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부 종말론의 성서적 모순
김한영 박사
서문
이 글은 한국 기독교계는 물론 일반 사회까지 일시적으로 크게 어지럽혔던 시한부 종말론자의 신앙관에대한 (그들의 신앙관은 1991년 7.2일자 뉴욕판 한국 일보 A12-13쪽에 게재된 소위 '다미 선교회의 신앙관'이라는 제하로 이장림씨가 1991년 4.4일 시행한 총회신학교 강의내용임) 논박의 글로 1991년 9월 22일자부터 11월 17일까지 연 8회에 걸쳐 미주 복음 신문에 기고했던 내용을 서문과 결론 부분을 제외하고 그대로 복제한 글이다. 이 글을 본 기념문집에 실리기 원하는 이유는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이론적 주장의 근거로 신약 신학에서 중요한 영역인 본문 비평학과 신약 성서해석학에서 논하는 기법을 도입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박을 통해 복음 주의적 입장에서의 올바른 본문 비평학과 성서 해석학의 활용의 예제를 독자들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함이다.
필자는 신약학을 전공한 사람으로 그들이 소위 전문적인 신학적 기법을 도입하여 자신들의 그릇된 주장을 정당화시키고 있었으며 그 기법 자체도 오류로 가득차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학문적 수련이 없는 사람들이 들으면 그에 대한 비판력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오류에 의하여 오도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학문"이라는 권위 때문에 그들을 따라가게 된다는 독소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였다. 그러므로 필자의 반박의 글을 다시 복제함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논리적 모순과 편견에 의한 학문의 오용이 어떻게 이루어지며,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며, 외부로부터의 도전에 대하여 어떻게 우리가 논리적으로 극복하여 우리가 믿고 있는 전통적 신앙을 고수하며, 끝으로 어떻게 올바른 성서 해석학적 기법에 대하여 훈련할 것인가를 경험적으로 들여다보려고 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와 유사한 많은 설들이 일어나 기독교계를 혼란시킬 수 있다는 경각심을 불러 일으킴과 동시에 그러한 미래적 현상에 대한 대비로서의 올바른 학문적 기법을 습득해야할 필요성을 강조하려고 한다.
그들의 주장에 대한 논박을 함에 있어서, 막연하게 그들이 "이렇게" 주장하였다는 식의 개진보다는 신문지상에서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강의 내용을 토대로 하되 (모든 내용을 다 반복할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기 때문에) 그들 주장의 문제의 핵심이 된다고 판단되는 부분을 항목별로 나누고 우선 순위별로 다루었으며, 핵심 내용은 그들의 주장을 그대로 직접 인용하여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고 필자의 대안을 제시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나갔음을 부연해 둔다.
I. 성경 보존과 본문 비평의 문제
게재된 글의 결론에서 다미 선교회의 근본적 동기는 성경 보존의 차원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 보존이라는 차원에서 말세의 예언이 문자적으로 이 역사 안에 이루어질 것을 믿는 전 천년설의 입장을 결코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만을 보면 다미 선교회는 아주 순수한 동기에 의해 시작되었고 예언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 있다. 그들은 소위 성경 보존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자신들의 1992년 10월 휴거설이 문자적인 성경 해석에 의하여 뒷받침되는 계시라고 주장하는데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비유적인 성경해석을 통해 오리겐에 의해 변질되어진 성경이기 때문에 현대 기독교는 변질된 성경에 의해 원래의 메시지에 눈가리워져 있으며 이같은 사실에 주목한 다미 선교회는 예언자적인 통찰력에 의해 1992년 10월 휴거설을 다시 찾아야 하는 시대적 사명을 띄고 있다고 주장한다. 직접 그들의 주장을 인용하자.
A.D. 250년경 (184-254 A.D)에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오리겐 (Origenes)은 그의 스승 클레멘트이 영 향을 받아 이집트에 학교까지 세워 비유적 해석법을 가르쳤다. 그때부터 성경은 변질되기 시작했다. 그는 성경을 자기 식성대로 고쳤다. 유세비우스가 콘스탄틴 대제의 명을 받아 50권의 성경을 복사할 때 원본으로 사용한 것이 바로 오리겐이 개조 변경한 성경이었다. 여기서 제롬이 라틴어로 불가타(Vulgate) 역을 내었다. 유세비우스가 복사한 50권의 성경에서 시내 사본과 바티칸 사본이 나왔고, 이것을 근거로 해서 만든 것이 웨스트코트 (Westcott)와 호트 (Hort)의 신약 성경, 그리고 네슬(Nestle)판이 나왔고, 여기서 한글 개역 성경, 현대인의 성경, 새번역, 공동 번역, 표준 번역 등이 나왔다. 이렇게 볼 때 오리겐의 비유적 성경 해석법이 미친 영향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A13).
