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ICAL PREACHING
- CREATING SERMONS FOR THE NEW MILLENNIUM
Ⅰ. Lecture 1 - The Call to Preach 설교자의 소명.
가장 큰방은 개선의 방이다. 사람으로서 완벽한 설교를 한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같은 설교 할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고, 우리 인간의 설교를 위한 노력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Introduction
성서적인 설교란 오순절 이후의 설교를 말하며 이는 전 세계에 하나님의 말씀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설교의 이상적인 모델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오순절 때에 베드로의 설교로 그는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영적인 부흥을 일으켰으며 구원의 열매를 거두었다(행 2:14-36).
초대교회의 서머나의 감독이었던 폴리캅도 영적 부흥의 설교를 외쳤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미국 출신의 첫 번째 위대한 설교자인 죠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1703-1758)의 설교는 대각성운동의 주요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18세기 영국에서는 조지 휘트필드(George Whitefield;1714-1770)는 웨슬레와 함께 옥외 설교가로 영적 각성을 일으키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20세기 들어서는 미국 출신의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미국 및 전 세계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복음 전파를 명령 하셨습니다(마28:18-20 ; 막16:15-18 ; 눅24:47-48 ; 요21:24).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은 하나님의 왕국(나라)에 대하여 설교하고 가르치라는 것이었습니다.
Post-modern 시대인 현대에 누가 설교를 듣는가?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유럽의 성당은 비워가고 있다. 반면 다른 곳에서는 초교파적이며 폭발적인 성장이 일어나고 있다(중국의 처소교회, 아프리카의 부흥, 남미의 부흥, 아시아의 부흥 등).
그리고 세계 도처에서 성도가 5천명이 넘는 초대형 교회(Mega-church)도 있다(미국, 한국, 아르헨티나).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설교는 결코 시대에 뒤떨어진 적이 없다. 설교를 듣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하지 말라고 금지하신 방법은 바뀔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과 은혜는 바뀔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설교의 전략들은 바뀔 수 있다. 그러나 복음 그 자체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탈 현대시대인 오늘날 어떻게 하여야 사람들을 구원하는가?
탈 현대시대에서 사는 사람들은 관계를 좋아하는 세대이다.
미국 사람들은 M-V를 보면서 24시간 팝송을 즐기며 듣고 있다. 컴퓨터의 급속한 보급으로 사람들은 Inter-net을 통하여 많은 정보 얻으며,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로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난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에서 고독을 넘어 관계를 형성하고 사랑을 찾고 있다.
유럽의 기차들은 마주보고 타는 기차인데 열차를 타고 여행을 하다가 독일 젊은이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들의 반응은 매우 진지하고 복음을 들으려 하였다. 지금도 이러한 사실로 볼 때 복음의 전파는 계속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사랑에의 추구, 서로의 신원 확인, 공동체 형성 등으로 사랑을 받기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초심리학(Parapsychology)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이는 적극적인 사고방식과 자기 사랑을 추구하는 것으로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과학주의 분파이다.
또한 현대인은 설교보다는 TV의 상업 광고에 더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디히트리히 본훼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종교적인 전문 용어를 사용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타협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어떤 시대, 어떤 세대에도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사랑은 던져집니다.
말씀에 대한 굶주림의 시대에 예수에 대한 증거를 하면 사람이 끌려온다.
변화하는 세계는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불변한다. 그러므로 말씀에 대해서 깊어져야 한다.
현대 미국인들은 짧은 설교를 좋아하고 그것을 돈과 바꾸려 한다. 짧은 설교는 잘 요약되고 요리가 이미 되어진 설교로 이러한 것을 현대인들은 들으려고 한다. 이는 대중 매체(Mass-media)의 영향으로 사람들이 충동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큰 교회의 목회자가 성경적인 바른 설교를 하지 못한다.
신세대에 성경의 가치는 얼마나 있는가? 과학시대에서 성경이 필요한 것인가?
바울은 고린도전서 1:20-25에서 전도의 어리석음으로 이 세상을 구원하라고 설파하고 있다. 복음 전파는 변명이 아니다. 이 시대에서 필요한 것이 성경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우리의 존재의 뿌리는 항상 성경이어야 하며, 이를 벗어나서는 살아 갈 수 없다.
