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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스크랩] 시간에 대해서

by 해찬솔의 신학 2007. 5. 5.

 

 

 

제 1 장. 서론

 

 

사람은 누구나 시간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날마다 경험하는 이런 시간들은 붙잡아 둘 순 없다. 왜냐하면 한번 왔다 갔다 가버리면 영원히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이 바로 시간이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든 지나간 시간을 다시 돌이켜 세울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는 것이다.

고대 자연 철학자에서 부터 현대 철학자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시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물음을 주고 끊임없이 그 해답을 찾기 위해 고심분투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하나 ”시간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라고 명쾌하게 해답을 제시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다. 4세기 말과 5세기 초를 살다간 성 어거스틴의 고백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설득력을 가진다.

“도대체 시간이 무엇입니까? 아무도 묻는 이가 없으면 아는 듯 하다가도 막상 묻는 이에게 설명을 하려 들자면 말문이 막히고 맙니다.”

 

그러나 시간의 본질에 대해서 명쾌하게 해답을 준 사람이 전혀 없다 할지라도 카시러(E. Cassirer)가 지적한 바와 같이 어거스틴 만큼 서양 철학사에서 처음으로 시간 문제를 포괄적으로 연구하고 논술한 사람이 없다. 특히 훗설같은 철학자는 어거스틴이 이런 난해한 시간 문제를 통찰한 것을 보고 “아무리 지식을 자랑하는 현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시간 이해에 있어서는 그 문제와 씨름했던 이 위대한 사상가 보다 더 깊이 있고 의미 심장한 발전을 보지 못했다.” 라고 까지 극찬했다.

 

카시러나 훗설의 말을 간과하더라도, 과연 어거스틴은 학문의 초첨단을 달리고 있는 현대인도 뛰어넘지 못할 정도로 모호한 시간 문제를 설득력있게 풀어나가고 있다. 이러한 취지에서 본 논문은 어거스틴의 시간의 이해와 궁극적으로 시간의 본질이 무엇인지 고찰하고자 한다.

 

본고는 2장에서는 시간과 창조, 3장에서는 시간과 본질에 대하여 정리하고 4장에서는 시간과 측정, 5장에서는 시간의 무상성과 하나님의 은혜를 고찰하고 마지막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제 2 장. 시간과 창조

 

 

어거스틴은 “세계는 무로부터 창조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 신플라톤주의자인 플로티누스의 유출설을 반대한 이론이다. 그는 성경에 근거하여 유출설을 거부하며 세계는 하나님께서 무로부터 창조하였다고 역설하고 있다.

플로티누스에 의하면 전적 존재인 일자에서 부터 모든 만물의 기원이 시작된다고 한다. 이 일자만이 신이요 모든 존재의 근원이요 초월해 있는 단일자라 했다. 그렇지만 이 일자는 그 어떤 것도 창조할 수 없다. 대신 일자는 늘 충만해 있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넘쳐 흐른다. 이 넘쳐 흐름으로 말미암아 세계가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어거스틴을 비난하던 일렬의 무리들이 제기한 질문들 ‘만약 무로부터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기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셨나? 라는 질문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 세계는 시간안에 창조한 것이 아니라 시간과 함께 창조했다고 답변한다.

 

즉 시간은 세상과 동시에 창조되었으므로 창조 전에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셨는가 하는 질문은 우문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시며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영원자이므로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초월자이므로 만물을 무로부터 창조했다. 무로부터 창조된 시간의 절대 시작, 즉 태초부터 시작한 시간은 영원토록 무한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종말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사상은 시간의 윤회설을 반대하는 견해이다.

 

어거스틴은 창세기 1장 1절을 풀이하면서 시간과 창조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구절은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하늘과 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때 하늘과 땅은 완전히 형상화된 영적 하늘과 아직 형상화 되지 않은 질료 즉 무형의 질료를 암시한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깊음 위에 있는”란 구절에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함을 무형의 질료로 이해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를 아직 활성화되지 않은 영적이 질료로 보았다. 이 질료는 무로 부터 구별되며 동시에 하나님과 같이 영원히 실재하는 실체도 아니라 단지 가능체로서 질료이다. 이 질료에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여 피조물로서 형성된 것이다.

 

또 하나님이 먼저 영적인 질료에 어떤 형상을 부여해 주기 위해서 로고스 안에서 어떤 질료를 부어 주셨다. 그래서 존재의 근원되시는 창조주가 피조물을 보존해 주지 않으면 피조물은 존재의 능력을 가질 수 없다. 하나님께서 지지해 주는 능력에 의해서만 무로 돌아가려는 그의 존재를 지탱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피조물은 절대적으로 창조주께 의지해야 한다.

 

제 3 장. 시간의 본질

 

 

어거스틴의 시간의 본질에 대해선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선 그의 저서 「고백록」제 11권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고백록」을 중심하여 그의 사상을 살펴 보기로 한다 .

