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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료·논문

schleiermacher(슐라이에르마허)

by 해찬솔의 신학 2007. 12. 1.

 

 

1. 서론                                                                            김한영 교수

 

슐라이에르마허는 많은 비판가들에 의해서 범신론자라는 오해를 받아왔다. 이러한 오해는 슐라이에르마허가 그의 『종교론』에서 하나님이라는 표현 대신에 우주, 무한자, 세계, 세계정신 등의 용어를 사용한 것에서 기인하였다. 그리고 스피노자에 대한 그의 찬양도 그를 범신론자로 지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범신론자라는 것은 슐라이에르마허의 생애와 전반적인 사상을 통해서 생각해볼 때 정당한 평가는 아니라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필자는 슐라이에르마허의 신관이 범신론이 아니라는 것을 논증하기 위해서 그의 『종교론』과 다른 문헌들을 통해 그의 신관을 고찰하고자 한다.

 

 

2. 『종교론』에 나타난 신에 관한 표현들

 

슐라이에르마허는 종교에 대한 근본적인 정의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종교는 우주에 대한 직관과 감정이다.” 이 정의에 따르자면 종교의 대상은 우주이다. 또한 슐라이에르마허는 이것을 확장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종교는 우주를 직관하려 하며 우주의 고유한 서술과 행위속에서 그에게 경건히 귀 귀울여 들으려 하고 스스로 어린 아이의 수동성으로 우주의 직접적인 영향에 사로잡히고 충만하게 채워질 수 있으 려고 한다.

 

이처럼 슐라이에르마허는 종교의 본질이 우주에 대한 직관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더 나가서 슐라이에르마허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여러분 나와 함께 경건히, 성스럽게 추방당한 스피노자의 영혼에 양털의 공물(貢物)을 바치자. 저 높은 세계 정신이 그를 감화시켰으며 무한자가 곧 그의 시작과 끝이었고 우주는 그의 하나 뿐인 영원한 사랑이었다.”

 

여기서 그는 스피노자를 찬양하고 있으며, 세계 정신과 무한자와 우주라는 표현을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다. 종교는 우주에 대한 직관이며, 우주는 세계 정신과 무한자라는 표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더 나아가서 하나님보다도 우주에 우위성을 둔다. 또한 슐라이에르마허는 하나님을 종교의 본질적인 것이 아닌 단지 “종교적인 직관의 개별적인 유형”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한다. 심지어 하나님이 종교에서 불필요한 것처럼 이야기하기도 한다.

 

“나의 관점으로부터 그리고 나의 신앙 개념에 따르면, “하나님 없는 종교는 불가능하다는 개념은 전 혀 발견될 수 없다.”

 

이상에서 우리는 신에 관한 슐라이에르마허의 진술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진술은 종교를 경멸하는 무신론자들에 대한 변증적 차원의 수준이지, 그가 범신론자라는 사실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종교론』은 신관을 제시하려는데 목적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학자의 사상은 그의 전체 사상과의 관련성 아래에서만 확실히 윤곽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물론 『종교론』에서 범신론적인 색채로 오해받을 수 있는 소지는 어느 정도 나타난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슐라이에르마허 자신도 분명히 자기는 범신론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3. 슐라이에르마허의 신관에 대한 논의 - 하나님과 하나님 개념의 구별

1) 다양한 평가들

먼저 슐라이에르마허의 신관이 『종교론』 초판과 재판이 일치한다는 관점에 서 있는 학자들은 다음과 같다. 후버(Eugen Huber)는 슐라이에르마허의 종교는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해석했다. 『종교론』초판에서 종교의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주라고 후버는 보았다. 후버는 『종교론』의 수정판에서 우주란 말 대신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했음을 인정했지만, 하나님이라는 용어조차도 의심스런 눈으로 보았다. J. Wendland, 와 M. E. Sandbach-Marshall, J. K. Graby도 슐라이에르마허가 일생동안 범신론을 주장하였다고 한다.

한편 Gerhard Ebeling은 범신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슐라이에르마허의 『종교론』재판과 심지어 초판에서의 신관을 다음과 같이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현대에 있어서 슐라이에르마허와 같이 신론을 새롭게 이해하려고 시도한 신학자는 없다. 그는 모 든 전례들을 응지로 돌리는 조직적인 힘을 가진 신론을 통해서 신론에 대한 전통적 형태의 의심스 런 면을 일관성 있는 비판으로 일관하여 주장했다.”