1. The call is Form God(하나님으로부터의 소명(부르심, 소환))
소명의 정의
“알려진 필요성과 능력 충족시키기 위해서 사람들의 내적인 능력에 공급하는 것”이다. 즉 소명이란 영적인 긴박함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을 불러서 하늘의 양식을 공급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칙은 하나님의 사랑을 듣고 아는 것이다.
칼 바르트는 예수 사랑하심은(찬송 411장) 이란 찬송을 그의 신학의 핵심으로 삼았다.-Jesus loves me, this I know 승리하는 삶은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라고 영국의 케직 사경회에서 말했었다.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는 소명에 자신을 드렸다. 소명에 따랐을 때 성육신이 되었다.
소명에 대한 상황은 결과가 분명하며 내적인 소명이 열정적으로 나타난다. 또한 의무감이 느껴지는데 그것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소명의 결과를 말할 때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이 화로다”라고 말했다(고전 9:16).
소명은 뿌리가 성령님께 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소명 후 40년 동안 목자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에 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것을 보았다.(출 3장) 하나님은 “모세야”하고 부르셨다. 모세는 하나님이 시키시는 데로 하겠다고 했으며, 하나님은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어 민족을 구원하도록 하셨다.
4세기 때 아일랜드의 노예였던 페트릭은 소명을 받았다. 그런 후 노예에서 탈출하였다. 어느 날 그는 꿈을 꾸었는데 하늘로부터 사닥다리가 내려왔는데 아일랜드에서 알고 지내던 청년이 와서 우리를 떠나지 말고 우리를 구원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래서 패트릭은 40세 때에 다시 아일랜드로 갔다. 이 결과 성령님이 아일랜드의 지도자들을 모아놓고 15-20년 동안 교회를 개척했고, 10만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사야 6장의 소명 장면을 다시 보면 이사야가 성전에 있을 때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천사를 보내셨다. 그 천사는 재단의 숯불을 그의 입에 대었고, 하나님은 너를 네 백성에게 보내겠다고 하셨다.
아브라함의 소명 장면을 보면(창 12:1-3)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복을 선포하셨다.
이스라엘이 미디안과 전쟁시 기드온이란 젊은이를 부르셨다. 기드온은 "나의 지파는 므낫세 지파중에 극히 약하고 자신은 아비 집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기드온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삿 6:11-18).
열왕기상 19:19-21에서 보면 엘리야가 엘리사를 만나 그에게 겉옷을 던졌다. 이러한 사건 뒤에 바로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른다.
예레미야는 소명 앞에서 하나님 저는 어린아이입니다(렘 1:4-10)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열방 만국 위에 강하게 하여 하나님의 뜻을 세우게 된다.
소명은 다양한 방법과 자연스럽고, 극적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이던 간에 공통점은 성령님이 강한 확신을 주신다는 것이다.
2. Personal Qualifications for Ministry - 개인적 자격
a. 소명은 사람을 사랑하게 만든다(빌 2:3) - 사랑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이기주의가 무너지고 지식(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데는 학위는 필요 없다)이 무너지고 오직 사랑만이 나오게 된다.
전세계에는 정규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사역자도 많이 있다. 하나님은 특별한 자격과 조건을 놓고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사역자를 부르셔서 쓰신다.
b. 지적 자격 - 대부분의 사역자는 평범한 사람이다. - 하나님의 부르심(고전1:26-29)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알지 않고 그것밖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다(갈6:14).
예수 그리스도 처럼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기를 원하는 것이 참 지식이라고 했다.
c. 신체적 자격 - 신체적인 부족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막지 못한다. 그러나 효율적인 설교에는 논리적인 생각과 구변력(언어의 전달법)이 필요하다. 스스로 노력하여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되어야 한다.
c. 영적인 자격 - 동아프리카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을 때, 연합성회에 강사는 대부분이 평신도였다. 그들은 신학교육을 받지도 않았고 잘 알지도 못한다. 그러나 영성이 강한 사람들이다. 오직 주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다 바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자로써 자격이 있는 것인데 성령의 충만함과 완전한 헌신이 필요하다.
성령 충만은 우리의 죄를 사해주고 성령 충만이 떨어지거나 없어지면 도덕적인 문제, 금전적인 타락에 빠지게 된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를 막론하고 우리 인간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바로 성결과 거룩인 것이다.(특별히 약 3:1-12을 참조)
d. 절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는 자신을 조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3. Right Motives for Ministry
소명의 동기가 경제적이면 안된다. 즉 설교자가 되는 이유가 돈을 벌기 위해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소명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으시는 것이다.
