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설교를 위하여
글 : 김한영 목사
올바른 성경 연구는 필수적인 것
본 개신교보 부설 "실로암 성경 연구원"에서 주최한 '성경 연구 공개강좌'가 2월26일 서울 남영동 소재 해외 선교사 영어 훈련원 소강의실에서 수강자 12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하게 진행되었다. 모인 숫자로는 미니급이었지만 강의 내용은 메가톤급이었다는 것이 참석자들의 한결같은 평이었다.
이 날 본 행사를 주관한 본보 발행인 김 상철 목사는 개회사를 통해서 "목사가 설교할 때에는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서는 안되며(성경을 제 멋대로 이용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 오직 말씀의 선포자로서의 역할만을 감당해야 한다"고 전제하고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바른 성경 연구는 필수적인 것"이라고 규정짓고, 오늘 공개 강의를 통해서 한국의 목회자들은 적어도 몇 가지 측면에서 내적 갈등을 가지게 될 것이라면서 우선 다음의 세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로,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소명자(召命者)로서 과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사역을 하는 자인가? 아니면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하는 자인가?라는 소명 의식에 대한 깊은 통찰과(목사는 누구를 위하여 일하는가?), 둘째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전달해야 하는 설교자(說敎者)로서 가장 기본적인 작업으로서의 말씀 연구를 소홀히 하는데 대한 진실한 자기 반성과(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는 가?)
셋째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며 거룩하게 세워가는 일에 수종들도록 그 일에 부름받은 목회자(牧會者)로서 과연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마귀가 즐거워 할 일들을 위해서 땀을 쏟고 있는가?하는 냉철한 자기 비판(주님의 양들에게 생명의 꼴을 먹이고 있는가?)이라고 언급한 후에, 그러나 본 개신교보의 발행 목적이 한국 교회의 진정한 개혁에 있는데 그 일의 가장 우선하는 대상이 바로 목회자 여러분의 진정한 개혁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임을 명심하고 오늘 모인 수강자 여러분들은 비록 적은 수이지만 나 자신부터 새로워져야 한다는 소명 의식을 가지고 수강해 달라고 부탁했다.
목회자의 생명은 올바른 설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날의 강의 주제는 "예수님과 율법사의 논쟁"이었다. 한국 교회의 설교자라면 적어도 이 본문(눅10:25-37)을 가지고 한 번 이상씩은 설교를 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며, 신자들 또한 소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관한 설교를 듣지 못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날의 강사인 최 용태 목사는 “이 눅10:25-37의 본문에서 비유로 등장하는, 소위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사랑이나 선행을 설교의 주제로 삼는 것은 설교의 abc를 무시하는 짓이라고 못박았다. 그 이유는 비유 해석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그 비유가 등장하게 되는 본 문맥과 분리해서 해석하는 것은 절대 불가한 것이요, 다음으로 한 가지의 비유가 여러 가지의 영적 진리들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라고 상기시킨다. 또한 강의 논제에서 보듯이 쉽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라고 하지 않고 '예수님과 율법사의 논쟁'이라고 한 것은 이 본문에서 어찌하여 사마리아인 앞에 형용사로 "선한"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면서 "說敎란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뜻(의도)대로 전했을 때만이 생명이 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만약 이 본문에서 사마리아 사람의 행실에 초점을 맞추고 설교를 한다면 결국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던진 '영생'에 관한 악의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영생의 방법은 곧 착한 행실에 있다】라는 논리에 귀착되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율법주의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라고 강사인 최목사는 깊이 탄식한다.
본문의 분위기와 본문의 앞뒤 문맥의 흐름상 '사마리아인의 비유'부분은 결코 "사랑의 실천"이라는 명제를 설명하거나 이해시키기 위해서 등장시키는 비유의 예화가 아니며, 그렇다면 당연히 본문의 의도대로 비유가 해석되고 적용되어져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고 부연해서 설명한다.
