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사·뉴스

스탈린 그는 누구인가?

by 해찬솔의 신학 2007. 12. 23.
                       스탈린(소련의 정치가) 그는 누구인가?
 
스탈린 /스탈린(1950)
1922~53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1941~53년 소련 국가평의회 주석을 지냈다. 그는 4반세기 동안 소련을 독재적으로 통치하면서 세계 주요 강대국으로 변모시켰다. 스탈린은 소련을 공업화하고, 농업을 강제로 집단화했으며, 철저한 경찰 테러에 의해 그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1941~45년에 독일을 패배시키는 데 일조했으며, 소련의 지배권을 동유럽의 여러 나라로 확대했다. 소비에트 전체주의의 최고 설계자이며 능숙하기는 하지만 가공할 정도로 무자비한 조직가였던 스탈린은 그때까지 남아 있던 개인의 자유를 완전히 말살하고 생활수준을 궁핍하게 만든 반면 강력한 군산복합체(軍産複合體)를 이룩해 소련을 핵시대로 이끌었다.

 
스탈린의 일대기는 거짓말을 능사로 하는 소비에트식의 '전설'로 인해 오랫동안 은폐되어왔다. 그 '전설'은 영웅적인 볼셰비키 혁명의 모의자이자 소련의 건국자인 레닌의 충실한 추종자로서 그의 위대성을 과장하고 있다. 전성기에 스탈린은 '만능의 천재', '빛나는 태양', '삶의 지주', '위대한 선생이며 친구'로서 찬양을 받았고, 한때는 러시아 정교회의 부주교로부터 공공연히 '우리의 아버지'(Our Father)로 불리기까지 했다. 자기 자신의 흉상·동상·초상 들을 많이 건립해 개인 숭배를 강요함으로써 전대 미문의 광신적인 예배의 대상이 되었다.

 
청년 혁명가
 
러시아가 아닌 그루지야 태생의 요시프 스탈린은 당시 러시아의 한 식민지였던 그루지야 공화국의 고리 시(市)에서 가난한 신기료장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술주정꾼인 아버지는 그를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요시프는 집에서는 그루지야어만을 사용했고, 고리에 있는 교회학교에 다니면서(1888~94) 러시아어를 배웠다(그의 러시아어에는 항상 후음성의 그루지야어 액센트가 섞여 있었음). 그후 티플리스 신학교에 진학했으며, 재학중 비밀리에 국제공산주의의 최고 이론가인 카를 마르크스의 저서와 다른 금서들을 읽다가 1899년 신학교에서 퇴학당했다. '전설'에 의하면 혁명 활동을 하다가 퇴학 처분을 당했다고 전해지는데, 아들을 지나치게 사랑했던 그의 어머니는 몸이 쇠약해져 중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앙심 깊은 세탁부였던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사제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요시프 스탈린은 외모나 사고방식이 성직자보다는 악당이 되기에 휠씬 더 적합했다. 그는 체구는 땅딸막했고 머리카락이 검고 눈매가 사나웠으며, 한쪽 팔이 다른 쪽 팔보다 길었고, 가무잡잡한 얼굴에는 갓난아기 때 천연두를 앓아서 생긴 곰보 자국이 뚜렷했다. 체력이 강하고 엄청난 의지력을 타고난 그는 일찍부터 본심을 감추고 때를 기다리는 법을 터득했으며, 피의 복수를 하는 카프카스인의 전통에 따라 자기를 모욕한 자들에 대한 장기적인 복수를 꾀하는 데 있어 아무에게도 꺾이지 않을 집념을 가지고 있었다.
1899년 12월 스탈린은 티플리스 천문대의 서기가 되어 잠시 동안 근무했는데, 그것은 그가 정치 이외의 분야에서 월급을 받고 일한 유일한 직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육체 노동은 전혀 한 적이 없다. 1900년에 지하 정치운동에 가입하여 카프카스 지방의 주요 공업지대에서 노동자의 시위와 파업을 선동했지만, 속기 잘하는 근로자들을 몰아부쳐 경찰과 유혈 충돌을 벌이게 하는 데 지나친 열성을 보여 동료 혁명가들로부터 반감을 샀다. 러시아 사회민주당(마르크스주의 혁명당)이 1903년 멘셰비키파와 볼셰비키파로 갈라진 후 스탈린은 보다 호전적인 볼셰비키파에 가담하고, 그 지도자인 레닌의 제자가 되었다(→ 소련 공산당). 1902년 4월부터 1903년 3월까지 스탈린은 혁명 활동을 하다가 7번 체포되어 투옥과 추방을 되풀이했다. 그가 받은 선고 형량이 가벼운 데다가 번번이 쉽게 도피했기 때문에 그는 한때 제국(帝國) 경찰의 보수를 받는 밀정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집권
 