믿음으로 사느냐 돈으로 사느냐? 하나님은 돈으로 계산하지 않으시며 오직 믿음을 우리에게 원하신다. 돈을 목적으로 한다면 마땅히 회개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원망이 나오고 분이 나오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사역을 통해서 사람을 변화하게 하소서라고 말하지만 먼저 하나님은 나를 변화시키시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연단은 오직 믿음의 연단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무엇 때문인가?(설교의 동기) 하늘로 부터오는 소명으로부터 동기이다. 하나님 당신의 종이 되기를 원합니다. 특히 겸비의 영을 갖춘 종이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연극배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참 종이 되는 것을 원하신다.
복음의 순례자들은 하늘로부터의 상급 즉 썩지 않은 것을 위해 산다. 예수님은 사례 받지 않으셨다 - 낮이 있는 동안 아버지가 시키시는 일(막 2:38)을 하셨다.
4. Providential Circumstances
5. Need to Ascertain Natural and Spiritual Gifts
Ⅱ. Lecture 2 - Evangelical, Biblical Preaching
1. What is Preaching
설교란 무엇인가? 설교는 선포하는 것이다. 공적인 증언이다. 예수님이 주인이심을 공적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설교는 예배의 형식을 통해서 진행되며 이루어진다.
칼뱅은 자신의 책인 ‘기독교 강요’에서 “설교에는 강해가 있고, 해석에 있고, 해석을 적용하는 것”이 있다고 했다. 이는 설교자의 인격을 통해서 성경 말씀이 공적으로 해석되는 것을 이야기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왕국에 대해 설교 하셨고 제자들에게도 부탁하셨다. 천국이 왔다고 말만하지 말고 행위로 하셨다. 예수님은 말씀으로만 아니라 삶으로 보이셨다. 행위(삶)를 통해서 말씀을 확실하게 드러내셨다. 한 예로 천국이 왔다는 증거로 귀신을 쫓아 내셨고 병든 자들을 치유하셨다.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설교하셨다. 산, 배, 성전, 시장, 호수, 평지 어디서든지. 그리고 제자들을 보내서 사역을 감당하셨다. 그들의 사명은 무엇이었나?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선포하도록 하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롬10장에서 들려주는 자가 있어야 함을 이야기한다.
헬라어로 “케리그마”( κηρυγμα )는 헤럴드(herald) (선포하다, 전파하다, 전달하다)란 뜻이다. - 그 당시에는 로마에 다른 나라로부터 승전보로 알려주는 것에서 사용되었다.
현대에 설교자가 필요한가? 하나님은 설교 즉 언어를 통한 말씀으로 전파하신다. 즉 전도로 구원을 이루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대변자, 전파자이다. 설교를 위해서 섰다면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
케리그마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이지만 말씀의 떡을 떼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가 설교의 방법을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다음으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해야 하며 그 사랑으로 알게 하여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로 삼았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십자가를 전해야 한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가 알 수 없다. 단지 우리는 순종할 뿐이다.
민수기 21장 4-9절(참조 요 3:14-15)에 광야에서 놋뱀을 만드셔서 순종을 보셨다.
루터나 칼뱅, 칼 바르트가 있었다면 누가 설교를 하든 말씀하실 때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기쁨은 잊지 못하였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선포할 때, 부활을 설교할 때,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낼 때, 하나님이 우리의 설교에 기름을 부으신다.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님의 성육신, 대속적 구속, 부활, 예수의 승귀, 예수의 재림을 설교한다.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개혁주의에서도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이신칭의를 설교한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설교의 중심이다.
설교의 문제점은 설교자가 하나님의 능력에서 멀어진다는 것이다. 원인은 강단에서 다른 소리를 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66권의 성경이 있다. 즉 하나님의 계시가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계시하신 말씀도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리고 그 계시는 십자가의 삶으로 증거 되었다. 이처럼 좋은 소식(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의 소식이었다.
설교는 사람들을 예수에게로 초청하는 것이다. 칼빈주의자는 이 부분에서 반발한다.
효과적인 부르심을 안다. 말씀을 선포하거나 증거 하면 성령이 초청을 한다. 성령은 내적으로 역사하며, 외적으로도 공적으로 승인을 한다.
