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대학교의 대사회적 책임
벌써 우리 나라에 복음이 들어 온지 백년이 훨씬 넘었다. 현재 우리사회는 많은 신자들과 교회, 그리고 신학교육기관들이 있다. 공식적으로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신학전문대학원 대학교와 신학교를 졸업해야 목사가 될 수 있다.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는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책임지며, 한국 기독교를 책임지고, 더 나아가 한국사회를 변화시킬 주역들이다. 따라서 이들의 중요성은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다. 따라서 이들이 신학을 훈련받는 기간은 그들의 미래를 위한 준비기간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가 제 역할을 하는데 결정적인 준비의 날들이다.
그런데 이런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여러 정황은 우리를 실망시킨다. 최근 신학대학에 오는 신학생들의 신앙관이 이전 보다도 희미하다는 보도가 있었다. 심지어 신학을 공부하는 학도들이 사회의 지탄을 받을 정도로 타락한 경우가 늘고 있다. 한국 최초의 사이버 포주가 신학생이었으며, 목욕탕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한 신학대 졸업생과 100여 차례에 성폭행을 가한 신학생도 있다.
이런 식으로 신학대학교를 졸업한 사람의 경우 목회자가 되었을 때 어떨까? 얼마전 부천에서 온 동네에 방화를 저질은 목회자, 노름에서 번 돈을 주지 않는다고 채무자의 손을 자동차 바퀴로 밟은 목회자, 산업금융채권 위조단을 만들어서 개척교회를 세우며 좋은 일에 쓰겠다고 말한 모 신학교의 부학장, 몇몇 목회자만으로 구성된 교회가 돈 문제로 한 목회자의 아내를 집단 살해하고 오랫동안 시신을 부활시키려고 소동한 목회자들도 있다. 신학생과 목회자에 관한 이런 모든 사건들은 최근 일 이년 사이에 한국에서 공개된 것들이다.
그 동안 신학과 목회에 대한 교육이 지나치게 개인 구원과 지나치게 교회 성장 위주에 강조점을 두었다면 이제는 기독교가 사회에서 어떻게 그 역할을 해야할지 신학교에서 바르게 가리켜주어야 한다.
꽁트(Comte)의 후계자로서 그의 실증주의를 철저하게 사회학에 발전시킨 에밀 듀르케임(Emile Durkheim)은 사회 삶에서 종교의 역할을 강조한 사회학자이다. 물론 우리는 신학교에서 이런 종교 실증주의를 가르키는 것이 본래의 목적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바울의 가르침을 종합하여 고찰할 때 이웃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 있는 구원이야 말로 우리에게 너무나 절실한 사명이다.
오늘날의 상황에서 신학대학교의 대사회적 책임에 대하여 몇 가지를 말하려고 한다.
첫번째, 신학생의 대사회적 책임을 감당하기 위한 교육으로 철저한 신앙의 헌신이 요구된다. 따라서 신학대학 혹은 신학교의 입학부터 철저하게 신앙이 검증 되어야 한다. 올바른 성경적 믿음이 없는 자들은 처음부터 받아 드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제가 있는 대학에서는 현재 입학시에 인터뷰를 통하여 신학의 동기를 중요하게 다룬다. 신학이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연구이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그분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다. 비가시적 영역에서 역사하시는 그 분을 이해하고 따르려면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나님께 나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을 믿어야 한다고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말한다.
