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학자료·논문

고통의 문제에 관하여 (아더T 피어선)

by 해찬솔의 신학 2011. 7. 2.

 

#교정을 보지못해서 오타가 있을 수 있으니 양해 바랍니다.

 

 

                                           고통의 문제에 대하여

                                                                   (글쓴이 : 아더 T 피어선 목사)

                                                                                                                                                        옮김 ; 김한영 박사

 

      

 

                                                                                                                                                                                                                                                                      

 다음의 다섯 개의 성서 본문은 성서적 가르침의 경향을 보여 주기에 충분하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5:12)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1:27)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 으니.”(12:6)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5:3.4)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 고.”(11:25)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 라.”(1:29)

 

죄와 마찬가지로 고통은 가장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이다. 그것의 신비는 삼중적이다. 무엇보다 먼저, 수백만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지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그들보다 앞서 산 사람들이 지은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 수백만 이상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만들지 않았으나 피할 수 없는 부패하고 왜곡된 사회 제도의 희생물이 된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힘이 일시적으로 정의를 이기는 것 때문에 전 국민이 고통을 당하고 제도의 횡포에 구속을 당한다.

뿐만 아니라, 상당히 많은 고통이 개인의 죄나 필요에 비례하여 주어지지 않는다. 공정한 할당이나 부과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때로는 희생자의 전 삶이 하나의 고문이 된다. 종종 재난이 구조나 희망이 없어 오랜 세월동안 지속되며, 몇 세대를 걸쳐서 연장되기도 한다.

설상가상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이 침묵하거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어떤 동정심 많은 재판관이 도덕 세계를 다스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아니라면 만약 신이 계시다면, 그는 알거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며, 또한 간섭할 수도 없거나 하려고 하지 않는 분으로서 행동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하나님의 계시에서 아무런 도움도 찾지 못한 사람은 기껏해야 다음 세 가지 결론 가운데 하나에 이를 수밖에 없다. 무신론, 운명론, 이원론.

무신론자는 말한다. “어떤 신도 없다. 사람들은 아무 의미도 없는 우연에 의해서 이리 저리 시달린다. 이 우주 이면에는 도덕 질서나 도덕적 통치나 어떤 인격성이 없다.

운명론자는 하나님을 자신과 같이 어떤 바꿀 수 없는 필연에 붙잡힌 자로 이해한다. 하나님은 구원하거나 돕는 일에 간섭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전적으로 영혼이 없고 기계적 규칙과 통일성 가운데 움직이는 우주의 기계의 한 부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은 그 기계에 의해 부서지거나 높임을 받는 것을 결정할 만한 어떤 주권적 능력이 없다. 이원론자는 이 우주에서 두 가지 서로 반대되는 세력, 곧 양성과 음성을 인정한다. 전자는 인간의 복지를 추구하나, 후자는 인간의 불행을 기뻐한다. 이 가운데 어떤 것이 우세할 지는 언제나 확실하지 않다.

이제 인간의 이론에 지나지 않는 것들에서 떠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 풀기 어려운 신비에 대해서 아무런 명확한 빛이 없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이곳에서 그 젠체 문제를 풀기 위한 독특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그 해답은 인간의 철학이 만든 가장 지혜로운 체계를 부끄럽게 만든다.

이 문제를 살핌에 있어서 서로 다른 종류의 고통에 대하여 몇 가지 분명한 선을 긋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고통이라는 말이 매우 포괄적이기 때문이다. 이 일반적인 용어 아래에 속하는 것으로 다음 여섯 종류의 경험들이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더욱 자세하게 연구할 가치가 있다.

 

1. 유기적이고 유전적 고통(31:29; 18:2; 20:5; 5:12).

2. 형벌적 사법적 고통: 이것은 보복의 형태이다(31:30; 18:4; 32:23; 5:22-24).

3. 교정하고 새롭게 하는 고통: 이것은 의에 이르도록 회복시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아 버지의 사랑에 바탕을 둔다(12:12:5-13; 고전 5:5, 11:31).

4. 훈련하고 교육하기 위한 고통: 이것은 보다 높은 단계의 거룩한 인격과 봉사에 이르도록 준비시키기 위한 것이다(5:8; 고후 4:17, 18, 12:1-10; 벧전 2:19, 4:13).

5. 허용적이고 변호적인 고통: 이것은 하나님과 성도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것이다(1-2; 34:17-22, 35:17-28).

6. 자발적이고 대속적인 고통: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법 가운데 하나이다(고후 1:5-9; 1:24; 3:10).

 

이와 같은 여러 종류의 고통들을 서로 구별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필요하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우리는 고통의 근원과 목적을 알 수 있다. 또한 고통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고통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니면 그것을 피할 수 있는 것으로 인정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고통이 심판 혹은 자비에 의해서 가해지기 때문에, 고통을 인내하면서 감당해야 하는지 아니면 참회하는 마음으로 끝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한 걸음 나아가, 고통이 재판관이 내리는 형벌인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더 높은 수준의 복을 받기 위한 준비인지, 아니면 그것이 마지막 의의 승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증진시키려는 더 큰 구도의 한 부분으로 알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할 특권인지를 알 수 있다.

 

1. 무엇보다 먼저 유기적이고 유전적 고통이 있다.

 

이것은 인류 전체, 곧 바로 직전 조상들뿐만 아니라 아담까지 올라가는 먼 조상들과의 유기적 관계 때문에 비롯되었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모두 죽었다. 그래서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다.”(5:14)

하나님은 엄중하게 말씀하신다. 그는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한다.”(20:5) 나아만의 문둥병은 그와 그의 자식들에게 벌로 가해졌다(왕하 5). 이 유전적 고통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유기적 형별은 유기적 법을 어겼기 때문에 뒤따르는 것이고, 사회적 유기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다. 어떤 사람이 잘못을 하면 그 결과는 그 사람이 육체적으로 또한 정신적으로 견뎌야 한다. 그것은 그들이 인류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아담 안에서 모두가 죽었다.” 이 진술에 대해서 우리는 신학적으로 논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가장 명백한 사실 중 하나이다. 어떤 사람이라도 그의 후손에게 그 자신보다 더 좋은 상태를 전가시킬 수 없다. 우리의 첫 조상이 죄를 지어 고결한 지위에서 떨어지게 되었을 때, 그는 존재의 균형을 깨뜨려 버렸고, 죄에 오염되었으며, 하나님과의 교제와 모든 거룩한 존재와 사귈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그의 후손들이 그의 도덕적 형상을 물려받아야 하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범죄와 비슷한 죄를 짓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의 타락의 결과를 피할 수 없었다. 그것은 고통뿐만 아니라 죄의 성품이라는 오점과 경향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의 철학이 무엇이든지간에 이러한 사실들은 분명하고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뒷받침하는 가공할 만한 정도의 증거들을 보려면, 뉴욕의 파이브 포인츠”(Five Points)sk 런던의 세븐 다이얼”(Seven Dials)과 같은 대 도시들의 빈민가들을 방문해보면 된다. 이곳은 사회개혁 프로그램으로 사회적 오물들을 말끔히 쓸어내기 전에는 수 세대에 걸쳐서 무서운 죄와 범죄의 자취들이 있었다. 50년 전에는 다수의 어른들과 어린 아이들이 그곳에 있었는데, 그들의 몸은 부도덕한 모습들로 손상되어 있었고, 불구나 병신이 되어 있었다. 그들의 술 중독 성향과 범죄성은 타고난 것이었다. 그들에게 일생은 오랫동안 지속되는 하나의 저주였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가장 존경받을 만한 사람들조차도 개인적으로 책임이 없는 악을 이어 받는다.