 

반면 『종교론』 초판과 재판에서의 신관이 단절, 변화를 거쳤다는 것을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R. A. Lipsisussms는 『종교론』 초판에서 우주는 “하나이며 전체인 자”, 그리고 ‘무한자’로 이해하는 점에서 신과 세계는 구별되지 않는 범신론이었으나, 재판에서는 신은 전 세계(Welt-totalitat)가 아니요, ‘지고의 통일체’(The hightest Unity)라고 하면서 재판의 신관념은 초월적 근거로서 세계자체와 구분되는 철학자의 하나님일 뿐이라고 한다. Richard B. Brandt는 『종교론』 초판의 범신론적 경향이 재판에서 전통적 기독교쪽으로 변화했다고 말한다.

 

이상에서 보듯 『종교론』의 신관은 일관된 범신론 혹은 일관된 내재초월신관과 초판에서는 범신론, 재판에서는 유신론, 그리고 초판에서는 범신론, 재판에서는 내재초월신관으로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2)하나님과 하나님 개념

그러나 슐라이에르마허의 『종교론』에서의 신관은 범신론이 아니다. 이를 논증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관련하여 하나님 개념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슐라이에르마허가 살았던 시대는 계몽주의의 영향이 지대하던 시대였다. 계몽주의의 기초는 신과 세계, 신과 인간의 분리에 있었다. 이 시기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인간성의 천재”로 간주하였으며, 인간을 “하나님의 원형”으로 취급했다. 따라서 인간성이 그들의 모든 것이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이러한 신개념을 거부했다. 그리고 그 당시의 하나님의 개념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인간존재로부터 이끌어낸 신개념이 자신의 종교에서 가장 높은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성이 아니라 우주가 그에게는 모든 것이었다. 인간성은 단지 우주의 무한히 작은 부분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그는 ‘우주’를 추구하였다. 이것은 곧 계몽주의의 종교관에 대한 비판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당시의 하나님 개념에 대한 비판을 통해 하나님과 종교의 관계를 제시했다. 그러므로 『종교론』에서 하나님의 필요성을 거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당시의 하나님 개념에 대한 거부로 보여진다. 이것은 그의 종교론의 신관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작크에 대한 답장에서 잘 나타난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자신이 『종교론』에서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거부하거나 무시하지 않았다고 주장함과 동시에 종교란 어떤 하나님 개념, 심지어 하나님의 인격성의 개념에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왜냐하면 종교는 하나님의 인격성 개념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상에서 우리는 슐라이에르마허가 하나님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하나님 개념을 거부하였음을 살펴보았다. 이제 그의 우주에 대한 개념과 우주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을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 개념들을 분석함으로써 우리는 슐라이에르마허의 신관의 성격을 특징지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4. 우주와 하나님

슐라이에르마허에 의하면 우주는 “경험적으로 확인될 수 있거나 시간과 공간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우주는 도덕적인 세계도 물리적인 세계도 아니다. 그것은 세계, 자연, 인간 및 역사를 포함하는 “존재와 생성의 전체”이다. 그리고 우주는 종교에 있어서 직관되며, 인간에게 본원적인 행동을 하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슐라이에르마허가 우주를 세계와 인간과 역사와 구분하지만 분리하지는 않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그가 내재적 초월신을 우주라는 개념으로 대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슐라이에르마허 자신도 자신이 일관성 있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내재적 초월신을 말하고 있다고 상술한 바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우주라는 말로 표현한 것은 계몽주의적 시대속에서 변증적 과제를 수행하였던 것에 다름아니다.

한편 신에 대해서 슐라이에르마허는 “종교가 명령적인 신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하나님 ‘자체’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즉 하나님의 ‘개념’ - 인격적 ‘개념’, 혹은 도덕의 근거로서의 신개념 -을 거부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5. 슐라이에르마허 변호자들의 견해

슐라이에르마허의 변호자들은 슐라이에르마허에게 스피노자가 많은 영향을 준 것을 인정하지만 그 내용에 대해서는 슐라이에르마허의 비판가들과는 많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마틴 레데커는 슐라이에르마허가 하나님에 대한 자연신론적인 개념과 초자연적인 계몽주의 개념을 거부한 점에 있어서는 스피노자와 유사성이 있지만 양자 사이에는 극단적인 차이가 있음을 주장한다.