두 번째, 신학교육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는 건전한 윤리의식을 갖추도록 훈련 과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학교에서 배운 기독교 윤리에 대한 과목을 이수했다고 해서 모두가 다 기독교 윤리에 대하여 완전하다고 말할 수 없다. 윤리에 대한 철처한 교육과 더불어 실천적인 윤리의 실습이 필요하다. 만일 윤리의 교육과 실천이 이원화 되었다면 앞날의 문제점은 뻔한 일 이다. 얼만 전 한국을 방문한 존 반더 스텔트 (John van der Stelt)교수가 지적한 것은 서구의 기독교 교육 기관들 역시 플라톤의 이원론에 영향에 있어서 그리 자유롭지 못하여 현재 기독교 세계관과 문화의 발전에 장애가 되었다고 말하였다. 그의 주장은 기독교 대학에서의 교육이 좀더 사회에서 기독교 세계관의 관점에서 실천적이 되도록 연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거룩성을 겸비한 신학도의 양성이 시급하다. 신학생이면서도 세속적인 문화와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해 남보기에 덕이 안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거룩성이란 단지 외형적인 것만은 아니다. 참된 거룩성을 발전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늘 경건한 삶을 살도록 영적 훈련이 필요하다. 최근 많은 소장파 학자들이 외국에서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신학교에서 열심히 가르치는 모습은 매우 아름다운 일이다. 여기에 첨가하여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말씀의 권위와 성령의 능력으로 신학생들의 삶을 변화시키며, 성결한 종들로 새롭게 만들어 내는 영적 지도력이다.
네 번째. 문화에 대하여 적응하고 문화를 변화시키는 교육이 필요하다.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세속의 문화는 엄청나게 변화하였고 또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따라서 문화에 대한 철저한 교육과 기독교문화의 정립이 시급하다. 한국 사회에서 크리스천들이 많은 비리에 연루되는 것은 그들이 세속 문화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어서 그렇다. 세상에 모든 것이 다 미래의 하나님의 나라의 것이며, 그 주인이 주님의 것이라는 철저한 인식이 있다면 그렇게 많은 스캔들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말한 영역 주권사상이 우리 한국 기독교 세계관에 새로운 모티브를 주었으면 한다. 신학대학에서 올바른 기독교 세계관과 문화관에 대한 철저한 교육과 그것이 삶의 현장에서 적용되도록 실질적으로 힘써야 한다.
현재 어려운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교회가 감당하기에는 시간적으로 늦는다. 신학대학들은 교회를 책임지고 사회를 바르게 이끌 미래의 신학도들을 온전한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교육시켜야 하며 이런 신학교육기관들을 위하여 한국교회는 관심과 도움으로 협력해야 한다.
벌써 우리 나라에 복음이 들어 온지 백년이 훨씬 넘었다. 현재 우리사회는 많은 신자들과 교회, 그리고 신학교육기관들이 있다. 공식적으로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신학전문대학원 대학교와 신학교를 졸업해야 목사가 될 수 있다.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는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책임지며, 한국 기독교를 책임지고, 더 나아가 한국사회를 변화시킬 주역들이다. 따라서 이들의 중요성은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다. 따라서 이들이 신학을 훈련받는 기간은 그들의 미래를 위한 준비기간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가 제 역할을 하는데 결정적인 준비의 날들이다.
그런데 이런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여러 정황은 우리를 실망시킨다. 최근 신학대학에 오는 신학생들의 신앙관이 이전 보다도 희미하다는 보도가 있었다. 심지어 신학을 공부하는 학도들이 사회의 지탄을 받을 정도로 타락한 경우가 늘고 있다. 한국 최초의 사이버 포주가 신학생이었으며, 목욕탕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한 신학대 졸업생과 100여 차례에 성폭행을 가한 신학생도 있다.
이런 식으로 신학대학교를 졸업한 사람의 경우 목회자가 되었을 때 어떨까? 얼마전 부천에서 온 동네에 방화를 저질은 목회자, 노름에서 번 돈을 주지 않는다고 채무자의 손을 자동차 바퀴로 밟은 목회자, 산업금융채권 위조단을 만들어서 개척교회를 세우며 좋은 일에 쓰겠다고 말한 모 신학교의 부학장, 몇몇 목회자만으로 구성된 교회가 돈 문제로 한 목회자의 아내를 집단 살해하고 오랫동안 시신을 부활시키려고 소동한 목회자들도 있다. 신학생과 목회자에 관한 이런 모든 사건들은 최근 일 이년 사이에 한국에서 공개된 것들이다.