그와 같은 유기적이고 유전적인 고통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물론 우리는 순응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 태어나고 국가의 일원이 된 것 때문에 받는 형벌이다. 이곳에서는 한 구성원이 고통을 받으면 모든 구성원들이 그와 더불어 고통을 당한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유기적 연대가 있으니, 후손은 현재의 부모뿐만 아니라 더욱 먼 조상들이 지은 죄의 결과를 거두게 된다.

이 유기적 법칙을 불평하거나 창조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가 오랜 전에 들은 것을 기록한 것과 같이, “부모들이 신 포도를 먹어서 그 아이들의 이가 시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공의롭지 못하다고 비난을 받는다,. 왜냐하면 부모의 범죄가 자식들에게 비정상적 경향과 성격을 전가시켰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화에 나오는 독수리와 같다. 이 독수리는 제단에 바친 희생제물을 훔칠 때, 그것과 함께 타고 있는 석탄을 나른다. 이 석탄은 자기가 있는 둥지에 불을 지를 뿐만 아니라 새끼 독수리를 태운다. 그러나 그러한 불평에 대한 답은 신앙심이 없는 과학자의 논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사람은 과학적 관점에서 이러한 자연의 법칙이 흔히 초래하는 우연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공정하고 지혜로우며 선한 것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이러한 우화의 의도는 선을 위해 운용되는 법칙은 오용되었을 때에는 언제든지 고통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그는 한 젊은이가 주피터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방탕한 결과로 극심한 번민의 아픔을 당하고 있고, 자신이 짓지 않은 죄 때문에 공정치 못하게 형벌을 받고 있다고 불평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주피터는 그가 불평하고 있는 바로 그 법칙에 따라서 그의 아버지로부터 섬세한 신경과 활력이 넘치는 근육과 감각을 받았다.”고 대답한다. 이러한 것들 때문에 기쁨은 물론 많은 고상한 정신과 마음의 역량과 기능들이 있게 된다. 주피터는 그에게 그와 같이 좋지 않게 보이는 유기적 법칙을 일시적으로 중지시켜 주겠다고 제안한다. 하지만 주피터는 그 젊은이에게 그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 사라지게 되면 똑같은 유전적 세습의 법칙을 통하여 그에게 다가오는 모든 유익과 축복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리고 계속하여 그에게 그의 고통까지도 자비의 전령이고, 그의 아버지가 밟았던 승리의 길들로부터 그에게 경고하는 모니터라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고통을 겪고 있는 이 사람은 자신의 불평을 철회하였고, 자신보다 뛰어난 부모의 자질에 의해 자신에게 똑같이 미치게 된 많은 축복들을 바라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고통에 몸을 맡겼으며, 고통에 순응하기로 다짐하였다.

이 우화는 명백한 교휸을 준다,. 오용될 때 악을 이루는 똑같은 법일지라도, 순종하면 선을 이루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부모들의 죄를 자녀들에게 갚되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겠다고 위협하는 반면, 똑 같은 처리 방식 혹은 법에 따라,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수천 대까지 은혜를 베풀겠다!”고 약속하신다. 불순종의 결과가 그렇게 삼사 대까지 이르는 데 반하여, 순종에 대한 보상은 아주 오랜 시간에까지 미친다. 게다가 악한 행동에 따르는 형벌이 아무리 무시무시한 것이라 하더라도, 잘 한 행동이 초래하는 복된 결과와 보상은 이보다 더욱 크다.

창조자는 유전을 본래 축복의 통로로 의도했고 채택하였다. 그러나 죄가 그것을 부분적으로 저주의 통로가 되게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은 이러한 빗나감에 대해 비난받을 수 없다. 그리고 이 법에서 우리들을 유익하게 하는 측면이 없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유기적인 법칙을 위반하거나 무시하는 것과 같은 행위에 대해 경고하는 파수꾼의 역할을 한다. 절제할 줄 알고 덕을 쌓는 삶은 우리의 후손들에게 축복을 넘겨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격고 있는 유전적인 악이 만약 제거되지 않는다면, 그것에서 벗어나게 하고 건강과 행복을 증진시켜 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미래 세대가 우리보다 더 고결한 삶의 수준에 이르도록 도울 수 있는 순수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격려 받을 수 있다.

 

2. 고통의 두 번째 부분은 사법적이고 형벌적이다.

 

이것은 악을 행한 사람에게 보복적인 형벌을 가하는 것이다. 그것은 의로운 율법의 요구와 결코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의로운 재판관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행악자도 피해 갈 수 없는 하나님의 통치의 완전함을 나타낸다.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한 자들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2:2).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하나님 자신이 죄의 동반자가 되게 될 것이다.

성서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 법의 시행을 조절하는 데에는 세 가지 혹은 네 가지의 요건이 있다.

 

. 재판은 두 영역 곧 현세와 내세를 포함한다. 보복적이고 형벌적인 고통의 범위는 시간과 영원 모두에까지 확대된다. 대 백 보좌는 이 세상 너머에 있다. 심지어 여기에서도 보복이 끊임없이 작용하지만, 그것은 고의적이고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의 삶은 잠정적이고, 회개와 개혁의 기회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땅의 죄인은 모두 당분간 보류된 심판 아래 있다. 게다가 보상과 형벌 모두에 대한 완전한 조정은 이곳에서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라는 보다 큰 계획이 있다. 이것에 의해서 완전한 조정이 영원에서 완성된다.

 

. 이 세상에서 완전한 조정은 불완전성 때문에 불가능하다. 사람이 저지르는 악의 상당수가 끝까지 계속 진행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옳은 것이나 그른 것 중 그 어느 하나에 대하여도 그 둘이 완성될 때까지는 적당한 보상이나 보답이 있을 수 없다. 행동은 틀림없이 그에 대한보상이 이루어지기 전에 행해지기 때문에, 현세에서보다 더 큰 보복 계획은 이 세상 너머의 삶을 받아들여야 한다.