스탈린은 당 조직 내에서 서서히 승진했다. 그는 타메르포르스(지금의 핀란드 탐페레, 1905)·스톡홀름(1906)·런던(1907)에서 개최된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정책 결정 회의에 매번 참석했지만 강한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1907년 6월 25일(구력 6. 12)에 당 운영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티플리스(지금의 트빌리시)에서 대규모의 수송 방해 작전을 꾸미는 데 기여했다. 그가 정치적으로 처음 크게 부각된 것은 1912년 2월(구력 1월)로서, 당시 외국에 이주해 있던 레닌이 멘셰비키파와 최종적으로 결별한 볼셰비키당의 제1차 중앙위원회에 그를 신입 위원으로 선출한 것이었다. 이듬해 스탈린은 레닌의 명에 따라 마르크스주의와 국가 문제에 관한 1편의 중요한 글을 발표했다. 이당시 그는 러시아어로 '강철'을 뜻하는 스탈(Stal)에서 딴 스탈린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으며, 새로 창간된 볼셰비키 신문 〈프라우다〉의 편집도 잠시 맡았다. 그러다가 그는 그의 생애 최장기간의 유형을 당하게 되었다. 1913년 7월부터 1917년 3월까지의 시베리아 유형이 그것이었다.

 
1904년경에 스탈린은 신앙심 깊은 그루지야 처녀 예카테리나 스바니드제와 결혼했다. 그녀는 결혼한 지 약 3년 만에 야코프라는 아들 하나를 남기고 죽었는데, 그 아들이 1920년대말에 자살을 시도하다 실패한 후 스탈린은 그를 약골이라고 부르면서 경멸했으며, 야코프가 제2차 세계대전중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혔을 때 스탈린은 그의 아들을 교환 조건으로 삼자는 독일의 제의를 거절했다.
1917년 3월 25일(구력 3. 12) 시베리아에서 페트로그라드로 온 스탈린은 〈프라우다〉의 편집 책임을 다시 맡았다(→ 1917년 혁명). 그는 2월혁명중 마지막 황제가 퇴위한 뒤를 이어 불안정한 권력을 승계한 중산층 자유주의자들의 임시정부에 볼셰비키가 협조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레닌의 영향을 받아 스탈린은 이내 볼셰비키당이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보다 호전적인 정책으로 전환했다. 1917년 11월(구력 10월)에 그들의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스탈린은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그의 최대 라이벌인 레온 트로츠키의 역할만큼은 두드러지지 못했다.