설교를 위한 설교, 소위 제목 설교라고 일컬어지는 설교를 위한 성경 본문의 선택이 가지는 위험성이 보통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심각한 해석의 오류를 야기시킨다고 말하는 최 용태 목사의 이 날 강의는 누가복음 본문에 대한 강의에 앞서서 서론적인 강의가 약 1시간 30분 가량 소요되었는데, 오직 이 땅의 교회들이 주님의 몸으로서의 교회로 바르게 세워져 가야 한다는 사명감과 또한 이 땅에 있는 주님의 피로 값주고 사신 성도들에게 바른 생명의 꼴이 이 시대에 선포되어져야 한다는 호소에 이르러서는 이 시대의 한국 교회를 향한 안타까움과 간절함으로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성실한 사명감과 성령의 감동에 사로잡힌 진리의 열정을 가지고 강의에 임하는 모습이었음을 기자가 본 이 날의 최 용태 목사의 모습이었다.
최 용태 목사는 본 강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본문(눅10:25-37)을 이 날의 수강자들이 얼마만큼 이해하고, 또 어떻게 접근하는지를 알기 위해서 아래와 같은 과제(유인물)를 배포하고 20여분간의 시간을 주었다.(본보의 독자들도 이 문제를 연구해 보시기 바람)
사마리아 사람의 행실이
이 본문의 설교의 주제가 될 수 없다
☞ 본문 연구를 위한 과제
1. 본문을 연구하는데 필요한 중요한 단어나 구절을 본문에서 찾아서 쓰고 그 이유를 간단히 서술하시오.
2. 본문의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서 단락을 나누고 단락별 내용을 요약해 보십시오.
3. 율법사가 "영생"에 대한 논쟁적 질문을 하게 된 동기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4. 10:25-37의 본문이 10장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본문입니까? 만약 아니라면 본문을 해석하기 위해서 필요한 관련된 본문들을 제시하고 그 이유를 간단히 서술해 보십시오.
5.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는 율법사의 2차 논쟁적인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대답으로 제시하는 예화로서의 비유에서 왜 하필이면 사마리아인을 비유의 중심인물로 등장시켰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보십시오.
6. 예수님께서는 율법사가 묻는 질문 2가지 모두를 율법사 스스로 대답하게 하신 이유를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7. 저자 누가가 본문10:25-37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주된 메시지는 무엇이며, 굳이 적용적 측면에서 이 본문에서 얻을 수 있는 메시지라고 한다면 무엇인지를 써 보십시오.
8. 본문 가운데에 30절 '어떤 사람이………… 내가 돌아올 때 갚으리라'의 35절까지가 예수님께서 예화로 등장시킨 비유의 내용입니다. 이 비유만을 가지고 설교를 구성할 수 있을까요? 만약 할 수 있다면 어떤 내용의 설교를 구성할 수 있는지를 간단히 요약해 주십시오.
이상의 제출된 과제를 20여분간 풀고 난 뒤에 수강자들로 하여금 한 문제씩 직접 발표케 하려 했으나 제한된 강의 시간 때문에, 그리고 공개강좌의 특성상 최 용태 목사가 직접 설명을 하였다.
과연 목회자들은 한 편의 설교를 준비할 때, 선택한 본문을 어떻게 연구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는 설교가 설교가 되는지, 아니면 한낱 사람의 이야기로 전락해 버리든지 하는 중요한 갈림길이 되는 것이다. 설교에 있어서 교과서적인 전제는 항상 설교의 실제적인 목표는 정해진 본문의 뜻을 정확하게 해석해서 청중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이 말은 설교자의 첫 작업은 본문에서 어떤 감동적인 요소가 있는가? 어떤 경건한 요소가 있는가?가 아니라는 말이다.
서두에서도 말했듯이 오늘의 본문에서와 같이 사마리아 사람의 행실에 초점을 맞춘 설교는 본문의 뜻을 밝히는 것과는 이미 멀리 떨어진 일요, 이것은 결국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한낱 도덕적인 이야기가 되고 마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기본적인 내용도 연구하지 않는 그러한 설교자가 있다면 그러한 목회자는 소명자라고는 할 수 없고 단지 직업인일 따름이다.
★성경을 연구할 때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첫째로는, 본문을 선택하면 먼저 그 본문의 앞과 뒤의 문맥을 잘 살펴서 관련성을 살핀다.
둘째로는, 본문의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한 작업으로서, 대화의 상대, 당시의 상황과 사건의 배경, 그리고 특히 저자의 기록 목적이나 의도를 잘 살핀다.