 

. 하나님의 경영은 또한 사람을 다룰 때 대속의 원리를 인정한다. 은혜는 인간 범죄자들을 위해서 자발적이고 대리적인 대속자를 보내주었다. 이것은 실로 놀라운 사랑의 계획이다. 이에 의해서 파기된 율법은 정당성이 인정될 것이며, 또한 신적 통치가 추구하는 모든 위대한 목적들이 죄를 지은 사람에게 형벌을 주지 않고서도 이루어질 것이다. 한편 심판은 범죄자가 구원의 선물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곧 죄 사면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가 밝혀질 때까지 유보된다. 그러나 죄를 지은 사람 자신이나 그의 대속자는 상응하는 죄의 값을 치러야 한다(11:49-52). 본명하게도 많은 형벌적 고통은 피할 수 있다.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 이 법에 대한 또 다른 조절이 있으니, 자비까지도 공의를 위태롭게 하지 않도록 법이 집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죄를 용서받은 죄인이 때때로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법적인 형벌을 부분적으로 받아야 하는 것은 차별이 없는 느슨함 때문에 범죄에 대하여 프리미엄이 부여되지 않기 위해서이다. 영원한 형벌은 폐지되었으나. 일시적 형벌은 남아있다. 다윗이 자신이 지은 큰 죄를 고백한 다음에 나단 선지자는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삼하 12:13, 14)라고 말했다. 그리고 왕의 아들이 그의 아버지의 첩들과 더불어 왕보다 더 못된 범죄를 저지르게 허용한 것에 대하여, 그리고 공적인 방식에서 또 다른 형벌이 이 공적 범죄에 대하여 가해졌다. 다윗을 최종 정죄에 이르게 하지 않은 하나님의 죄 용서에도 불구하고, 죄인을 자비롭게 다루시는 하나님이 또한 정의롭고 의로운 재판관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가르치신다.

그러한 고통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신적 통치의 완전함을 자랑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러한 완전함 때문에 나 자신이 고통을 받는다면, 보다 큰 도덕적 우주의 이익을 위해서 내 자신의 고통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반면에 나는 세상의 죄를 짊어지신 하나님의 어린 양에 대한 믿음 때문에, 나를 위하여 영원한 심판을 완전히 제거해 주신 무한한 은혜에 잠기게 된다. 하나님이 공의로우면서 또한 그를 믿는 자를 의롭게 하시는 것과 같은 그러한 자비의 계획을 은혜가 마련한 것은 보복적인 형벌의 어두운 그림자에서 구조되는 것 이상임이 확실하다. 심판의 목적은 갈보리의 희생에서 모두 충족되었다. 하나님의 법은 높이 들어 올려졌고, 그의 통치는 정당화되었으며, 하나님의 성품은 죄를 혐오하시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었고, 죄를 지은 사람들은 개혁되었으며, 다른 사람들이 이 세계의 다른 영역에서 비슷한 죄를 짓지 않도록 방지된 것이다.

 

3. 하지만 다른 종류의 고통은 순전히 아버지로서 가하는, 징계하기위한, 잘못을 고치기 위한 고통이다.

 

그것은 가능한 부드러운 조치로 우리가 저지른 잘못을 고치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불쾌가 아니라, 사랑의 표시이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12:6)

이 방법의 적용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죄인에게는 회개하게 하는 것이고, 둘째, 성도들에게는 정화시키고, 순수하게 하며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범죄자에게 희망이 있는 한, 자비는 심판을 유예시킨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이 겪은 오랜 고통을 당하도록 징벌하여 참된 회개와 새로운 삶을 살도록 이끄신다. 더구나 그들이 믿음으로 그의 자녀가 될 때, 하나님은 여전히 교정의 지팡이로 그들을 훈련하여 거룩함과 하나님의 뜻에 쓰임 받도록 놀라운 성취를 이루게 한다.

그러한 훈련을 위한 고통을 벗어나거나 피하려는 것은 그것에 의해서 끊임없는 자기 점검을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난을 당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 자기 점검은 또한 하나님이 제거하려고 하시는 허물과 어리석음을 고치게 한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1, 32) 여기에 매우 중요한 원리가 제시 된다: 많은 신적 징계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진지한 자기 판단이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결과가 너무 가치가 있어서 고난이 없이는 그것들은 얻을 수 없다. 이것은 오직 불만이 은과 금에서 불순물을 제거할 수 있는 것과 같다.

피레네 산맥에 재난이 될 만한 대 화재 사건이 일어나 포도원을 파괴하고 그 지역 사람들을 급박하게 위협하였으나, 그 모든 손실을 보상하고도 남을 만한 은광이 발견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재난과 같이 보이는 많은 일들이 새로운 경험의 광맥과 하나님과의 교제로 밝혀진다. 슬픔을 당한 성도라 할지라도 위안의 광산과 하나님 안에서 보상을 발견하였다면,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위안으로 남들을 위로할 수 있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러한 깊은 경험이 다른 사람들을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풍성하게 하는 수단이 되었다.

우리의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다.”그러나 죄인들이 이 소멸하는 불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두려워하는데 반하여, 성도는 즐거워한다. 그것은 그 불이 그가 영원히 제거하고 싶어 하는 것을 태우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집 청소의 과정에서 배우게 되는 것은 어떤 쓰레기 더미는 불에 때워지기까지는 결코 처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빗자루가 그것들을 구석에 쓸어내지만, 다시 흩어지게 될 뿐이다. 불이 아니고는 그것들을 최종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소멸하는 불만이 제거할 수 있는 쓰레기가 우리의 삶 가운데 있다. 진정으로 마음을 청소하려면 값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따라서 신적 훈련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신실한 아버지의 손에 자신을 맡기는 사람은 복되다.

 

4.지금까지 말한 것은 우리가 네 번째 형태의 고통을 살펴보게 하는 준비이다.

이것은 준비시키는 교육적인 고통이다. 곧 하나님과 더욱 밀접하게 교제하고, 하나님의 계시나 하나님을 위해 섬김의 일을 하기에 적합하게 하는 것이다. 어두운 불신앙의 밤뒤에 오는 새벽과 같이, 어떤 고통의 경험은 영적 고양의 시간이다. “밤이 점점 어두워지면 예언의 별들이 나온다.”고 페이톤 대통령이 말하였는데, 이것은 좋은 말이다.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그의 성도들을 거룩함에서 완전하게 하고자 하시기 때문에 정제의 불이 가지는 가치를 아신다. 가장 값나는 금속일수록 그 시금자가 애를 쓰면서 그것들이 높은 열을 받게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높은 열을 가진 불만이 그 금속을 녹이고, 녹은 금속만이 혼합물이 빠져나가고 주형(금형)에서 완전하게 새로운 형태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노련한 정제자는 지나치게 높은 열이 생겨서 그 금속을 못 쓰게 하지 않기 위해 도가니를 결코 떠나지 않고 그 옆에 앉는다. 그리고 표면에 있는 마지막 찌꺼기를 걷어내면서 자신의 얼굴이 반사되는지를 확인하자마자 그는 그 불을 끈다.

