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가살이
김한영 목사
충무공 이순신은 스물두 살에 방씨 집안에 장가를 가서 10년 동안 처가살이를 했다. 장인은 전남 보성 군수를 지낸 부자이자 명궁(名弓)으로 소문난 무인(武人)이었다. 그가 보성 군수였던 시절 화적 떼가 집을 털려다 그의 활 솜씨에 겁을 먹어 도망쳤을 정도라고 한다. 충무공은 그런 장인에게서 활쏘기와 병학(兵學)을 배운 덕분에 서른두 살 때 무과에 급제했다.
가난했던 퇴계 이황은 큰 아들에게 처가살이를 시켰다. 퇴계는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위로했다. “굳세계 참고 순리대로 처리하며 수양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것이 마땅할 것‘이라고 했다. 고려 때부터 17세기 이전까지 남자가 처가에 들어가거나 처가 근처에 사는 게 전통 혼인풍속이었다고 한다.
“태종실록”은 ‘남자가 장가들어 자식을 낳으면 외가에서 길러주니 그 은혜가 크다’고 썼다. 율곡 이이가 강릉 외가에서 나고 자란 게 당연했다. 처가살이를 뜻한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은 17세기 이후 퇴색했다. 아들과 딸이 똑같이 재산을 물려받아 제사를 번갈아 모시던 풍습이 사라진 탓이다. 큰아들이 제사를 도맡아 유산을 독점하면서 가부장제가 더욱 굳어졌다. 상속권을 잃은 여성의 지위는 떨어졌다.
최근 통계청 조사에서 ‘처가살이 남성’이 1990년 1만8000여명에서 2010년 5만3000여명으로 세 배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장인. 장모에게 가족 생계의 결정권을 맡긴 남성 가장(家長)이 많아진 탓이다. 반면 ‘시집살이 여성’은 44만4000여명에서 19만8000여명으로 크게 줄었다. 아이를 맡기려고 처가 또는 친정 근처에 사는 맞벌이 부부가 흔해졌다. 지난 5월 청소년 의식조사에서도 이모와 외삼촌을 고모, 백부, 숙부보다 더 가깝게 여긴다는 답변이 많았다. 친가보다 외가를 축(軸)으로 삼아 가족이 이뤄지는 ‘신(新)모계사회’라는 말이 나온 지도 꽤 됐다.
여성계에선 “시댁에 아이를 맡기기 힘든 취업 주부들이 만만한 친정 엄마에게 아이를 떠넘기는 게 신모계사회의 실상”이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아예 친정에 남편과 아이를 데리고 가서 사는 주부도 있다. ‘처가살이’와 ‘전업 주부(主夫)’를 마다 않는 남자도 많아 졌다. 처가살이는 남자가 여자보다 경제력이 약했던 시대에 유행했다. 4세기 만에 되살아나는 처가살이 뒤엔 일자리를 못 구해 한숨 쉬는 남자들과, 손주 돌보느라 숨찬 친정 엄마들이 있다.
주후 2011년 07월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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