설교에 사람들이 반응하도록 해야 한다. 설교를 통해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며, 우리의 왕이신 그리스도께 헌신하도록 초청하는 것이다.
설교는 단순하며, 확실하며, 깨끗하며, 사랑스러우며, 담대하며,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설교의 문체나 어휘력, 논리력도 중요하지만 설교자에게 어느 것보다도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겸비이다.
설교는 목자가 양을 먹이는 것이다. 성경적 설교는 진리를 드러내는 설교이며 누구나 목을 수 있도록 요리를 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설교자는 자신이 설 때 하나님이 함께 서시는 것을 기억하라.
항상 말씀이 나(설교자)보다 영광스러운 것을 잊지 않도록 하라.
2. The Meanining of Evangelical
복음이란 말은 헬라어 유앙겔리온( ευγγελιον )에서 나온 단어이다.
*복음주의자란? 구원의 하나님의 능력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에서만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복음)은 선교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책이다. 하나님은 선교사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선교를 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자이다.
복음주의적 행동은 하나님의 행동이다. 사람들에게 도전하고, 유혹하며, 전파하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의 내용은 선교적이며, 신학적이며, 역사적이어야 한다.
복음은 사도들에 의해서 전파되었고, 초대교회 교부들에 의해서, 스콜라신학자들도, 모두 복음주의 자들이었다. 개신교 종교개혁자들, 경건주의자들, 청교도들도 복음주의였다.
위클리프 등 영적각성운동도 복음을 전파하였다.
복음을 믿으면 성경의 능력이 나타난다. 새로운 세계의 필요를 알게 되는데, 그것은 예수 없이는 모든 것이 무익할 뿐이라는 것이다. 복음의 전파는 잃은 자를 찾는 것이다.- 예수를 찾게 하는 것이다.
복음주의의 4가지 핵심
① 성경의 완전 영감설
② 사람들은 거듭나야 한다
③ 예수가 없이는 잃어버린 자들이다
④ 사람을 찾는 복음전파가 되어야 한다. 예수를 찾아주는 것이다.
*보편주의자
우주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설교(복음)를 하지만, 보편주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든지 안 믿든지 간에 구원이 있다고 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과 진리며 생명이다”(요14:6)라고 하셨다. 내가 유일한 길이다라고 정관사( )를 사용한 것이다.
클레르보의 버나드,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파스칼처럼 어떻게 설교할 수 있을까?
로마 카톨릭에서도 복음주의 운동(성령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러시아 정교회에서도 복음주의적인 삶을 주장하고 있다.
*자유주의자
심리적이고 문화일류학적이다. 중심은 인간이다. 시작은 인간의 이성에서 출발했으며, 무예부흥, 계몽주의에서 출발하여 현대주의에 이르고 있다. 인간의 이성(인본주의)에서 시작한 것이다.
복음주의는 하나님의 계시에서 시작하지만, 자유주의는 이성에서 시작한다.
복음주의는 종교개혁과 경건주의를 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대의 성장하는 교단과 교회는 복음주의노선이다.
1900년도에는 복음주의는 2.5%
1970년도에는 복음주의는 5%
1992년 현재는 복음주의가 10%이다.
복음의 밀수자(선교사)들은 문화의 벽, 정치의 벽, 언어의 벽, 민족의 벽, 경제의 벽을 넘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삶을 통해서 이를 분명히 드러내셨고, 바울도 역시 이를 위해 복음의 밀수꾼이 되어 로마에까지 파고 들어갔다.
하나님의 큰 선물인 복음 증거의 사명을 사랑과 겸손으로 이루어야 한다. 때가 찰 때까지….
3. person or Office
설교자는 사람들 앞에 말씀을 가지고 섰을 때 하나님의 위임을 받은 것이다.
루터는 “설교자는 교회라는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검증 받은 공적 직분자로 인정받은 자”라고 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을 통해서 나타나신다. 그런즉 인격과 직분은 밀접한 관계로 신비하기까지 하다. 그 이유는 죄인의 입을 주장해서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이 증거해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설교할 때 우리의 체험과 인격, 학문, 환경이 흘러나온다. 설교자의 언어는 능력과 이해, 자신의 인격, 그리고 삶이 나오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공식적으로 교회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자이다.
요한 웨슬레는 설교는 인격에 완전히 찍혀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즉 변화된 인격에서 열매가 나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설교자는 인격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나와야 한다.