우리는 구속자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을 것이다.”(3:3)라는 매우 아름다운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려고 결심하고 자신의 귀한 금속을 도가니에 집어넣으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옆에 앉아서 그것을 지켜보신다. 하나의 불필요한 고통도 하나님은 허용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것에 붙어 있는 찌꺼기가 배출되어 하나님의 모습이 투영되는 지를 보자마자 시련은 끝이 난다.

특별히 하나님의 목적은 불순물을 제거하는 것뿐만 아니라, 값비싼 금속의 특성이 가진 모든 가능성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노력하여 이루는 것 가운데 다른 모든 것을 능가하는 세 가지 은혜가 있다. 인내, 겸손, 이기적이지 않음 혹은 사랑이다. 이 모든 것들은 고통을 통하여 발전하게 된다.

분명하게도, 인내는 시련이 가져오는 직접적인 열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견디는 작용이고, 참아야 할 어떤 것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혀 고통을 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고통을 인내할 수 있는가? 인내는 우리 주님의 정원에 있는 밤에 피는 선인장이다. 이 꽃은 역경 가운데 활짝 피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시련이 크면 클수록 더욱 더 아름다워진다.

겸손은 낮은 단계의 은혜이며, 일반적으로 교만과 자기만족을 하찮게 여기는 경험을 뜻한다. 이것은 통상적으로 패배와 낙심에서 비롯된다. 사람은 자신의 깃털을 나타내 보이는 수컷 공작새처럼 뽐내며 걷기를 좋아한다. 그는 자신에게 자랑할 것이 있다고 상상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은 먼저 겸손해져야만 겸손하게 되는 것을 배운다. 우리가 세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우리가 의도하던 바가 실패로 돌아가며, 우리가 가진 자신감을 잃어버려 우리 자신이 무력해 졌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참된 자세로 겸손을 배운다.

어떤 호상이 말하기를, 성공적인 상인이 가져야 할 가장 위대한 자질은 자신이 본 손해를 인정하고 그것들을 다루어 가는 방법을 아는 것이라 하였다. 제자에게 자기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패배와 실패에서 성공을 기획하는 것보다 더욱 가치 있는 성취는 거의 없다. 자신의 한계에 이를 때에라야 우리는 하나님의 시작에 이를 수 있다! 사람이 쓴 자서전은 일반적으로 한 사람의 성공을 높인다. 하지만 하나님이 성서에서 자서전을 쓰실 때, 하나님은 그의 성도들이 어떻게 욥의 경우에서처럼 실패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신다. 찬양은 교만을 키우는데 반하여, 책망은 겸손에 이르게 하며, 고통은 보통 겸손한 영의 전조이다.

도대체 누가 시련 없이 비이기적인 사랑에 대한 교훈을 배울 수 있는가! 슬픔을 겪어보지 않고서 누가 다른 사람을 동정할 수 있는가! 자신이 소멸되는 환난의 풀무에서 비로소 우리는 다른 사람이 겪고 있는 환난을 동정할 수 있는 법을 배운다. 가난을 통해서 우리는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을 배운다. 사랑하는 사람을 여의어 보아야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여윈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다.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은 다름 아닌 비이기적 수확의 씨이다.

우리의 구원의 위대한 선장마저도 고난을 통하여 완전해 지셨고”, “자신이 겪은 것들에 의해서 순종을 배우셨다.” 만약 완전한 인간이신 그분마저도 고난을 인내함으로써 지도자로서의 일을 하기 위한 자격을 완전하게 갖추셨다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비슷한 결과에 이르기 위해 마지못해 비슷한 훈련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호와드 포프목사는 상당한 곤경을 당한 기독교인 대장장이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사람은 한 불신자로부터 어째서 그러한 곤경을 당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듣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이러한 일들에 대해 당신이 만족할 수 있을 정도로 설명할 수 있을지에 대해 잘 모르겠으나, 내 자신에게는 만족할 만한 설명을 할 수 있다. 나는 대장장이다. 나는 자주 철 한 조각을 집어 불에다 넣고 그것을 백열에 가져간다. 다음에 나는 그것을 두들기는 대에 올려놓고, 그것이 담금질이 되는지를 살피기 위해서 한두 번 그것을 두드린다. 조직이 형성될 것이라 생각되면, 나는 그것을 물에 처넣어 갑자기 그것의 온도를 바꾼다. 이어서 나는 그것을 다시 불에 집어넣었다가 다시 물에 처넣는다. 이러한 과정을 두세 번 반복한다. 그리고 난 다음에, 나는 그것을 두들기는 대에 올려놓고 그것을 망치로 두들기고, 구부리며, 문지르고, 줄질을 한다. 그러면 그것은 운반차에 실을 유용한 물품이 된다. 그곳에서 그것은 25년간 잘 쓰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내가 그것을 두들기는 대에 올려놓고 처음으로 두들길 때, 그것이 조직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면, 나는 그것을 파철 더미에 집어던져 버린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무게 1파운드당 1/2페니에 판다.”

나는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내가 조직이 형성될 것인지를 보시기 위해 나를 시험하고 계신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나를 불속에도 물속에도 집어넣으셨다. 나는 최선을 다해 느긋이 그것을 참아왔다. 그리고 나의 매일의 기도는 이러하였다. ‘주님, 당신이 뜻하신다면 나를 불에 집어넣어 주소서: 나를 물에 집어넣어 주소서, 당신 생각에 그것이 나에게 필요하다면: 오 주님, 당신이 기쁘시게 여기는 것이면 어떤 일이든 행하옵소서: 다만, 제발 나를 고철 더미에 던져 넣지 마소서!”

하나님은 성도들이 받을 하나님의 유업이 갖는 영광의 풍성함에 매우 높은 가치를 두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유업을 완전하게 하기 위하여 그의 성도들이 슬픔이나 고통을 당하게 하신다. 이것은 마치 토지를 소유한 사람이 그의 유산인 토지를 아름답게 하기 위해 그의 땅에 쟁기질을 하고 그의 집을 부수는 것과 같다.

고통은 언제나 사법적이거나 유기적인 형벌은 아니다. 그것은 흔히 성격을 순수하게 하고, 아름답게 하며, 영화롭게 하는 그 자체의 목적이 있다. 성서에서는 모든 비유의 양식이 슬픔에 관한 이러한 신적 관념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우리가 고통을 마치 신적 사랑이 아니라 신적 진노의 표현인 것처럼 생각한다면, 우리는 반은 이교도이다.