 
1918~20년의 내전중에 여러 전선에서 정치·군사 지도자로 활약하면서 스탈린은 새로 구성된 볼셰비키 정부에서 2개의 장관직도 차지했는데, 인종문제 담당 인민위원(1917~23)과 국가통제(또는 노동자·농민 감시) 인민위원(1919~23)의 직책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독재를 위한 권력 기반을 제공한 것은 그가 1922년부터 죽을 때까지 맡았던 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으로서의 직책이었다. 그는 서기국의 장으로 취임했을 뿐만 아니라 강력한 정치국과 그밖의 상호 연관되어 있고 중복된 많은 위원회의 위원직도 맡았다. 한마디로 그는 트로츠키와 그리고리 지노비예프를 포함한 세속적인 조직 업무에 관심이 없는 라이벌들의 허를 찌르며 최고의 관료가 된 것이다. 천연두 자국이 많은 이 그루지야인이 지적이지 못한 것이 너무도 분명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를 우둔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1921년부터 스탈린이 병든 레닌의 의사를 능멸했으므로 레닌은 죽기 1년 전에 정치적 내용의 '유언'(후에 널리 선전된 문서)을 썼는데, 그것은 스탈린을 서기장직에서 해임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 문서는 레닌이 작성한 것이기 때문에 스탈린의 생애에 치명적인 것일 수 있었지만, 그에게 으레 따른 행운과 그의 용의주도함 때문에 이 문서는 그가 살아 있는 동안 평가절하될 수 있었다.

 
레닌의 후계자
 
1924년 1월 레닌이 죽은 후 스탈린은 고인이 된 지도자를 준(準)비잔틴식으로 우상화했다. 레닌주의의 대제사장이 된 스탈린은 이듬해 차리친 시(市)를 스탈린그라드(지금의 볼고그라드)로 개칭함으로써 자신의 우상화도 함께 추진했다. 한때 레닌의 법정추정 상속인이었던 그의 최대의 라이벌 트로츠키는 이제 지노비예프와 레프 카메네프 및 스탈린의 삼두체제에 의해 축출되어 그늘 속에 가려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탈린은 니콜라이 부하린 및 알렉세이 리코프와 결탁하여 삼두체제의 동지였던 두 사람을 몰아냈다. 스탈린 서기장은 이제까지 세계혁명을 통해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지원을 기다릴 것 없이 소련 단독으로 생명력 있는 정치체제를 확립할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하에 '일국사회주의' 정책을 주창했으며, 이 정책은 스탈린이 영향력있는 중간 관료로 끌어올리고 있던 강경파 당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부하린과 리코프도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의 뒤를 이어 숙청되었는데, 당 내의 말단직으로 좌천되었다가 결국 처형됨으로써 스탈린의 가장 강력한 정적들은 모두 제거되었다.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1929년에 소련에서 추방하고, 이어 1940년에 그를 멕시코에서 암살하게 했다.
1928년에 스탈린은 레닌의 준자본주의적인 신경제정책을 버리고 무모한 국영산업화 정책을 채택하여 일련의 5개년 계획을 추진했다. 이것은 사실상 새로운 러시아 혁명이었으나, 그 영향은 1917년 혁명의 여파보다 더 파괴적이었다. 독재자의 철퇴를 가장 호되게 맞은 것은 농민층으로, 농촌의 약 2,500만 세대가 2, 3년 이내에 집단농장이나 국영농장에서 집단 생활을 하도록 강요당했다. 이에 필사적으로 저항한 농민들은 군대와 정치경찰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쿨라크로 불린 비협조적인 농민들은 무더기로 체포되어 추방·총살되거나 급속도로 팽창하고 있던 스탈린식 집단수용소에 흡수되어 극심한 악조건 속에서 강제노동을 했다. 집단농장화는 우크라이나 지방에 대기근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기근 지역에 급송해야 할 식량을 계속 수출했다. 그 몇 년 동안에 그의 정책으로 인해 희생된 농민의 수가 약 1,00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저돌적인 산업화는 약간의 효과는 있었다고 하나 엄청난 실패를 수반했으며, 스탈린은 이에 산업 관리인들을 규탄하고 계속 여론재판에 회부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피고들은 겁에 질려 허위자백을 함으로써 서기장의 정책으로 야기된 재앙을 대신 짊어지는 희생양의 역할을 했다. 그렇지만 스탈린은 후진국을 급속도로 산업화하는 데는 성공했으며, 그것은 아돌프 히틀러나 H. G. 웰스, 조지 버나드 쇼와 같은 유명 작가들을 포함한 당대의 열광적인 외국인 목격자들에 의해 널리 인정되었다. 스탈린의 정책을 완화하려고 헛된 노력을 한 사람들 가운데는 그의 2번째 아내인 나데주다 알릴루예바가 있었다. 그녀는 1919년에 스탈린과 결혼하여 1남1녀를 낳고 1932년에 자살했다. 아들 바실리는 아버지의 힘으로 소련 공군의 고위 장교가 되었는데 후에 알코올 중독으로 죽었다. 스탈린은 딸 스베틀라나에게 애정과 분노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갖고 있었는데 그녀는 스탈린이 죽은 후 국외로 이주하여 스탈린의 감추어진 사생활을 밝히는 회고록을 집필했다.

