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독교

무소유의 삶은 가능한가?

by 해찬솔의 신학 2019. 1. 27.






 

                                                무소유의 삶은 가능한가?

                                                                                                                                                                                                                                                                                              김한영 목사



 

인간은 욕망을 가진 자연 존재(Naturwesen)이면서 동시에 이성을 가진 존재라 규정된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욕망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이는 인간이 생존하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조건을 이룬다. 이점에서만 본다면 인간은 다른 자연 존재, 즉 식물이나 동물과 잘 구별되지 않는다. 식물이나 동물도 나름대로 생존을 위한 욕구를 가지며 이는 서로간의 생존 경쟁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들은 일차적 욕구가 어느정도 충족되면 자기 만족에 도달하여 더 이상 무모한 경쟁을 시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욕망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도 없으려니와 비록 욕망이 충족됐다 하더라도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슈펭글러인간과 기술(1931)에서 인간을 맹수로 규정하거니와 그렇다고 단순히 맹수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본능에 호소할 뿐만아니라 나아가서 보다 체계적으로 욕망의 충족을 기획한다. 인간은 손과 언어를 통해서 도구의 사용 및 그 제작 그리고 의도된 기획을 수행할 수 있다. 인간은 마침내 기술을 동원하여 세계를 메카니즘화한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손을 사용하여 도구를 제작하고 도구는 발전하여 고도의 현대 기계(컴퓨터)가 된다. 이는 인간의 사유를 대변하는 것이며 이러한 사유는 오성에 의해서 총괄된다. 오성은 감성적 차원을 넘어서서 본질(법칙)의 세계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단순한 감성적 사유보다는 분명 한단계 높은 차원의 사유 활동이다. 도대체 현대 기술 문명을 가능케한 것은 오성적 사유의 덕택이다. 오성이 없었더라면 인간은 아직도 자연 상태의 삶을 영위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자연은 때로 재앙을 가져오는 인간의 적이면서 신비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오성을 가짐으로써 자연을 벗어나서 마침내 도리어 그것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인간은 이제 고도의 인공 지능을 앞세운 현대 기술에 의해서 화성을 비롯한 우주 정복에 나서고 있다. 이것은 가히 인간 오성의 승리인 것처럼 보인다. 삐에르 딸라 드 샤르뎅(Pierre Teilhard de Shardin)의 희망처럼 인간이 우주의 지배자이고 우주의 과정은 실제적인 어떤 궁극 목적(유토피아)을 향해서 꾸준히 나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cf. Entstehung des Menschen, aus dem Franzoesischen von G. Scheel, Muenchen 1982). 인간은 가히 과거의 하느님을 대신하여(형이상학적 욕망을 통하여) 세계를 지배하는 새로운 기술을 가진 하느님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가속도로 발전하는 현대 과학 기술의 발전만을 안중에 둔다면 이러한 희망은 단순한 망상이나 유토피아가 아닐지도 모른다. 인간은 다만 지금까지의 길을 계속 가기만 하면 만사는 매우 순탄할 것이다.

 

 

그러면 이처럼 스스로 하느님의 지위에 들어섰다고 자부하는 인간은 자신의 출발점인 욕망을 극복한 것일까? 그가 신뢰하여 숭배하는 오성의 차원은 욕망의 차원과는 완전히 별개의 것일까? 물론 오성은 인간의 욕망을 채운다는 직접적인 의도를 가지고 출발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또한 가치 중립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성은 일차적으로 자연을 탐구하고 인식하려 하지 그것을 파괴하고 지배하려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오성이란 근본적으로 욕망에 봉사하며 직접적으로는 아니라 하더라도 욕망을 일깨우고 그것을 부채질하는 역할을 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표면상의 중립성은 오성의 교만과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보다 교묘하게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광분하는 것이다. 직접이든 간접이든 그는 자연과 다른 인간을 지배하고 파괴시키기 위해 책략에 책략을 거듭하는 것이다. 이점에서 오성이란 형이상학적 욕망이라 규정될 수 있다. 이제 한편에서는 이러한 오성의 월권 행위를 경계하고 규탄하는 경향이 생겨나고 있다. 오성이 눈먼 지배의 기획에 전념하는 동안 인간은 자신의 다른 본래적 차원인 이성의 차원, 정신 존재(Geisteswesen)의 차원을 망각하는 것이다. 참된 정신 존재의 차원이란 무엇일까?

