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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료·논문

[스크랩] 고펠트의 신약신학

by 해찬솔의 신학 2011. 4. 15.

 

 

                                                          고펠트의 신약신학

 

 

                                                                                                                                                            김한영 박사

 

  1) 고펠트는 철저한 역사 비평적 방법만 사용하지만 복음서 전승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과 행위의 진정성과 관련하여 원칙적으로 훨씬 더 회의적이었다. 그는 주어진 전승이 진정한 것으로 입증될 때까지는 비진정한 것으로 생각하는 불트만식의 주먹구구식 추정을 좋아하지 않았고 주로 그 반대의 입장을 취했지만, 예수 전승의 신빙성에 관한 전제가 전체로서의 예수의 사역과 복음 선포 속에서의 그것의 실질적인 의미라는 더 큰 신학적 문제들로 통합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공허한 결론이라고 생각하였다.

2) 그는 흔히 신학적 우파의 단순한 보수주의자로 자처하고 일반적으로 구원사학파와 관련되지만(Von Hoffmann. T. Zahn. A. Schlatter. J.Schniewind. O. Cullmann) 독자성(신학적 무인도)을 유지하고 있다.

3) 예수의 부활이 그의 사고에서 중심을 차지한다.

4) 그는 오늘날의 세계에서의 기독교인의 삶이라는 실제적인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갖고 활동한 교회의 사람, 대화의 사람이었다.

 

[서문]

1) 신약신학의 목표는 신약의 개개 저작들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예수의 사역 또는 가장 초기의 교회에서의 선포와 가르침에 관한 서로 관련된 모습들을 주제별로 수집하여 정리하는 것이다.

2) 신약신학은 주석을 통한 신학적 결론들을 수집할 뿐만 아니라 주석을 촉진시키고 주석을 가능케 하는 개관 또는 전체적인 안목을 제공해 준다.

3) 신약과 오늘날의 사람들이 서로 진지하게 대화하는데, 특히 주석학과 조직 신학간에 있어야 한다.

 

1 부 예수의 사역과 그 신학적 의의

 

1 장 역사적, 신학적 위치의 정립

1. 신약 신학의 출발점에 대한 문제

1) 성경 주해의 답변

(1) 교회가 부활절 케리그마를 토대로 세워졌고 지탱되었다는 것은 바울이 최초로 확실하게 말한 것이 (고전 15:1-55; 언어적 특징들이 아람어로 된 원형으로부터 유래했음을 보여 준다. 그 원형은 두번째 전승들 안에 닻을 내리고 있었다. 두 전승의 차이는 사도행전이 선교 목적의 케리그마였고 고린도전서가 교리학습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2) 수난 설화를 전혀 담고있지 않은 어록 자료는, 부활절의 빛 안에서 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장래에 오실 인자 / 세상의 심판자의 말씀으로서의 예수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살았던 어떤 회중을 전제한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설은 1> 바울 서신들에서 팔레스타인 기독교와 헬라 기독교의 회중들 사이에 그러한 결정적 차이를 갖고 있다는 지표를 읽을 수 없다는 점,2> 어록 자료가 마가 전승과 경쟁적인 독립적 예수 전승으로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않았다고 가정함--이 두가지로서 반박된다. 초기 기독교 전승들에 따라 부활절 케리그마만이 기독교 회중의 창립 및 예수 사역의 계승에 책임이 있었고, 이것이 신약 신학의 출발점이다.

(3) 바울 서신은 예수의 사역으로부터 나온 말씀들에 대해서는 드물게 산발적으로만 언급하고 있지만, 부활절 케리그마를 포함하고 있으며 예수 전승 자체는 선교 또는 교리 학습을 위한 선포의 직접적 내용은 아니었지만, 그 토대를 구성하고 있다.

(4) 교회 회중과 기독교 선교라는 상황 아래서 예수 전승이 종합적이고 설득력 있는 것이 되려면 부활절 케리그마는 두 방향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1> 부활절 케리그마는 지상적 예수의 견지에서 회고적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복음 전승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수의 지상사역과 케리그마를 통합함으로써 전자가 후자를 받쳐 주는 토대가 되게 한다는 것이다. 바울 이후 시대에서 이러한 복음서들은 바울의 복음을 대체하는 것은 아니지만 케리그마를 위한 토대로서의 기능을 우선적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2> 케리그마를 회중의 상황에 맟추는 것이 필요하다.