슬픔을 당한 하나님의 성도들이 시련의 가지들로부터 얼마나 놀라운 위로를 끌어낼 수 있는가! 그 슬픔의 징계에 의해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순수하게 하고 완전하게 하고 계신다고 느끼기만 한다면 말이다. 로트 선장은 적은 맞바람은 좋은 것이고, 발전해 가는데 도움이 되며, 용광로의 불을 강하게 한다!”고 말하곤 한다.

우리가 알아본 바와 같이, 성장하는 데 필요한 덕과 은혜가 슬픔에 의해 결정되기도 한다. 우리가 세속적이지 않게 되는 것은 일시적이고 없어질 수밖에 없는 것들을 단념하게 하는 과정에 의해서만 배울 수 있다. 만약 포도주를 한 용기에서 다른 용기로 붓지 않으면, 그것은 앙금으로 가라앉을 것이고, 그것이 포도주의 맛이 될 것이다. 희망의 닻이 강풍에서 우리를 붙들어 주는 것으로 검증될 때에만 우리는 희망을 확신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위로를 받을 때까지는 어떻게 남들을 위로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게 될 것인가!

제지 공장에서, 한 쪽의 깨끗하지 못한 넝마 무더기와 다른 한 쪽의 불순물 없고 더럽지 않은 흰 종이는 서로 얼마나 잘 대조를 이루는가! 이 넝마는 이와 같이 새로운 형태로 나타나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어야 하는가! 갈가리 찢어서 펄프가 되기까지 잘게 갈리며, 모 든 얼룩이 제거되기까지 표백분으로 표백한다. 그리고 염소와 황산알루미늄 작용에 의해서 한 번 더 표백 처리를 한다. 매끄럽게 된 펄프나 재료가 크림이나 눈송이처럼 희게 될 때까지 다시 씻어낸다. 그 후 철사로 된 원통형에 집어넣고, 섬유 조직을 엇갈리게 하고, 그 섬유 조직이 빽빽하고 견고하게 되도록 포드라이너 과정으로 심하게 흔든다. 그런 다음 뜨거운 표면 사이를 거쳐 지나가게 해서 종이가 매끈하고 균일하게 만든다.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하시는 것이 이것과 얼마나 비슷한가! 이 방법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더러움을 씻어내 버리시니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당하는 환난이 이것과 얼마나 유사한가!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어린양의 피에서 우리의 옷을 빨고 희게 하였으니 말이다.

기념비적 도기를 준비할 때는 많은 것이 용광로의 불에 의해 결정된다. 도시에채색한 것들은 열에 의해서 색깔의 특성과 특질이 나타나게 될 때까지는 비교적 혐오감을 자아낼 만 하다. 도기에 칠할 때 사용된 물질은 유리에 융해되어야 하고, 용광로에서 부드럽게 되어야 하며, 열에서 녹아내려서 용기 자체의 물질이 되거나 그것과 하나로 결합되어야 한다. 또한 그 도기는 너무 일찍 식게 해서는 안 된다. 너무 일찍 식게 하면, 그것에 들인 수고가 헛될 수 있다. 경험이 있고 난 이후에도 칙칙한 표면은 문질러서 빛이 나고 광채가 나도록 해야 한다!

아직까지 얼마나 많은 야곱이 슬픔을 당하여 소리치고 있는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이 모든 일들이 나에게 불리하다!” 라고 말이다. 얼마나 많은 라헬들이 자신들의 어린 자식들의 무덤을 바라보고 울면서 위로받기를 거절하는가! 왜냐하면 그들은 위로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의 기쁨과 일시적 이익이 파선된 것 같아 보이는 상황에서, 그 답답함에서부터 믿음, 소망, 사랑, 이내라고 하는 네 개의 복된 닻을 던지고 나서, “그날에 대한 소원을 기다리는 사람은 복되다!

슬퍼하는 성도들이여, 머리를 들자! 환난 가운데 영광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떠한 연단이란 말인가?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승인을 받는 것이다. 신적 시금자가 값진 금속을 정제한 다음, 그것에 합격이라는 표를 한 검인. 우리 주님은 금속을 버릴 때, 그것에 유기라는 도장을 찍으신다. 주님은 그것의 불순물을 제거하여 그것이 자신의 얼굴을 반사시키면, 그것에 합격이라는 도장을 찍으신다. 그러한 연단은 부끄럽지 않게 하는 소망을 줄 준비를 하며, 또한 우리 마음에 그의 사랑을 널리 쏟아 부어주실 준비를 한다. 그런데 그의 사랑은 다른 모든 것을 능가하는 것으로서, 천국의 전조가 되고, 그것을 미리 맛보게 하는 것이며, 이해할 수 없는 평안이다.

 

그렇게, 슬픔은 용광로의 불이고

마무리공의 비누이자 눈물의 골짜기이다.

하지만 슬픔은 내 깊은 갈망을 이루게 하나니

내 영혼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난다!

 

5. 또다른 종류의 고통이 있으니 그것은 자발적이고 대속적인 고통이다.

그것은 피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와 깊은 교제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피한다. 이 고통은 우리가 주님과 아주 친밀한 교제를 하고, 사람들을 한껏 섬기기 위한 목적으로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주님은 아픔과 부끄러움의 십자가를 지실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그 십자가를 내려놓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죄는 아주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필요로 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이 자신을 비우는 희생을 지불해야만 확보될 수 있었다.

에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와 비슷한 자발적 자기희생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성서 구절들이 많이 있다. 그 사람은 그 희생을 피할 수 있으며, 여전히 자신의 구원을 박탈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주님과 친밀한 연합과 사귐과 사람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봉사를 잃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16;24) 이것은 우리가 만일 성서의 문맥과 일반적 기르침을 모두 믿을 수 있다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섬김의 조건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 이른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주님을 따라가기 위한 조건이다. 그것은 주님을 따르는 길, 곧 주님이 하신 것과 같이 우리가 행하고, 주님이 짊어지셨던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이다. 이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면 혼란을 초래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는 영생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그 간단하고 유일한 행위로 구원을 받았다고 반복하여 확실하게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생을 받는 것을 어떤 선한 행위나 영웅적 자기 부인에 의존하는 것은 율법주의로 은혜를 모호하게 하는 것이다. 이곳에서 가르치는 교훈은 만일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를 가깝게 따르기를 갈망한다면, 주님의 영광과 동시에 부끄러움의 표인 자기 부인의 십자가를 자발적으로 떠맡지 않고서는 그러한 일관된 제자로서의 삶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대관식의 문제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것은 왕관을 얻기 위한 유일한 길로서 십자가를 자발적으로 떠맡는 문제이다. 이와 비슷한 교훈을 요한복음 1224-31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밀알을 곡간에 쌓아두어 보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것은 그대로 머물러 있을것이다. 수확을 내는 조건은 그것을 땅에 묻는 것이다. 수확을 할 때까지 살아있으려면, 그것은 한 알의 씨로서 반드시 죽어야 한다.