 
 
스탈린주의의 지나친 월권행위가 한풀 꺾인 듯한 1934년말, 스탈린은 자신을 권좌에 올려준 공산당원들에 대한 새로운 정치 폭력전에 착수했는데, 그가 구실로 내세운 것은 동료이자 장차 정적이 될 가능성이 있었던 세르게이 키로프가 12월 1일 레닌그라드에서 암살된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 관해서는 1956년 제20차 공산당전당대회에서 흐루시초프 당 제1서기가 스탈린 격하연설 도중 '스탈린 자신이 숙청을 단행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었다'고 암시한 바 있다. 스탈린은 고위 공산당원들에 대한 여론 재판을 폭력을 확대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다. 1936년 8월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재판정에 끌려나와 허위자백을 하고 사형 선고를 받은 후 총살당했으며, 1937년 1월과 1938년 3월 또다시 대규모의 재판이 벌어졌다. 1937년 6월에는 당시 군에서 가장 영향력 있던 인물인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원수와 그밖의 고위 장성들이 반역죄로 군사재판을 받고 처형된 것으로 보도되었다.
이상이 소련 공산당과 소련 엘리트 전체를 길들이는 데 사용한 스탈린의 주요박해사건이다. 그는 반독립적인 고참 볼셰비키 당원들뿐 아니라 공산당의 많은 지도급 인사들, 군부의 지도자들, 산업 관리인들, 그리고 자신에게 철저히 순종한 정부의 고위 관리들까지도 숙청했다. 그밖의 희생자들 가운데는 소련 영내에 머물고 있던 외국 공산주의자들과 NKVD로 개칭된 정치경찰기구의 구성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예술계·학계·법조계·외교관을 위시한 모든 분야에서 많은 엘리트들이 희생되었을 뿐 아니라 일반 국민들도 많이 희생되었다. 스탈린의 정치적 희생자는 수천만 명으로 헤아려졌는데, 그의 주된 목적은 자기의 권력을 극대화하는 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역할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는 중요하지 않은 인물로 취급되었던 스탈린이 전쟁 후기에는 교전국들이 배출한 최고 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성공한 지도자로 부상했다. 그는 서방국가들과 반(反)히틀러 동맹을 결성하려고 시도했으나 결국 1939년 8월 히틀러와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용기를 얻은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는 폴란드를 공격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새로 동맹국이 되기는 했지만 결코 믿을 수 없는 국가였던 독일이 서방국가들과 교전하고 있는 동안 자국의 서부전선 강화를 최우선 과제로 삼은 스탈린은 폴란드 동부와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루마니아의 일부를 병합했으며, 한편으로는 핀란드를 공격하여 영토 할양을 강요했다. 1941년 5월 스탈린은 독일이 소련을 공격할 위험성이 증대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스스로 인민위원회 위원장(정부 수반)직에 올랐는데, 그것은 1923년 이래 그가 처음으로 차지한 행정관직이었다.
스탈린의 전전(戰前) 방어책은 독일의 전격전 앞에 무력함을 드러냈다. 히틀러가 1941년 6월 22일 정당한 이유 없이 소련을 공격한 이후 독일군은 소련 영토 깊숙이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왔다. 그 맹공격에 스탈린이 충격을 받아 한동안 무력증에 빠졌다고 흐루시초프는 주장했지만, 여하튼 스탈린은 얼마 후 기력을 회복하고 스스로 최고사령관직을 떠맡았다. 1941년 겨울 독일군이 모스크바를 위협하자, 그는 이 풍전등화의 수도에 머물면서 일대 반격을 위한 준비작업을 지시했다. 이듬해 겨울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1943년 여름의 쿠르스크 전투에서도 스탈린이 총지휘하는 소련군이 승리를 거둠으로써 대세는 역전되어 독일군은 후퇴를 거듭하다가 1945년 5월 마침내 항복했다. 스탈린은 군사지도자로서 소련의 여러 전선과 예비군 및 전시 경제 분야에 강력한 인사 통제체제를 유지시켰다. 처음에는 히틀러처럼 전화를 이용한 부적절한 지령으로 지나치게 간섭하는 경향을 보이던 그는 점차 군사적인 결정을 현지의 지휘관들에게 위임할 줄 알게 되었다. 스탈린은 연합국 고위 회담에 참석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테헤란(1943)과 얄타(1945)에서 처칠루스벨트와 가진 '3대국 회담'이었다. 스탈린은 대단한 협상가로서 이 외국 정치가들의 의표를 찔렀으며, 그의 우수한 협상 기술은 당시 영국의 외무장관이었던 앤소니 이든으로부터 갈채를 받았다(→ 테헤란 회담, 얄타 회담).