설교자의 삶의 스토리(경험된 이야기)는 안경의 렌즈와 같다. 경험이 안경을 통해서 반영되기 때문이다.
설교자의 옷(예배시의 예복)의 역사는 그 사람의 직분과 사명을 확인한다. 입느냐? 벗느냐? 의 문제가 아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목사의 가운을 입을 때 목사의 직분을 생각한다”고 했다.
설교시 하나님의 권세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 있는 권세이다.
4. 누구에게 설교가 주어지는가?
설교는 목회자의 상담이 아니다. 단지 성경을 읽는 것으로 설교를 대신할 수 없다. 또한 기도문이 설교를 대신할 수도 없다. 설교자는 그의 인격과 영혼을 통해 외쳐야한다. 사람들에 심장에 외쳐야한다.
한명 한명에게 관심 있게 설교를 하게 된다. 모임의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한 영혼에 대해 설교해야 한다. 양심을 만져줄 때, 듣는 자의 소리로 듣는다. 이러한 설교는 20년이 지나도 마음에 새겨져 있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개인의 인격에 맞도록 말씀이 성장한다.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은 설교하신다.
설교는 하나님의 권세를 선포하는 것이다. 권세의 근거는 하나님이시다. 권세는 하나님의 말씀, 교회의 전통, 고백과 신경의 전통을 전하는 것이다. 절대 계시라는 뿌려진 복음은 사람 속에서 변화되어 곧 열매를 맺게 된다.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가? 찬양, 복음송, 성가대, 기도, 성례전을 통하기도 하지만 설교는 예배의 모든 행위를 묶는 것이다.
설교를 들을 때 청중을 향한 성령의 조명을 관찰한다. 설교할 때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여야한다.
개인적으로 성령이 나의 경험을 취해서 나에게 맡는 설교를 하신다.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 기도하여야 합니다.(막9:29)
5. 설교는 불변(不變)하는가?
설교란 불변하는 것이냐? 설교는 변한다. 그러나 본질과 내용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의 설교가 다르게 보이고 방법이 다른 것 같지만 하나님의 대변자는 같은 기차를 탄다.
역사의 현재 시점을 설교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내려오는 케리그마를 설교하는 것이다. 설교는 예수님의 피와 살이다. 방법과 상황 설정은 다르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설교는 새포도주를 담은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변혁을 목적으로 삼는다. 이 변혁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창조적이고 힘이 있다. 설교자는 이 세대 빠지지 않고 이 시대를 변화 시켜야 한다.
6. Biblical Preaching
탈현대시대에 문화적인 설교는 상황적인 설교를 하므로 본문적인 설교를 이탈한다.
본훼퍼는 미국에 와서 조간신문을 보고 사건, 사조를 가지고는 설교를 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말과 장난과 유희에 사람들은 즐거우나 거듭나는 신자는 없다. 즉 그 시대의 언어는 사용하지만 그 시대의 문화에는 속하지 말아야한다. 만일 그렇게 되면 설교 자체는 복음의 핵심에 접근하지 못하는 설교가 된다. 예화나 우화의 사용은 가능하지만 그것 자체가 중생으로 인도하는 것은 아니다.
그 시대에 맞는 전달하는 기술들을 정복해야한다. 우리의 모델은 예수님이다. 비유와 이야기와 단순한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으로 하신다. 그래서 설교의 목표는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교회의 문제들이 일어난다면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설교자이다.
성서적인 설교는 십자가의 설교이다.
예를 들면 빌리 그래함도 십자가의 설교자이다. 힘도 없고, 목소리도 좋지 않고, 인격이 부족하더라도 능력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설교자는 잊어서는 안된다.
Ⅲ. Lecture 3 - The Primacy of Scripture in Preaching
성경의 위대성은 성경 자체가 유일하신 하늘의 권세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권위를 실추시키면 우리의 설교는 무너지고 만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사람, 한 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1. Divine Authority
복음주의적인 성경관은 성경을 정확 무오한 영감된 책으로 본다.
성경은 이중적으로 저작되었는데 그 첫째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표현(증거)이며 둘째는 하나님이 직접 증거 하신다는 것이다.
