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겸손에 대하여
역: 김한영 박사
“우리는 겸손하게 살다가 겸손하게 죽을줄 알아야 한다”(창 11:4의 주석에서).
“헬라의 웅변가였던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는 웅변의 첫째 비결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받았다. 그때 그는 발음을 잘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두번째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동일하게 대답하였다. 그리고 세번째도 동일하게 대답하였다. 이같이 어거스틴도 말하기를, 만일 여러분이 기독교의 신앙 생활의 비결에 대하여 묻는다면,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겸손이라고 답할 것이라고 하였다.”(강요,2권 2:1).
교만이란 모든 죄의 으뜸가는 근원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간교하고 교묘한 독소이다. 여타의 모든 비행은 악한 것들 속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이 교만은 최고로 잘 한다는 행위 가운데서 일어난다. 칼빈에게 있어서 겸손이란 기독자의 모든 신앙 생활의 비결이요, 모든 미덕의 어머니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성경의 해석에서 겸손을 강조하고, 그의 모든 교리 설명의 중요한 바대로 삼는다. 그의 교훈 전체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겸손에 관한 개혁주의적인 그의 교훈의 근거는 다함이 없는 성경에 충실하고저 하는데 기인한다.
모든 신학에서와 같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그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만이 신앙적으로 참되게 우리 자신을 이해하게 한다. 내가 신앙적 지식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 지식은 인간의 능력을 극대화하여 인생의 삶을 이성에만 국한시키려고 하는 철학자들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을 참으로 안다는 것을 하나님을 아는 것과 관계되고 또 이를 요구한다. 이같이 사람은 자신을 앎으로써 겸손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먼저 교만이란 언제 일어나는가? 우리 자신의 약함과 무의미함에 비교하여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시며 어마 어마한 창조적 능력을 가지신이인가를 우리가 망각할 때 일어난다. 우리 육신의 존재를 우리가 인식 할 때, 우리의 안목이 분명히 열리게 된다. 우리는 흙에서 났으므로 울의 가치가 진흙보다 높을 것이 없다. 자연의 법칙은 우리의 육신이 흙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한다. 이러므로 우리는 무의미하다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성경에 비추어 생각할 때, 하나님의 은사들이 우리에게 부으신바 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성실한 마음으로 자연의 질서가 얼마나 완벽한가를 깨닫게 된다면, 우리의 약함과 무가치함을 보다 더 심하게 느끼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썩을 수 밖에 없는 우리 육체에 생명을 주심은 우리로 죽음 이후의 생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하나님 밖에서는 어떤 우수한 것도 발견될 수 없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좋은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이 모든 좋은 것은 선하신 하나님에 의해 지속되고 있는 것이므로 우리는 항상 그를 의지하고 섬기려고 해야할 것이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원하심, 그의 선하심과 관대하심은 우리 자신의 나약함과 변덕스러운 성품, 우리의 처지의 연약함을 더욱 예리하게 경험하게 한다. 시작에서부터 우리는 하나님과 피조물의 정확한 관계를 인식하였다. 그는 창조자이시며, 그의 모든 피조물을 소유하신 분이시다. 우리는 그의 피조물들이다. 그는 모든 좋은 것들의 근원이시다. 우리는 그에게 빚진자들이다. 하나님의 우월하심에 먼저 우리 자신을 굴복시키지 않는한 우리는 그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다. 우리가 겸손과 겸양에 이르기 전에는 그의 선하심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무한하신 은혜를 깨닫고 그를 섬기기 전에는 우리는 우리의 창조자를 알지 못할 것이다.
이 땅에서는 비교되 수 없는 성결하시며 공의로우신 분으로 하나님은 계시되고 있다. 내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이런 하나님의 성품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묘사되고 있는 대로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심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순수하다고 주장하거나 발표할 것이 인간에게는 없다. 처음부터 우리는 멸망할 자들이요, 우리의 창조의 목적에서 이탈된 자들이다. “가히 헤아려 알 수 없는 그의 영광에 비하면, 우리 인생은 모두가 아무것도 아니다”(욥 25:5 의 설교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반역적이고 무례한 불경을 범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서는 우리 중 누구도 육체의 교만을 꺾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전 14:25 주석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우리 인간의 비참함은 어느 정도 인간의 직관에서 동시에 깨달아 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들어내고 우리의 도덕적 약함과 불의함을 들어내는 것은 성경의 법이다. 우리의 부패하고 타락한 성품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반대된다. 우리의 불의와 불순함은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아무런 반응도 보일 수 없다(강요 2권 8:1). 하나님의 법에 맞추어서우리의 전 삶을 철저하게 살펴 보아야 한다. 우리의 심정의 가장 은밀한 생각까지라도 다 들어낙 완전히 잊혀졌고 감추어진 생각들이 우리의 양심에서 부터 되살아날 것이다. 전에는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이런 부패성들을 보고나서 우리는 우리의 생활과 하나님의 참되신 거룩 사이에는 무한한 간격이 있음을 알게 된다. 거만, 무례함, 위선등은 깨어지게 될 것이다.
