운 대가를 치르고 얻어낸 참담한 결과물이다.자원의 소모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생태적 요소 마저 회복 불능의 상황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지하수 수위의 하강,산림면적의 감축,수산자원의 감소,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생물의 대규모 멸종이 바로 그것으로 우리 삶의 기반 자체를 무너뜨리고 있다.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지수함수적 성장이 더 이상 길게 지속될 수 없다는 점이다.조만간 생태계의 건강을 회복시키지 못한다면 인류의 자멸을 포함한 전지구적 대참사를 모면할 방법이 없다.

생태계적 측면에서만 보자면 인구 4백만으로 ‘생태학적 균형’을 이루고 있던 문명 이전 시기의 생태계로 복귀하는 것이 가장 타당한 해결책일 것이다.그러나 현재 인구로 4백만명이 살던 문명이전의 생태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1천5백개의 지구가 필요하다.그러나 잘 알다시피 우리에게는 지구는 하나 뿐이다.

말하자면 1천5백개 지구에 분산 수용해 ‘생태학적 균형’을 이룰 인구를 하나의 지구에 모두 수용하고도 여전히 ‘생태학적 균형’을 이룰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기술적 어려움에 앞서 더욱 중요한 문제는 우리들 대부분이 이러한 사실 자체를 아직도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연하게도 우리가 이런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 바로 새 천년으로 넘어서는 문턱과 일치한다.인류가 만일 새 천년을 의미있는 새 시대로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이를 계기로 생태학적 측면에서 인간의 존재에 대해 원천적인 의식 전환을 시도해야 한다.지금까지 우리의 주된 관심사가 자연과 대항해 환경을 개척하고 삶의 여건을 인위적으로 개선하는 데 있었다면 이제 반대로 자연과 더불어 어떻게 조화로운 삶을 살 것인가’ 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역사적 과제로 삼아야 한다.

우리는 가장 소중한 것 즉 ‘생명’에 관해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고 있다.사실 현대 과학은 생명을 겹겹이 싸고 있던 많은 신비를 벗겨냈다.

그러나 아직도 인류는 ‘생명이 과연 무엇인지’‘생명 속에서 우리 삶에 관련된 어떤 의미와 방향을 찾아 볼 수 있는지’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았다.오직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개체생명의 물질적 이해만을 추구하고 이를 활용한 기술적 조작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왔을 뿐이다.우리는 지금까지 하나하나의 개체생명이 생명의 궁극적 실체라고 생각하고 개체의 보존과 번영에만 모든 노력을 기울여 왔다.그러나 생명의 본질은 기왕에 익숙해진 개체생명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생명’이라 불리울 좀더 큰 규모의 것에서 찾아야 한다.

그 동안 우리가 단지 ‘환경’이라고만 불러 왔던 우리 주변 생태계와 태양,지구가 모여 온전한 한 생명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우리가 만일 자신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긴다고 하면 이보다 더 근원적인 ‘나’ 즉 ‘온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의식 전환은 매우 어렵다.일상적 경험과 감성을 통해 구성된 좁은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과학이 제공하는 우주적 시각을 통해 생명을 이해하고 이를 다시 우리의 심정 속에 받아들이지 않고는 이루기 어려운 일이다.

한 가지 고무적인 사실은 동아시아 문명을 비롯한 일부 동양 전통 문화들은 생명이 지닌 이러한 온생명적 성격을 직관을 통해 이미 이해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예를 들어 유가에서는 천지인(天地人)을 구분되지 않은 총체적 생명으로 보는 관념을 깊숙이 지니고 있으며 불교의 화엄사상 또한 생명이 개체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지탱해 주는 연기의 형태로 존재한다고 말한다.도가 또한 자연을 곧 온생명으로 파악하고 이에 맞추어 삶을 영위해 나가야 한다는 사상을 담고 있다.

삶의 바른 자세를 애써 추구해 온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일찍부터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온생명 안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성격을 지녔음을 직관적으로 통찰한 것이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와 편의를 도모한다는 근대 기술문명이 급속히 전파되면서 전통적 관념은 오히려 비과학적 사물인식의 소산인 듯이 여겨지면서 오로지 인간중심,더욱 좁게는 개인 중심의 가치관이 팽배하고 있다.현대 과학을 통한 ‘온생명’의 이해는 새로운 도움의 손길이다.동양의 전통적 생명의식에 과학적 시각을 통한 새로운 생명관을 수용한다면 이러한 두 가지 생명 이해가 내적인 공명을 일으킴으로써 온생명적 생명관이 우리 의식 속에 보다 확고하게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

반 세기 전 토인비는 천년 이후까지도 그 중요성이 인정될 중요한 문화적 기여는 서구의 충격을 받은 동방에서 올 것으로 기대했다.

이제 우리가 동양의 전통사상 뿐 아니라 서구의 과학사상을 함께 접합시킴으로써 토인비의 이러한 기대에 부응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1999년 12월 31일 17시 36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