셋째로는, 무엇보다도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라는 말과 같이 이것은 복음이 지향하는 방향성의 문제로서, 동일한 사건을 가지고도 해석 작업의 오류로 인하여 복음이 율법으로, 율법 이 복음이 되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에 성경의 통일성과 함께 다양성을 깊이 숙지하고 본문을 해석함으로써 복음의 방향성을 상실하는 일이 없도록 세심한 노력이 필요하다.
넷째로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선택된 본문 가운데서 복음이 담겨진 중심 사상을 찾도록 노력해야 함과 동시에 복음의 근본인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데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음을 예수님 스스로 여러번 밝히시는데서 그 중요성과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결국 설교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드러내는 작업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 인간에 불과한 설교자가 아무리 뛰어난 지식과 청중을 사로잡는 사로잡는 화술이나, 탁월한 인생의 경험을 가졌다고 해도 이 땅의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대신할 능력의 설교가 될 수 없고,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성도들에게도 결코 그들 속사람(영혼)이 자라가는데 필요한 생명의 양식이 될 수 없음은 너무도 당연한 것일진대 성경의 말씀을 바르게 전달하지 않는 그 어떤 형태의 설교 행위도 전하는 자나 듣는 자 모두에게 엄청난 비극을 초래하게 되는 것임을 명심하고 새로운 자기 성찰과 소명에 대한 새로운 결단이 요구된다고 설교자의 성경 연구에 대한 구체적인 자세와 중요성을 제시하였다.
기자의 소견을 잠시 정리하여 말한다면 이런 것이다.
대체로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의 설교는 예배에 참석한 신자들을 하나님의 말씀 속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의 말솜씨를 가지고 성경을 도구로 사용하여 자기의 주장이나 아니면 신자들의 기호에 맞도록 각색하여 전달해 온 것이 오늘의 현실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로 인하여 정작 교회가 가져야 할 실질적인 내용으로서의 생명의 능력은 간데 없고, 대신에 이 자리에 없어야 할 종교개혁 이전에 만연했던 종교적 의식이나 절기 행사들, 그리고 외식적인 건물의 치장이나, 나아가 성직자라는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목회자의 우상화 놀음이 그 생명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모두 말세에 마귀가 교회를 대적하여 넘어지게 하려는 것들의 단골 메뉴들이라는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이라는 것에 우리는 다시금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설교의 가장 강력한 생명력은
본문의 중심사상이 정확하게 부각되어야 함
【예수님과 율법사의 논쟁】이란 본강의에 들어가서는 최 용태 목사는 오늘 본문을 보다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누가복음의 흐름을 잔잔하게 추적하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러면서 율법사의 등장이 무엇보다 이 본문에서 중요한 이슈가 된다고 하면서 첫 번째 물음의 연구할 단어나 구절에서 율법사에 대한 연구를 촉구하였다.
지상 중계(紙上 中繼)
① 율법사 :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향하여 벌떡 일어서서 군중들 앞에서 예수님께 직접 시비조(시험하여; 막12:13,15)의 질문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 율법사가 도대체 어떤 신분의 사람이며, 무슨 이유로 예수님께 시비를 걸어오는 것인가?에 대한 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 상황에서 예수님의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의 역사를 보려거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여 있었을 것이며, 그들 중에 예수님을 책잡아서 옥에 가두려고 예루살렘으로 부터 파송된(눅5:17; 6:7) 일단의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율법사들이 함께 섞여서 예수님의 일거수 일투족과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율법사가 질문한 '영생'에 관한 것은 율법사 자신이 친히 선생된 자로서 그 문제에 관한 전문가로 자처한 바이며, 또한 그 자신도 이 영생에 관하여 늘 율법적인 가르침에 성실하게 살아가려는 애씀이 있는 자(눅18:11-12)임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이러한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어쩌면 유대인들이나 특히 그 사회의 지도자격인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이 이 '영생'의 문제를 끄집어 내어야 했는가를 생각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 본문을 바르게 접근하는 지름길임을 우선 밝혀 둔다.