성경 하나님의 말씀은 부분적이지 않다. 100% 하나님의 말씀이며 또한 100% 인간을 통해서 쓰셨다.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을 인간의 표현하며, 인간의 경험을 썼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성경이 신성에 대하여 가르치는 것이며, 강조점은 인간의 양심적인 이야기라고 한다. 결국 성경은 이간이 만들어 놓았다고 주장한다. 근본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으로 본다.
극단 보수주의 근본주의자들은 인간의 요소는 전혀 없고, 하나님이 기계적(하나님이 부르시면 인간은 받아 적기만 했다)으로 썼다고 본다. 성경 저자들은 무아지경 속에서 성경을 섰으며, 그러나 성경에 하나님의 절대 계시에 의해서 쓰였다. 이를 기계적 영감설이라고 한다. 물론 이러한 것도 어느 정도 있지만 부분이 전체를 대신 할 수 는 없다. 자연적인 것도 초자연적인 것도 있고, 사람에 대해서 쓰기도 하며, 신성과 계시에 대하여 쓰셨다.
성경은 인간이 계시에 관하여 쓴 것 이상이다. 성령님의 조명함이 없으면 성경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즉 권위가 나타나지 않는다.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이다.
루터는 성경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주해자(조명)가 필요한데, 그것은 성령님이시다.
성령님께서 조명해주시지 않으면 성경을 이해하기 어렵다. 성령님의 조명이란 것은 중요하다. 성령님께서 문자를 살아있는 문자로 만들어주시지 않으면 안된다.
마틴 루터의 성령의 조명하심을 칼뱅은 성령님의 인치심이란 표현을 한다.
어거스틴은 성경의 계시된 말씀은 모든 감독들의 말보다도 중요하다.
예수님은 엠마오에 가는 중 이시며, 두 제자와 걷고 있었다(눅 24:13-35).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몰라보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변형된 형체이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이 음식을 잡수실 때 떡을 축사하셨을 때 즉 제자들이 눈이 밝아져 주를 알았고 말씀을 풀어주셨을 때 마음이 뜨거워 졌다.
우리의 마음이 뜨겁지 아니 하더냐? 라고 한 것은 이들이 성경에 있는 사랑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변화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오는 것이다.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은
조명(照明, illumination) : 성경을 읽을 때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눈과 마음을 열어 주신다.
계시(啓示, revelation) : 하나님의 숨은 뜻을 열어 알려 주시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교회에 계시하시며, 보여 주시는 것이다.
영감(靈感, spiritual) :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이는 성경을 기록하는 일과 관련이 있다. 헬라어 원어(θεόπνευστος)의 의미는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다”이다. 이렇듯 저자들에게 하나님의 숨을 공급한 성경은 하나님의 영이요, 생명이다. 이는 성경의 초자연적인 면을 말하는 것이다.
2. Primacy of Scripture
성경의 유일성의 문제는 전통과 성경과의 갈등에 있다.
예수님은 사역의 기초를 성경에 두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사역의 기초를 유전과 전통에 두었으며, 그 당시 자유주의자인 사두개인들은 사역에 있어서 초자연적인 기초를 제거했다.
초대교회로부터 14세기의 교회까지는 성경을 가르침의 근거이며 핵심이라 했고, 성경을 규범( norm )이라고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경이 전통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였고, 성경이 존재의 근원이라 했다.
14세기 이후에는 성경의 권위와 교회의 전통을 동일선상에 놓고 상충하는 것으로 보았다.
종교개혁자들은 이에 대해서 반발하였다. 개혁자들은 교회보다도 성경을 섬기는 종이었다.
불트만은 계시를 보여주어야 한다. 성경은 영감된 부분이 있다고 했다.
성도들에게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먹이는 것이다. 말씀을 묵상하고, 먹고 암송하며 삶으로 증거 하는 것이다. 윌버 스미스는 하나님의 존전에 서서 회개와 순종과 고백(기도)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설교를 위해서 연구를 위하여 성경을 보면 이미 덫에 걸린 것이다. 설교는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즉 나 자신이 감동되어야 한다. 설교자는 먼저 우리의 영혼에 설교해야 한다. 우리의 영혼을 감동해야한다. 우리가 먼저 은혜 받을 때 그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설교자 자신이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과 하늘의 불을 얻어야 한다.
복음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유일한 최고의 권위를 갖는다. 오직 성경을 통해서 모든 책을 비추어 보아야 한다. 전통과 권위도 성경을 통해 분별해야한다.