율법은 우리를 하나님의 법정으로 소환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가까이에서 우리를 살피면, 우리는 세상의 표준으로 우리 자신을 판단하여 맹목적으로 우리에게 유리하게 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의 표준은 아무 힘이 없으면 신빙성도 없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해명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기 전에는 참 겸손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정에 소환당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우리의 심판장이심을 알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생에서의 우리의 모든 것을 그는 아시고 살피실 것이다”(욥 5:8). 우리는 하나님을 그대로 생각해야 한다고 반복해서 칼빈은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라는 말을 농담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의 완전함을 이해 못하면, 상식 이하로로 이를 조롱하고 경멸할 것이다. 참되고 모범된 공의에 따라 인간의 모든 행위가 그대로 심판을 받는다면 그 모든 것은 더럽고 추악할 뿐이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공의라는 것은 하나님앞에서는 순전히 불의일 뿐이다. 성실이라는 것도 부패하였고, 영예라는 것도 수치스러운 것에 불과하다”(강요 3권 12:1,4). 우리의 수치가 들어나지 않으면, 우리의 교만이 산산히 깨어지지 않으면, 그리고 우리가 수욕에 떨어져 먼지 속에 파묻히지 않으면, 우리는 결단코 하나님을 바르게 찬양할 수 없으며, 그를 참되게 높일 수 없을 것이다.(단 4:37주석에서). 우리의 부함의 가치를 헤아리기 전에 차라리 우리의 가난함을 헤아려 보자. 이를 깨달았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처럼 되어 수치심으로 꿇어 엎드리자. 우리 자신에게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불가피하게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강압적인 방법에 의하여 겸손이 얻어진다고 믿어서는 않된다. 사실이 그렇다면, 우리의 설명은 겸손이 아니라 굴복이 될 것이다. 참 겸손을 보다 적극적이다. 겸손은 인간이 내면에서부터 자신을 낮출 것을 요구한다. 겸손은 의식적인 노력과, 강요되지 않은 마음, 진정한 소원과 동의하는 마음을 요구한다. 하나님은 그의 의로우심을 우리에게 계시하신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은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주권을 가지시고 그의 법정에 앉아 계신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하늘의 재판장 앞에 세워야 한다. 각 사람은 스스로 꿇어 엎드려 자신이 동의하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낮추어야 한다(강요 3권 12:1).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신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분 계시는 데로 나아가야만 한다(단 9: 19주석에서). 그의 영광이 우리 위에 비추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를 느끼기를 소원해야 한다(욥 40). 그는 우리에게 내려오신다. 그러나 우리의 전 생애가 벌거벗은 것 같이 들어난 것처럼 그 앞에 전심으로 엎드려야 한다(단 9: 19). 우리는 이를 자발적으로 하여야 한다(욥 31:27, 벧전 5:5). 하나님이 우리를 살피신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한다. 자신이 받는 모든 영광을 떨어버리기 위하여 우리는 자발적으로 완전한 겸손을 배워야만 한다(강요 2권 8:1). 인간이 자신에게 입혀진 모든 왕권을 완전히 벗어버릴 때에만 하나님이 참으로 영광을 받으실 수 있는 것이다(합 1:16). 칼빈은 자신을 아는 사람은 자신을 낮게 평가한다고 거듭 언급하였다. 하나님의 공의를 훼손한 중대한 죄를 범했음을 깨달은 사람은 말없이 그의 겸손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이다(강요 3권 3:16).
