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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료·논문

로마 카토릭의 칭의론

by 해찬솔의 신학 2008. 7. 1.

                                       

                                       로마카톨릭의 칭의론

 

1. 전통적 칭의론 - Trent공의회

 

중세기를 거치며 부패해온 교회의 정화를 주장하며 루터가 ‘오직 성경’을 주장하고 나섬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로마카톨릭교회는 교회개혁을 시작했고 특히 1555년 아우그스부르그 종교협정 후 로마카톨릭은 자체 교리확립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트렌트공의회는 카톨릭 종교개혁의 상징이면서 근대 로마카톨릭의 시작이라고 언급되기도 한다. 그러나 교리의 측면에 있어서는 전통적 이론을 재확인하고 있다. 로마카톨릭과 개신교의 분열의 주된 원인은 칭의에 관한 입장차이였는데 트렌트공의회에서는 전통적 칭의이론을 수호한다.

트렌트공의회는 교회 법률과 관습 개혁과 개신교의 견해에 대한 분명한 교리적 정립이라는 두 개의 근본적 방향으로 움직였다. 회의가 의제로 채택한 주제들은 근본적으로 개신교 정교개혁에서 제기된 것들인데 성경의 권위, 원죄의 본성과 결과, 의인, 성례전, 연옥, 성자와 유물에 대한 숭배 등이었다. 회의는 실질적인 측면에서 대부분 개신교 개혁자들과 철저히 반대되는 입장을 취했다.

칭의에 관한 논의는 1546년 6월 22일 시작되어 1547년 1월 13일 신조가 발표되었다. 본 교령의 말미에는 각각 ‘만일 누구든지...라고 말한다면’으로 시작하여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로 끝난다. 이 법규들은 지금까지 가르친 내용을 강화하는 구실을 한다. 이 교령의 가르침은 루터의 신학에 대한 거부일 뿐만 아니라 어거스틴이 설명하고 아퀴나스가 확증한 옛 서방 카톨릭 칭의 교리에 대한 재천명이다. 물론 개신교의 존재가 이 주제의 접근법에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각 장의 내용은 개신교의 가르침에 대한 단순한 논박의 차원을 넘어, 중세 후대의 부가물과 오류를 제거함으로써 어거스틴의 가르침으로 회귀하려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의 사상과 구분되는 로마 카톨릭의 칭의 개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칭의는 성화를 포함한다

 

칭의에 관한 교리 제 4장에서는 칭의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칭의란 인간이 아담의 자녀로 탄생한 상태로부터 제 2의 아담인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의 상태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입양의 상태로 변환되는 것이다. 이 변환은 복음의 선포 이래로, 중생의 씻음 없이는 발생할 수 없다.

 

칭의는 세례의 사건 즉 중생의 씻음과 함께 시작되는 과정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7장 서두에서는 칭의는 죄의 용서이면서도 은혜와 선물들의 자발적 수용을 통한 내적 인간의 성화와 갱신임을 말한다. 이에 의해 불의한 사람이 의로워지고 적이 친구가 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영원한 생명의 소망에 따른 후사가 된다는 것이다. 이어서 10장에서 이를 더 분명히 하고 있다. 즉 칭의는 의로워지는 과정이며 따라서 신자들의 마음 속에서 칭의가 증가될 수 있다고 진술한다.

그들은 하나님과 교회의 계명의 준수를 통한 믿음이 선행과 협력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그 의에서 성장하며 한층 더 의로워진다.

 

이것은 트렌트회의의 칭의개념에는 종교개혁가들이 칭의와 구분하여 말한 성화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2) 칭의를 위한 우리 안의 의는 내재적인 것이다

 

트렌트회의에서는 중세적인 스타일로 칭의의 원인들이 스콜라식 인자범주를 사용하여 설명되고 있다. 그 중 칭의를 위한 형상인은 하나님의 의이며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게 만든다. 즉 주입된 의가 칭의의 형식적 원인이 된다. 칭의된 죄인은 성령의 자유로운 관대함과 자신의 기질과 협력에 의하여 의를 받은 이래로 의롭다고 인정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의롭다고 불리우며 의롭다. 여기에 트렌트 공의회의 핵심이 있다. ‘형식적 원인’은 죄인들에게 전달되는 내재적 의이다.

결국 우리 안의 의는 우리 자신들로부터 우리 자신의 것으로서 세워지는 우리 자신의 의가 아니다. 이 의가 우리의 의라고 불리는 것은 이 의가 우리 안에 내재함으로 인해 우리가 의로워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우리 안에 주입되는 의이다.

