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도 지정문화재인 경북 영천시 화북면 자천 3리 자천예배당(문화재자료 452호)은 세상 사람 누구도 이길 수 없는 골리앗 ‘세월’을 잘 견뎌낸 시골의 작은 ‘다윗’ 예배당이다. 결코 화려하지도, 그다지 뛰어나지도, 별로 힘이 센 것도 아닌 농촌의 소박한 한 예배당이 ‘104년 세월’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묵묵히 살아남아 새삼 전국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바벨탑처럼 하늘을 찌를 듯이 명성을 쌓았거나 들끓는 교인들로 인구에 회자되던 개신교회들은 이미 변화의 흐름을 좇아 ‘과거’를 벗어 던져 버렸다. ‘구식 과거’는 추억의 흑백 사진 속에 남겨두고, ‘신식 오늘’을 선택하여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였다. 그래서 구한말, 아니 일제 강점하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옥죄는 탄압의 눈길을 피해 서로 모여 눈을 맞추고, ‘휴우~’ 날숨이라도 내뱉던 그때 그 시절 예배당들은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다. 어쩌면 그리도 한결같이 모든 교회들이 더많은 성도들을 붙잡을 수 있는 번화가로 이사를 가거나, 불어나는 교인들을 수용할 수 있는 새 교회를 지으면서 ‘세월이 주는 훈장’을 팽개치고, 시속(時俗)이 주는 편의와 유행만을 선택하였을까? 역사의 이끼를 제거해버린 현장은 그곳이 문화유적이든, 종교적 성지이든 폐부를 찌르는 감동이 없고 현대사회가 빚어내는 속도와 규모, 그리고 ‘살아남기 경쟁’만 판을 친다. 그러나 천연기념물 제404호로 지정된 영천 오리장림(자천숲)을 지나, 보현산 자락 초입에 있는 ‘자천예배당’(慈川禮拜堂)은 다르다. 1903년에 세워진 지 올해로 104년째, 어찌 위기와 유혹이 없었을까만은 세상사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가만히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기에 오히려 토속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문화재로 귀한 대접을 받는 유적지가 되었다. 구석 모퉁이 돌이 귀한 머릿돌이 되리라던 성경 말씀이 저절로 이루어진 자천예배당에서 풍겨나오는 '세월향'(歲月香)은 추억의 씨실과 정감의 날실로 짜여져 그윽하고 살갑기 그지없다. ◈가는 길엔 오리장림 군락 언제부턴가 전라도 담양에 있는 메타세쿼이아길은 알아도 영천 오리장림은 잊고 살았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키큰 은행나무, 굴참나무가 오리(五里) 숲을 이뤄 장관이던 영천 오리장림은 국도를 만든다고 마구 훼손, 숲의 정령과 역사성을 잃고 말았다. 그래도 자천숲은 사람들이 뺏어간 오리장림의 일부 군락지를 지키며, 화북면 자천마을 일대를 쓸쓸하게 지키고 있다. 동네 사람들만 간간이 모여앉아 여름 막걸리잔을 기울이는 마을 주점 옆 오리장림은 시커멓게 타버린 속을 숨긴 채 오늘도 자천숲을 지키고 서있다. “그래 언젠가는 꼬맹이들이 자천숲을 찾아 씀바퀴도 캐고, 산바람도 쐬겠지. 지금은 5리는커녕 1리도 안 되지만, 너희들이 다시 찾아오는 날 자애로운 숲으로 다시 살아날 거야.” 100m도 넘는 큰 키에 수백 년씩 살아서 나무 속이 텅텅 비어버린 할머니 꿀밤나무들이 장관을 이루었던 그 옛날 오리장림의 추억처럼 쓸쓸하게 서 있는 영천-청송 방면 국도를 타고, 화북면 자천 3리 자천예배당을 찾았다. 영천 화북면사무소 건너편 마을 안이어서 금방 찾았다. 마침 교회가 쉬는 월요일 오후에 취재를 가서인지, 시골 예배당은 내 마음 속의 풍경처럼 그렇게 단촐하고 소박하다. “고마워 교회야. 다들 변하는데 변하지 않아줘서, 다들 옮기는데 옮기지 않아줘서.”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은지 교무금이 채 5만 원도 되지 않는 시골 교회를 전국에서 찾아온다. 