이면에서 직접 관계되는 두 언급이 있다. 우리가 자신에게서 발견한 이 언약과 이 죄는 자신과 관계되는 것을 의미한 뿐이요 우리의 이웃과 관계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춘 사람은 이웃의 죄를 보고 안심하는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세리의 비유는 우리에게 보여준다. 하나님은 우리와 이웃하는 사람들을 판단하시므로 우리 중의 어떤이를 심판하시는 우회적 방법을 사용하시지 아니하신다. 한 사람의 본성은 다른 사람에 의하여 달라지지 않는다. 둘째로 칼빈주의 자는 자기 주위에 모든 것을 불신하고 정죄하는 비관적이며 불신에 찬 비평가가 아니다. 그는 자신에 관한 모든 망상을 떨어버리는 분별있는 사람이다. 반면에 자신의 죄를 깨닫고 다른 사람에 대하여 관용하며 사랑한다. 그 누구보다도 자신을 잘 알기 때문에 그는 자기 자신을 정죄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만족한다. 심판의 권세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만 속한 것임을 그는 안다.
더 나아가 이 자발적인 겸손은 자신이나 타인 앞에서 고질적 열등감을 유발시키는 자학적이며 병적인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소명감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겸손은 절망이 아니다. 겸손은 겸손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전혀 그 반대다! 겸손은 은혜에 이르는 좁은 길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인도하는 길이다(단 7:5-8). 우리 자신의 슬픔은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 안에서 기쁨이 된다. 인간의 겸손과 하나님의 은혜는 나눌 수 없는 한 쌍이다. 하나님은 그가 구원하신 사람들이 겸손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그에게만 소망을 갖게 하신다. “당신이 자신의 내면에서 연약을 느낄수록 하나님은 더욱 기꺼히 당신을 영접하신다”, 고 어거스틴은 말하였다.
겸손한 중에도 열들감이나 낙심에 빠지지 아니하도록 우리는 항상 경계해야 한다. 사탄은 간교하게 우리 앞에 덫을 놓아 우리의 구원에 필수적인 것이 되리어 우리에게 해가 되게 할려고 한다. 사람이 교만하게 되면, 사탄은 승자가 된다. 사람이 겸손하게 되면, 사탄은 거의 패배에 이른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가 불운을 당할 때, 우리에게 절망의 덫을 던저 하나님에 대한 모든 소망을 잃어버리게 한다. 그리하여 그의 은혜를 믿지 않게하며, 은혜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게 할려고 한다. 우리는 우리의 대적보다 더 대비해야 한다. 항상 방비책을 예비해 놓아야 한다. “겸손은 용서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게하며, 아무리 힘써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강요 3권 3:15). 인간이 자신의 약함을 하나님이 완전히 치료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아는 한 그의 겸손에는 한계가 없다”(강요 2권 2:10).
겸손은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데 필요한 한 국면이다. “겸손은 우리가 그에게 완전히 순응함을 표하는 하나의 재물이다”(욥 31). 겸손은 총체적이어야만 한다. 겸손은 머리를 깊이 수그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외적인 모습으로 참 겸손을 헛되히 모방려는 행위에 불과하다. 겸손이란 필요 이상으로 우리 자신을 경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더욱 자신은 덕망이 높다고 느끼면서도 그렇지 않은양 행세하려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강요 3권 12:6). 겸손은 우리의 모든 권리를 다 박탈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겸손은 꾸밈이 없이 우리의 마음을 낮춤이요, 가식이 없이 자신을 비움이다. 겸손은 중심으로부터 자신의 비참함과 가난함을 인식하는데서 나온다. 우리의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님께 고백할 수 있는가? 헛된 변명을 버리고 참으로 고백을 우리는 드려야 한다.
우리가 절반쯤 겸손하여 일부분만을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은 절반쯤만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것을 온전히 그 자신만을 위하여 남겨놓으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누워 가질 수가 없다. 만일 우리가 이런 유혹을 받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도덕 능력 공의와 모든 영광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하면 우리가 아무것도 아님을 충분히 가르쳐 줄 것이다. 더욱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우리의 덕의 근원을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 스스로는 아무아무 가진 것이 없다. 모든것은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졌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더욱 살피면, 우리는 우리의 죄가 우리 속에 얽혀 섞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허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낮추어 이 은혜를 받아야만 한다. 그 다음에 아무리 부족하다고 해도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 우리가 가장 잘 했다는 일들을 하나님이 판단하신다면, 그는 그 속에서 그의 공의를 발견하시고 우리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발견하실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처지를 기억하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려야 할것이다(행 12:23).
“성 버나드는 말하기를, 사람의 미덕이 여기 있으니 즉 그를 구원하실 수 있는 이에게 그 모든 소망을 두는 것이라고 하였다”(강요 3권 12:3).