그들의 주장대로 오리겐이 개조한 성경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면 그들은 과연 어떻게 변질되지 않은 성경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문제가 된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이 변질되지 않은 성경이며 어떻게 그것을 찾을 수 있을까 말하지 않는다. 이 문제에 대하여 조금 더 깊이 논의하기 전에 심각한 오류에 대해서 먼저 지적할 필요가 있다. 만일 그들이 변질되지 않은 성경을 소유하고 있고 또 그것에 의해 자신들의 주장이 뒷받침되고 있다는 사실을 제시하지 못 한다 면은 그들은 이 변질된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어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시키고 있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물론 그들은 변질되지 않은 성경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없고 그것에서부터 인용하고 있다고 주장하지 못한다). 만일 변질된 내용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그것 때문에 변질된 신앙관을 가지게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것이 미치는 치명적 결과가 어떠하겠는가. 쉬운 예를 들어 보자. 우리가 약국에서 약을 살 때 약의 상표에는 사용기한이 적혀 있다. 그런데 약국 주인이 욕심이 나서 사용기한이 지난 약을 그 사용기한을 변질시켜 놓았다. 그 약이 사용 기한이 지난줄 분별 못하는 사람이 그 약을 사먹었다. 변질된 기한을 모르고 다만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때 이렇게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변질된 성경을 원래대로 찾기 위해서는 문자적이어서는 안되고 오히려 오리겐의 비유법 해석 (그들의 주장하는 바)을 역으로 비유적으로 해석함으로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과연 그들의 주장대로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성경이 오리겐의 비유법 해석에 의해 "그의 식상대로" 변질시킨 성경인가? 집고 넘어±?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오리겐의 성경해석법은 비유법 (parabolic)이라기 보다는 은유법 혹은 영해법 (allegorical)이라고 해야만 더 적절한 이해가 가능하다. 이 문제는 신약학의 가장 기초적인 부분의 하나인 본문 비평학에서 다루는 까다롭고 복잡한 학문이다. 오랜 역사적 자료들과 복잡한 분석이 요구되는 전문적 학문이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하여 식견이 별로 없으면 아주 쉽게 한 두 마디로 오도 될 수 있다는 점을 먼저 지적하여야 하겠다. 약간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잠깐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현재까지 발견된 신약 문헌을 보면 헬라어 사본 (신약의 전부 또는 부분을 담고 있는)이 약 5000점 라틴어로 번역된 사본들이 8000점 그리고 다른 언어로 번역되어 있는 것이 약 1000여 점이나 된다. 그 많은 사본들은 사본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추가되거나 또는 삭제되어 있어서 서로를 비교해 보면 일치하지 않는 부분들이 발견된다. 완전히 순수하게 원본이 보존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불일치 하는 점들을 비교하여 가능한 원본에 가까운 것이 어떤 것일까를 찾아내는 학문이 본문 비평학이다. 사본들끼리 서로 비교되어 짐으로 어떤 사본이 다른 사본들과 현격하게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면 그 사본은 여지없이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정을 받게 된다. 이러한 기본 맥락에서 볼 때 오리겐이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자기 식성에 따라 성경을 변질"시켰다 하더라도 본문 비평학에 의하여 여지없이 그것이 들어 난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본들 역본들 또는 교부들이 인용하고 있는 사본들이 소위 오리겐이 변질시켜 놓은 사본을 그대로 복사하거나 번역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본들은 오리겐 훨씬 이전에 된 사본도 있고, 오리겐이 살지 않았던 지역에서 나온 사본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바는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는 무지의 결과에서 나온 주장인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 것은 요한 레온하드 허그 (Johann Leonhard Hug, 1765-1846)가 발전시킨 이론을 왜곡하여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왜냐하면 허그 이전이나 이후에 그와 유사한 이론을 주장하거나 또는 하나의 정설로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허그에 따르면 3세기 초경에 몇 개의 신약 본문이 변질되어 소위 웨스턴 본문 (western text)이 생겨났고, 3 세기 중엽에 이르러 이것은 팔레스틴에서 오리겐에 의해 개역되었고 그후 제롬이 받아 들였다고 한다. 이러한 학설은 곧 쇠퇴되어 사라져 버렸다. 어느 누구도 (유세비우스를 포함) 유세비우스(260 -340?; 교회의 역사를 씀) 에 의한 50권의 사본이 소위 오리겐에 의해 변질된 사본을 기초했다고 주장한 사람은 없다. 시내 사본과 바티칸 사본이 유세비우스의 50 권의 사본중 하나라고 주장할 수 있는 증거를 제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다만 어떤 학자들이 그럴 것이라고 믿고 있을 뿐이다. 영국 박물관의 스키이트 (T. C. Skeat)은 메츠거에게 바티칸 사본이 50권 중 거절당한 파본일 것繭箚?하였다고 한다. 메츠거에 의하면 오히려 오리겐 이전에 이미 알렉산드리아 계열(위의 두 사본 포함)의 본문들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한다. 오리겐은 이미 이 계열의 사본들을 그의 주석에서 인용하고 있음이 발견된다. 사실상 오리겐은 그가 가지고 있었던 사본들 속에 이미 많은 불일치들이 있음을 인정하고 또한 이단자들이 자신들의 교리에 알맞게 변질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깊이 관심을 가지고 성경의 변질됨이 없이 성경이 보존되야 함을 추구하였다고 한다.
다미 선교회는 웨스트코트와 호트가 마치 무비판적으로 또는 원칙없이 시내 사본과 바티칸 사본을 독단적으로 편집하여 신약 헬라어 본문을 전수시켰다고 터무니없이 주장하나 그것은 자신들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억지에 불과하다. 구텐베르그 활자 인쇄가 발명된 후 최초로 헬라어 본문이 1516년 3월 에라스무스에 의해 출판된 후 (이것이 후에 KJV의 기초가 되었음) 많은 경건한 학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많은 사본들을 수집하고 대조하기 시작하였고 그러한 본격적 대조 작업이 시작된 후 약 1 세기 후에 영국의 웨스트코트와 호트가 28년간에 걸쳐 기존 자료들을 비교 분석하여 집대성한 것이 W. H. 헬라어 본문이다. 네슬판은 W. H. 판과 티센도르프 그리고 와이스 판 사이에 적어도 둘 이상이 동의하는 범위내에서 편집된 것이다. 이와같은 비평학에 의하면 어느 사본들도 근본적으로 신학적 내용을 뒤바꾸어 놓을 수 있을 정도로 변질될 수 없고 또 감히 변질시키려고 하는 사람도 없고 변질되어 있지 않았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일찍이 벵겔(Bengel, 1678-1752)은 각고의 노력 끝에 각 사본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불일치들은 생각보다 그 수가 훨씬 적으며 또한 그 불일치들은 복음적 교리를 뒤바꾸어 놓지 못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다미 선교회의 소위 성경 보존 운운하면서 오리겐과 그리고 다른 학자들을 매도하고 있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본문 비평학적 사실들을 철저하게 의도적으로 왜곡시켜 92년 10월 휴거설이 원래는 문자적으로 뒷받침되는 것인데 오리겐이 영해 주의에 의해 가리워져 왔으며 자신들에 의해 문자적으로 재발견되었다는 자신들의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의도적인 왜곡이 아니라면 무지, 편견 또는 아집에 의해서 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II. 성경 해석의 문제
이제 92년 10월 휴거설에 대한 성경적 바탕을 마련한 그들의 성경관(이것은 성경해석의 방법론에 대한 그들의 입장이라고 해야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에 의해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왜곡되었으며 오도하고 있는가를 보려고 한다. 먼저 그들의 주장을 보자.