이로써 부활절 케리그마에 대한 상세한 해석이 신약 신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지만, 신약 신학을 그 내재적 구조에 맞추어 서술하려면 지상적 예수의 문제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순전히 역사적인예수상은 알 수 없으며 이는 대수롭지 않은 문제이다.(고후 5:16) 신약 신학은 예수가 지상의 생애동안 제자들에게 자신을 어떻게 나타내었는가 하는 것을 묻는다. 더욱이 역사적으로 계속해서 사역하신 분은 바로 이러한 예수인 것이다. 하지만 성경 주해의 측면에서 확인한 모든 것은 우리가 순전히 역사적 인식이라는 안경을 쓸 때 근본적으로 의문 투성이가 된다.

2) 역사적 문제점

F.C.Bauer는 역사적 발전-기독교의 출현-을 이적<부활, 십자가에 못박힌 개인의 승리>에서 이끌어 내는 것을 역사적 이성에 배치된다고 하였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단지 두 가지 사항-예수의 역사적 활동; 제자들의 부활절 신앙-만을 고찰할 수 있는데, 이 둘은 시계추처럼 그 강조점이 진동하였다.

(1) 합리주의와 자유주의(종교 사학파도 가담)는 그 출발점을 역사적 예수에서 찾았다.

J. Weiss; W.Bousset; H.Braun --신화적 사고 분리 주장

(2) BultmannBauer는 위의 견해를 역사적 허구로 규정하였다. 역사적 출발점은 부활절 신앙이다. 부활절 신앙과 기독론은 단순히 지상적 예수를 신화적으로 변용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 속에서는 지상적 예수의 삶에서 오직 이 발달의 형태로만 작용했던 한 차원의 모습(Bauer--기독교의 종교적 관념; Bultmann--결단으로서의 하나님의 종말론적 부르심)을 드러낸다. 바울은 이러한 요소를 신학적으로 해석 발전시켰다. --바울 신학의 중요성

(3) 1960년경 Bultmann의 제자들조차도 이러한 결단으로의 종말론적 부르심이 전 세계적인 신자

공동체를 탄생시키는 것이 진정 가능했느냐 하는 의문을 제기하였다. 어떤 이들은 회중의 신앙고백 혹은 신앙에 대한 이해가 출발점이라 생각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지상적 예수의 말씀들을 케리그마의 근거이자 시금석이라 하는등, 역사적 문제점은 논의가 되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예수가 자기 스스로 되고 싶어 했던 그런 분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될까?

3) 예수의 계속된 사역에 대한 유비들

몇몇 유사한 유비들은 부활절 케리그마가 예수 당시의 유대적 환경 속에서 전혀 전례가 없었다는 점을 분명히 해준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지상 사역이 실제로 부활절 케리그마의 본질적 토대인가 하는 점이다. 예수의 사역은 그 본질적 구조의 견지에서 볼 때 수난과 부활로 이어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가 신약 신학을 서술할 때 예수의 사역과 생애로부터 시작하는 것의 적절성이 밑받침된다고 하겠다.

2. 자료들

부활절 케리그마의 관점에서 쓰여진 자료들로부터 부활절 케리그마 이전의 예수의 사역에 대한 믿을만한 묘사를 얻어내는 것이 가능할까?

1) 공관복음서

(1) 공관복음서 자료들에 대한 문헌 비평적 연구는 두 자료 가설(마가복음과 유사한 어떤 복음서, 마가에는 없고 마태와 누가에 공통적으로 있는 내용을 어록 자료)이라는 잠적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문헌 비평은 또 누가복음이 제 3의 자료를 사용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 자료들은 구전형태로 형성되어 전해진 단어들을 문자화하여 편집한 것 들이다.