 

 

인간의 위대성은 단순히 자연 존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서 이성을 소유한 정신 존재라는데 있다. 인간이 만일 정신 존재의 차원을 결여한 단순한 자연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면 자신의 한계점을 자각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한편으로는 자기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 사실을 자각하는 존재이다. 즉 그는 정신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불완전한(유한한) 정신 존재이다. 참된 정신 존재는 타자(자연, 인간)를 단순한 수단으로 삼는 대신 그것을 그 자체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배려를 할 줄 안다. 헤겔이 말하듯이 정신이란 타자속에서도 자기의 동일성을 상실하지 않는다. 즉 타자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타자와 관계하면서도 그 타자의 자립성(즉자 존재)을 인정함으로써 자기의 자립성을 상실하지 않고 그 타자에 있어서도 사실은 자기 자신에 있어서(bei sich selbst) 존재한다. 반대로 오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타자를 그 자체의 권리를 가진 존재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것을 폭력적으로 지배하려 하며 타자에게서 자기 자신으로 귀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또 하나의 타자로 전락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있어서 존재하지 못한다. 이는 바로 오성이 단순한 감성적 욕망의 차원의 연장에 지나지 않으며 아직 참된 정신의 차원인 이성에는 도달하지 못한 상태임을 뜻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진정 참된 정신 존재일 수 없단 말일까? 인간은 적어도 자신의 한계점을 자각하고 그것을 개선하려 시도할 수 있다. 그럴때 여태까지의 삶의 방식을 반성하고 그것을 개선하려 시도할 수 있다. 인간의 일상적 삶에서 그가 욕망을 가진 존재로 규정된다는 것은 그가 무엇인가를 소유하고자 한다는 것과 그 욕망이 채워진 후에도 계속해서 끝없이 무엇을 소유하려 함을 뜻한다. 그래서 인간이 참된 정신 존재로 거듭날 수 있는지의 물음은 그가 소유를 포기할 수 있는지, 아니면 소유욕을 제한시킬 수 있는지의 물음으로 환원된다. 물론 인간은 정신 존재일 뿐만 아니라 자연 존재, 즉 생물이기도 하므로 소유욕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가 자신의 소유욕을 현저히 제한시켜서 타자로 하여금 침해당함이 없이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면서 존재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느냐이다.

 

 

헤겔은 정신이 타자, 즉 자연과 관계를 맺는 한에서의 정신을 자연 정신(Naturgeist) 또는 주관적 정신이며 이는 자기 자신을 파악함으로써 객관적 정신에 도달한다고 한다. 주관적 정신이 타자와 관계를 맺는다는 점에서 즉자적으로만 자유로운(nur an sich frei)데 반해서 객관적 정신은 이 타자로부터 자기 자신으로 귀환하여 자기를 자각한다는 점에서 대자적으로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객관적 정신은 한 개인으로서 자기의 자유의 실재성을 물건가운데 고정시켜서 소유로 삼는다는 점에서 아직 주관적이다. 여기서의 자유는 아직 불완전하고 추상적이다. 이 추상성은 이기적이 아닌 이타적인 인륜 세계인 국가에서 비로소 지양된다. 그러나 객관적 정신으로서의 국가가 결여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다만 정립된 객관성(nur eine gesetzte Ovjektivitaet)이라는데 있다. “세계는 다시금 정신으로부터 자유롭게 해방되고 정신에 의해서 정립된 것은 동시에 직접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als ein unmittelbar Seiendes)파악되어야 한다.”(Enzy. §385 Zus.) 헤겔에 있어서 이처럼 객관적 정신의 한계점을 극복한 상태에서의 정신은 물론 예술, 종교, 철학이라는 절대적 정신이다. 여기서 본다면 헤겔에 있어서 결국 정신은 완전성에 도달하여 감성과 오성의 차원을 지양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결론은 역시 피상적이고 일면적이다. 헤겔의 체계안에서 조차 이 결론은 유지될 수 없다. 헤겔은 절대 정신의 최고 형태인 철학에서 조차도 오성적 요인이 필수적임을 인정한다(Enzy. §80 Zus.). 또한 주관적 정신, 객관적 정신, 절대적 정신의 변증법적 발전의 순서도 역시 논리적 서술에 있어서만 그러할 뿐 실제로는 모두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정신은 어디까지나 시간성안에서 전개되며 여기서 절대 정신의 완전성을 여지없이 교란시키는 우연성, 유한성은 끝내 완전히 지양되지는 않는다. 다만 이러한 시간성(역사성)에 있어서 삼라만상이 전개되는 과정 전체가 진리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진리가 존재(zu sein)할지는 몰라도 그것을 소유(zu haben)할 수는 없다. 또한 헤겔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학문적 혼란상을 감안한다면 헤겔의 체계는 존재하는 사실에 대한 단순한 서술(존재학)이 아니라 이를 어떤 식으로든 비판하려는 규범학의 성격을 띤다는 점에서 일종의 사유 모델이라는 점이다. 헤겔이 법철학서문에서 “[...] 철학은 언제나 너무나 늦게야 온다. [...]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과 더불어 비로소 그 날갯짓을 시작한다”(PhdR 28)고 고백함으로써 철학 자체에 회의하고 있음은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인간은 과연 자기의 욕망을 제거 또는 제한하여 진정한 의미에서 무소유의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단순히 어떤 형태로든 재산을 전혀 소유하지 않는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욕망(욕심) 자체의 체념에서 비롯되는 초연성(Gelassenheit) 을 뜻한다. 우리가 현상으로 드러난 현대의 메카니즘적 삶의 모습을 일별해 본다면 이에 대한 긍정적 대답을 기대하기 어려울 듯하다. 비탈길을 달려 내려오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기 위하여 점점 더빠른 속도로 계속 달려 내려갈 수 밖에 없다. 욕망을 완전히 제한하여 초연한 삶을 영위한다거나 아니면 반대로 욕망적 삶을 극대화하여, 즉 욕망을 완전히 충족시켜 풍요로운 삶을 유지한다는 생각은 유토피아적이다. 왜냐하면 현재 인간의 삶의 모습 - 위기의 상황 - 의 평균성은 그 필연성을 말해주며 결코 인간의 우연한 실수에서 비롯된 가상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헤겔은 개인과 절대 정신의 관계를 이성의 꾀(List der Nernunft)”라 나타내지만 이성의 꾀는 이제 자기 자신을 몰락시키는 꾀로 전락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cf. Igor S. Narski: Die verkehrte Welt, List des Verstandes und List der Vernunft bei Hegel, in: Analien..., Koeln 1983, S. 136-140)? 이점에서 이성의 꾀보다는 오히려 오성의 꾀(List des Verstandes)”가 아닐까? 그렇다! 오성은 자기와 자연 대상사이에, 자기와 자기의 욕망사이에 타자(기술, 자연)를 삽입시킴으로써 그것을 지배, 정복하려고 하지만 이제는 도리어 그 꾀에 자신이 걸려들고 있다. 오성은 오히려 자신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서 자신을 대상으로, 수단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그러나 오성은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자기가 스스로 설치한 덫을 벗어날 도리가 없다. 겉으로 보기에 무한한 능력을 가진 듯한 이 오성의 위력만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한 인간은 멸망과 자기 부정의 무한한 딜렘마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일찌기 슈펭글러는 서구의 몰락을 선언했다. 여기서 말하는 서구란 지리상의 서쪽만이 아니라 이러한 오성을 바탕으로 한 기술 문명 전체에 대한 통칭이다. 이처럼 오성의 황금 시대는 인간의 몰락, 지구의 몰락이라는 드라마를 예고하는 셈이다.