나는 성경이 인간 구원의 필수적인 조건임을 믿으며, 해석상의 차이점이 있을 수 있음을 믿는다. 그리고 고착화된 본래의 뜻 외에도 시대적인 환경에 따라 개별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언외의 의미도 경우에 따라서는 허용될 수 있다고 본다.
나는 여러 가지 성경해석법......중에서 상황에 따라 그 때 그 때 분별해서 균형잡힌 성경해석 을 시도하려고 노력한다. 어떤 구절을 문자적으로 보아야 하느냐 상징적으로 보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는 영감의 원동력인 성령의 도움을 받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본다. 성령이 깨닫게 하지 않고서는 원문의 본뜻을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묵시적 예언이라고 해서 무조건 상징으로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본래 성경은 노동자나 농민과 같은 일반대중을 위해 기록된 것이므로 즉시 보고 알 수 있도록 된 것이다....(A12)
첫째, 다미 선교회는 경우에 따라 적용 될 수 있는 언외의 의미도 있다고 주장한다. 이 소위 언외의 뜻을 영적으로 해석하려고 시도한 분이 오리겐인데 오리겐도 자기 주관적인 견해에 따라 해석하려고 하지 않았고 신약의 권위아래서 구약의 문제들을 해석하려고 하였고 또한 분명하게 은유법으로 사용된 내용들을 은유적으로 해석하려고 하였다는 점을 명기하고 싶다. 만일 시대적 환경에 따라 개별적으로 적용하게 될 때 주관주의에 빠지게 되고 독선에 빠지며 전통적 진리 체계를 벗어날 수 있는 독소를 품고 있다. 대부분의 이단들이 바로 주관주의에 빠져 전통적 진리 체계를 벗어나서 개별적으로 어떤 부분을 해석함으로 생겨 났다는 사실을 보아야 한다. 그 대표적 예가 통일교의 창세기 3장의 아담의 죄를 사단과 이브의 성적 범죄에 의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지 않은가.
둘째, 성령님의 도움을 받는 것이 문자적으로 해석하느냐 혹은 상징적으로 해석하느냐 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절대적 조건이라고 하는데 이점도 아주 그럴듯한 말이지만 성령님의 도움이 어떻게 주어지는지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고는 주관주의 또는 독선주의에 빠질 수 있는 독소가 있다. 물론 위는 우리의 경건 생활을 위한 그리고 성경의 오묘한 진리를 터득하기 위해 늘 성령님의 조명이 있을 것을 위해 간구해야 한다. 그러나 성령님의 조명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그리고 역사 속에서 증험된 진리체계 위에서 가능한 것이므로 이러한 진리체계를 벗어난 성령의 조명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있는 것이며 교회에서의 교육이 있는 것이며 신학교가 있는 것이며 어마 어마한 투자를 하면서 신학교육을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이다. 성령님이 깨닫게 하지 않고는 원문의 뜻을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렵다고 했는데 이 점 역시 위에서 제시한 진리 체계내에서 제어 받아야 한다. 소위 성령님을 받아 특별하게 깨달았다는 많은 사람들 중에 교회의 권위를 무시하며 잘 가르치는 목사들을 무시하며 신학교 교육까지 무시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성령의 깨닫게 하는 역사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이성의 균형잡힘과 덕성의 면을 잃게 된다.