그 동안 신학과 목회에 대한 교육이 지나치게 개인 구원과 지나치게 교회 성장 위주에 강조점을 두었다면 이제는 기독교가 사회에서 어떻게 그 역할을 해야할지 신학교에서 바르게 가리켜주어야 한다.
꽁트(Comte)의 후계자로서 그의 실증주의를 철저하게 사회학에 발전시킨 에밀 듀르케임(Emile Durkheim)은 사회 삶에서 종교의 역할을 강조한 사회학자이다. 물론 우리는 신학교에서 이런 종교 실증주의를 가르키는 것이 본래의 목적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바울의 가르침을 종합하여 고찰할 때 이웃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 있는 구원이야 말로 우리에게 너무나 절실한 사명이다.
오늘날의 상황에서 신학대학교의 대사회적 책임에 대하여 몇 가지를 말하려고 한다.
첫번째, 신학생의 대사회적 책임을 감당하기 위한 교육으로 철저한 신앙의 헌신이 요구된다. 따라서 신학대학 혹은 신학교의 입학부터 철저하게 신앙이 검증 되어야 한다. 올바른 성경적 믿음이 없는 자들은 처음부터 받아 드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제가 있는 대학에서는 현재 입학시에 인터뷰를 통하여 신학의 동기를 중요하게 다룬다. 신학이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연구이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그분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다. 비가시적 영역에서 역사하시는 그 분을 이해하고 따르려면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나님께 나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을 믿어야 한다고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말한다.
두 번째, 신학교육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는 건전한 윤리의식을 갖추도록 훈련 과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학교에서 배운 기독교 윤리에 대한 과목을 이수했다고 해서 모두가 다 기독교 윤리에 대하여 완전하다고 말할 수 없다. 윤리에 대한 철처한 교육과 더불어 실천적인 윤리의 실습이 필요하다. 만일 윤리의 교육과 실천이 이원화 되었다면 앞날의 문제점은 뻔한 일 이다. 얼만 전 한국을 방문한 존 반더 스텔트 (John van der Stelt)교수가 지적한 것은 서구의 기독교 교육 기관들 역시 플라톤의 이원론에 영향에 있어서 그리 자유롭지 못하여 현재 기독교 세계관과 문화의 발전에 장애가 되었다고 말하였다. 그의 주장은 기독교 대학에서의 교육이 좀더 사회에서 기독교 세계관의 관점에서 실천적이 되도록 연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거룩성을 겸비한 신학도의 양성이 시급하다. 신학생이면서도 세속적인 문화와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해 남보기에 덕이 안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거룩성이란 단지 외형적인 것만은 아니다. 참된 거룩성을 발전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늘 경건한 삶을 살도록 영적 훈련이 필요하다. 최근 많은 소장파 학자들이 외국에서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신학교에서 열심히 가르치는 모습은 매우 아름다운 일이다. 여기에 첨가하여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말씀의 권위와 성령의 능력으로 신학생들의 삶을 변화시키며, 성결한 종들로 새롭게 만들어 내는 영적 지도력이다.
네 번째. 문화에 대하여 적응하고 문화를 변화시키는 교육이 필요하다.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세속의 문화는 엄청나게 변화하였고 또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따라서 문화에 대한 철저한 교육과 기독교문화의 정립이 시급하다. 한국 사회에서 크리스천들이 많은 비리에 연루되는 것은 그들이 세속 문화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어서 그렇다. 세상에 모든 것이 다 미래의 하나님의 나라의 것이며, 그 주인이 주님의 것이라는 철저한 인식이 있다면 그렇게 많은 스캔들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말한 영역 주권사상이 우리 한국 기독교 세계관에 새로운 모티브를 주었으면 한다. 신학대학에서 올바른 기독교 세계관과 문화관에 대한 철저한 교육과 그것이 삶의 현장에서 적용되도록 실질적으로 힘써야 한다.
현재 어려운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교회가 감당하기에는 시간적으로 늦는다. 신학대학들은 교회를 책임지고 사회를 바르게 이끌 미래의 신학도들을 온전한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교육시켜야 하며 이런 신학교육기관들을 위하여 한국교회는 관심과 도움으로 협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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