의에 관하여 트렌트회의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시고 그 고난의 공로를 통하여 그분 안에서 거듭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그리스도의 독특한 역할을 재확인하였다. 칭의에 관한 교령 1장에서는 원죄에 관한 선대의 교령을 생각해보며 인간이 자신의 힘이나 도덕적 법에 의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음을 선언한다. 그리고 3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새로운 탄생으로 그분의 수난의 공로를 통하여 사람들을 의롭게 만드는 은혜가 사람들에게 ‘하사된다’면서 그리스도의 수난 공로를 전달받은 자들이 ‘의로워진다’고 한다. 칭의는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의롭게 ‘만든다’는 의미이다.

 

3) 믿음은 인간구원의 ‘시작’이다

 

교령 8장에는 믿음의 우선성을 인정하고 있다. 믿음은 인간 구원의 시작이며 모든 칭의의 토대와 뿌리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구원을 위한 공로가 되지는 못한다. 믿음은 단지 칭의에 선행될 뿐이다. 믿음이 칭의를 위해 필수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이 믿음은 소망과 사랑이 덧붙여져 작용해야 한다. 이 점에서 루터의 ‘오직 믿음’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믿음이 선행과 협력함에 따라서 인간은 성숙되고 더욱 의로와진다.

 

4) 구원의 확신은 불가하다

 

이처럼 경건한 사람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공로, 성례의 힘과 효력을 의심하지 않아야 하지만 각 사람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연약함, 자신의 부적합성을 주시해 볼 때 자신이 받은 은혜에 관하여 두려움과 우려를 가질 수도 있다고 한다. 아무도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획득하였다고 오류를 범할 수 없는 어떤 확실한 믿음으로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12장에서 선언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자기는 확실히 택함 받은 자 가운데 하나라고 상상하는 것은 경솔한 가정이라는 것이다. 13장에서는 분명하게 인내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밝힌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스스로 섰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넘어질까 두려워하며 애씀과 자지 못함, 자선행위, 기도와 헌신, 금식과 연단 가운데 두려움과 떨림으로 자기 구원을 이루도록하여야 한다.

 

이미 받은 칭의의 은혜는 믿음 그 자체까지 상실케하는 배교나 기타 용서받지 못할 온갖 죄에 의해서 상실될 수 있다. 만일 이 과정 중에 믿음을 상실하거나 은혜로부터 떨어져나가면 고해성사를 통해 칭의 상태로 회복될 수 있다.

그리고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자비롭게 약속된 은혜인데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그들의 선행과 공로에 대해 신실하게 주어지는 보상이라고 언급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는 가운데 끝까지 선하게 행동하는 자들에게 제공된다고 한다. 여기에 로마 카톨릭의 잉여공로설이 나타난다. 칭의된 사람의 선행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것들은 이 칭의된 사람의 선한 공로이기도 하다고 하였다.

11장에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속적으로 지켜야 할 필요성이 강조된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들은 그의

계명을 지킨다. ...이 일은 확실히 하나님의 도움으로써 행할 수 있는 일이다.

 

끝까지 견디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께 버림을 받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일단 의로워진 자들이 먼저 하나님을 버리지 않는 이상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는다.

 

이상에서 보아 전통적인 로마카톨릭 교회의 칭의는 하나님과 인간의 협동작업이며 의인은 ‘믿음만으로가’ 아닌, 은혜와 공덕의 주입을 포함하고 있다. 그 은혜도 인간이 수용하던 말던간에 초자연적인 삶을 살기 위해 충분하고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본다.

 

 

2. Lutheran과의 대화를 통한 일치

 

트렌트공의회 이후, 사백년 동안 카톨릭은 자체 내 토론은 벌였으나 루터란과의 대화는 없었다. 루터란은 여전히 칭의를 핵심적인 교리로 인식하면서 단지 다양한 해석을 시도하였으나 카톨릭은 죄, 자유, 본성, 은총 등을 다루면서 칭의 자체에 집중하지는 않았다.

20세기 중엽 Vatican Ⅱ공의회에서 칭의문제를 간접적으로 다루었는데 믿음이 칭의를 가져오는 은총에 대한 신자들의 반응 전체를 포함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협력과 공로문제에 있어서 공의회는 프로테스탄트의 관심과 카톨릭 안에 상존하는 반 펠라기우스적 경향에 민감하게 대응하였다.

VaticanⅡ 공의회 이후 로마 카톨릭 교회는 루터란세계연맹(LWF)과 교제를 가졌고 공식적으로 대화와 협력을 논의하게 되었다. 양측은 전통적으로 논쟁거리가 되어왔던 교리상의 문제들로 인한 오해와 불합리의 원인들이 현대 세계속에서 부여받은 새로운 통찰력을 통해 제거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로마카톨릭과 루터란은 1967년 스위스의 Zurich에서 “복음과 전통”이란 주제 하에 첫 회합을 가진 이래 1971년 2월, 다섯 번째 회합을 “복음과 교회”라는 주제로 San Anton에서 가졌다. 그리고 수년간 계속적인 대화를 통해 1997년에는 칭의론에 대한 합의문을 작성하였고 1999년 10월, 이 합의문을 승인하기로 결정하였다. 오랫동안 로마카톨릭과 루터교와의 갈등의 핵심으로 작용하던 교리중 하나인 칭의론은 이제 더 이상 양측의 불일치의 근거로 제기될 이유가 사실상 없어졌다.