(2) 1918년 이후 구전에 대한 탐구에 관심이 집중되었으며,“양식사의 견지에서 연구되었는데, M.DibeliusR.Bultmann(`공관 복음 전승사‘)에 의해 발전되었다. Bultmann우리는 예수의 생애와 개성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예수에 관해 남아 있는 모든 것은 결단으로서의 종말론적 부르심이다.”라고 주장하며 전승에 대한 급진적 역사적 비평을 가하였다. G.Bornkamm은 부활절이라는 지평은 잊혀져서는 안되며, 부활절 이전의 예수의 역사는 사실이라고 주장하며 `나사렛 예수에서 Bultmann을 반박하였다. KasemannBultmann이 발전시킨 급진적 비평이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수 많은 세월동안 시험을 거친 구체적 역사성 특질의 판별 기준에 따라 어떤 것이 예수에게 고유한 것이냐 하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유대교, 헬레니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관념들과 구별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예수에게 고유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Roloff는 이 비평적 연구가 아직 적정한 결론에 이르지 못한 것은 확고부동한 견해들이 이 연구계획을 계속 지배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고전적 양식 비평의 가설(회중이 복음서들에 남겨있는 전승을 만들어 내었으며 이것은 주로 그 회중의 삶을 조건짓는 관계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이 확고부동하여, 우리가 이미 복음 전승의 출현에 관해 확인했던 것과 모순된다.

(3) 독자적인 전승 비평적 분석의 발판: 1> 이차적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것 배제, 2> 진정한 자료의 핵들로 부터 나오는 여러 부분들을 취합하여 합리적 해석을 통하여 단일하고 전체적인 상을 만든다. 진정한 자료의 핵은 종교사적 특징이라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판별 기준을 그 환경 및 초기 기독교 공동체와 결부시켜 적용함으로써 분리해 낼 수 있다. 공관복음서의 자료는 신약 신학에서 관점을 달리하여 서너번 등장할 것이다.: 예수에 대한 묘사 ; 초기 공동체의 신학; 복음서 기자들의 신학.

2) 요한복음의 공헌

(1) 요한복음의 예수는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신학적 묘사로서 공관복음서와 전혀 다른 개념의 언어를 사용하므로, 공관복음서의 개념어로 변환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의 사역에 대한 구도와 문학적 구조의 차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요한복음의 강화들은 믿을 만한 예수의 전승을 강해와 해석을 통하여 발전시킨 것이라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2) 부활절 이후의 상황에 적용하고 있다.

(3) 요한복음이 공관복음서 보다 복음서 기자의 복음을 훨씬 더 많이 내포하고 있지만, 예수의 지상사역을 말해주는 전거를 양적으로는 적지만 핵심적인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4) 요한복음 기자는 공관 전승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1> 요한은 공동체가 공관복음서로 잘 알고 있다고 전제하지만 공관 복음서를 사용하지 않았다. 2> 공관 복음서를 대신하기를 원치 않았다. 3> 공관복음서 옆에 예수에 관한 독자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한 예수의 모습에 대한 심화된 이해를 전달하고자 한 자신의 묘사를 병치시키려 하였다.

3) 정경복음서 이외의 기독교적 예수 전승

(1) Jeremias에 의하면 이삼백 개의 agrapa(예수의 개별 말씀들) 가운데 20여개 만이 공관복음서의 예수 말씀에 비견될 수 있으므로, 공관 복음서의 예수 전승을 아그라파를 통해 보충하는 것은 무의미 하다.

(2) 위경 전승은 주로 공관복음서들에 의존하고 있으며, 전승사적 견지에서는 비교적 거의 완전히 이차적임이 드러났다.

4) 비기독교적 예수 전승

표면적으로 편견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기독교적 정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1,2세기에 나온 예수에 관한 정보를 담고있는 소수의 현존하는 비기독교적 자료들을 살펴보면 오히려 편견을 제공함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의 지상 사역의 신학적 내용을 본질적으로 공관 복음서 전승에서 끌어내야 한다는 시사를 받는다.