보편적으로 사람들은 흘러가는 무엇이 없을때 시간이 있지 아니하고 흘러오는 무엇이 없을때 미래의 시간도 있지 아니할 것이며 아무것도 없을때 현재라는 시간도 있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반문한다.

“그럼 과거와 현재의 두 가지 시간은 어떻게 생기는 것이며 그 과거가 있지 않게 되는 때는 언제이며 미래에 있지 아니할 때는 또 언제이냐? 현재가 늘 현재로 있다면 과거로 지나갈리 없으니 따라서 시간은 없고 영원만 있게 될 것이다. 이른즉 만약에 현재가 시간이기를 위하면 과거로 흘러가 버려야 될 수 있다 치면 어찌 이것을 ‘있는 것’으로 이컬을 수 있겠는가?”

 

어거스틴은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야 비로소 똑똑히 밝혀진 것은 미래도, 과거도 있는 것이 아니란 점입니다. 따라서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 가지 시간이 있다 말함이 옳지 못한 것이요, 차라리 과거의 현재, 현재의 미래, 미래의 현재 이렇게 세 가지 때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그럴듯한 것입니다. 이 세가지가 영혼 안에 있음을 어느모로 알 수 있으나 다른 데는 볼 수 없사오니 즉 과거의 현재는 기억이요, 현재의 현재는 직관이요, 미래의 현재는 기다림입니다.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세 가지 때를 내가 볼 수 있고 사실 셋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거, 현재, 미래가 따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간 속에서 세 가지 시간이 있다고 봐야 한다. 현재는 미래가 계속적으로 바뀌어지는 교차적인 것이 아니고 외적으로 볼 때 과거와 미래로 나누어져서 결국 분산되는 현재도 아니다. 이것은 내적으로 파악된 현재, 즉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기대를 자체 내에 포함하고 있는 어떤 현재의 지속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의 세 가지 모습은 인간의 마음속에 그리고 그 마음의 생각에서 포착될 수 있다. 그래서 과서의 현재는 기억이요, 현재의 현재는 직관이요, 미래의 현재는 기다림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존재론적으로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영혼을 매개로 현재의 존재로 전환되는 것이다.

 

 

제 4 장. 시간과 측정

 

 

사람들은 “시간의 동안”을 측정한다. 그래서 긴 시간, 짧은 시간, 혹은 “ 이 시간은 저 시간보다 두 배나 길다.” 혹은 “이 시간은 저 시간과 같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시간 측정에 대해서 “지나가 버린 과거의 시간을 어떻게 잴 수 있는가? 혹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시간을 어떻게 잴 수 있는가? 현재 있지 않는 시간을 어떻게 측정할 수 있는가? 공간이 없는 시간을 어떻게 잴 수 있는가?”라고 반문한다.

 

어거스틴은 이 문제에 대해서 시간을 운동의 관점에서 규정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끌어 들인후 “그러면 시간이 운동에 의해 측정될 수 없다면 어떻게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면서 어거스틴은 시간 측정의 문제를 다시 제기힌다. 결국 어거스틴은 지나간 사물들이 우리 안에 인상들로서 기억 속에 잔존함으로써, 즉 영혼에 의해서 측정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시간이 측정되는 장소는 영혼 속이고 영혼에 의해서 시간 측정이 가능하다고 한다.

 

결국 시간 측정이란 객관적인 대상으로서의 시간 측정은 불가능하고 세 가지 양태, 즉 마음의 활동인 기억, 직관, 기대의 상호 일치 송에서 영혼 안에서 파악 되어진다. 그래서 시간을 “영혼이 팽창”이라고까지 했다 따라서 시간을 인간 영혼 속에 내면화시키는 것이 시간 이해의 열쇠이다. 과거와 미래는 더 이상 없고 현재는 연장을 가진 것이 아니지만 시간은 영혼에서 그 실재성을 확보한다. 시간 측정은 그 자체로서는 불가능하지만 인간의 영혼안에서 영혼에 의해서 가능해진다.

 

 

제 5 장. 시간의 무상성과 하나님의 은혜

 

 

시간은 영원과 대조되는 말이다. 왜냐하면 시간은 무로부터 창조되어 끊임없는 가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가올 것을 기다리는 “기다림”은 이 “기다림”이 온 다음에는 “보는 것”으로 변하고 “보는 것”이 지나가면 이것이 “기억”으로 변해 버리기 때문이다. 시간이란 늘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흐르고 있으며 계속적인 가변성을 가지고 있다. 어거스틴은 가변성을 “무형의 질료”와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무형의 질료”란 “거의 무”, “사이비적인 무”와 같은 뜻으로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아무 형체가 없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아무 형체가 없는 곳에는 변화가 없기 때문에 시간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형체가 없는 그 질료란 무엇으로 형상화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어거스틴은 창조 사역이 두 가지 단계를 거쳤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무형의 질료를 절대 무에서 창조한 단계와 둘째로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이 무형의 질료들을 조합하여 피조물로 만든 단계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고 두 단계에 시간적인 간격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시간이 영원 속에 매개된 역사적인 사건이 바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다. 그래서 일찌기 어거스틴은 ‘바라기는 나 있는 곳에 그들도 있게 되기를 원한다고 아버지께 기도한 그 분(그리스도)이 우리를 그 곳으로 올리어 주기를 바랄 뿐이다’고 간구했다.말씀이 육신이 된 사건이 바로 영원이 시간 속에 매개된 사건이며 여기서 영원자의 사랑이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이다. 무상한 시간 속에서 무로 달려가는 인간이 무로 와해되지 않는 유일한 길은 성육하신 그리스도에게로 나아 가는 길이다. 바로 이것을 어거스틴은 믿음(fide)이라고 했다.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이 유한한 시간적 존재가 영원자에게로 나아갈 수 있고 이로 인해 무로 부터의 분리를 막을 수 있다. 여기에 영원자의 깊은 은혜가 드러나고 있다.

