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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뉴스

[스크랩] 대연각호텔 화재현장(1971년 12.25일)

by 해찬솔의 신학 2009.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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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5명의 생명을 앗아간 대연각 호텔 화재현장에 나온 박정희 대통령이 김현옥 내무부장관으로

 

상황설명을 듣고 있다 >

 

 

 

1971년 12월25일은 많은 한국인들에게 기억하고 싶지 않은 크리스마스일것이다.

이 날 오전 9시50분께 서울 대연각호텔에 불이 났다.

대연각호텔은 21층 건물로 당시 서울의 최고급 호텔 가운데 하나로 꼽혔다.

1층 커피숍에서 프로판가스가 폭발하면서 치솟은 불길은 삽시간에 80여m의 21층까지 번지며 건물 전체를

아비규환으로 뒤덮었다.

데거나 질식해 죽은 사람들 말고도 불을 피해 건물에서 뛰어내리다 죽은 사람들도 수두룩했다.

불은 7시간 반 만에야 꺼졌다.

당시 소방 당국은 미군 소방차의 지원까지 받으며 진화에 나섰지만, 겨울바람이 거세 불길 잡기가

힘들었던 데다 호텔 건물에 스프링클러 따위의소방 시설이 거의 돼 있지 않아 인명 피해를 사뭇 키웠다.


 

이 참혹한 장면들은 텔레비전을 통해 그대로 전국에 전달되면서 사람들을 충격으로 몰았다.


 


대연각(大然閣)호텔은 그 이름부터 불씨를 잉태하고 있었다.

‘그럴 연(然)’자는 본시 개(犬)의 고기(月-肉)를 불(火)에 태운다는 뜻이었으니

대연각은 ‘크게 불이 날 집’이었던 것이다.


 

이 참사는 우리나라에서 단일 화재로 최대의 인명 피해를 낸 사건이었다.

존 길러민 감독의 유명한 재난 영화 ‘타워링’(1974)의 모티브를 제공한 것이 대연각호텔 화재라는 말도 있다


당시 주한 대만대사관 리우생룡(余先榮) 공사는 11층 객실에서 10시간을 버틴 끝에 극적으로 구조됐다.

그는 욕실에서 몸에 물을 적시며 침착하게 구조대를 기다렸다.

15층에 있던 한 일본인은 침대 시트로 끈을 만들어 7층까지 내려와 구조됐다.

전체 사망자 163명 중에는 일본인 10명과 중국인 3명이 포함돼 있어 이 일화는 동양 3국의 국민성을 비유하는

우스갯소리로 회자됐다.

중국인의 침착성과 만만디(慢慢的), 일본인의 영악함을 말해준다는 것.

8층에서 침대 매트에 대충 몸을 의지한 채 뛰어내린 한국 여성은 ‘저돌성’의 표본이었다.

화인(火因)은 프로판가스였다.

1970년대 경제 고도성장에 시동(始動)을 걸던 그때 급속히 보급된 프로판가스가 터져 버린 것이다.

그것은 값싸고 편리했으나 위험천만이었다.

‘정치는 없고 경제만 있는’ 당시의 권력처럼 고약했다.

1970년대는 유독 대형 화재사고가 많았다.

황당한 것은 대연각호텔 화재 때 살아남은 한 20대 여성이 3년 뒤 대왕코너 화재 때 숨지고 만 것이다.


1968년 건축공사를 마친 호텔은 준공검사를 받은 지 불과 한 달 만에 불이 났다.

스프링클러도 없었고 옥상에 헬리포트도 없었다.

방재시설로는 화재경보기가 유일했으나 경보음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대형 건물에서는 스프링클러 설비를 갖추는 것이 의무화되었다

 

 

163명의 희생자중 121명은 발굴현장에서 발견되었으며, 38명은 화재시 뛰어내리다가 사망했고,

2명은 헬리콥타로 구조되다가 떨어졌으며, 2명은 병원에서 숨졌다.


희생자중 남자는 96명, 나머지는 여자였다.


국적별로 보면 한국인 147명, 일본인 10명, 중국인 3명, 미국·인도인등이 3명이었다.


시체 신원확인을 위해 사진과 소지품 명세서가 게시되었으나 17구의 신원이 미확인되었다.

 

출처 : 김한영 박사 신학모음
글쓴이 : 김모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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