셋째, 성경을 받아보는 사람들이 노동자나 농민과 같은 일반대중이라고 하면서 성경해석상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부분인 묵시적 예언도 즉시 보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노동자와 농민과 같은 일반 대중이 즉시 보아 알 수 있으면 왜 성령의 도움이 필요한가? 성령의 도움은 엘리트에게 필요하고 일반 대중은 필요 없다는 말인가 앞뒤가 맞지 않는 논리의 전개이다. 또한 성경을 받아보는 사람들은 일반대중이 아니다. 성경을 받아보는 사람은 최초로 성경이 쓰여진 바에 의하면 일반대중이 아니라 주 예수를 구주로 고백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게 쓰여진 것이다. 차라리 일반대중이 모여 있는 교회를 향하여 쓰여졌다고 다미선교회는 말했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서이 있다. 그것은 기독교의 구성원에 대한 사회신분 즉 Class 문제를 다미선교회는 들추어내고 있다. 그 의도가 무엇인지 분명히 모르겠지만 유추해 본다면 다미선교회는 일반대중을 위해 존재하는 그래서 종말의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는 묵시적 예언까지도 쉽게 알 수 있게 하는 선교회라는 인상을 풍기고 있다. 과연 처음 성경을 받은 초기 기독교는 농민과 노동자들로만 구성되었는가? 이러한 문제는 이미 막스주의 학자들에 의해서 주장된 문제이며, 또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많은 학자들이 노력한 바 특히 독일의 학자 다이슨(Gerd Theissen)이나 예일 대학의 미크스(Wayne Meeks)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 초기 기독교는 노동자 계급 뿐 아니라 상류층(문벌있고, 권세있고, 부유한)까지 이르고 있다고 논증하고 이제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정설이 되고 있다. 이점에 있어서도 다미선교회는 의도적이든 혹은 무의식적이든 기독교를 하나의 계급층을 대상으로 하는 다시 말하면 계급의식을 은연중에 심화시키는 기독교로 유도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넷째, 다미선교회는 문자주의(letterism)와 문헌법(litanal)해석을 혼돈하고 있는 듯하다. 전통적인 기독교의 해석체계는 그 골격이 문헌법 해석인 것이다. 문자주의는 문자주의가 본래적으로 안고 있는 독소로 인하여 이미 고대 기독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제외된 방법(물론 유대교의 성서해석에서도 제외되었음)으로 버나드 램은 다음과 같이 문자주의의 위험성에 대하여 쓰고 있다. "성서의 어휘 하나 하나에 지나치게 치중함으로(exaltation) 성서의 참 의미를 잃게 된다. 하나 하나의 어휘가 과도하게 높아짐으로 그 문맥의 근본의미를 흐리게 한다. 어떠한 주석도 그것이 사소한 것에 질질 끌리면 즉 문자주의에 빠지면 주석의 본분에서 이탈하게 된다."(램, P. 48). 그 반면 문헌 해석법은 인간 교통에 있어 핵심수단인 언어라는 상징을 통하여 그 언어로 구성된 문헌 내의 문화적 혹은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하여 그 문헌 또는 문장 또는 구절들이 전달하는 의미를 발견하는 방법론이 문헌해석법이다.
다섯째, 이렇듯이 문자주의와 문헌해석법을 혼동하여 마치 문자주의가 자신들이 되찾은 또는 기독교가 채택하여야 할 방법인 양 오리겐을 매도하며 소위 1260일, 열나라, 666 등을 문자주의에 의해 무리하게 그들의 틀에 끼어 맞추려고 하고 있다. 묵시적 예언은 상징화를 통해 비밀을 전달하는 것이 그 특징인 것이다. 상징화라는 특징은 상징적 언어를 사용함으로 그 상징 속에 감춰진 비밀을 어떤 사람에게는 의도적으로 감추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 비밀을 알 수 있게 하든지 아니면 어떤 한정된 기간까지 그 비밀을 숨겼다가 그 기간이 지나면 알게 하든지 하는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상징적 언어로 가득찬 묵시문헌(예를 들면 계시록)은 억지로 그 상징을 현대적 상황과 접목시켜 해석하기보다는 전체 맥락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가르침을 발견하고 신앙생활에 지침을 삼도록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것이다. 요한계시록 전체를 흐르는 줄거리는 교회는 이 세상 안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 등을 당할 수 있다. 그러나 반드시 이 세상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사단과 함께 능욕을 당하셨지만 영광을 얻으신 만왕의 왕 되신 예수님께서 재림하심으로 멸망하고 사단은 영원한 종말을 당하며 교회는 영원한 복락이 있는 천국에서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지배하는 사단에게 경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님께만 경배하고 끝까지 참고 견뎌야 할 것이다 라는 것이다. 만일 어느 한 부분에만 치우쳐 문자주의에 빠지면 근본 메시지를 벗어나서 주관주의와 독선주의에 빠지게 되며 지나치면 박 장로교와 같은 이단이 생겨나는 것이다. 다음에 "열나라"(계시록의 10뿔을 열 나라로 해석함)에 대한 문제를 예로 들면서 문자주의에 의한 해석상의 오류를 지적할 것이다.
3. 계시의 문제
한마디로 다미 선교회는 이 계시의 문제에 관하여 심각한 자체 모순을 들어내고 있다. 그들은 92년 휴거설이 성령의 계시라고 주장한다. 페이지 A12에서 나의 계시관이라는 난에서 "성령의 계시라는 명확한 증거가 있는데도..."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다시 A13에서 92년 휴거설의 성경적 근거를 무리하게 제시하고 있다. 또한 "우리에게 이미 가르쳐준 92년 10월의 휴거설도 주님이 계시해서 알게 해 주신 것이다"라고 자신들이 직접 주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것처럼 말한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이것은 성령의 계시도 아니요 주님이 그들에게만 가르쳐준 계시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소위 계시를 받았다면 굳이 성경적 근거를 억지로 인용할 필요가 없다. 공개된 계시이기 때문이다.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 성경의 근거가 필요 없다.