루터교와의 대화를 통한 칭의론의 합의과정과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The Gospel and the Church (1972: Malta Report)

 

이 보고서에서는 궁극적으로 로마카톨릭과 루터교의 분리는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의 문제에서 야기된 것임을 언급하며 양측은 이제 복음이 부활 사건에 대한 증언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 즉 하나의 복음의 진리라는 것에 일치하였다(25).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계 구원을 위하여 행하신 것이 복음 안에 전달되었고 성령 안에서 현존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행위의 선포로서 복음은 하나의 구원 사건 자체라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 사건을 구원의 행동으로 만드시는 분은 성령이심에 일치를 보았다(18)

카톨릭 신학자들은 신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은 인간의 성취들이 관계하는 한 무조건적임을 강조하였고, 루터교 신학자들은 “칭의의 사건은 죄의 개인적 용서에 제한되어 있지 않다”고 말하면서 칭의 사건에 대해 죄인의 칭의에 대한 순수한 외적 선언으로만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리스도 사건 속에서 살펴본 하나님의 의는 칭의의 메시지를 통하여 신자의 새로운 삶에 기본적인 포괄적 실재로서 죄인에게 전달되었다고 주장하였다(26). 나아가 복음이 증언하고 있는 구원사건이 신약성경에 화해, 자유, 구속, 새로운 삶, 새 창조 등으로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고 하였다(27). 양측은 복음이 곧 이신칭의를 의미한다는 합의를 보았다.

 

 

2) All Under one Christ(1980)

 

이 성명서는 만장일치제로 승인되었는데, 양측은 삼위일체되신 하나님과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대한 믿음을 고백함으로써 이것이 기독교신앙의 중심임을 재인식하였고 칭의론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합의가 있었다.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공적 때문이 아니라 오직 은혜와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성령을 받아들이게 된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우리가 선행을 할 수 있도록 구비하고 우리를 선행으로 부르신다(14)

 

또한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이 믿음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기본적 교리적 진리임을 인정하였다(7).

 

3) Justification by faith(1985)

 

그러나 16세기 이래로 분열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칭의론의 문제는 Malta Report에서의 약간의 논의로는 부족하였다. 1983년에 나온 이 문서에서는 이신칭의에 관하여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양측은 칭의를 Solus Christus를 옹호하는 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로 받아들이는데 합의점을 찾아가고 있다(155).

양측의 근본적인 확신은 다음과 같이 정리되었다.

 

칭의와 구원에 대한 우리 모두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있으며 이 복음에 의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행위라는 복음이 알려진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과 구원사역 외의 그 어떤 것에도 궁극적인 신뢰를 보내지 않는다(157).

 

본 문서는 복음에 대한 신뢰 속에서 최종적으로 공유 선언을 싣고 있다. 즉 하나님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고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안에서 우리가 자유과 하나님과의 교제로 부름받았다는 것이며, 이 부르심에의 응답은 은총으로 말미암는 것이지 자기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 삶의 모든 국면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증거하도록 인도하심을 받는데 이 믿음은 우리 자신과 모든 인류에 대하여 소망을 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이 전 세계가 갈망하는 복음으로 선포될 것을 확신하게 한다는 것이다(161).

여기에서 구원을 위해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 강조됨으로써 칭의교리의 중심이 나타났고, 최종 구원의 필요한 사전 준비로서 은총과 이를 통해 죄인이 변한다는 가톨릭의 전통적 입장도 배제되지 않았다.

이 문서에서는 구원 확신의 성격, 하나님 앞에서 칭의된 자들의 근본적이고 경험적인 자세에 대한 내용이 일치되었다.

 

 

4) Church and Justification(1994)

 

본 문서는 칭의론과 교회론을 적극적으로 연결하여 생각하고 있다. “칭의와 교회는 생생한 관계속에 있고 하나님의 구원행위의 결과이다(1).”

칭의론에 관한 합의는 교회론적으로 증명되어야 하는데 결과적으로 칭의의 본질과 효과에 관하여 믿어지고 가르쳐지는 모든 것은 교회, 구원의 수단, 교회의 교역에 대한 광범위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언급한다(2).