3. 역사적 구도

1) 예수에 관한 연대에 대하여

(1) 3:1에 따르면 세례 요한은 티베리우스 15, 즉 주후 27101일과 주후 28930일 사이의 어느 시기에 공적인 사역을 개시했다고 한다.

(2) 이 전거는 본디오 빌라도가 공직을 맡았던 해에(요세푸스에 의하면 주후 26-36) 예수가 사역을 했다는 믿을 만한 전승과 일치한다.

(3) 예수가 죽은 해는 바울의 회심(주후 33-35년 사이)이전이어야 한다. 니산월 15일이 주후 30년 또는 31년 성 금요일에 해당되었다. 요한의 연대기에 언급된 날짜인 니산월 14일은 주후 30-33년의 성금요일에 해당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니산월 14(또는 15)인 주후 3047일에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2) 예수의 조상들

(1) 갈릴리 나사렛: 유대인들이 나사렛 예수 호칭만을 사용한 것은 예수가 메시야라는 생각 자체가 어리석은 것임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나사렛이라는 마을은 구약의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예수와 유대교의 갈등을 예수가 갈릴리 출신이라는 것에서 그 해결점을 찾는 것은 잘못이다.

(2) 베들레헴: 베들레헴 탄생은 단 두곳(2:1, 2:4)에서만 말한다. 전승사적 배경과 관련하여 살펴보면 이 묘사 속에는 두 요소가 결합되어 있다. 즉 예수는 다윗의 혈통에 속함과 동시에 성령에 속했다. 이러한 전승사적 요소들의 결합으로부터 탄생 설화는 예수의 역사적 조상들에 관하여 두 가지 점에서 세부적인 내용을 제공해 준다. 예수는 역사 안에서 전혀 새로운 어떤 것을 창조해 내는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나왔으며, 약속의 역사의 연속선상에서 출현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국외자들에게 예수의 신적 또는 메시야적 성격을 확신시킬 수 있는 증거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었다.

3) 공적 사역의 경과와 구도

(1) 개요: 복음서들이 전하는 예수의 사역은 대부분 팔레스타인 유대교 안에서 일어났다. 불트만도 동감하는 벨하우젠의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니라 한 사람의 유대인 이었다.”는 진술은 예수가 실질적인 의미에서조차 이러한 틀의 경계를 뛰어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잘못이 있지만, 외관상으로는 타당하다. 예수의 사역은 서기관의 사역에 비교할 수 있지만, 직접적인 예언자적 발언 및 이적 행위들로 인해 평범한 서기관 상과는 구별되었다.

(2) 지리적으로: 예수의 목표는 이스라엘과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예루살렘과의 만남에 중점을 두었으므로, 예수의 사역은 본질적으로 유대 백성들이 정착해 있던 팔레스타인 지역안에서 행해졌다.

(3)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한 선교: 예수는 이스라엘에게 이전에 알지 못했던 신을 선포했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조상들의 하나님의 오심을 알렸다.

(4) 예수와 종교 분파들: 유대 공동체의 신정체제 안에서 종교적 분파라는 성격도 띄고 있었다.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열심당들은 소수였지만 이스라엘의 정치-종교적 생활을 결정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복음서 기사들에서 열심당과 에세네파는 언급되지 않고; 사두개파는 편집에 의한 증보를 제외한다면 오직 한번 논쟁에 등장하며: 바리새파는 편집에 의한 증보를 제외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예수의 적대자들로 등장한다. 이는 예수와 유대교의 대표인 바리새파 모두가 율법에 관한 문제에 사활을 걸었기 때문이다.

(5) 예수의 사역의 길: 예수의 배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네가지 관계--열심당, 갈릴리 형제단, 묵시론적 배경, 유대의 세례파들, 에세네파--들을 살펴볼 때, 예수의 직접적인 제자 집단의 선구와 관련한 공관 전승의 얼핏 스쳐가는 언급과 정확히 일치한다. 예수의 종교사적 선구에 대한 고찰에서 다음을 요약해 낼 수 있다. 1> 예수는 어느 특정한 유대교의 분파에서 나오지 않았으며,다양한 유대의 전통들을 취사 선택하여 자신의 선포를 발전시켰다. 2> 예수가 바리새파와 대결했던 것은 예수가 기존의 반바리새파를 대표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는 모든 이스라엘을 회개로 불렀고 이 부르심에는 다른 어느 분파보다도 율법을 자신의 영역으로 생각했던 바리새파도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3> 예수가 분명하고 긍정적으로 동조했던 유일한 분파는 세례 요한이라는 인물에 의해 대표되는 운동이었다.