 
만년
 
전후에 스탈린은 동유럽 여러 국가에 대해 새로운 종류의 식민지적 지배를 부과하여 각국의 공산당 정부들이 명목상으로는 독립적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소련에 종속되도록 만들었다. 그럼으로써 그는 자기의 신민(臣民)의 수를 약 1억이나 늘렸다. 그러나 1948년 티토주의를 표방하는 유고슬라비아가 소련 진영으로부터 이탈함으로써 스탈린이 주도하는 단일체로서의 세계공산주의는 큰 타격을 입었다. 다른 예속 국가들이 티토의 선례를 따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스탈린은 각국에서 여론 재판이 일어나도록 사주하고, 1930년대 러시아의 대숙청 때와 같은 조작을 하여 공산 위성국 지도자들이 스스로 티토주의자임을 자백하게 만들어 다수를 처형시켰다.
히틀러 사후 스탈린은 미국 및 영국과의 전시 동맹 관계를 지속시키기는커녕 이제 이들 두 나라를(특히 미국) 최대의 적국으로 간주했다. 국내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의 지배권이 가혹하게 재천명되었다.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 스탈린의 주요 살인청부업자 역할을 한 안드레이 주다노프 중앙위원회 서기는 소련의 예술가와 지식인 세계에 공포시대를 몰고 왔다. 외국인의 업적은 조롱거리가 되었고 사실상 모든 분야에서 발명가와 개척자로서의 러시아인의 우월성이 천명되었다. 전쟁중에 소련에서 널리 움텄던 강압 정치의 완화에 대한 기대는 이로써 무참히 깨졌다. 나이가 들수록 의심과 편집증세가 심해진 스탈린은 1953년 1월 크렘린 전속 의사 몇 명(주로 유대인)을 주다노프를 포함한 소련의 여러 지도자 암살 혐의로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이 '의사들의 음모'를 구실로 삼아 자기의 고위층 동료 모두를 위협하는 또 한 차례의 큰 폭력을 준비하고 있었음이 분명했지만, 공식 보도상으로는 그가 1953년 3월 5일에 급사했다고 발표되었다.