그리고 더 나아가 생각하면 '영생'에 관한 동일한 질문이 눅18:18이하에서도 기록되고 있는데 같은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대답이나 질문자에게 대하시는 분위기가 여기 눅10장의 율법사와는 크게 다른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동일한 저자, 누가에 의해서 기록된 책에서 동일한 주제의 질문을 가지고 동일한 대답자인 예수님께서 왜 다르게 그 질문에 대응하시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연구들이 앞서 본 강의의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소위 본문의 분위기 파악이라는 작업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대화는 항상 상대가 있는 것이고, 그 상대의 자세나 감정에 따라서 분위기가 달라지고 그 대화의 내용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자연적인 이치이다.
② '시험하여' : '시험'이라는 단어는 여기에서는 '약점을 잡으려고', '책잡으려고'(막12:13,15)라는 의미로 사용되어졌다. 왜 감히예수님에게 이러한 어리석은 짓을 하게 되었는가?하는 문제인데 이것은 바로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자신들(율법사)이 평소에 알고 있고, 또한 가르치는 '영생'에 관한 것과 지금까지 예수님의 뒤를 쫓아오면서 예수님이 '영생'에 관해서 가르치는 것이 크게 상이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제 결정적으로 예수님에게 올가미를 씌워서 공회에 고소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고 여기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배경을 무시하고 율법사의 '영생'에 관한 논쟁을 순수한 질문인 것처럼, 또는 진정으로 영생에 대한 갈급함을 가지고 질문하는 것처럼 본문을 해석하려고 하는 가벼운 생각에서 바로 지금껏 본문의 해석에 심각한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는 궁색한 이유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게 되면 결국 본문에서 '영생'의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간데 없고 다만 사마리아 사람의 선한 행실만이 드러나게 됨으로써 소위 "선한 사마리아인"의 행실만이 부각되고 이것이 복음의 방향성을 상실하는 황당한 설교가 자행되고 마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그 어떤 착한 행실의 사람도 그의 행실로는 구원(영생)얻을 사람이 없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롬3:20, 갈2:16)
③ '자기를 옳게 보일려고' : 율법사는 스스로 자기의 입으로 26-27절에서 '영생'에 관하여 율법에 기록된 답을 말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네 말이 옳다"고 하니까 이제 율법사는 자기의 의도대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책(약점)잡을 확실한 기회를 포착했다고 여기고는 또 다른 문제, 곧 예수께서 율법을 어겼다고 여겨지는 문제를 한가지 더 제시하는 자신감을 군중들 앞에서 자행하게 된 것이다. 특히 9:51절에서 언급하는 내용은 이제 예수님의 남은 사역이 대적들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짐작케 하는 부분으로써 "굳게 결심하시고"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대적들이 예수님을 집중적으로 공격할 것임을 염두에 두신 예수님의 결단임을 암시한다.
④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 위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이제 율법사는 자기의 의도대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책(약점)잡을 확실한 기회를 포착했다고 여기고는 또 다른 문제, 곧 예수께서 율법을 어겼다고 여겨지는 문제를 한가지 더 제시하는 자신감을 군중들 앞에서 자행하게 된 것이다. 율법사를 비롯한 일단의 대적하는 무리들은 일찌기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서부터 뒤쫓아서 계속 따라온 자들로서 본문의 바로 앞부분인 9:51-10:24절까지의 상황이 이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두가지의 문제인 '영생'에 관한 것과, 또 한가지 곧 사마리아 여러 동네를 상대로 영생의 복음을 전했고 그러한 사역을 위해서 사마리아 사람들을 직접 접촉하게 되는 것을 목격한 자들임을 염두에 둘 때, 첫 번째 질문인 '영생'과 이제 예수님께서 율법사의 악랄한 마음을 아시고 내버려두심의 자세로서의 "네 대답이 옳다"라는 문자적인 표현에 고무된 이 어리석은 율법사는 그것에 한가지 더 사마리아 동네와 사마리아 사람들을 접촉하며 영생의 복음을 전하게 하는 예수님의 황당한 처사-그들의 율법에 근거하면 사마리 아 사람은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의 선민도 아니요 나아가 상종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에 근거함-를 군중들 앞에서 고발하는 의도가 잘 드러나는 시비조의 질문임을 알아야 한다.
