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전 윤정희씨 가족
- 네 아이 입양해 사랑 나누고
부산 아줌마에게 신장기증해 생명 나누고
“감사해요, 행복해요”
- ▲ 사진 오른쪽 아래부터 시계방향으로 윤정희씨, 셋째 하민, 넷째 사랑, 남편 김상훈 전도사, 둘째 하선, 첫째 하은이. (photo 이경호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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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옆구리에서 아랫배를 향해 그어진 수술 자국이 30㎝는 족히 넘어 보였다.
생면부지의 만성신부전증 환자에게 아무 대가 없이 한쪽 신장을 내 준 윤정희(42)씨.
지난 10월 29일 오후 대전시 중구 용두동 ‘함께하는 지역아동센터’에서 그를 만났다.
서대전 초등학교 맞은편에 있는 건물 4층이었다. 형편이 어려운 한 부모 가정,
조손(祖孫) 가정 어린이와 청소년 30~40여명이 쉬고, 놀고, 공부하는 곳이자
윤씨 가족의 보금자리다. 한쪽 방에서는 초등학교 2학년 아이들 7~8명이 머리를 맞대고 책을 읽고, 반대편 방에서는 5학년 아이들이 대학생 자원봉사 교사의 지도로 문제집을 풀고 있었다.
10월 18일 수술을 받았으니, 벌써 열하루가 지났다. “몸은 좀 괜찮으냐”고 묻자 느릿한 충청도 말씨로 윤씨의 타박이 돌아왔다. “아유, 생각 좀 해 보세요. 생살을 째고, 갈비뼈를 잘라내고 신장을 들어냈는데, 왜 안 아프겠어요. 지금은 쬐끔 나아졌는데, 수술하고 한 사흘 동안은 아파서 꼭 죽을 것 같았어요.” 평소보다 3㎏ 넘게 줄어든 체중 탓에 핼쑥해 보였지만 표정은 맑디맑았다. 찡그리다 웃고, 숨을 몰아쉬다 또 웃는 아내를 바라보며 남편 김상훈(47) 전도사는 “아프다면서 저렇게 웃고 다니는 사람은 처음 본다”며 함께 웃었다. 김 전도사는 2년 전부터 같은 건물 지하에 있는 ‘함께하는 교회’를 이끌고 있다.
윤씨 부부는 네 아이의 부모다. 2000년부터 입양한 아이가 딸 셋에 아들 하나. 첫째 하은(10)이를 시작으로 하선(8), 하민(5)이가 가족이 됐고, 지난 5월 어린이날에는 막내 사랑(3)이를 맞았다. 네 명의 아이를 입양한 것으로 모자라 이번에는 신장기증에 나선 것이다. 이유가 궁금했다. 윤씨는 “얘기가 좀 길다”고 말했다. 아이 넷을 입양하고 키우면서 깨닫게 된 감사의 마음, 성치 않은 아이들에게 건강을 허락한 절대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했다.
“친구 소개로 만난 이 사람과 1992년 12월 결혼했어요. 당시 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있었는데, 2~3년에 한 차례씩 유산을 했지요. ‘차라리 (어린 생명을) 주시지나 말지, 줬다 빼앗아 가는 건 무슨 경우냐’며 절대자를 원망하던 제게 선배 목회자께서 ‘굳이 너의 아이만 고집하지 말라는 뜻 아니겠냐’고 하시더군요. ‘그래, 이거야.’ 가슴이 확 열리는 기분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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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는 대전에 있는 ‘늘사랑 아기집’을 찾았다. 윤씨가 중학교 때부터 봉사활동을 다녀 익숙한 복지시설이다. 거기서 첫째 하은이와 둘째 하선이를 만났다. 둘은 미혼모인 친엄마가 맡긴 친자매였다. “하은이는 방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고, 폐가 좋지 않았던 하선이는 늘 누워 지냈어요. 아이들을 처음 본 순간 ‘내 아이’라는 걸 직감했죠.”