여기에서 그들은 아주 돌이키기 힘든 심각한 자체 모순을 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만이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 결코 이미 모든 사람에게 공개된 계시를 인용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몰몬교처럼 그들이 받았다고 하는 성경 밖의 계시가 담겨 있는 경을 제시하면 그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는 분석해 보아야겠으나 아! 그들은 무엇인가 받았구나 라고 받은 사실에 대해 인정할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세워놓은 소위 "성령의 계시" 또는 "주님의 계시"와 "깨달음"사이를 혼돈하고 있다. 그들은 이미 모든 사람에게 공개된 성경의 계시인 다니엘서와 계시록에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내용을 과거 정치 현상과 국제 정치(특히 유럽을 중심으로)현상에 억지로 사실 무근하게 접목시키면서 그럴 것이라고 이해한 것에(그들 어휘대로 하면 깨달음)현혹되어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의 조명은커녕 이성적 작용을 통한 지적 이해 그것도 사실 무근한 근거 위에서 되어진 이해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가지고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 이 세상에 계시를 안 받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한가지 더 지적한다면 계시를 받았으면 그 표현은 "그렇다"이지 가정법을 사용해서 표현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왕 가능성이 반반이라면 92년 휴거를 믿는 쪽에 가담하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하다",라는 식의 표현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가능성이 반반이라면"이라고 했는데 그러한 표현은 통계학상 반반이 될 확실성이 있을 때 반 반 이라고 표현한다. 예를 들면 동전을 공중에 던져서 두상이 나올지 독수리 상(미주화 25쎈트 짜리)이 나올지 반드시 50% 50% 일 수 밖에 없다. 이렇게 가능성이 반반이라고 쓰는 것인데, 0%도 가능성이 없는 억지 주장(계시를 받은 것이 아니고 이해한 것임으로)을 가지고 반반 운운하는 것은 통계가 무엇인지 알고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그러면 사실 무근하게 접목시킨 예를 들어보자. 계시록17장의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과 다니엘서 7장의 열 뿔 가진 짐승과를 동일시하여 "그러므로 다니엘서와 계시록에 나오는 열 뿔은 신흥로마가 분명하여 이것은 바로 EC인 것이다"(A13)라고 말하면서 열 뿔을 EC 열 나라로 연결시키고 있다. 물론 이렇게 접목을 시도하면서 100% 확실성을 스스로 결여하고 있음을 노출하고 있다. EC는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럽 10개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이 사실 때문에 다미 선교회는 열 뿔과 EC 열 나라를 동일시하며 이를 신흥 로마로 품고 있다. 과거의 로마제국이 유럽으로만 형성되었었는가? 소아시아, 팔레스타인, 북 아프리카는 어디에 숨겨놓았는가. 굳이 신흥로마로 본다면 과거의 로마제국의 영토를 다 포함시켜야 된다. 또한 EC 는 이제 10개국으로 구성돼 있지 않다. 포르투칼과 스페인이 근자에 EC 회원국으로 가입하여 이제는 12개국으로 구성되어 있다. EC를 신흥로마로 보고 그 짐승의 열 왕인 열 뿔로 본다면 나머지 2개국은 어디로 갔는가. EC에 대하여 덧붙인다면 쏘련 구테타 일이 발발하자 영국의 전 대처 수상을 비롯한 많은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동구 유럽권이 서구 유럽권에 급속으로 밀착하여 유럽공동체는 그 회원국이 더 증가할 전망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모른다면 아마도 "계시"를 받았기 때문에 그것이 반드시 열 나라이어야만 하기 때문에(그래야만 접목이 되기 때문에)의도적으로 몰라질 수 있다.
다시 한번 정치 질서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걸프전 이후의 "새 세계질서는 휴거의 서곡"(A13)이라고 하였는데 부시 대통령이 주창하고 주도하고 있는 새 세계 질서는 그 중심부가 유럽 공동체를 주축으로 한 세계 평화 유지라야만 그래도 모양새가 있는 접목이 될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휴거설에 의하면 신흥로마인 EC가 그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분명 이성적 작용에 의한 그것도 무근거한 자료들을 가지고 억지 접목하여 이해한 것을 가지고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그 계시가 성경 밖의 계시인데 성경에 의하여 입증될 수 있다고 억지를 쓰고 있으면서 성경 밖에서의 계시가 가능함을 다시 성경의 예를 통하여 정당화하려고 한다. 동방박사들에게 성경 밖에서의 계시가 주어졌다고 하며 더 나아가서는 목동들에게 예수님 탄생을 알려준 것도 성경 밖의 계시라고 한다. 동방박사들에게 나타난 것은 그들에게만 주어진 계시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보면 보여지는 자연 현상 중에 한 특이한 사건이다. 동방박사들은 그들 말대로라면 "점성술가"들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하늘의 별들을 면밀히 관찰하고 별들의 변하는 상태에 따라 이상을 말하기도 하고 점도치며 예언도 하는 것이 점성술이라면 그들은 그들의 점성술에 의하여 특이한 현상이 나타난 것을 발견하고 그 신비를 찾아내려고 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성경 밖의 계시라기 보다 점성술에 의한 발견이라고 하여야 한다. 또한 목동들에게 예수님 탄생을 알려준 것은 이미 나타난 계시(예수님)에 대한 증거이며 소식이지 계시자체는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와 자연을 통해 비밀스러운 일들을 알려 주시는 말하자면 일반계시가 있음을 믿는다. 그러나 그러한 종류의 계시는 예수님과 관련된 계시와 비교 될 수 없다. 예수님에 대한 계시는 이미 완성된다. 성경이 이미 이것을 담고 있다. 남은 것이 있다면은 이 완성된 계시를 주님의 재림과 함께 영광 중에 그것이 무엇인지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완성된 예수님에 대한 계시는 성경 밖에서 주어질 수가 없다. 이미 완성되기 때문이다. 예수님 재림에 대한 특히 일시에 관한 계시는 성경 밖에서 주어질 수 없다. 이미 성경은 그것에 대해 문을 닫아 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 때의 문제에 대하여 논의하고자 한다.
4. 때를 알려주는 것에 대한 문제
그들은 "예수님도 모르는 종말의 때를 말하는 것으로 인해 이단으로 몰리게 되었다"라고 하면서 그에 대한 반론으로 즉 시간의 주권을 쥐고 있는 아버지께서 그 때를 알려 주실 가능성에 대하여 신, 구약 약 30여 곳의 예를 들어 정당화하려고 하였다.
마태복음 24:36의 "아들도 모르고"라는 말을 그들은 "예수님이 모른다는 말로 해석하지 말고 그의 인성으로서는 모르게 되어 있으니 시간의 주권이 인간에게는 없고 아버지에게만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여야 한다"라고 하면서 "성경에는 모른다고만 있지 가르쳐 주지 않는다고 말한 곳은 없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그 때를 그들에게만 알려 주셨음을 뒷받침하려고 하였다.