실제로 모든 것이 은혜이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 우리는 그 안에서 안심할 수 있다. 신명기 9:1~6의 설교에서 칼빈은 외쳤다. “만일 인생이 이 세상을 다 살고도 고물 취급도 못 받는다면, 어떻게 그에게 영생을 얻을 공로가 있겠는가? 만일 내가 한 푼의 돈도 벌어드릴 수 없다면, 내가 하나님의 나를 얻을 수 있겠는가?” 우리 속에 가장 바르게 겸손을 세우고 유지시키는 교리는 은총의 선택론이다. 경건 생활의 시작은 믿음이다. 그리고 성경에 의하면, 믿음은 값없이 주신 선물이다. 하나님은 돌과 같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시셨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다 파기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대신 하나님의 은혜에서 흘러나오는 것들로 채워야 한다. 우리의 중생은 일종의 창조이다. “우리의 의지가 다시 개혁되기 이전에는 거기에서 어떤 선한 것도 나올 수가 없다. 개혁이 된 이후에 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지 우리 자신에게서 온 것은 아니다”(강요 2권 3:8). “이 원리를 모르면, 하나님의 영광을 경감시키고 참 겸손을 격감시킨다. 이런 무지는 구원받는 것을 하나님의 손에만 맡길줄을 모른다”(강요 3권21”1). 이런 류의 겸손이 뿌리 뽑히지 않으면, 하나님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적지 않을 해를 끼치게 된다. 은총의 선택론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당연한 겸손의 감정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의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cf. Ibid).
겸손을 통해서만 우리는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갈 수 있으며 그를 영접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값진 피를 통하여 겸손의 교리의 본질을 세우시었다. 우리는 비참하고 무가치한 죄인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얼굴이 우리 위에 비추시었다. 우리가 편히 쉬는 아닉일로 주일을 지킬 때, 우리 자신이 성취한 일들은 다 잊어버리고 그대신 주님이 이루신 놀라운 사역으로 기뻐해야 할 것이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시었다”(요 15:4~5).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 문제는 분명하다. 그리스도는 우리 자신의 능력에 대하여 어떤 생각도 갖지 못하게 하신다. 포도나무가 흙으로 부터의 자양분과 하늘로 부터의 이슬 그리고 태양으로 부터의 열을 받아 힘을 얻는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우리는 열매를 맺을 수가 있다. 우리의 선행 중 그 어느 것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돌릴 수는 없다. 기독자의 참된 모습은 그의 할 수 없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진정한 영광을 돌릴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방법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진정한 영광을 돌릴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우리를 그에게 필요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을 그에게 고하는 것이요, 그가 우리를 위로하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낮추는 것이며, 우리가 그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고 우리 자신으로는 죽은 우리가 그 안에서 살아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정죄하는 것 등이다. 후한 부자에게 나오는 걸인처럼, 의사에게 나오는 환자처럼, 의로운 판사에게 나오는 죄인처럼, 생명을 줄 수 있는 사람 앞에 나오는 시체처럼 우리는 그에게 나아와야 한다”(강요 4권 17:42).
교만대신에, 우리가 받은 은혜는 우리 눈에서 베일을 벗기고 보다 깊게 우리 자신의 참된 본성을 깨닫게 해준다. “하나님은 그의 은혜로 우리 자신의 밑바닥에 있는 것까지도 발견하게 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신 7:5~8). 용서받은 죄인만이 그이 죄의 더러움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만이 그리스도안에 계시된 하난미의 사랑을 이해한다. 그리고 참되게 자신을 이해한다. 어떻게 하여야 될 것인가를 아는 겸손은 보다 훌륭한 겸손을 배양한다. 가난한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은 부함중에 계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 이는 역시 우리 피조물의 가난함을 더욱 실감나게 한다. 우리는 그 이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민 18:8).
은혜는 우리의 것이다. 그러나 은혜가 결코 우리가 될 수는 없다. 하나님이 그의 선하심으로 주신 은혜와 우리 자신을 언제나 구별해야 한다. 우리 자신을 한 편에 놓고 그리고 하나님을 다른 한 편에 놓고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 “은혜는 나의 것이 아니다.. 내 스스로는 이를 소유할 수가 없다. 내가 이를 얻었으면 이를 내게 주신 하나님을 찬양해야할 것이다”(욥 7:8). 죄 이외에 우리의 것이라곤 아무것도 우리에겐 없다. 선하심의 찬양을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받을수는 없다. 이 모든 영광을 오직 그에게만 돌려야 한다. 이 부드러운 은혜는 우리의 경외심으로 놀라게 한다. 그 결과 우리는 전적으로 그에게만 의지하고 우리 자신을 그의 능력아래 겸손히 엎드리게 한다(강요 3권 2:23).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의 “기도론(Treatise on Prayer)에서 의지하는 마음이 항상 기도 중에 강조되어야 한다고 아주 힘주어 말하고 있다.