(6) 예수와 세례 요한의 관계: 예수는 요한의 세례는 하나님으로부터온 것이라고 분명히 선언하였으며, 그에게 세례를 받았고, 오직 요한만이 그 시대에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지칭하였다. 예수는 구원사적 관점에서 세례 요한과 운명을 같이 했던 것이다. 신약의 진술을 공정하게 다루려면 두 고찰 방법--역사적 및 구원사적 --을 모두 진지하게 고려하여 상호간에 치열한 대화를 전개하도록 해야 한다. 세례요한에 관한 신약의 진술들을 역사적 상황앞에 맞세워 놓음으로써 예수의 직접적인 배경을 분명히 밝히고자 하는 시도로부터 이 대화를 시작함으로써 예수의 자기 이해 뿐 아니라 예수의 구원사역을 이해하기 위한 종교사적 전제인 유대의 구원론이라는 문제를 이끌어 들일 것이다.

4. 구원사의 출발점: 세례 요한

1) 역사적 위치를 결정하는 문제에 대하여

(1) 쿰란과의 지리적 근접성에 걸맞게 사해 두루마기를 통해 에세네파와 요한 사이에는 놀랄만한 유사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회개로의 급진적인 부름; 결례; 위로부터 임박한 개입에 대한 기대; 광야에 있는 것을 구원사적으로 이해.

(2) 공관복음서의 기자들은 세가지 전승층으로 되어있다. : 1> 마가전승은 세례 요한의 사역의 개시와 죽음에 대해 들려준다. 이는 마가에서 편집적 성격을 띄어 마태, 누가에 의해 한층 개작된다. 2> Q에 나오는 세례자에 관한 말씀들은 사슬 형태로 전해 내려온 것으로 아마 아람어로된 정형 어구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듯 하다. 3> 세번째 층(3:10-14의 소위 본문 설교에 관한 누가의 특수 전승과 눅 1장의 탄생 설화)은 거의 역사적 신빙성을 지니고 있지 않음을 보여 준다.

2) 세례 요한의 설교: 네 가지 신학적 주제들은 유대 구원론의 주요한 주제들이다.

(1) 임박한 진노의 심판: 임박한 진노는 열매와 관련되는데, 그 누구도 열매를 보일 수 없다. 이것은 기독교 신학의 손을 빌어 요한의 입속에 넣어진 말들이 아니다. 쿰란 사본들도 진노 아래 모든 사람들의 멸망을 전제하고 있다. 곧 지금 제안되는 회개를 바탕으로 행하는 사람들만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2) 회개로의 부름: metanoia는 히브리어 shub(돌이키는 것)의 헬라어 대응어로서, 전 인격이 방향을 바꾸는 것, 이스라엘이 그들의 하나님께로 되돌아 가는 방식, 견해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행위의 변화를 의미한다. 바리새파 유대교는 매일 회개하라고 권면하였고 용서를 수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매일의 부분적 회개를 요구한 반면 요한은 단번의 총체적인 회개, 즉 열매맺지 못하는 나무가 열매 맺는 나무로 변하는 회개로 나아가도록 가르쳤다. 회개에 대한 세례요한의 요구는 에세네파의 요구와 흡사하다. 에세네파는 회개를 보이는 것은 언역 곧 자기 분파로 입회하는 것을 의미한다. 거기서 하나님과 자신의 공동체와의 새롭게 된 교제가 제공된다고 하였다. 세례 요한은 주위에 특별한 공동체를 모으지 않았고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모든 이스라엘을 회개로 불러 재난을 예비하라고 하였다. 요한의 회개의 부름은 하나님과의 최후의 종말론적 대면을 예기하였다.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된 변화를 실현시키는 것은 오실자의 세례-성령과 불-라는 것이다. 요한의 세례는 실현을 미리 나타내 보이면서도 동시에 여전히 약속으로 남아있는 표시이다.

