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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문안교회 창립120주년

by 해찬솔의 신학 2007. 9. 20.
이땅에 개신교 싹 틔운 어머니교회… 새문안교회 창립 120주년


새문안교회 성가대의 초기 모습. 한복을 차려입은 여성 성가대원들 오른쪽에 양복을 입고 있는 사람이 성가대 지휘자인 홍난파 선생. 사진 제공 새문안교회
《27일은 서울 종로구 신문로 1가에 위치한 새문안교회 창립 120주년이 되는 날. 이날을 맞아 새문안교회(담임목사 이수영)는 12일 창립 120주년을 기념하는 경축음악회를 열었고 23일 기념예배와 언더우드 목사 추모예식 등을 거행한다. 또 시각장애인 120명에게 새 생명의 빛을 찾을 수 있도록 개안수술비 3600만 원을 실로암안과병원에 기증했다. 이 밖에 120주년 기념 동화집, 기념우표, 기념사진첩 등을 발간하는 등 다채로운 행사를 마련했다.》
 

“아무도 날 도와줄 이 없는고, 황후의 죽음을 누가 갚아주기만 한다면, 단발()해 신을 꼬아 주겠노라.”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가 일제의 자객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하루 뒤 고종은 이렇게 울부짖었다. 당시 고종 곁을 지킨 사람은 의사 알렌과 언더우드, 애비슨과 같은 선교사들이었다. 나중에 언더우드의 부인이 된 릴리어스 홀튼은 독살의 두려움에 떨던 고종을 위해 밥을 지어 올렸다.

 

새문안교회의 역사를 들추다 보니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 한국 개신교 최초의 조직화된 교회이자 ‘어머니 교회’로 불리는 새문안교회는 1887년 9월 27일 서울 정동의 한 한옥에서 출범했다. 한인 14명이 참석한 가운데 언더우드 목사가 세례를 베풀고 장로를 세웠다. 1885년 제물포항에 첫발을 디딘 언더우드 목사가 2년여의 선교활동 끝에 얻은 첫 결실이었다. 그리고 그 자체가 한국 개신교의 역사가 됐다.

 

개신교사를 넘어 한국 현대사에서 새문안교회가 끼친 영향은 결코 적지 않다. 일제강점기의 독립 및 문화운동에 걸출한 족적을 남겼던 인물들 중 상당수가 이 교회 출신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1886년 언더우드 목사가 설립한 보육원에서 2년간 수학했고 1898년부터 3년간 역시 언더우드 목사가 세운 초등교육기관인 영신학교(경신중고교의 전신)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참석했던 김규식 선생도 이 교회 장로를 지냈다. 독립운동 단체인 신한청년단을 조직한 서병호 선생은 한국의 첫 유아세례자이고 한글학자인 외솔 최현배 선생, ‘불놀이’의 작가 주요한, ‘봉선화’ ‘성불사의 밤’을 작곡한 홍난파 등이 새문안교회가 배출한 인재들이다.

 


1970, 80년대에는 종교계 민주화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다. 특히 급성장한 청년부를 중심으로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대한 신조가 확산됐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등과 함께 한국 민주화와 구속자 석방, 인권탄압에 대한 항의 등의 집회가 열렸다.

 

개신교 초기 선교사에 있어서도 새문안교회의 위상은 압도적이다. 교회를 근거지로 해서 1891년 곤당골과 관내못골에 예배소를 설치했고 1894년 연못골(연동)교회, 1905년엔 승동교회와 남문밖(남대문)교회, 1909년 안동교회, 1910년 묘동교회 등을 차례로 개척해 나갔다. 이 당시 언더우드 목사가 설립한 교회만 해도 20여 곳에 이른다. 새문안교회는 120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언더우드 목사가 당시 설립했던 ‘자매교회’를 방문하는 행사도 마련했다.

 

이 교회 120주년기념사업위원회 위원장인 최규완 장로는 “개신교의 역사가 새문안교회의 역사라고 할 정도로 개신교사에서 새문안교회의 위치는 중요하다”며 “교회를 세운 언더우드 목사는 세브란스병원과 학교 유치원 등을 설립해 우리나라의 근대화에 큰 족적을 남겼다”고 말했다.

윤영찬 기자 yyc1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