성경과 기도를 통하여 얻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신비적 연합을 통하여 그와 나눈 교제는 우리의 겸손을 완전하게 한다. 이제 우리는 자신은 다 잊어버리고 하나님 섬기는 것만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 영혼속에 감추어진 죄악들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의 길은 우리를 즐겁게하는 것과 관계되는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에게 향하신 그의 요구와 소원을 찾아 우리는 우리의 지성과 감성을 기우려야만 한다. 칼빈은 이를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로 요약하였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강요 3권 7:1). 칼빈의 목표는, “나는 하나님께 마음을 제물로 드린다”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이 그를 섬기게 하기 위하여 완전히 굴복시킨 한 사람의 태도가 생생하게 묘사된 말이다.
사람이 자신의 의지를 포기할 때, 역시 그는 그의 이성과 판단 지혜 지성 감정등을 버리고 그의 모든 기능과 노력을 기우려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된다. 칼빈은 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여 언급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입으로 순종하는 것만 아니라 자신의 판단을 비운 인간의 마음이 자신을 완전히 다스려 하나님의 영의 지시에 따르게 하는 것을 나는 하나님을 섬김이라고 부른다”(강요 3권7:1). 철학자들은 이 태도를 무시한다. 기독교 철학은 이성이 성령에게 순종하므로 인간이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살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영 안에서 살 수 있게 되기를 요구한다(cf. Ibid). 겸손은 모든 참된 지능의 시작이다(겔 1:13주석).
성경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일만을 통하여 우리 안에 살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를 모시는 일이 가능하다. 칼빈이 온유의 영 이라고 부르는(마 20:24주석) 성령님이 우리를 깨우쳐 지적으로 다스리심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지 못할 때, 겸손할 수가 없다(합 1:16). 교만은 결과적으로 성경을 수용하는데 넘을 수 없는 장벽이 된다. 교만은 인간 이성에 일치하지 않는 계시를 거절한다. 하나님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으므로 그것은 그들에게 순전히 어리석게 보일 뿐이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어리석은 지혜를 생각할 때, 그들의 반역이 어리석을 뿐이다. 교만은 원숭이가 악보를 아는 것보다도 더 못하게 하나님의 신비를 헤아릴 능력을 갖지 못한다. 수준 이하로 모든 것들이 우리의 정신을 둔감케하고 우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한다(강요 2권 2:21). 그러나 산 체험에 의하여 성경의 광체와 지혜와 능력이 크신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이 그들에게 계시하기를 쉬임없이 추구하는 칼빈과 그의 제자들을 지배하였다(신 5:22설교).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우리는 그의 말씀을 신중히 받아야 한다. 하나님을 놀이감으로 삼는 일이 있어서는 않된다. 그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굴복시켜 그의 뜻대로 세워놓은 양떼와 같이 그가 우리를 다스리신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한다. 그의 말씀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를 확신하고서, 칼빈은 성경을 읽고 배우는 원리를 정하였다. 우리는 호기심에서가 아니라 복종하고저 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판단하는 마음이 아니라 신중한 마음올 마지못한 마음이 아니라 즐거운 마음으로 성경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게시되었으며, 그리스도가 성경에 의해서 우리에게 계시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복종하여야 한다. 이같이 우리 지식의 한계는 제한되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외에서 하나님을 찾거나, 그것의 인도를 받지 않고 하나님을 생각하거나, 성경에서 인용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말해서는 안된다”(강요 1권 13:21). 아담은 그의 지식에 의하여 보다 높은 완전에 이르기를 그는 추구하였다. 하나님을 거짓말쟁이 사탄을 진실한 자로 만들어 버렸다. 원죄의 아픔을 당하고 있는 우리가 오늘 우리의 이 비참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을 높이려는 생각이나 하고 있다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우리에게 하나님이 남추신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줄 선생이나 의사는 누가 되겠는가? 믿음으로 자신을 다스림을 가르치는 일을 우리가 포기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그 이전에 세상을 왜 창조하시지 않으셨을가를 알고저 하는가? “하나님이 그렇게 오랫동안 지체하신 이유에 대하여 우리가 탐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 하신다. 인간의 심령이 그렇게 멋대로 높아지려고 한다면, 그는 그 길에서 수 백번이고 실패할 것이다. 이외에도 하나님이 이유가 있겠는데 이를 감추시고 왜 우리의 믿음의 견고함을 시험하시는지를 알고저 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강요 1권 14:1).
