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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허한 삶의 자세

by 해찬솔의 신학 2015. 1. 4.

 

 

 

                                                    

                                                             겸허한 삶의 자세

                                                                                                                                                                       글 : 김한영

 

사람은 절로 살고 내 인생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나를 이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님과 부모와 만인(萬人)에게 은혜를 입고 살아가고 있다. 내 마음도 부모처자와 물과 대지와 공기와 햇볕도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머리털 하나 세포하나도 내가 만들지 못한다. 태어나는 시간도, 삶의 기간(期間), 죽는 시간도 내가 정하지 않았다. 절대 자기 소유라고 주장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시한부로 빌어쓰고 있는 것뿐이다.

따지고 보면 내 뜻대로 태어날 수도 없고 내 마음대로 살수도 없고 내 마음대로 죽을수도 없는 주인(主人)있는 존재임을 수락하는 겸허를 우리 모두가 배워야 한다.

 

권세와 부()에 대해서도 겸허를 배워야 한다.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이 시든다. 우리는 역사의 뭇 영웅들과 스타들이 낙엽처럼 떨어지는 것을 똑똑히 보고 있는 무대의 관중들이다. 소유의 개념을 고쳐야겠다. 소유는 소여(所與)이고, 소유주는 하나님이 맡긴 재산의 관리자일 뿐이다.

지식에 대해서도 겸허를 배워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나는 나의 무지(無知)를 안다고 했다. 무지에의 자각이 지성의 겸허이다. 어항 속에 물고기들의 지식과 경험의 무한과 영원을 다 모아놓아도 그것은 형편없이 극소(極小)한 것이다. 최근에는 지식을 변화(미래의 충격)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인간이 경험하고 안 지식의 총화가 하나님이 보실 때는 물방울 하나 속에 생긴 세균들의 경험정도 밖에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영원히 유한(有限)하고 상대적인 피조물이다. 따라서 그 지식도 경험도 영원히 불완전하고 부분적인 것이다. 무르익고 겸허한 지성은 항상 경건 된 신앙 앞에 세게 마련이다.

 

자기주장에 대해서도 겸허를 배워야겠다. 정치 경제 사회문제에 대한 내 주장과 견해는 언제나 상대적인 것이다. 자기것만을 절대화시켜 결사극한(決死極限)의 반대를 펴 자기와 다른 주장을 말살시키려 하지 말고, 자기주장을 상대화시킬 줄 아는 겸허가 민주시민의 기본자세이다. 과거의 자기태도나 주장이 잘못되었다고 솔직히 고백할 줄 아는 용기 있는 지도자가 아쉽다.

자기의 의()나 정의(正義)에 대한 도덕적인 겸허를 배워야 하겠다. 성자(聖者)일수록 참회록을 쓴다.

간음한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 정죄의 돌을 들고 치려던 도덕의 고발자 바리새인들에게 예수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들어 치라했더니 모두 도망갔다는 얘기는, 오늘 우리들의 정의의 바리새인들에게도 하시는 말씀이 아니겠는가, 우리 모두 도덕적 겸허를 배움이 진실한 성도요 인간일 것이다.

 

 

                                              초저녁 잠에서 깨어 전혀 잠이 오지 않은 오롯한 시간이기에 무서움의 어둠의 장막을 이기고자 잠시 ,,,,,,,,

 

 

                                                                                                                                    주후 20150104일 오전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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