이 문서에서는 칭의와 교회는 모두 신앙의 진리이고 그리스도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근거하며 우리의 세상속에서 하나의 도전이 되는 은혜의 선물임을 시작부분에서 강조하고 있다(3). 이신칭의와 교회가 어느위치에 있는가는 다음의 내용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우리는 칭의와 교회를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교회 안으로 모으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성령 안에서 우리를 거룩케 하시고 교회 안에 내주하시는 성부를 믿는다. 우리의 신앙은 칭의와 교회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으로 이해한다...우리는 칭의와 교회 모두 우리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인 신,망,애로 인도함을 공동으로 말할 수 있다(5)

 

이처럼 칭의와 교회의 존재목적을 삼위일체론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이전의 기독론 중심에서 삼위일체 중심의 칭의론으로의 전환을 보여준다.

칭의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의지의 표현이라고 하면서 칭의와 교회는 “사랑”의 방향으로 나아감을 언급하는데, 이 사랑의 방향은 JPIC 흐름과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다. 즉 인간사회의 정의,평화의 증진를 넘어 창조질서 보존까지로 지평이 넓어진다. 그러나 성화 차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자체 안에서 일어난 ‘새창조’(new creation)를 내세운다. 결국 복음 자체 안에서 구원론적 차원과 윤리가 하나로 엮여있게 된다. 즉 칭의와 성화가 분리될 수 없게 된다. 이런 맥락은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 속에서 칭의와 성화를 보았던 개혁신학의 입장과도 상통한다. 여기서 양측은 칭의와 교회를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면서 도전’이라는데 합의를 보았다.

 

그리스도와 삼위일체의 신비는 과분하고 은혜로운 칭의와 교회의 선물을 위한 기초이다. 인간은 아무것도 기여할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 그것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이 선물의 은혜로우심 때문이다. ...하나님의 순수한 사랑으로 죄많은 피조물을 용납하시고 삶의 기초로 행위와 성취의 법을 거부하신다. 하나님은 세상 속에 유행하는 것과 가장 심오하게 모순되는 삶의 방식인 사랑의 삶을 여신다. 이 사랑은 믿음으로부터 일어나며...정의,평화,창조질서의 보존을 증진시키도록 촉구한다(9).

 

또한 이 문서는 교회가 칭의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면서 동시에 칭의가 이루어지는 장소임을 강조한다. 즉 칭의론에 의해 교회의 생명력이 평가되어야 하고 교회는 이 칭의메시지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110). 양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행위가 audible and visible ecclesial community에 매개되는 audible and visible means of grace를 통해 신자들을 부르시고 성화시킨다는 것에 동의하였다(147).

이 문서는 앞서 언급했듯이 Missio Dei 차원과 Life and Work차원의 사회참여를 언급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매우 약하다.

 

5) Joint Declaration on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1997: Final Proposal)

 

이제 로마카톨릭과 루터교 양 진영은 칭의론에 관한 기본적인 진리에 있어 합의에 도달하였다.이 문서에서는 먼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을 함께 경청하여 이해를 공유한 후 칭의론에 대하여 삼위일체의 사역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righteousness이며 우리를 부르시고 화해시키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라고 한다(14-16).

이어 양 진영은 “칭의는 하나님의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발생한다”고 주장하여 자력구원을 거부한다(19). 결정적 이신칭의 이전의 preparation도(habitus), 은혜의 결과이다. 루터도 인간 쪽의 응답을 인정하였다. 결국 결정적 이신칭의 이전(habitus)이나 이후(sanctification)는 이신칭의 자체와 구별되며 인간의 구원은 ‘칭의’에 있다고 하였다(20).

나아가 로마카톨릭은 ‘협력’개념을 “인간의 능력으로부터 발생하는 행동이 아니라 은혜의 효력으로서 인격적인 동의”로 설명하였고 루터교는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영향받은 신앙과 인격적으로 관련되어 있다(21)”고 하여 인간 쪽에서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하였다.

또한 루터란은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의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용서하시는 사랑의 측면으로 강조하면서도 그리스도인의 삶의 갱신을 부정하지는 않는다”(23)고 말함으로써 ‘made righteous'를 전보다 강조하였다. 로마 카톨릭은 “칭의에 관한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은 인간의 협력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24)고 말하여 서로 합의를 이루었다. 이런 태도라면 구원론에 있어서 가톨릭과 루터란 사이의 차이는 매우 적어진다.

양측은 26,27항목에서 “칭의없이 믿음은 존재하지 않는다”(루터란)와 “믿음없이 칭의는 발생할 수 없다”(카톨릭)고 말함으로써 이신칭의와 성화가 구별은 되지만 분리는 되지 않는다는데 합의를 이루었다. 그런데 선행은 칭의를 뒤따르며 칭의의 열매라고 양측이 공히 고백하고 있다(36). 특히 루터란은 “righteousness"의 “complete"를 말함과 동시에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가운데에서 효과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36) ‘의’의 ‘완전성’과 ‘점진성’을 모두 설명하고 합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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