천사들의 창조 주 조직 역할등에 관하여 호기심이 있는가? “마지막날까지 완전한 공개가 유보되어 있는 비밀에 이 호기심은 우리를 끌어넣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한 우리의 호기심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우리가 알아서는 안되는 것을 알아보려는 시도를 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려는 뻔뻔스러운 행동에 주의하여야 한다(강요 1권 14:8).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 사탄의 타락의 이유 방법 시기등을 성경밖에서 연구하려고 하는가? “이런 일들은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 경솔히 말하거나 취급하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 터무니 없고 열매도 없는 이야기들을 읊조리므로 우리의 호기심을 채우려는 것은 성령님과 일치하지 않는 일이다(강요 1권 14:16). “성경에 나타난 모든 하늘의 비밀에 관하여 우리는 정중히 침묵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한계를 긋는 것보다 더 넘어서 이야기하려는 것을 경계하여야 한ㄷ(강요 1권 13:21).
신중함 위에 복종함을 더해야 한다. 먼저 신중함은 만족하지 못한 지식에 대하여 지나친 호기심을 갖는 것을 억제해 줄 것이다. 보다 더 모든 문제를 잘 알기를 원한다는 핑게하에, 성경 연구하는 일을 포기하지말자. 이 성경 연궁0ㅔ 우리는 가능성이 미치는 한에까지 다함이 없는 우리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과 전연 상관도 없는 문제들을 언제나 쉬임없이 그리고 만족하지 않고 알기를 백과 사전과 같은 마음을 칼빈은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필요한 것은 과다한 지식이 아니라 신중함이다. 신명기 12:29~32의 설교에서 칼빈은 매우 신중한 태도로 이면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학문에 있어서의 이 온건함에 아성의 온건함과 지식의 기교의 온건함을 더해 보자., 우리의 본성은 편협한 한계에 머물러 있다. 우리의 능력의 부족을 우리는 인식하여햐 한다. 칼빈은 미묘한 문제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피하였다. 그리고 모든 추론을 금하였다. 모든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대한 정의를 내리를 것도 금하였다. 겸손하고 온건한 크리스챤의 지식은 철학자나 학자들이나 교파주의자들이나 이단들의 지식이 아니다. 하나님, 그의 본질, 그의 계획, 그의 비밀들은 우리에게 이해될 수 없다. 성경보다 더 나아가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우리의 이해에 예속시키는 것이된다, 하나님을 우리의 이성의 한계와 범주에 묶어두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에게서 그의 초월성을 박탈함이 될 것이다. 칼빈은 외치기를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마음에 갇히워 진다면 그의 위대하심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라고 하였다(신 4:11~14). 그는 전연 더 이상 하나님이 되실 수 없을 것이다. 신비로움은 신앙의 한 부분이다. 그 신비로움이 살아지고 하나님의 사상은 인간 자신의 개념에 축소되고 영원을 시간에 속박시킬 때, 아무리 주권적이라는 말을 한다고 해도 이성보다 나을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신론은 신비로 남아 있어야 한다. 성 히라리우스(St. Hilaire, 주후 403-449)는 말하기를 “하나님 자신을 아는 특권은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이는 하나님만이 자신을 적절히 살피시며 그 자신에 의하여 알려지신다”고 하였다. 그가 자신을 알려주신 대로 우리가 그를 이해하려면, 그리고 그의 말씀을 통해서만 그에 관한 것을 탐구하고저 한다면, 우리는 그에 속한 것을 그에게만 맡겨드려야 한다(강요 1권13:21). 하나님은 자신을 양성에 의하여 계시된 그리스도의 품위의 연합에서만 알려주신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것을 발견하지 못할 때는 우리가 무지 가운데 살고 잇음을 깨달아야 한다”
심령의 굴복과 지식의 겸양은 모든 신자에게 요구되는 지적 겸손의 두가지 아름다운 열매이다. 그러나 우리가 시험이나 환난을 받을 때, 혹은 하나님의 계획이나 비밀의 섭리에 관계하여 우리의 느낌이 작난을 하려고하면 우리는 경계하여 이 무례함을 막아야 한다. 수용하려는 마음의 자세가 겸손을 완전케 한다.
주후2012년 11월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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