지난 7월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회장 지관 스님) 일행이 다녀가고부터는 종교의 벽을 뛰어넘은 관심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자천예배당 심점균 담임목사, 역시 초종교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타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오랜 세월 살아온 시골 교회를 보고 싶은 사람은 다 받아들여 교회만큼이나 오래된 한옥 교육관에서 잠도 재워주고, 농촌체험도 하게 해준다. 주말이면 어디서 알고 그렇게들 찾아오는지, 비경북권 사람들의 발길이 더 많다. 이들은 자천 예배당, 시안미술관, 오리장림, 보현산천문대를 패키지로 둘러보는 체험가족들이 대다수이다. 자천예배당이 새로운 문화투어로 각광받는 유적지가 된 것이다. ◈남녀칠세부동석 받아들여 자천예배당은 우진각 지붕에 한옥 일자형 예배당이라는 것도 특색도 있지만, 남녀칠세부동석의 유교적 관습이 교회에서 받아들여졌음을 보여주는 내부 가름벽이 남아있다. 자천 예배당 강대상(목사가 설교하는 곳)을 향해서 오른쪽은 여자, 왼쪽은 남자 영역으로 구분짓는 나무벽은 교회가 당시 우리사회를 지배하던 유교관습을 받아들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관습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억지로, 한꺼번에, 의도적으로 바꾸려 하면 그만큼 희생과 아픔이 따른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구 제일교회의 경우이다. 영남의 모교회인 대구제일교회조차 초기 성가대 지휘자가 남녀 성가대를 같이 앉히면서 교회 어른들이 반발하고, 큰 잡음을 내지 않았던가? 자천 예배당은 교회 안을 가로지른 목벽에 의해 남녀가 따로 앉는다. 지금도 연세 드신 노인분들은 자연스레 그렇게 앉지만, 중년 부부가 나란히 교회에 오면 어느 한쪽을 택해서 같이 앉기도 한다. 흘러간 관습을 구태여 고집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런 세월을 거쳐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천 예배당 내부뿐 아니라 남녀 출입문도 제각각이다. 남자 출입문은 남자 좌석쪽에, 여자 출입문은 여자 좌석쪽으로 나있다. 그런데 신기하다. 여성 출입문은 두 개이다. 관습을 존중하면서도, 합리적인 사고가 더해져서 변화를 보인 것이다. 이제 겨우 여자 화장실을 남자 화장실보다 1.5배 더 넓게 해야 한다고들 하는데, 이미 100년 전에 여성들의 출입문을 두 개 내었다. 한국적인 관습에 서구적인 합리성이 보태진 변화의 바람이 여성 출입문을 2개 만들어냈다. 자천예배당에는 마치 대구 계산동에 있는 상화 고택처럼 들문이 달린 온돌방도 있다. 교회 내부에 온돌방이 놓여 있는 것도 정겹지만, 지금은 누각이나 정자, 고가 등에서만 볼 수 있는 들문이 교회 안 온돌방에 달려있는 것이다. 이 들문은 교회에 큰 집회가 있으면 들어올려져 교회 내부 공간으로 확장된다. 온돌방 들문을 들어올리고, 교회 내부에 들여놓은 장의자를 들어내면 겨우 30~40명 수용하는 좁은 공간이 200명이 앉을 수 있는 공간으로 넓어진다. 유연한 공간활용의 지혜가 놀랍다. ◈ 새로 맞을 1천년 이 교회는 경주에서 서당 훈장을 하던 권헌중(權憲中)이 1897년 외국인 선교사 안의와(J.E.Adams)를 만난 것을 계기로 1903년 창립되었다. 화북면사무소 서류에 보면 이미 1904년에 종교건물이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설립 100년을 훌쩍 넘은 유서깊은 자천예배당의 입구에는 한자로 ‘禮拜堂’(예배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지금도 겨울철만 되면 교회 바닥 아래에 뚫어놓은 5개 공기 구멍에서는 찬 기운이 올라온다. 그래도 모두들 그러려니 하고 참는다. 불편함을 참고, 모두들 견뎌주었기에 골리앗 세월을 이기는 용사 다윗의 후예들이 되지 않았겠는가. 