루터는 성경은 믿을 뿐만 아니라 경험해야 한다. 어떤 감정과 어떤 책 보다 먼저 이해되고 비추어 보고 경험해야 하는 것으로 성경을 말하고 있다. 성경의 경험은 믿음으로 말씀을 순종할 때 나타난다.
프란시스 쉐퍼는 성도 중에 방황하고 있는 사람이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의 양심은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양심은 가치와 판단을 모아 놓은 것이지만 언제나 타락할 수 있기 때문에 성경에 비추어서 검증되어야 한다.
환상과 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말씀에 의해서 모든 것은 검증되어야 합니다.
예수를 영접한 후에 일어나는 모든 일(기적, 기사, 이적, 축사, 신유 등)들도 항상 성경에 의해서 검증을 받아야 한다.
성경의 우월성은 이미 정경은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 있다. 그러나 성경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월성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정경에서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떤 것도 대신 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겨야 한다.
본인이 통일교 지도자들과의 대화에서 회심을 이야기했다. 복음을 올바르게 제시했을 때 그들 중에 몇 명에게 말씀에 깊이 들어가서 생명이 나는 것을 보았다.
챨스 템플텐은 깊은 불신의 공격 앞에서 성경으로 이를 이기었다.
빌리 그래함은 언제나 성경에 기초를 두고 “성경에 말씀하시기를”하며 설교하였다. 그는 성경이 설교자의 권위의 자원이며 근거라고 했다.
복음의 제시는 예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다. 예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아버지의 영광이다. 어떠한 상황에 놓여 있더라도 하나님이 일을 하신다. 우리는 말씀을 먹어야 한다.
얼마 전 ‘천국의 문’ 종파의 집단 자살 사건은 하나님이 아닌 우주인이 자신들을 구원시켜 줄 것이라고 믿고 더 높은 차원의 의식에 이르기 위해서 집단으로 자살한 사건이었다. 이러한 사건을 통해서 보더라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지 않으면 안되는 거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주제별 설교를 따르지만 그 보다는 강해 설교를 하는 것이 좋다.
나에게 주어진 사람들을 말씀으로 제자로 만들어야 한다. 오직 말씀으로 양육될 때 즉 하나님의 말씀이 외쳐질 때 인간은 변한다.
딤후 4:1-2 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우리의 사명이다.
챨스 맥카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기 전에 성경으로 설교록을 채우라고 했다.
요한 웨슬레도 자신은 한 가지만 알기 원한다고 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보여 주시기를 바랬다. 그것은 바로 말씀이었다.
3. How to interpret the Bible
성경을 해석하는 일은 성령님이 하신다. 성경은 영적인 분별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성령의 조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순종을 위한 마음의 문을 열어 놓아야 한다.
* 성경을 해석하는 원리(방법) - 도날드 블러쉬의 “복음주의 신학의 기초”에서 참조
1. 열린 마음과 금을 찾는 갈망으로 성경을 접근하라.
중생한 신자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얻는다.
2. 본문을 철저하게 정확히 조사하라.
성경본문을 보는 가운데 역사적 배경, 문자적 정의, 어원, 근거, 문학적, 정치적, 철학적으로 연구하라.(본문 비평, 고등 비평, 양식 비평, 문학 비평) 또한 저자의 배경, 저술 동기, 저술 목적 등을 알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저자를 통하여 무엇을 하시려는가?를 알아야 한다.
본문(text)과 상황(context)과의 접촉 시도와 대화를 유도한다.
3. 신학적인 주석
시대적으로 조명, 문법적도 조명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전체적으로 조사하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한다. 성경을 읽고 해석 위해서 예수의 어록을 많이 연구해야 한다. 설교가 성경과 다르면 회개해야 한다. 역사적, 문법적인 것은 신학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진정 필요한 것은 영적인 주석을 하는 것으로 말씀의 대언자인 저자의 의도를 발견하라.
4. 설교자의 문화권에 어떻게 적용하는가?
설교는 변화하지만 성경은 변화하지 않는다. 즉 전달하는 매개체는 변화할 수 있다.
설교를 통하여 어떻게 하나님을 영접하는가? 그래서 그 상황이 어떠하든 복음 전파는 신실하게 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7-8세의 어린이가 이해 할 수 있는 언어를 구사한다. 문화의 접근은 항상 접촉점이 문제가 된다. 그 내용은 주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도록 하는 것이다.