이와 비슷한 성서의 가르침을 수없이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들 모두 똑같은 본질적 교훈을 주고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자발적으로 떠맡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희생하는 대속 사역에서 그와 연합하는 것이다.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그가 유일한 바탕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 위에 세워진 건축물이 가치가 없고, 나무나 건초나 그루터기와 같이 지속적이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 일이 지속되고 보상을 받으려면, 그것은 주님의 일처럼 되어야 한다. 우리는 영문 밖으로 가서 그의 치욕을 참아내도록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13:13). 우리는 세 개의 커다란 적들, 곧 세상, , 사탄을 불가피하게 적대하기로 동의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세상에 속하면, 세상이 그 자신의 것을 사랑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주님이 살았던 것과 같이 구별된 삶을 살면, 세상은 주님에게 했던 것처럼 우리를 미워할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육을 따르든지, 아니면 그것을 거부하고 영적인 것에 순복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사탄을 거부하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있다.

여기에 우리가 살펴 볼 가치가 있는 진리의 또 다른 영역이 있다. 영혼은 구원 받을 수 있으나 생명을 잃어버릴 수 있다. 하늘나라는 들어갈 수 있으나 상급이 전혀 없을 수도 있다. 피로 구속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면류관을 쓰지 못할지도 모른다. 영광 가운데 고통 받는 구주와 가장 동일시되는 면류관은 그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는 사람들을 위해서 따로 마련되어 있을 것이다(1:24).

이것은 분명하게 이해되기보다는 흔히 간과되는 구별이다. 신약 성서는 매우 분명하게 선물과 보상을 구별한다. 구원은 언제나 값없이 주는 선물로 나타나 있다. 여기에는 그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 이외의 어떤 조건도 없다. 받아들이는 것이 그 선물에 부가된 유일한 조건이다. 그러나 구원 받은 사람들이 행하는 일들이 있다. 이 일은 인정을 받고 보상을 받는다. 따라서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생수를 주신다는 놀라운 가르침을 주고 있는 요한복음의 장은 또한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라고 가르친다(4:10, `3, 36). 일을 피하는 것은 구원의 선물을 잃는 행위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섬김의 삯을 박탈당한다.

그러므로 반복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섬김의 일을 위한 고통은 우리에게 강요된 것이 아니고 우리가 떠맡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과의 교제로 자발적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이것이야 말로 그것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요 아름다움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고통을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그것은 강제적이거나 의무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에 따른 헌신이어야 한다. 값없이 베푼 구원에 대한 감사와 구주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이 희생을 감당하려고 선택하는 것은 로마 가톨릭교도처럼 구원을 확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주님과 우리 자신을 더욱 밀접하게 동일시하고자 하기 위함이며, 주님의 승리와 그가 받은 고난이 준 만족을 앞당기기 위한목적에서이다. 우리는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죽기로 마음을 정한다. 고통을 받아들이는 주된 동기는 우리의 안전이 아니라, 열매를 맺고자 함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세상에서 잊혀지는 것이므로,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려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것에 따르는 보상은 놀라운 것이며, “그날에비로소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6. 고통이 가진 측면 가운데 한 가지 더 살필 필요가 있다. 이것은 우리가 허용적이고 변호적인 고통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것에 관하여 영감 받은 책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에 대해서는 특별히 욥기에 밝혀져 있다. 그 놀라운 서사시는 신정론 혹은 신적 통치의 정당화이며, 그러한 것으로 보아야만 바르게 읽혀질 수 있다. 그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의 정의가 완전히 의로운 사람의 증대된 고통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심판대 앞에서 심문을 받는 존재는 실제로 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이다.

욥이라는 이름은 독특하다: “반대자혹은 이란 말과 같은 어근에서 비롯된 이 이름은 반대자에 의해 공격당하거나 핍박을 받는 사람을 뜻한다. 그러므로 바로 그 이름이 욥기를 아는 관건이 된다. 서막에서 세 사람이 활동 무대를 차지한다. , 사탄,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욥기의 저자이고, 이 우주에서 선을 행한 것을 재판하고 보상하는 분으로 하늘의 회합에 앞서 욥의 의로움에 대해 만족하다고 선언하신다. 시험을 통과하지 않은 모든 덕과 비이기적 모든 경건을 부인하는 적대자 사탄은 그의 종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에 도전한다. 하지만 그의 외적 행동을 비난할 아무런 근거도 찾지 못하자, 그의 내적 동기를 공격한다.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가?” 사탄은 과감하게 만일 욥이 하는 선한 행동에 따르는 모든 일시적 보상을 제거하면, 그의 덕은 쉽게 비난받아야 할 것으로 드러나고야 말 것이라고 제안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외적 번창이 유혹을 막는 울타리였다는 것이다.

사려 깊은 학생은 이러한 공격이 실제로는 하나님 자신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장 선한 사람이 하나님이 주시는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되어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러한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거나, 아니면 그러한 사랑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는 것을 빗대어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장주에게 노동자에게 줄 임금이 없다면 그에게 어떠한 존경도 표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아버지에게 그의 가족이 그를 버리지 않는 것은 오직 음식과 옷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업주나 양친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심이 없는 사랑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가장 높은 수준의 덕이 모자란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욥이 얻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참된 경건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탄의 미움은 이상적인 하나님의 사람이 단지 돈을 욕심내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하게 만든다. 이것은 하나님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비난하는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고데트가 말한 것과 같이 누구든 사랑을 받고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영예로울 수 없기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공격이 욥기를 설명해 준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이 종을 공격하고, 그의 울타리를 쓸어버리며, 그가 가지고 있는 재산, 가족,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자신까지 치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하나님이 받아야 할 영예를 변호하신다. 부유한 사람이 갑자기 거지가 되고, 아버지가 아이를 잃어버리게 되며, 승리에 찬 사람이 가련하게도 문둥병에 걸리게 되었다. 이 문둥병은 당시에 병이 주는 무서움 외에도 죽음과 하나님의 심판을 생생하게 비유하는 것이었다. 아내의 믿음까지도 재로 변하지만, 욥은 여전히 하나님을 굳건히 붙잡았다.