자천예배당은 용하게 6·25의 폭격도 피해갔다. 6·25 때, 영천지역에는 미군 폭격이 심했다. 달리 교회를 보존할 방법이 없었던 교인들은 예배당 지붕으로 올라갔다. 마침 우진각 지붕이어서 글쓰기에 좋았다. 교인들은 횟가루로 교회 지붕에 ‘CHURCH’(교회)라고 썼다. 미군용기 비행사들이 과연 이 글씨를 보고 폭격을 안 했는지, 폭격 대상이 아니었는지 알 길은 없으나 하여튼 전쟁의 참화를 면했다. 폭격을 피해간 건물은 영천 내에서도 몇 집 되지 않았다. 그 안에 자천예배당이 들어있다. 알게 모르게 저 위에서 힘을 썼는지…. 교인들의 기지로 교회뿐만 아니라 담을 잇대고 있는 이 지역 천석꾼 지주의 큰 기와집도 화를 면했다. 이를 고맙게 여긴 집주인(김경환)은 작고하면서 이 집을 교회에 기증하였다. 오래된 토속미를 지닌 자천예배당이 바로 옆의 골기와집을 포함한 한옥 1만 9천여㎡를 기부받음으로써 이제 변화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심 목사는 "자천예배당은 이 지역사회만의 교회가 아니라 20세기를 살아온 우리 모두의 교회이자, 앞으로 빛을 볼 우리 후손들이 찾아올 등불과도 같은 교회인 만큼 이 자천예배당을 그대로 살려서 역사사료 박물관으로 만들 생각”이라고 밝힌다. 자천예배당이 영구보존될 구상이 움트고 있는 것이다. ◈ 배위량 목사 1893년 방문 영천 지방에 개신교의 복음이 처음 닿은 것은 1893년 5월 베어드 선교사가 경북 영천지방을 다녀간 때이다. 부산을 선교지로 배정받은 베어드 목사는 1893년 4월 15일에서 5월 18일 사이 서경조 전도사와 같이 부산-동래-밀양-청도-대구-상주-안동-의성-신령-영천-경주-울산으로 이어지는 경상도 전도여행을 하면서, 아마 5월 초순경 영천에 도착했을 것으로 보인다. 영천에 정확하게 며칠에 들렀는지, 영천에서는 누구를 만났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기록도 없어서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베어드 일기에 용궁(예천) 읍내에 5월 1일 밤에 도착하였고, 여기서 의성 신령 영천을 거쳐서 5월 13일에 경주를 순례한 것으로 보아서 영천에는 5월 상순에 다녀간 것이 확실하다. 이어서 영천지방은 아담스(안의와) 목사가 1897년에서 1898년 사이에 경상도 동북부 지방으로 전도여행을 다녀갔을 것이다. 이런 영향으로 영천시내 100년 넘은 신령교회, 우천교회, 명곡교회, 영천제일교회, 동도교회, 평촌교회 등은 모두가 안의와 선교사가 세운 것인데, 유독 자천예배당만 1903년 어도만 선교사가 건립한 것으로 안내판에 기록되어 있다. 사실 이것은 잘못이다. 프린스턴 신학대를 졸업한 어도만 목사는 1906년에 한국에 왔다. 아마도 교회를 미리 짓고, 보고할 당시의 자천예배당 담당 선교사가 어도만이었던 것이지 않나 싶다. 자천예배당이 세워지던 1903년의 한국은 사도행전의 오순절을 방불케 할 정도로 뜨거운 부흥운동이 일어났던 시기이다. 돈이나 물질을 하나님께 바치듯, 시간을 교회에 바치자는 ‘날 연보’(Day offering)가 교인들에게 선호되었고, 이 시기 경북 북부지역을 순회하던 안의와 선교사를 노귀재에서 만난 권헌중이 자천예배당을 어려움 끝에 지었다는 구전 역사가 전해지고 있다. 무리하게 관습을 배제하지 않고, 지역사회와 윈윈할 꿈을 갖고 있는 자천예배당은 정신없이 돌아가는 성장지상주의, 황금만능주의 가치관에서 빠져나와 처음 신앙을 받아들이던 순수한 그 마음으로 되돌아가 근본을 살리고 세월을 섬기며 사는 법을 오래된 예배당으로 보여주는 토속 성지로 거듭나고 있다. 외갓집처럼 푸근가고 나지막해 따사로운 일자형 한옥 교회 자천예배당 문을 나서는데 어디선가 향기가 실려온다. 한 세기 이상 자천교회를 지켜온 엄나무 향인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여름 꽃향인가? 글·사진 최미화기자 magohalmi@msnet.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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