5. 성령님의 조명함을 가르치고 있다(요한 1서 2:27).
성령의 조명은 성령으로 기름 부으심을 말한다. 이는 하나님의 기쁨이 넘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성경을 가르치기 전에 성경을 향하여 마음을 열고 주님께 순종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다. 그러면서 열심과 단순함으로 영분별을 간구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Lecture 4 - The Decisive Role of Preaching
1. The Popular Idea about Preaching(설교에 관한 일반적인 생각)
설교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생각한다. 그런데 현대사회에서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있다. 현대인은 설교에 대해서 경시한다. 이는 설교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에서 비롯된다. 사람들은 강의를 그만 하라고 한다. 그리고 가르치려고 하지 말라고 한다. 왜냐하면 듣는 자의 자세는 방어적이기 때문이다. 설교자와 1대1로 만나면 방어하면서 다가온다.
조지 엘리어트는 작가는 영국사회에서 노력도 안하고 많은 부를 갖고 있는 사람이 누구냐? 바로 설교자들이다. 설교자를 비하 시켰다. 자기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편견이 가득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성도들에게 강요한다. 능력이 조금 있는 사람들이 지식이 없는 사람하고 잘난 체 한다. 물론 이런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의 소명으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 설교가 예전같이 않고 지난날의 영광보다 낮아지는 사회현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설교의 기적은 하나님께서 죄많은 인간들을 택하셔서 부정한 입술을 통하여 강대상에서 하나님의 말을 증거 하게 되는 것이다(고전 1:26-29).
2. The Form of Preaching
설교자는 전하고 싶은 말을 전한다. 말(목소리)은 음성적인 표현이다. 몸과 행동은 비음성적인 양태이다. 즉각적 설교를 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한다. 특별히 이러한 경우는 하나님께서 시켜 주실 때 가능하다. 하나님은 언어를 통해서 이야기하신다. 그리고 설교자의 인격을 여과해서 말씀이 나온다. 똑같은 진리(같은 본문)가 인격이 다른 사람들이 설교할 때 그 결과는 다 다르게 난타난다. 철학이나 과학이나 같은 것을 사용하여 설교한다. 어떤 설교자들은 정치적 견해를 사용하여 설교한다.
설교는 듣는 자를 나누어서 먹어야 한다. 어떤 이에게는 고기가 필요하고, 어떤 이에게는 우유가 필요하다. 청중들은 은혜로운 설교자를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말씀의 준비가 있어야 한다. 즉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것들을 위해서 준비하는 것이다.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설교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의 예배분과 위원회는 예배를 주관하면서 회중을 참여시키는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이래라, 저래라 하면 안된다. 설교는 세상의 지혜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고전 2:6).
하나님의 통찰은 고전 1:17-18에 나와 있는 대로 십자가가 헛되지 않는 것이다.
* 마틴 루터는 설교의 핵은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 설교의 핵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이다. 또한 삶의 경험(설교자의 이야기)이 중요하다. 그는 성구 사전을 가지고 철저하게 준비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외칠 때 하나님의 권세가 나타난다.
설교할 때 성경을 기계적인 것을 구하지 말고, 창조적인 것으로 대하여 구하라. 권능의 말씀을 체험하기 전에 권능을 체험해야 한다. 설교의 범위는 확신을 전달하는 것이 설교이다.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의심되면 설교하면 안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도통하라(요한일서에 아는 것을 전한다를 여러 번 사용). 아는 것을 외쳐라. 즉 하나님 말씀을 확신하고 체험된 것을 설교하라. 양태와 색깔은 다양하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내가 외쳐야 할 말씀이 무엇입니까? 영적 필요와 영적 수준을 구해야 한다. 그래야 영적 수준에 따라서 말씀을 다르게 전파한다. 그리고 설교자는 청중을 이해해야 한다. 성도의 삶 속에서 함께 고난을 나누면 그 설교는 능력이 나가게 된다. 말씀의 깊이를 더하라. 설교자는 항상 말씀을 헌신적으로 먹고 마시라. 하나님의 보좌 앞에 무릎을 끊고 전할 말씀을 구하고 스스로 체험을 해야 한다.(사 41:10,13 -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바울은 고전2:3에서 설교할 때에 떨었다고 나온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을 나타내는 통로로 쓰신다.
예레미아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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