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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뉴스

이명박, 국민이 부른 까닭?

by 해찬솔의 신학 2007. 12. 22.
이명박의 표(票)는 낱개로 모은 표가 아니다. 무더기로 쏟아진 표다. 투표함을 열자 이명박의 머리 위로 함박눈처럼, 축복처럼, 밀가루처럼 하늘에서 표가 내렸다. 폭설(暴雪)이었다. 위장 전입, 위장 취업, BBK 특검(特檢)도 쏟아지는 표를 어쩌지 못했다. 내려 쌓인 표는 순식간에 갖가지 기록을 만들어냈다. 이명박은 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치러진 대통령 선거 개표에서 최단 시간에 당선이 확정된 후보다. 득표율 48.7%, 득표수 1149만표는 2위 후보의 2배에 육박한다. 표차(票差) 531만 표도 사상 최대다.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이래의 기록마저 대부분을 다시 썼다.

국민의 부름을 받고 불려 나온 이명박은 “이번 승리가 국민의 승리라고 확신한다”고 했다.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국민을 섬기겠다”고 했다. “대한민국 경제를 반드시 살리겠다”고 했다. “분열된 우리 사회에 화합과 국민 통합을 가져오겠다”고도 했다. 승리가 누구 덕분인지를 알고 있다는 이야기다.

좋든 싫든 오늘의 대한민국은 역대 대통령이 이끌어온 시대의 연속선상(連續線上)에 있다. 되찾은 땅 위에 나라를 다시 세우고, 그 나라를 공산 침략으로부터 지켜낸 대통령, 지구상에서 가장 배고픈 나라를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무역대국·산업대국으로 키운 대통령, 30년간 이어져온 군부 독재의 뿌리를 캐내 끊은 대통령, 북한의 모습에서 적(敵)의 얼굴에 덮여 있던 한 민족의 얼굴을 찾으려 했던 대통령…. 이들의 업적과 허물은 오늘 우리의 자랑과 부끄러움으로 남았다.

이명박이 이런 대통령들의 기록을 단숨에 뛰어넘은 것이다. 운(運)도 좋았다. 이명박의 근처에서 크고 작은 폭발물이 터질 때마다 북한,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인질범, 청년 백수(白手)의 통계 숫자, 소득보다 2배 오른 세금 내역, 삼성 의혹의 폭로 변호사, 엉망진창이 된 대입(大入) 수능, 종합부동산세의 융단 폭격이 교대로 혹은 함께 나서서 더 큰 소리를 내며 이명박의 허물을 덮었다.

그러나 운(運)만으로 되는 일은 없다. 스쳐 지나쳐 버린 행운의 여신의 ‘뒤통수’를 뒤돌아보며 아쉬워해본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운을 기회로 키워 가려면 행운의 여신의 ‘이마’를 바로 쳐다보고 붙들 수 있어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쌓아 온 실적이다. 이명박에겐 수십년간 땅 속에 파묻혀 죽어가던 청계천에 맑은 물을 다시 흘려 보내고, 구불어져 휘돌아가던 버스 노선을 단칼에 베어 펴버린 실적이 있었다. ‘반드시 경제만은 살려내겠다’던 어눌(語訥)한 약속도 국민 마음에 어지간히 울렸다. 더듬더듬하는 듯한 말투가 몇시간씩 이어지는 청산유수 같은 장광설(長廣舌)에 물리고 질리고 시달려온 국민의 귀엔 더 상큼하게 다가왔다.

그래도 이건 깜박하다 꺼져버리는 부싯돌 불에 지나지 않았다. 부싯돌 불만으로 큰 불을 지필 순 없다. 불쏘시개와 땔나무가 넉넉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나 야당의 선거 연료(燃料)는 국민의 고통·분노·좌절·불만·불안·불편·허탈감이다. 지난 5년 동안 대한민국 땅에 이 야당의 땔감이 지천으로 널려 쌓여 왔다. 여기 불이 붙는 순간 이번 선거는 결판이 났다. 스캔들을 뿌려도, 의혹을 끼얹어도 불길은 잠시 멈칫 할 뿐 더 무서운 기세로 타올랐다. 지난 5년 세월 국민 마음 속에 묻어둔 고통과 분노와 좌절과 불만과 불안과 허탈감이 그만큼 크고 무겁고 깊었다는 말이다. 무수한 고비마다 이명박을 지켜주고, 감싸주고, 일으켜 세워준 것이 바로 이 불길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그의 5년 세월이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든 진짜 공신(功臣)이라는 말이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야당의 구호가 국민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로부터 50년이 흐른 올해 ‘못살겠다 갈아보자’의 목소리가 그때 그 기세로 타올랐다. ‘못살겠다’는 국민이 ‘못참겠다’면서 ‘갈아보자’고 나서 정권을 바꾼 것이 이번 선거결과다.

이명박 당선자는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국민을 섬기겠다”고 했다. 쉬운 말이지만 실천하기는 어렵다. 당선자는 그 일이 어렵게 느껴질 때마다 ‘함박눈은 쉬 녹고 축복은 오래가기 어렵다’는 사실을 떠올릴 일이다. 이명박 당선자의 득표율은 48.7%다. 2002년 노무현 당선자의 득표율이 48.9%였다. 노무현 언덕이 녹아 없어지는 데는 불과 몇달로 족(足)했다.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