먼저 이 구절부터 생각해보자. 이 구절은 난해 구절이기 때문에 여러 헬라어 사본들 사이에 불일치를 보이고 있다. KJV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비잔틴 계열 사본에서는 "아들도 모르고"를 삭제하고 있고 네슬판, RSV,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아들도 모르고"가 나타나 있다. 신학적 난해성 때문에 어떤 사본에서는 의도적으로 본문에서 삭제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원본에서는 그대로 나와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문제는 다미선교회에서 해석하는 바 "그의 인성으로서는 모르게 되어 있으니"라고 하는데 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이원론적으로 그렇게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다. 다른 곳에서 예수님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10:18)라고 말씀한 적이 잇다. 과연 예수님은 하나님과 같이 선한 분이 아닌가 굳이 분리시켜서는 안될 인성과 신성의 문제를 가지고라도 그들의 말대로 인성으로서는 선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요5:19)라고 말씀하셨을 때 과연 예수님은 단독으로 하실 수 없는 분인가? 그들처럼 이사야 9:6을 인용할 때 그 분은 하실 수 있으신 분이다. 그런데 오니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 하셨을까? 우리는 모른다 인간적인 사고의 차원에서 구구한 설명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이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모르고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인성과 신성을 분리시켜가면서 까지 결론을 내리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절대적인 권위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면서도 자신의 자존적인 신분과 상반되는 듯한 말을 하셨다. 그러기에 그것은 우리의 인식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이고 신비에 쌓인 것이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의 문제는 삼위일체 문제와 함께 우리 인간의 이해가 닿지 않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억지로 인성과 신성을 분리시켜 해석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것을 이해는 못하지만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의 문제 또는 삼위일체 문제를 풀어보려다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난 이단들이 있으니 영지주의와 양식주의(Modalism)인 것이다. 그리고 현대의 여호와 증인 같은 것들이다.
이제 시간의 주권을 가지고 계신 아버지께서 재림의 날을 알려 주신다고 하는 그들의 근거에 대하여 논의하자. 그들이 증거로 내걸고 있는 29곳의 증거 중에 재림의 때를 정확히 언제라고 알려주겠다고 한 곳은 한군데도 없다. 휴거와 관련해서 떼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주장을 유추할 만한 부분이 고전 15:51-52과 살전 5:4-5이며 나머지는 시대의 증조와 관련하여 때를 주의하여 경각심을 가질 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 마태 24, 막 13, 눅 21장의 내용이며 나머지는 주로 하늘나라의 비밀에 대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들에 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고전 15:51-52과 살전 5:4-5 두 부분만 논의에 대상이 될 뿐이다.
고전 15:51-52에서는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라고 번역돼 있다. 다미 선교회는 이곳에 나오는 "마지막 나팔"을 휴거전에 있을 나팔절과 접목시켜 해석하고 있다. 휴거전에 있을 나팔절이 마지막 나팔절이며 92년 10월에 있을 나팔절이 EC의 상황과 비교하여 볼 때, 그 나팔절이 소위 마지막 나팔절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에 대하여 세 가지 면에서 그들의 주장이 억지임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그들 주장대로 나팔절에 휴거가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여도 그 나팔절은 마지막 나팔절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상에 이스라엘 나라가 존재하고 그 나라가 100% 그리스도 앞으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계속 유월절, 오순절, 대속죄일, 나팔절, 초막절은 지켜지기 때문이다. 전 천년설 이론에 따르면 휴거 이후에 7년 대환난이 있다고 하며 그 7년 대환난기간 중 어느 때까지는 이스라엘이 주님께로 100%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100% 돌아오는 기간까지는 (그것이 1년이든, 2년이든, 혹은 3년 또는 이상이든) 그 절기들은 연례적으로 지켜지기 대문이다. 그러므로 휴거전의 나팔절은 결코 마지막 나팔절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마지막 나팔"을 마지막 나팔절로 풀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둘째, 92년 9.28 나팔절이 휴거 전 나팔절로 접목시킬 수 없는 것은 그 나팔절을 그릇된 자료에 의한 EC 10개국의 통합과 연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이 문제는 이미 계시의 문제를 다룰 때 다루었음).
셋째, 헬라어 본문의 문맥은 "마지막 나팔"은 결코 마지막 나팔절로 풀 수 없게 되 있기 때문이다. 52절은 어느 사본이건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불일치로 인한 의미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더욱 더 명확해진다. 52절은 "ἐν ἀτόμῳ ἐν ῥιπῇ ὀφθαλμού, ἐν τῇ ἐσχάτῃ σάλπιγγι" 직역하면 "순식간에, 순 깜빡할 사이에, 마지막 나팔에"가 될 것이다. 소위 때를 나타내는 듯한 이 귀절은 ἐν(엔)이라고 하는 전치사 구절을 취하고 있다. 이 전치사는 주로 장소(안에) 또 어떤 물리적 혹은 추상적 영역내에 있는 것을 나타낼 때 가장 많이 쓰인다. 바울의 유명한 "그리스도 안에"라는 표현은 전부이 ἐν이라는 전치사에 연결돼 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수단을 나타낼 때도 쓰이며 부정사와 합하여 쓰일 때 "-하는 동안에"라는 시간적 제한의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위의 세 구절은 서로 따로 떼어놓아 어떤 특정한 시간을 지칭할 수가 없게 되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어느 한 정점 또는 어느 순간에 일어날 사건에 대하여 강조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그들이 주장하는바 대로 마지막 나팔절 (물론 마지막이라는 가설 조차도 위에서 논의한바 대로 억지이지만)로 해석 될 수가 없다. 어떤 저명한 주석 책을 참조하더라도 그 부분을 소위 마지막 나팔절과 연결시키고 있지 않다는 사실 또한 주목해야 한다.