 

 

제 6 장. 결론

 

어거스틴은 플로티누스의 유출설에 반대해서 “무로 부터의 창조”를 말했다. 만약 플로티누스의 말처럼 신적인 존재인 일자로 부터 모든 만물이 흘러 나왔다고 한다면 만물 속에 신적인 요소가 함유되어 있을 것이고 결국 유출설은 범신론에 빠지고 만다. 궁즉적으로 범신론에 빠지는 유출설에 반대해서 어거스틴은 “무로 부터 세게 창조”를 말했다.그러므로 시간 역시 무로 돌아 가려고 하는 무상성에 사로 잡혀있다. 어거스틴이 시간의 본질에 대해서 「고백록」 제 11장에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는데 “시간의 본질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대해 그는 한마디로 명쾌하게 정의할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과거는 이미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으며 현재는 항상 과거로 옮겨져 버리기 때문이다.

 

시간의 순간을 포착하여 고정해야만 포착된 순간을 정점으로 미래, 현재, 과거로 구분해서 이해할 수 있는데 현재란 계속적으로 흘러가 버리므로 결국 시간을 잡아둘 수 없다.

 

 

이런 이유로 해서 결코 “시간의 동안”은 측정할 수 없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과거, 현재, 미래의 현존성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발언에도 불구하고, 즉 그가 보기엔 과거, 현재, 미래 중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순식간에 사라져 버려 존재할 수 없는 데도 불구하고 이 세 가지 시간은 존재한다고 말한다. 바로 과거, 현재, 미래를 의식 내재적인 시간성으로 바꿀 때 과거, 현재, 미래는 존재하는 것이다.

 

과거란 이미 사라져 버렸으므로 현재 존재하진 않지만 마음 속에서 기억의 작용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현재 또한 미래에서 과거로 계속적으로 흘러가 버리므로 현재를 포착할 수 없지만 직관의 작용으로 현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미래 역시 영혼 속에서 기대의 작용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기억, 직관, 기대는 영혼 속에서 일어 나고 있는 작용이므로 현재는 정적인 순간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기대와 현재에 대한 직관으로 구성하는 일존의 연장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비록 영혼 속에서 시간이 존재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시간은 게속적으로 흘러가 없어지고 마는 것이 바로 시간이 가변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피조물을 창조하실 때 무로 부터 창조했기 때문에 끊임없이 무로 돌아가려는 성향을 지녔다는 의미이다.

절대 무에서 무형의 질료를 만들고 여기에 말씀을 가(加)하심으로써 무형의 질료들이 동시적으로 피조물들이 창조되었다. 시간 역시 절대 무에서 창조함을 받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무로 돌아 가려는 경향이 있다.

 

가변성을 가지고 무상성으로 끊임없이 파괴되는 시간이 자기에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영원에게로 향해야 한다. 영원으로 매개될때 만이 시간이 무로 와해되지 않고 자기의 동일성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시간이 영원 속에 매개된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라고 말하고 성육신 사건 속에서 영원자의 사랑이 나타난다고 했다.

 

 

 

 

 

 

 

 

 

 

 

 

 

 

 

 

 

 

 

 

參 考 文 獻

 

 

 

<單 行 本>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최민순 역. 서울:성바오로출판사, 1982.

󰠏󰠏󰠏󰠏󰠏󰠏󰠏󰠏󰠏󰠏󰠏󰠏󰠏󰠏. 「하나님의 도성」. 정정숙 역. 서울:정음출판사, 1983.

야마다 아끼라. 「어거스틴 신학강좌」. 윤원호 역.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89.

선한용. 「시간과 영원」. 서울:성광문화사, 1986.

 

 

 

 

 

<論 文>

 

김태규.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이론.” 「신학전망」 1986.

선한용. “어거스틴의 ‘신국론’에 나타난 ‘두 도성에 대한 문제 연구.” 「신학과 세 계」 12호, 1986.

󰠏󰠏󰠏󰠏󰠏󰠏. “성어거스틴의 있어서의 시간에 대한 문제 연구.” 「신학과 세계」 8호, 1982.

 

 

 

 

 

 

 

 

 

 

 

 

 

출처 : 시간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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