 

“스피노자와 그의 사상체계는 이중의 방법으로 해석될 수 있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자 연은 동일하다든가 또는 스피노자는 하나님을 자연이나 세계 속에 잠기게 하기를 거부하고 세계를 하나님 속으로 끌어들이려고 한다. 이 중 어느 해석도 슐라이에르마허에게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

 

크리이그(Carl E. Krieg)와 윌리암즈(Robert R. Williams)역시 슐라이에르마허와 스피노자 사이에 유사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슐라이에르마허가 스피노자의 실체(Substance)로서의 신 개념이 하나님과 세계의 무한한 질적인 차이를 정당하게 다루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거부했다고 주장했다.

보버민(G. Wobbermin)은 슐라이에르마허가 『종교론』에서 스피노자를 찬양한 것이 그의 범신론적인 경향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보버민에 따르면, 슐라이에르마허는 피히테의 극단적인 주관주의를 반대하기 위하여 스피노자를 끌어 들인 것이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우주는 지고의 궁극적인 실재였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슐라이에르마허 변호자들은 슐라이에르마허가 하나님을 초월적인 동시에 내재적인 존재로 생각했다고 주장했다. 죤슨(W. A. Jonson)은 슐라이에르마허가 일평생 이러한 신개념을 견지하고 있었다고 본다. 그는 『종교론』에서는 절대자를 내재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의 조화로 간주했으며, 후기 『신앙론』에서는 절대자를 내재적인 동시에 초월적인 분으로 생각하였다고 본다. 레데커 역시 슐라이에르마허가 하나님과 세계를 구별했으며 범신론 혐의를 부정한 것은 정당하다고 보았다. 또한 바이써도 슐라이에르마허가 하나님과 세계를 동일시하지 않고 명확히 구별했다고 보았다.

 

"세계는 모든 것을 포옹한다. 그것 밖의 영역은 없다. 우주는 세계 밖에 그리고 세계 앞에 있는 것 이 아니다. 항상 세계와 함께 있다. 이 하나님 또는 우주는 세계의 하나님이다. 이것은 존재들의 존 재이다. 세계 없이 우주는 없다. 한편 세계와 우주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존재와 모든 존재 들의 근거 사이의 차이다. 세계는 항상 존재하는 반면, 우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양 자 사이의 혼동은 완전히 배제된다.

 

이처럼 많은 슐라이에르마허를 변호자들은 그의 신관이 내재적이며 동시에 초월적인 기독교적 전통에 서 있음을 주장한다.

 

 

6. 결론

목창균은 다음과 같이 슐라이에르마허의 『종교론』에서의 신관을 평가한다.

 

“이것은(범신론자라는 오해는) 하나님과 세계 문제에 대한 슐라이에르마허 자신의 불확실한 진술로 인해 일어났다. 그는 교양 있는 독자의 감성을 각성시키려는 의도에서 신학적인 용어 대신 수사학 적인 언어를 사용했다. 하나님이란 말 대신 우주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 한 무한한 조직체로서의 우주와 그것의 산물로서의 유한한 세계 사이를 구별할 때를 제외하고는 하나님과 세계를 구별하지 않았다. 따라서 『종교론』초판에 범신론적 경향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 적으로 부정하기는 어렵다.”

 

물론 목창균의 지적은 어느 정도 정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이것은 슐라이에르마허의 사상을 그가 살았던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의 과도기적 상황과 유리해서 해석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계몽주의 시대의 ‘신과 인간의 전적 분리’의 형식의 극복과 종교를 멸시하는 교양인들을 염두에 둔 변증의 입장속에서야 비로서 우리는 『종교론』을 정확히 읽을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주’라는 용어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신론의 대담하고 창조적인 표현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시간적, 혹은 공간적 의미에서의 피조물이 아니다. 그는 결코 세계와 하나님을 동일시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다음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 “나는 하나님과 불멸을 가정하지 않고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었다.”

필자는 종교의 권위를 남용하여 종교 대심관의 자리에 서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 그들은 자신의 교리와 신학체계를 절대시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기와 다른 주장을 한다고 판단되면 가차없이 그들을 정죄하고 이단시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역사상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희생제물이 되어 비참하게 삶을 마감했는지는 역사가 잘 증언하고 있다. 문자를 절대시하고 자신의 섣부른 이론을 우상으로 삼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우리는 성서와 교회의 전통을 사랑하고 수호해야 하지만 그것이 마녀사냥과 같은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을, 그리고 정당화하는 것을 언제나 예리한 예언자의 눈으로 지켜볼 필요가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슐라이에르마허는 범신론자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신학을 시대적 상황과 매개하려고 하였던 예언자였으며 차가워진 이성중심의 인간에게 하나님의 체험을 역설하던 뜨거운 하나님의 연인이었음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