 
평가
 
철두철미하게 정치꾼이었던 스탈린에게는 사생활, 즉 가정생활은 거의 없었다. 그의 주된 오락은 뷔페식 저녁식사 자리를 즉흥적으로 마련하여 고위 당료, 장성, 방소(訪蘇)중인 외국의 유력자들을 초대하는 것이었다. 그런 자리에서 스탈린 자신은 거의 술을 마시지 않고 손님들은 대취하도록 권함으로써 나중에 이용할 수 있는 약점들을 노출시키게 하곤 했다. 그는 또한 익살과 악의를 잘 조화시킨 매너로 손님들을 놀리기도 했는데, 스탈린의 충복으로 당시 외무장관을 지낸 말더듬이 비야체슬라프 몰로토프가 그러한 을러메기 조롱의 표적으로 곧잘 올랐다. 스탈린은 통렬하고 풍자적인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손님들을 즐겁게 하는 데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기분상하게 하는 데 이용하는 것이 상례였다.
스탈린의 업적 가운데 첫째로 꼽히는 것은 1928년 그가 전권(全權)을 장악할 당시 세계의 주요공업국들에 비해 두드러지게 뒤져 있던 소련의 공업화이다. 전체주의적 독재자로 집권한 지 10년도 채 안 된 1937년에 그는 소련의 공업 총생산고를 미국에만 뒤지는 높이까지 끌어올렸다. 이 업적이 얼마나 괄목할 만한 것인가는, 러시아가 1913년에 공업 총생산면에서 5위에 머물러 있었고, 그후 세계대전과 내전 및 흉년과 역병으로 같은 기간에 세계의 다른 주요공업국들이 당한 것보다 훨씬 더 큰 재난을 당했음을 상기할 때 뚜렷하게 알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더욱 엄청난 파괴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탈린 치하의 소련은 미국 다음 가는 공업 대국(아울러 군사대국이기도 했음)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히틀러를 패배시키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1949년에 스탈린주의를 표방하는 러시아는 원폭 실험에 성공함으로써 세계 제2의 핵강대국이 되었음을 알렸다.
그러나 이러한 대단한 업적을 상쇄시키는 하나의 큰 결점이 있다. 스탈린 치하에서 높은 공업 생산이 달성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가운데서 소련의 보통 시민이 소비재나 생활의 편의품으로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없었다. 국가 자원의 상당한 비율(어떤 평시 자본주의 국가의 역사에서도 전연 전례가 없을 만큼 높은 비율)이 국가에 의해 군사비와 경찰기구 유지비 및 공업화의 계속적인 추진을 위한 재원으로 충당되었다. 따라서 스탈린주의가 아닌 다른 정치체제가 출현하여 그보다 훨씬 인간적인 방법으로 공업화를 추진했었더라도 그에 필적하는 공업화는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스탈린의 농업집단화는 소련 경제에 미친 공업화의 긍정적 결과에 비해 거의 비교가 안 될 만큼 효과가 없었다. 그러나 과거에도 그랬지만 현재에도 정치적으로 반항적인 농민을 통제하는 수단으로서는 집단화가 정당화될 수 있었으므로 이 농업집단화는 스탈린의 가장 영속성 있는 업적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또한 스탈린에 의해 시작된 대대적인 도시화 과정은 그의 사후에도 다른 어느 주요공업국보다도 농촌인구의 비율이 높았던 소련에서 계속 추진되었는데, 그결과 1937년에 인구의 56%가 농업이나 임업에 종사하는 것으로 기록되었던 데 비해 1958년에는 42%로 떨어졌다. 물론 그것은 스탈린의 정책이 가져온 결과였다.
스탈린의 모든 업적 가운데 가장 지속적인 것은 그가 교묘하게 관료화한 행정기구일지도 모른다. 그 행정기구는 공산당, 행정부의 각 부처, 노동조합, 정치 경찰, 군대 등이 상호 연계되어 있고 그에 아울러 망상화(網狀化)된 많은 통제기관들이 함께 조직되어 있었다. 스탈린 사후 20년 동안 이 기구들은 소련 사회의 핵심적 관료들을 계속 공급했으며, 스탈린의 공포정치 기간에 높은 지위에 오른 개인의 통제를 받았다. 그러나 전체적인 개인 독재성향 속에는 스탈린식의 극단적인 형태가 살아 있지 않았다. 그의 죽음으로 20여 년 동안 한 사람의 변덕에 좌지우지되었던 공산당이 권력의 중심 기관으로 소생했다. 이것은 다른 정부기관도 마찬가지였다. 스탈린의 뒤를 이은 당 지도자들은 큰 권력을 휘두르기는 했지만 과두정치 체제 내의 주도적인 인물 이상은 되지 못했다. 그들은 스탈린이 약 25년간 그 누구로부터도 도전을 받지 않고 전제적인 권력을 휘두른 것처럼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제한된 권력을 행사하는 일시적인 권력자에 불과했다.