이어서 욥이 당하는 마지막 형태의 공격이 시작된다. 그의 세 친구가 자신에게 돌아서고, 실제적으로 욥의 부인과 사탄의 편을 든다. 그들은 하나님이 공의롭고 덕과 악을 의롭게 보응하시기 때문에, 욥이 당하는 엄청나고 증대된 시련은 은밀한 죄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에게 죄를 고백하도록 재촉한다. 그들은 보응의 하나님이 악한 행위에 대해 보응하시고 매우 공정하게 행위들을 재시기 때문에, 너무도 큰 죄에 대해서 그만큼의 큰 슬픔을 당하도록 조정하고 계시다는 것 외에는 그러한 고통의 이유를 푸는 실마리를 찾지 못한다.

욥은 가장 극심한 곤경에 처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주장에 대해 답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성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없자 양심에 호소한다. 그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만일 그가 하나님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면, 그는 자기 자신을 고소해야 한다. 그는 절망가운데서 단지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 비록 그것이 죽음 이후일지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그 자신의 정당성이 밝혀지고 그로 인해 그를 지으신 분의 정당성도 밝혀지게 될 것이라고 믿고서 말이다.

욥기서의 마지막에 이르러 엘리후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외흘러는 이렇게 말한다. “욥에게 분개한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비난함으로 자신을 정당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욥의 친구들에게 격분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욥을 비난함으로 하나님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 불가사의한 일에 대한 부분적 해결책을 제시한다. 고통이란 언제나 보복적이지 않고,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정화적이고 교육적이어서, 잘못을 고치고 일탈된 행동이 죄에 이르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설명이 아니다. 그것은 여화와의 몫으로 남겨둔다. 그분만이 자신의 방식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두 번이나 욥을 압도 하신다: 첫 연설에서 그로 하여금 이 우주의 신비를 설명하게 하고, 둘째 연설에서는 그를 지으신 분보다 더 그것을 다스리도록 도전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의 안목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는 것을 경멸하면서, 욥에게 하나님의 무한한 완전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감추는 신비의 막을 받아들여야 하며, 시련을 당할 때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은 것에 의해서 인내의 승리를 이루어야 한다고 상기시키신다. 비록 불완전하다 할지라도 끝까지 견디어 낸 욥은 이전보다 갑절로 번창하는 영예를 누리게 된다.

이제 우리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고통은 그것이 전혀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하늘의 회의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정당성을 밝히기 위해서 사탄으로부터 공격당하는 것이 허용되었다는 점에서, 또한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손실이 우리가 저지른 죄에 대한 앙갚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변호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우리의 애정과 충성을 받을 수 있고 계속 지켜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하나님을 위하여 고난당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높은 특권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점에서이다.

우리는 고통의 문제를 지금까지 불완전하게나마 살펴 왔는데, 이제 다르게 이해하면 실망하게 될 어두움에서 벗어나게 되는 몇 가지 중요한 원리를 제시함으로써 이 문제를 접는다.

 

.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마지막 계시이다. 오래 전에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은 의, 생명과 빛의 근원, 거룩한 자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요한에게 이르러 마침내 새로운 이름이 주어졌다. 그 이름은 하나님이 사랑받을 만 하거나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라는 것이다. 곧 비이기적 선이 성육신하신 분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루고 있는 분은 너무나 지혜롭기 때문에 판단하실 때 잘못을 저지를 수 없으며, 너무나 선하시기 때문에 악의로 잘못된 행위를 하실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우리 자신을 안전하게 맡길 수 있고, 그의 징계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으며, 하나님이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행하실 때 가장 선한 일만을 기쁘게 행하실 것을 확신할 수 있다.

 

. 시험은 신뢰를 배우는 학교이다. 믿음은 용광로의 불에서 새롭게 정화되고, 단련되며 끈기가 있게 된다. 별이 없는 심야의 칠흙같이 어두운 곳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감추어진 하나님의 손을 굳게 잡는 방법을 배우고, 어떻게 하나님의 손이 우리의 손을 잡는지를 알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을 보시고, 그가 택하시는 길을 아시며, 비록 우리에게 그 길이 돌아가는 길일지라도, 그것은 바른 길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 이르게 한다.

 

.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밤에 부르는 노래이다하는 일이 잘 될 때 찬양하기는 쉽다. 자연스러운 감사가 있으니, 그것은 하나님, 내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니 당신께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비록 방종이 고통을 견디어 내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을 때에도,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은 영적인 감사이다. 복이 넘치는 좋은 계절에만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쉬운 동물적 정신을 흘려 내 보내야 한다. 그러면 당신 자신과 당신이 처해 있는 환경에서 즐거워할 만 한 것이 없다하더라도 기꺼이 하나님 안에서 똑같이 즐거워하겠는가? 당신은 하나님은 나에게 매우 좋게 해 주셨다.”고 말한다. 하지만 당신이 뜻하는 것은 당신이 누리는 번창이다. 욥이 역경을 당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덜 관대하였는가? 당신은 욥처럼 하나님이 주실 때처럼 가져가실 때 하나님을 송축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때때로 주실 때 보다 우리가 사랑하고 갈망하는 것을 보류하거나 철회할 때 우리에게 더욱 주의를 기울이신다. 그러므로 때로는 받는 것이 손실보다 나쁜 것이 된다.

벤자민 슈몰케이의 찬송이 있는데, 그것의 참된 아름다움은 그것을 쓴 상황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다. 이 루터교 목사는 처음에 자신의 교구를 황폐하게 만든 화재 사건으로 고통을 받았고, 이어서 가족이 죽는 바람에 가정이 해체되는 아픔을 겪었으며, 다음으로, 몸이 마비가 되어 앞을 보지 못하고 걸을 수 없는 고통을 당했다. 이와 같이 거듭된 역경을 겪고 난 후에 자신의 침대에서 이 찬송시를 받아쓰게 하였다. 이 시에서 우리는 이탤릭체로 된 줄을 통해서 이 모든 형태의 슬픔에 대한 것을 지적한다. 그 애절함이 얼마나 강렬한가! 하지만 얼마나 영광스러운 승리에 차 있는가!

 

나의 예수님,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 당신의 뜻이 나의 것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사라의 손에

나의 모든 것을 맡깁니다;

슬품을 통해, 혹은 기쁨을 통해,

나를 당신의 것으로 인도 하소서,

그리고 내가 잠잠히 말하게 도와주소서,

나의 주님,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리다!

나의 예수님,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많은 눈물을 통해 보일지라도,

내 희망의 별이

희미해지거나 혹은 사라지게 하지 마소서:

당신이 땅에서 우셨기 때문에,

그리고 종종 홀로 슬퍼하셨기 때문에,

만일 내가 당신과 함께 울어야만 한다면,

나의 주님,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리다.

 

나에 예수님,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나에게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미래 미래의 인생을 바꿀 일 하나 하나를

나는 기쁘게 당신께 맡깁니다:

위에 있는 나의 집으로 곧바로

나는 조용히 계속 나아갑니다.