⑤ 비유 중에 사마리아 사람을 등장시킨 이유 : 예수님께서는 왜 하필이면 율법사를 비롯한 대적자들이 가장 혐오하는 '사마리아 사람'을 비유의 예화로 삼았겠는가를 생각하는 것은 이 비유 부분의 사마리아 사람의 자비의 행실에 초점을 맞추어서 그 많은 설교자들이 황당하게도 설교의 주제를 삼지 말아야 할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연구할 필요가 있는 대목이라는 것이다. 이유는 위의 ③번과 ④번의 설명에서 거의 언급되었다고 여겨져서 여기서는 더 이상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유대인의 사마리아인과 이방인에 대한 인식은 예수님 당시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 본문에서 사마리아 사람을 등장시키면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는 최후통첩과도 같은 이 말의 의도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에디오피아인의 얼굴 가죽을 베껴 놓았다고 그 검은 색깔을 바꿀 수 없듯이, 표범의 가죽을 벗겼다고 해서 얼룩무늬 표범의 가죽 색깔이 변할 수 없듯이, 율법사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어떠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소망이 없다는 것을 그의 대답의 분위기에서 감지하시고-그의 대답에서 기어이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고 다만 '자비를 베푼자니이다'로 대신 하는 태도-이제는 더 이상 율법사에게 아까운 시간을 허락하지 않고 최후통첩의 형식으로 비생산적인 논쟁의 대미(大尾)를 마감하는 그러한 의도에서 주어진 예수님의 반응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행1:1하에 보면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라는 누가의 언급이 있듯이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사역의 일대기에서 상당한 부분이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제자 사역임을 알 수 있는데 본문에서도 바로 앞부분의 9:53-56절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의 일행들을 배척하는 상황을 목격한 일단의 제자들이 사마리아인 사람들에 대해서 여전히 왜곡되고 편견된 잘못된 모습이 잠시 언급되는데 이러한 제자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곧 이어서 이방인에 대한 복음의 확장에 대한 몰이해를 반드시 가르쳐서 바로 잡으셔야 하는 제자교육의 일환에서도 이 비유의 예화부분에서 '사마리아 사람'을 등장시키는 깊으신 배려를 충분히 느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상하시며, 치밀하게 제자들을 훈련시켜서 복음의 전도자로 세상에 보내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훗날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조차도 로마인 백부장 고넬료를 비롯한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일을 주저하는 자세를 볼 때 그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 베어 있는 유대인의 선민 사상과 이방인에 대한 차별 의식이 얼마나 철저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⑥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 눅10:25-37절의 본문이 잘못 해석되고 설교되어지는 가장 큰 원인이 바로 마지막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이 대목의 해석이다. 율법사의 질문의 요지는 '이웃이 누구인가'인데 반해서 많은 성경 해석자들이 일반적으로 이 대목의 해석을, 이미 이웃에 대한 것은 알고 있는 것이고, 이미 알고 있는 이웃이라는 대상에 대해서 신자라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또는 어떻게 베푸는 삶을 사는 것이 이웃에 대한 신자의 진정한 이웃사랑인가? 라는 쪽으로 해석하고 적용해서 설교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다시 말하지만 문법적인 해석의 가장 기본이 되는 질문과 대답의 논리적 형평의 원리에도 배치되는 해석으로써 우리 목회자들은 신학교 3년 과정이 단지 운전 면허증을 획득하기 위해서 정해진 코스를 지나가는 단순한 요식행위로만 인식하여 신학 따로, 목회 따로라는 마귀적 속임수에 농락당하지 말고 신학교에서 배운 신학 전반에 걸친 학문의 중요성을 새삼 깊이 인식하고 늘 말씀 연구에 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며, 스스로 높아진 마음을 겸손하게 낮추어서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조명해 주시도록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자세를 견지해만 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마지막 예수님의 응대(應對)는 독사의 자식같은, 속에 생명이 전혀 없는 회칠한 무덤같은 이 율법사에 대하여 거의 기대를 포기한 상태를 묘사하는 말로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특히 등장하는 