다음으로 살전 5:4-5을 보아도 마찬가지의 결론을 얻을 수 있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나니"라고 번역돼 있다. 이 구절의 내용을 가지고 그들은 "빛의 자녀들에게는 도적같이 오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깨어 있는 신자는 재림의 날을 알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A13, 하나님은 때를 일러주신다 에서 15번째 항목)라고 주장한다. " ..."로 헬라어 원본에서 기록되어 있다. 역시 여기서도 ἐν이 사용되고 있고 그것은 상징적으로 밤이라는 영역 다시 말하면 영적으로 어두움이라는 영역에 있지 않기 때문이 된다. 'ἐστὲ'라는 동사는 현재형으로 항상 계속되는 계속성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이것을 연결해보면 “너희가 항상 영적인 어둠에 있지 않기 때문에”가 된다. 밤 또는 낮이라는 어휘가 풍기는 의미는 어떤 특정한 시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어두움이 깔려 있는 상태 또는 빛이 비치는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그 상태에 있을 때는 어느 특정한 시간에도 다른 시간과 비교하여 다를 바를 못 느끼는 그저 어두움이 있고 빛이 있는 항상 똑같은 상태를 말한다.
그 이하 절은 결과를 나타내는 절로서 '임한다'라는 동사의(καταλάβῃ) 부정 가정법(subjunctive)으로 사용되고 있다. 헬라어에서 부정형은 어떤 한정된 시간선상에서의 행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위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위의 구절은 어두움 속에서는 언제나 같은 상태임으로 그것이 언제나 상관없이 도적이 너희에게 찾아올 수 있듯이 너희가 빛 가운데 항상 있기 때문에 "그 날"도 언제나 상관없이 너희에게 임할 수 있다라고 해석하여야만 한다. ὡς 라는 접속사는 대조용법으로 사용하는 접속사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이 구절은 어떤 특정한 때를 지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어떤 특정한 날 과는 상관없이 빛과 어두움이라는 어휘의 특성인 언제나 같은 상태에 초점을 맞추는 구절이 된다. 다미선교회는 이 구절을 가지고 다시 한번 무지 아니면 의도적 왜곡을 들어내 보이고 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 그들의 억지를 살펴보자. 그들은 "성경에는 모른다고 했지 가르쳐 주지 않는다고 말한 곳이 없다"라고 하면서 그 날을 계시로 자기들에게만 알려 주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여기서 칸트(I. Kant)나 흄(Hume)의 철학적 인식론을 논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아주 상식적인 것은 알려주면 당연히 아는 것 아닌가! '알지 못한다'라는 의미는 어떤 방법으로든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결과적인 상태로서의 인식의 문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마24:36에서 예수님께서 "천사도 모르고 아들도 모른다"라고 했을 때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가르쳐 주지도 않는다"라는 말을 덧 부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미 그 선언 속에는 계시의 행위가 차단 돼 있고 그 결과적 상태인 모르는 상태를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성경적 근거를 억지로 갖다 부친다 해도 예수님의 절대적인 "아들도 모른다"라는 선언속에 용해 될 뿐 만 아니라 완전한 해석이 가능하다. 그들은 문자주의의 말장난에 스스로 빠져 들어가고 마는 것을 볼 수 있다.
5.종말에 관한 문제
그들의 종말론을 보면 "역사내에 내재한 종말의 개념을 파악"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본질 중의 하나님의 사랑의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었기에 친교를 나눌 수 있는 사랑의 대상이 필요했다. 그래서 사랑을 하고 친교를 하려면 하나님과 닮은 존재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모양을 따라 자기 혀대로 인간을 만들었다.(창1:26)"(A12 종말론)라고 인간 창조의 목적을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시공 세계는 인간의 사랑의 테스트를 위해" 베풀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를 하나의 테스트 과정으로서 주어진 시간의 역사라고 한다. 그리고 "시간의 역사안에 내재한 시작과 진행의 종국적 성취는 그리스도의 지상재림으로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이같은 종말관속에 그리스도의 지상재림의 시간성(그들의 92년 10월 휴거설)을 강조하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와 재창조라는 대드라마 내에는 특정한 시간성이 강조되는 것이 아님을 먼저 밝혀야 하겠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천년이 하루같고 하루가 천년"같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기독교는 이같은 무시간성 속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처음부터 기대하고 있었고 또 그렇게 기대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무시간성이야 말로 신앙인들의 재림소망에 대한 시공을 초월한 확고 부동한 신앙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시간성 문제에 빠진 슈바이쳐 박사도 예수님이 자신의 때에 종말이 올 것을 기대하고 그에 알맞는 윤리를 현실에 맞지 않게 가르친 정신 이상자로 몰아 놓는 치명적인 과오를 범하고 말았지 않았는가.