 

 

이제까지의 결론을 상기해 보자. 인간이란 자연 존재이면서 동시에 정신 존재이다. 즉 인간은 감성과 오성뿐만이 아니라 이성의 차원까지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날 절감하고 있는 각종 위기는 이시대가 부담할 수 밖에 없는 필연적 결과이다. 인간은 물론 선택에 따라서 다른 길을 갈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는 바로 이러한 세계를 있도록 한 길을 걸어왔다. 문제는 이 시점에서 철학의 가능성을 제고해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만일 인류와 지구의 운명이 몰락을 향하도록 벌써 결정지어져 있다면 철학은 아무런 할 일이 없을 것이다. 어쩌면 철학은 현실을, 현존하는 세계를 변혁시키기에는, 헤겔이 말하듯이, 언제나 너무나 늦게야 오는지도 모르겠다. 철학이 세계를 변혁하고자 할 때 언제나 현실은 저만큼 앞서가기 때문에, 철학이 세계를 변혁하고자 의욕한다고 해서 세계가 곧 변혁되는 것은 아니겠기에.... 그러나 헤겔은 또한 말하였다. 정신의 본질은 자기 분열과 고통을 견디어 내고 이를 극복하는데 있으며 아무런 문제도 없는 곳에는 오직 정신의 죽음이 있을 뿐이라고. 결국 우리는 이렇게 말할수 있지 않을까? 즉 현존하는 세계를 변혁시키기에 철학은 항상 너무나 늦게야 온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 전체를 인식하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세계를 변혁시키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철학이 설자리가 없고 또한 할 일이 없다고 결론짖는 것은 너무나 섣부른 판단이 아닐까? 이점에서 철학의 본래의 임무란 단순히 존재하지도 아니하는 당위의 세계만을 희구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현존하는 세계를 인식하는 일이 아닐까? 헤겔은 말한다: “철학은 존재하는 것( das, was ist)을 인식하며 그러한 한에서 그 내용은 피안에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감관이나 내외적 느낌에서 드러나는 것, 오성이 파악하여 규정되는 것 등과도 다르지 않다. - 그러나 사유하는 이성만이 참된 것이 무엇인지를 서술한다”(Konzept der Rede beim Antritt des philosophischen Lehramtes an der Uni. Berlin, : Enzy. , S. 405).


'기독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광훈목사 자유화 운동에 기도해 주세요  (0) 2020.08.16
개탄 할 한국의 신흥종교  (0) 2020.06.15
노회 감사위원장 업무  (0) 2016.07.19
임직예배 참석  (0) 2016.06.11
아브라함의 과오  (0) 2015.01.04
1970년대 전국 주보모음  (0) 2014.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