인물가운데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을 두고 그들은 소위 '개같이 취급되는 사마리아 사람'보다 훨씬 자비도, 인정도, 사랑도, 아니면 일말의 인간적인 동정도 없는 사람인 것처럼 매도하면서 상대적으로 사마리아 사람을 영웅처럼 묘사하고는 결국 제사장과 레위인은 악한 율법사로, 영웅처럼 사랑이 충만한 사마리아 사람을 예수님으 로 부각시키는 이러한 알레고리적 해석이 자행되는 것을 볼 때, 이러한 설교자들이야말로 하나님보다 더 자기를 지혜로운 사람으로 둔갑시키는 가장 어리석은 작태를 자행하는 설교자라고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성경에서 주로 비유라는 기능으로 본문에서 등장하는 예화는 본문을 보다 더 정확하고 쉽게, 그리고 빨리 이해하도록 주어진 기능이라고 할 때, 위와 같은 묘한 대응적 알레고리 해석이야말로 본문보다도 비유를 해석하기가 훨씬 어렵다는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황당 한 해석적 접근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오류는 비유 해석의 첫 번째 원리를 무시하는데서 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중심 주제는 "영생의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영접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요, 나아가 적용적인 측면에서 굳이 설교를 한다면 두 번째 질문을 가지고 "영생의 복음이 이제는 이방인을 향하여 전세계로"라는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의 강의자로서 한가지 노파심에서 말씀드리면, 혹시 이 본문중에 소위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부분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나 선행에 관해서 설교를 한다면 반드시 이것을 주된 본문으로는 사용할 수 없고, 마5-7장의 산상설교의 사랑에 대한 설교에서 이 본문의 비유의 부분만을 재차 예화로 인용하여 사마리아인의 행실을 예화부분으로 삽입하여 설교를 구성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사랑에 대한 주제의 설교에서 예화로 등장시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대상은 어쩌면 이 본문의 '사마리아 사람'보다는 우리의 죄를 지시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감당하신 예수님이 보다 확실한 사랑의 확실한 실재 인물이요 설득력이 있는 예가 아닌가 여겨진다.
한정된 시간상 더 이상의 논의는 이만 줄이고 한국 교회 목회자 여러분들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성경 말씀보다 더 존귀한 생명의 양식이 없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면 이제부터라도 우리 모두 성령의 감동으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이 성경 말씀을 먼저 목회자인 우리 자신부터 생명의 양식으로 풍성히 섭취하는 일에 인색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목회자는 숙련된 기술자이기보다는 늘 하나님의 종의 신분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하달되는 명령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요청된다고 말하고 싶다. 이 본문 외에도 누가복음 안에서만 해도 수많은 본문에서 복음이 왜곡되이 해석된 채로 설교로 전달되는 예가 많이 있다는 것을 다시금 일깨어 드리면서 이만 줄인다.
이상과 같이 실로암 성경 연구원 공개 강좌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 정리하여 지상 중계하였다. 이 날 모인 수강자의 숫자는 비록 12명이었지만, 이를 두고 개신교보를 읽는 전국의 모든 독자들이 "그 성경연구 공개강좌는 실패했다"고 비웃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곳에 모인 12명의 목회자 전원은 한결같이 강의에 동의하면서 깊은 반성과 새로운 결단을 하고 자리를 일어났다는 것을 본 기자는 밝혀 둔다.
또한 본 개신교보의 발행 목표에서도 보듯이 앞으로 기독교 언론이 해야 할 모든 분야에서 반드시 이러한 올바른 말씀이 연구되어지고 나아가 바른 설교가 강단에서 선포되어지는 일을 위하여 선도적인 역할을 감당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시 한 번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앞으로 정기 강좌를 통해서 이와 같은 일에 동의하시는 목회자(목회자반)와 성도(평신도반)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을 것을 기대한다.
세상에서, 식수를 먹을 수 없는 때가 언제인가? 그것은 가뭄이 극심할 때 보다는 오히려 심각한 장마로 인하여 홍수가 발생할 때가 먹을 물, 식수를 얻기가 훨씬 어렵다는 이치를 지금 한국 교회는 새롭게 인식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지금 한국 교회는 설교의 홍수 시대를 만났지만 정작 영생하는 생수인 바른 설교를 어느 곳에서나 찾을 수 있을까?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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