하은이는 간헐성 외사시 증상을 보였다. 평소에는 괜찮지만 간혹 한쪽 눈동자가 바깥 쪽으로 몰린다. 윤씨는 복지시설에 버려진 상황을 감당하기 어려워 그런 증상이 나타났을 것이라고 했다. 하선이는 상태가 훨씬 안 좋았다. 늘 콜록거리며 기침을 달고 살았다. 폐렴인 줄 알고 병원을 찾았지만 몇 달이 지나도 증상이 나아지지 않았다. 서울의 대학병원을 찾아 정밀검진을 받은 결과 폐쇄성 모세기관지염 판정을 받았다. 의료진은 폐 한쪽이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라며 폐 이식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초등학교 3학년인데 어릴 적부터 병치레가 잦아 1학년짜리 덩치예요. 얼마 전부터는 늘 끼고 살던 마스크도 벗어던지고 친구들과 뛰놀아요. 아직 의학적으로 완치 판정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절대자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 아닐까요.”
‘장기기증’이란 단어가 윤씨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올 봄이었다.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대전·충남지역본부와 연결된 것도 바로 이때였다. 백명자 사무국장과의 상담, 운동본부에서 보내준 각종 자료를 보고 ‘장기기증’이란 단어는 그의 현실에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장기기증:장기 이식을 받으면 살 수 있는 말기 장기부전 환우에게 자신의 장기를 나눠줌으로써 생명을 살리는 것. 뇌의 모든 기능이 소실되어 다시 생존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진 뇌사자 장기기증, 살아 있는 사람이 장기 일부를 기증하는 생체 장기기증이 있다.…’ 막연한 사전적 의미가 ‘나의 일’로 다가온 것이다.
아내의 결심에 대해 남편 김씨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막아서 될 일 같으면 반대했겠죠. 고집을 꺾을 수 없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이번 일은 오히려 용기를 줘야 하는 일 아닌가요. 중간에 포기하지 않도록….”
남편은 아내를 처음 만날 때를 회상했다. “목회에 나서기 전에는 건설회사에 다니며 도로 공사 현장에서 일했습니다. 당시 중증장애아 사회복지시설에서 아이들을 돌보던 ‘천사’ 같은 이 사람의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좁은 방에서 같이 생활하며 먹이고 입히고 씻기던 그 모습을. 처음엔 이 사람을 ‘구출’하겠다고 복지시설에 함께 갔는데, 나중에는 저까지 빠져버리고 말았어요.” 담담히 말하는 남편을 바라보며 윤씨가 미소를 머금었다.
- [사회] 대전 윤정희씨 가족
- 네 아이 입양해 사랑 나누고
부산 아줌마에게 신장기증해 생명 나누고
“감사해요, 행복해요”
- ▲ 환하게 웃는 하은이(왼쪽), 김상훈씨, 하선이. / 2000년 입양 당시 하은(왼쪽), 하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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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을 이식 받은 환자는 부산에 사는 조월미(50)씨였다. 1977년부터 만성신부전증으로 투병해 온 조씨는 혈액 투석을 하며 힘겨운 싸움을 계속해 온 터였다. 2002년 신장 이식을 신청했지만 조직교차반응에서 일치하는 기증자를 찾지 못했다. ‘좋은 소식이 있을까?’ 희망은 ‘아직은…’ 이란 짧은 대답에 번번이 꺾였다. 절망이 희망으로 바뀐 것은 5년 만이었다.
수술은 10월 18일 오전 8시에 시작됐다. 윤씨가 회복실로 옮겨진 것은 5시간이 지난 뒤였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며칠 후 윤씨는 조씨를 만났다. “언니, 괜찮아요?” 조씨는 “고맙다, 고맙다”는 말만 계속했다고 했다. “눈빛이 모든 걸 말한다는 얘기 있잖아요. 그걸로 된 거예요.”
신장 기증을 앞두고 윤씨는 잠시 고민스러웠다고 했다. 수술 자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은 아니었다. “그때가 막내 사랑이를 입양할 무렵이었거든요. 글쎄 이 녀석, 처음 만났는데 저를 꽉 잡고 놔주질 않는 거예요. 입양한 뒤 사랑이 뭔지 알게 해 주려면 시간이 좀 필요한데, 수술 때문에 그게 잘 안 될까 걱정이 많았어요.”
사랑이는 어릴 적 뇌수막염을 앓았다. 지난 5월 새 식구가 됐을 때만 해도 돌쟁이 정도의 발달 상태를 보였다고 했다. 말 한마디를 제대로 못 하고, 사람을 두려워하던 아이는 지역아동센터에서 함께 생활하는 형과 누나, 윤씨 가족의 관심과 정성으로 요즘 확 달라졌다. 이제 사랑이에게 남은 큰 숙제는 안짱다리 수술이다.