스탈린의 사후에도 소련의 주요부문에 스탈린 체제의 요소가 지속적으로 남아 있었다는 것은 그것을 만들어낸 폭군이 워낙 가혹하게 그 체제를 실천했다는 데 그 부분적 원인이 있다. 그의 방법들은 많은 소련의 행정관들을 처벌함으로써 행정관들의 창의성을 말살했을 뿐 아니라 스탈린의 사후에도 계속된 제재 조치들을 국민이 견딜 만한 것으로 느끼게 할 정도로 극심한 공포의 기억을 유산으로 남겼다. 소련 국민들은 스탈린의 가혹한 억압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탈린 사후에 벌어진 가혹한 행위들을 크게 원망하지도 않았으며 그런 대로 참으면서 배척하지 않았던 것이다. 전시에 히틀러가 소련 국민에게 보인 잔혹성이 스탈린을 순수한 국민적 영웅으로 바꾸고 그를 스탈린의 폭력보다 더 가혹한 외국인의 폭력을 물리치는 소련의 기수로 만들었듯이, 스탈린의 후계자들이 그들의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데는 독재자가 군림하고 있을 동안에 이루어진 훨씬 더 가혹한 상황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아직도 생생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이 역사상 다른 어떤 인물보다도 더 많은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아마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전체적인 업적에 대한 평가는 그의 사후 거의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큰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역사가들은 그의 업적에 관한 가치판단에 있어 아직도 확정적인 의견일치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으며, 장차도 그들의 의견이 합치될 가망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미국의 학자 조지 F. 케넌은 스탈린을 "믿기지 않는 범죄성에서 그리고 사실상 한계가 없는 범죄성에서" 큰 인물로 본 반면, 미국의 소련 문제 전문가 로버트 C. 터커는 스탈린을 20세기의 이반 뇌제(雷帝)로 묘사했다. 영국의 역사가 E. H. 의 눈에는 이 그루지야 출신의 독재자가 무자비하고 정력적인 인물이기는 하지만 독창성이 결여된 인물로, 즉 우연히 그가 선두에 서게 된 대혁명의 가차 없는 진행에 의해 위대해진, 비교적 실체가 없는 인물로 보였다. 트로츠키와 스탈린의 전기를 저술한 고 아이작 도이처는 카와 마찬가지로 다소 속물이라는 트로츠키의 스탈린관을 대체로 수용하는 한편, 마르크시즘의 진화과정에서 아주 잘못된 방향으로 벗어난 인물의 대표격으로 스탈린을 파악했다. 그러나 도이처와 카는 스탈린의 경악할 만한 기록이 러시아의 10월혁명이라고 하는 역사적 업적의 궁극적 가치를 의문시할 만큼 인상적인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이러한 스탈린의 인격 일면을 비추고 있는 견해들에 한 가지 더 추가할 수 있는 것으로서 스탈린은 결코 전무후무한 탤런트가 아니라 단조로운 성격의 범인(凡人)에 불과했다는 의견이 있다. 여하튼 그의 특별한 광휘는 창조적인 정치적 조작이라는 잔인한 단 하나의 분야에 한정되어 있었다. 스탈린은 정치적 조작이라는 분야에서는 어느 누구도 당할 수 없는 재능을 보였으나, 그밖의 분야에서는 결코 초인적인 재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단지 그는 여러 가지 목적을 수행하고 무수한 적을 제거하는 데에만 죽을 때까지 굽힐 줄 모르는 완강한 집념을 보였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