그리고 살든지 죽든지 노래합니다,

나의 주님,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리다!

 

따라서 성품과 삶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값진 열매는 슬픔의 결과이다. 그 열매는 다름 아닌 가장 높은 거룩함과 가장 고상한 섬김이다. 바울이 가능한 한 많은 환난을 겪고, 그와 같이 두 가지 교훈을 배웠다는 것은 가치가 있다.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가 겪는 환난에서 우리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은 우리가 같은 위로로 남을 위로할 수 있게 준비시키는가(고후 12:4-5).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성공은 하나님과 하나 되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몰두하여 모든 일이 우리에게 불리하게 보일 때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고통의 잠자리에서 지낸 사람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가진 견고성에 대한 교훈을 남겨주었다. “거의 한 해 동안 물통 모양의 천잠나비의 난낭을 돌보고 있었다. 그것은 구조가 매우 특이하다. 플라스크의 목 부위에 하나의 좁다란 구멍이 나 있다. 그 구멍을 통하여 그것에 꼭 맡는 곤충이 억지로 빠져 나간다. 그 결과 버려진 난낭은 여전히 아무런 흠이 없다. 서로 얽혀 있는 섬유조직이 전혀 파손되지 않는다.”

밖으로 나가는 수단과 안에 있는 곤충의 크기는 서로 크게 차이가 나는데, 이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어떻게 밖으로 나가는 것이 가능했을까 하고 의아하게 만든다. 그것은 많은 노력과 어려움이 없이는 결코 불가능하다. 나비의 몸이 그 좁은 구멍으로 지나갈 때 받는 압력은 체액을 날개 관으로 밀어 넣기 위해서 자연적으로 제공되는 것이며, 이것들은 번데기에서 탈출할 때 다른 곤충에게 있는 것보다 덜 발전된다.”

나는 내가 가두어 놓은 나방이 오랫동안 감금된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애쓰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 거의 오전 내내 나는 그것이 아름을 무릅쓰고 갖은 애를 쓰면서 밖으로 나오려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결코 그 단계를 넘어갈 수 있는 능력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마침내 나의 인내력이 다하게 되었다. 나는 그것을 지으신 분보다 더욱 지혜롭고 그것을 더욱 아끼는 마음으로 그것을 돕기로 작정하였다.”

나는 가위 끝으로 묶어둔 실들을 싹둑 잘라서 그 출구가 아주 조금 쉽게 하였다. 그런데 저런! 내가 가지고 있던 그 나비는 아주 쉽게 기어 나와서는, 부어오른 몸과 무력해진 날개들을 질질 끌고 갔다. 나는 그 날개들이 우리가 보는 앞에서 조용하고 재빠르게 발전해 가는 굉장한 확대의 과정을 함부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 축소판으로 모두 가지고 있는 그 다양한 색깔들이 있는 곳과 그것들이 이루는 모습을 살펴보면서, 이 모든 것들이 마땅히 차지할 몫을 이루고 있고, 피조물은 그것이 실제로 그 종류대로 가장 사랑할 만한 가치를 가진 것이듯이,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기 원했다

그러나 나는 허망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나의 잘못된 자상함이 그것을 망치게 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짧은 생애동안 고통스럽게 기어 다니는, 성장을 멈춘 낙태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그 시간을 무지개 빛 날개로 공중을 날아다니는데 보내야 했다.”

내가 그날 깨달은 교훈은 나에게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것은 내가 독일 사람들이 맹렬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을 깨닫도록 도와주었다. 슬픔과 고통과 좌절을 이기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측은하게 바라보면서, 정말 내가 하나님보다 더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내가 기꺼이 그들이 받는 징계를 줄여주고 그것에서 벗어나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시안적 바보!- 나는 그러한 아픔들과 탄식들 중 하나를 겪지 않게 될지 어떻게 아는가? 멀리 보시는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은 그 대상의 온전함을 추구하기 때문에 현재의 일시적 고통을 속절없이 파하지 않는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너무도 참된 것이기 때문에 약하지 않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훈련시키신다. 그것은 자녀들이 하나님의 거룩함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녀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아끼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고난을 통하여 완전해지셨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순종에 이르도록 훈련을 받고 많은 환난을 통해서영광으로 인도된다.

 

. 고통은 때때로 최고의 특권이다. 제자에게 자기중심적인 삶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다. 우리가 가진 위험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아끼는 데에 있다. 마귀는 언제나 우리에게 자신을 아끼라고 말하는 반면에,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자신을 부인하도록 명하신다. 아마도 이 고통의 삶에 관한 계시에 뒤이어 곧 바로 일어난 예수님의 변화 산 사건이 뜻하는 것은 자발적인 자기 비움의 복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만약 그가 선택하였다면, 주님은 변화 산 정상에서 곧바로 영광 가운데로, 그가 하늘에 거하시는 곳, 곧 참된 탐지할 수 있는 산돌로 올라갔을지도 모른다. 베드로가 장막 셋을 짓겠다고 제안 한 것은 제 정신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말하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만약 주님이 영광 가운데 거하기를 선택하셨다면, 이 세상은 죄와 슬픔에 버려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놀랄만한 영광에서 내려와 십자가의 수치를 당하셨다: 그와 같이 그는 제자들에게 즉위식을 연기하고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일 것을 가르쳤다.

우리는 죄를 구속할 수 없다. 하지만 인류의 죄를 구속하시는 주님의 전신을 나누어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주님처럼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고난 받을 수 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주님은 말씀 하신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22:28-30).

시에나 캐더린이 손을 벌리고 아픔을 무릅쓴 중보 기도를 하면서 간청하였다: “사랑하는 주님, 당신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겠다고 저에게 약속하여 주소서! , 당신께서 그리하시겠다는 증거를 나에게 보여 주소서!” 그 때 주님이 그녀의 쭉 편 손을 꼭 잡는 것 같았다. 그녀는 마치 못이 그녀 자신의 손바닥을 꿰뚫고 지나갔던 것처럼 살을 에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우리 가운데 누가 영혼 구원을 위해 주님이 겪으셨던 아픔을 기꺼이 나누어 가지려 하는가! 우리가 그러한 고통을 느끼고, 어느 정도 주님의 고난을 나누어 갖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면, 사람들을 이끌어 구원할 능력이 있다!

이 외에도 여기에 커다란 수수께끼를 풀 또 다른 해결책이 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이끌 수 없다. 그는 단지 좌절에 이르게 하는 혼란의 구덩이에 함께 빠질 뿐이다. 그러나 성서의 인도를 따르는 사람은 이 고통의 문제들이라고 하는 어두운 방으로 비치는 거룩한 빛을 발견하게 된다.

 

 

 

 

 

 

 

 

 

 

 

                                                                                                                                       주후 20110702일 오후1142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