다 아는 것이지만 창세기는 하나님의 창조로 시작하여 어두움이 휩싸이고 그 후 빛의 창조로 이어지며 인간의 창조 그리고 뱀의 유혹에 의한 타락과 타락한 인간의 역사가 계속된다. 그리고 신약에 오면서 예수님의 탄생과 마귀의 시험으로 시작하여 기독교 역사의 시작과 역사속에서의 삶 그리고 사단의 패망으로 어두움의 역사가 끝나고 다시 완전한 질서와 영원한 빛이 있는 천국의 시작으로 끝을 맺는다. 이같은 맥락에서 볼 때 시간과 공간성이 중요하다. 시간과 공간은 그리고 역사는 하나님을 처음부터 대적한 사단을 이기고 사단에 대한 영원한 종말과 하나님나라의 영원한 시작의 한 시점인 것이다. 이러한 영원성에 비할 때 인간의 이성속에 인식되는 범위에서 시, 공이 중요하게 보여지겠지만 하나님의 영원성내에서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종말에 대하여 논할 때 그것은 어떤 특정한 시간내의 사건이라기 보다는 이미 그 종말을 고한 사단의 영원한 종말이라는 개념속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조림을 종말이라고 하며 때로는 예수님의 재림을 종말이라고 하기도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예수님의 초림과 함께 종말을 당한 사단은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영원한 종말의 길을 가기 때문이다. 시작의 개념도 비슷하게 이해 할 수 있다. 천지 창조와 함께 시작된 천국은 끝이 없는 영원한 천국의 시작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전체성경이 지향하는 무시간성의 맥락에서 이탈하여 어떤 특정한 시간성을 강조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시간성 강조에 의해 왜곡 되게 그리고 무리하게 모자이크한 자신들의 입장을 계시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사도행전 5:38-39의 사건을 자기화 시켜 "그렇다. 우리의 휴거설이 사람에게서 나왔거나 사탄의 계시라면 스스로 무너질 것이요 만일 그렇지 않고 이것이 확실한 성경의 계시하면 무너뜨릴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어 성령 훼방 죄에 걸릴 것이다"(A12 휴거설에 대한 해명에서) 라고 한다. 사도행전 5:38-39 에서의 가말리엘의 지혜가 다미 선교회의 자기 정당화에 대한 비난을 대항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될 수 없다. 가말리엘이 이것을 말했을 때는 유대교 신봉자들이 기독교인들을 핍박할 때였다. 유대교 신봉자들은 스스로 진리 수호자로 자처하였고 거짓 메시야를 적발하는 일을 감당하기도 하였다. 가말리엘은 예수님 이전에도 몇 사람이 그리스도로 자처하고 군중들을 현혹하였으나 마침내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거짓 메시야 임이 드러났다는 전례를 가지고 기독교인들에 대해 상관 말라고 한 것이다. 유대교 신봉자들은 참 메시야를 거역하며 그를 죽이게 하고 그의 부활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을 핍박한 것이다. 유대교 신봉자들은 근본적으로 참 진리에 대한 도전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가말리엘의 지혜는 가장 적절한 지혜였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 그 진리를 수용하고 있으며 그 진리를 위해 쌓아온 전통적 기독교와 그 진리체계로부터 이탈하고 있는 다미선교회와의 문제인바 다미선교회는 감히 가말리엘이 상관 말라고 한 진리의 수호자들과 연계시킬 수 없다.
기독교는 2천년의 역사를 통해 수많은 험난을 겪어 가면서 진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 왔다. 그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할 것이며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을 진리 안에서 수호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를 향하여 "성령 훼방 죄" 운운하면서 방자하게 손가락질 할 수 있는가!
6. 끝 맺는 말
지금까지 가능한 범위내에서 다미선교회가 주장하고 있는 바에 관하여 하나 하나 열거하면서 그들이 범하고 있는 오류들에 대하여 지적하였다. 그것들을 요약한다면 첫째, 다미선교회는 역사적 자료들을 확실한 근거없이 왜곡시켜서 92년 10월 휴거설을 뒷받침하였으며 둘째, 그러한 오류에 의하여 작용한 인간 이성의 산물을 가지고 특정한 날에 휴거가 있다고 하는 계시를 받았다고 억지 쓰고 있으며 "성령 훼방 죄" 운운하면서 두려움없이 말하며 셋째, 성경의 근거를 찾음에 있어서도 전통적 성경해석의 원리를 무시하고 자신들의 편의주의와 주관주의에 따라 이현령 비현령(耳懸鈴鼻懸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으로 정치현상과 무리하게 접목시켰으며 넷째, 그렇듯 분명한 오류를 범하고 있으면서 '해석상의 차이' 또는 '신학노선의 차이'정도에 그친다고 한다(해석상의 차이 또는 신학 노선의 차이는 차이를 나타내고 있는 그룹들이 현저하고도 분명하게 해석상의 차이를 객관적으로 인정할 때 용인되는 것이지 분명한 오류를 가지고 있을 때는 쓰는 표현이 아니다). 다섯째, 자기 우월 주의에 빠져 오리겐 혹은 웨스트코트나 호트 같은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신 종들을 아무 근거없이 매도하면서 기독교의 역사성과 전통성을 경시하고 있다. 초기 기독교의 영지주의나 그것의 현대판인 구원파에서 공통적으로 보이고 있는 오직 자신들만 계시를 받은 특별한 그룹으로 자처하고 있다.
종교 사회학적 관점에서 볼 때, 다미선교회는 이제 cult형성의 첫 단계를 지나 자신들의 이탈된 신앙 체제를 정당화(legitimation)하고 있다는 점을 주의하면서 우리는,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깨달았다"라는 말 "계시를 받았다"는 말에 현혹되지 말고 혹시 주위에 현혹된 사람들이 있다면 다미선교회가 가지고 있는 오류들을 지적하여주고 선도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아 나태했거나 주님의 재림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여 소망을 잃고 이 세상 것에 만 치심 하지 않았나 점검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귀한 복음을 전달하는 전도의 사명을 등한히 하지 않았나 점검하여야 할 것이다. 끝으로 이렇듯 전통적 진리체계로부터 왜곡. 오류 또는 무지에 의하여 이탈되고 있는 집단들이 발아하고 뿌리를 내리고 그 세를 확장시켜 나갈 수 있게 된 우리의 신앙 풍토에 대하여 깊이 자성해야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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