“이것 좀 보세요.” 윤씨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입원한 엄마에게 보낸 맏딸의 편지였다. 파란 펜으로 또박또박 써내려간 글귀마다 사랑이 오롯했다. ‘엄마 보고 싶어서 밤새도록 울었는데 엄마도 나 보고 싶지? 수술 잘 해서 우리 가족 다 같이 소풍 가자. 아무리 내가 4학년이라도 엄마 없으면 난 못 살아.…’
“저 딸 하나는 참 잘 키웠죠? 이것도 좀 보세요.” 윤씨가 건넨 A4 용지 두 장에는 하은이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작년에 하민이가 우리 집에 오면서 어렸을 때 생각이 났다. 엄마에게 여쭈어 보았다. 엄마와 아빠는 내가 궁금한 걸 가르쳐 주시고 (내가) 변함없이 우리 집의 사랑스런 큰딸이라고 말하셨다. 친엄마, 친아빠가 누구인지 궁금했지만 보고 싶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내게는 가끔 계모처럼 굴지만 날 가장 사랑하는 우리 엄마와 항상 우리 4남매가 복덩이라고 자랑스러워하는 아빠가 있기 때문이다.… 난 사랑 받는 내가 참 소중하다. 내 동생들도 나처럼 커서 행복해 하고 감사했으면 좋겠다. 오늘도 우리 집은 시끄럽다.… 난 날마다 시끄럽고 정신 없는 우리 집이 참 좋다. 그리고 아빠 말씀대로 난 복덩이다.”
“엄마….” 귀염둥이 셋째 하민이가 어린이집을 마치고 돌아왔다. “갔다 왔어요” 하더니 엄마의 품에 폭 안겼다. 하민이는 구순구개열(일명 언청이) 때문에 입 모양과 치열이 고르지 못하다. 남편 김씨가 말했다. “2004년 입양한 뒤 장애 진단을 받으려고 한 병원을 찾았는데, ‘아이 장애 등록 받아서 무슨 혜택을 보려는 것 아니냐. 입양도 그래서 한 것 아니냐’ 하더군요. 어찌나 가슴이 무너지는지. 얘 엄마도 그때 마음 참 많이 상했죠. 입천장 구멍 자리도 메워줘야 하고, 없는 이도 새로 해 넣어줘야 하고…. 성형·정형외과·치과 등 합동으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네요. 앞으로 형편이 좀 풀리면 수술 꼭 시켜줘야죠.”
혹시나 해서 물어봤다. “또 입양할 계획은 없나요.”
남편 김씨가 껄껄 웃더니 입을 열었다. “입양은 좀 버거울 것 같고…. 아이를 위탁 양육하는 것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모들의 형편이 어려워 당장은 키우기 어려운 아이들을 1년이든 2년이든 맡아서 돌봐주는 것인데, 그럴 여력은 있을 것 같아요.”
윤씨는 “여기 ‘함께 하는 지역아동센터’에 오는 아이들은 모두 우리 자식들”이라고 했다. 아동센터에서는 3명의 교사와 주방 도우미 선생님 등 4명이 힘을 보태고 있었다. 식사와 간식, 야외 활동 비용, 건물 임대료 등 매달 500만원 안팎이 들어간다.
이날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는 윤씨에게 감사패를 전했다. ‘윤정희 전도사. 당신은 사랑과 생명 나눔의 정신으로 고통받는 환우에게 신장을 기증함으로써 생명의 고귀함과 숭고한 희생의 가치를 널리 알렸습니다. 그 뜻을 널리 높이 기려 이 패를 드립니다. 이사장 황승기.’
대전충남지역본부 김광섭 본부장이 감사패를 전달하자, 남편 김씨와 백명자 사무국장이 박수를 쳤다.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덩달아 손바닥을 마주쳤다. “참 쑥스럽네요.” 윤씨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아내의 어깨를 감싸며 남편이 말했다. “불평과 불만으로 살면 행복은 저 멀리 날아가버립니다. 여건 탓한다고 되는 일이 있습니까. 먼저 감사하세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행복해져요. 폼 나게 사는 삶? 돌이켜보니 그거 별 것 아니더라고요. 저흰 이렇게 평안한 오늘의 삶에 만족합니다.”
/ 채성진 기자 dudmi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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