(3) 요한의 세례: 세례를 받으러 온 사람들은 모두 회개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세례는 죄의 고백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라, 죄사함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을 나타내는 표시였다. 반면에 모든 유대의 결례는 자기 정화였다. 요한의 세례는 그 작용 양식상, 바리새파에서 발전된 개종자들의 세례와 마찬가지로 단 한번의 침례였다. 그러나 결례가 회개와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요한의 세례는 에세네파의 개념에 더 가깝다. 바리새파에게서 죄를 깨끗게 하는것은 예배 의식이었다. 물론 에세네파의 회개는 결례에 의해 보완되는 것인 반면, 요한에게 회개는 세례를 통해서만 가능하였다. 종교사적 관심에서 요한의 세례는 포로기 이후의 유대교의 종교적 결례들에서 자라왔다. 하지만 그 핵심적인 의도에서 그것은 물뿌림과 성령의 부여주심을 통한 종말론적 정화라는 구약 예언과 맥을 같이한다. 그는 이 세례가 마지막 날의 입구에서 은혜의 최후 수단이자 죄 사함과 회개의 매개가 되도록 했지만 장차 올 어떤 것을 약속하는 표지라는 의미에서만 은혜였다. 성령을 통한 인류의 새로워짐은 오실 자에 의해서만 현실로 될 것이다.

(4) 오실자: Q전승(3:16), 마가 ;전승(1:7),들을 결합하는 마 3:11이하를 연구함으로써 세가지 사항을 알수 있다. 1> 요한은 메시야적 인물을 기대했지만, 종말에 구원을 가져다 주는 자에 대한 관례적인 유대적 호칭들(메시야, 다윗의 자손, 인자)을 사용하지 않았다. “내 뒤에 오시는 이”,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라 불렀다. 2> 요한은 오실 자를 심판자이자 새롭게 하시는 자로, 따라서 마 3:7에 따라 임박한 진노로 선포했다. 3> 오실 자가 심판자로 등장한다면, 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그 누구도 구원 받을 수 없으리라. 성령의 세례를 선포함으로써 요한은 자신의 사역의 한계를 인정했으며, 이를 통해 그는 역사의 완성은 자기가 예언의 전체 증언을 따라 예상했던 방식으로 오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인정하였다.

3) 세례 요한의 의의

(1) 세례 운동: 종교사적 분석은 요한이 유대의 세례 운동의 흐름 안에 있었음을 자주 반복해서 보여 주지만, 그 운동과도 구별되었는데 전체적으로 세례 운동보다 구약 예언의 주요한 흐름에 더 중점적으로 강조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디벨리우스에 의하면, 요한은 유대 백성들 속에서 종말론적 회개 운동을 일으켰다. 예수도 이에 감명을 받았고, 그 흐름을 타고 그 정점에서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요한이 예언을 넘어 시행했던 세례 조차도 회개를 가져올 수 없었다. 요한은 예언을 대표했지만 또한 그 자신이 예언의 한계에 대한 증인이기도 했다. 요한의 인격과 사역은 자신만이 아닌 구약 예언의 막다른 골목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막다른 골목은 예기치 않았던 방식으로 해결되었다. 오실 자는 세례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스스로 세례를 받으러 왔다. 오실 자는 역사의 피날레로서가 아니라 역사 안으로 들어 왔다. 요한의 주요한 사명은 예수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는 것이다.

(2) 예수의 수세: 1:9-11 및 병행구에 나오는 예수의 수세는 두부분으로 나뉜다. 1> 첫번째는 일반적으로 역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여기서 예수가 요한에게로 온 것은 구약에 대한 그의 이해 및 기독교적 이해를 회당의 이해와 구별한다는 것을 전제하며, 그 때 이후로 예수는 회개로 부르심 받은 자들과 같이 했다. 2> 예수는 결코 하나님의 부르심 또는 명령을 자신의 사역을 위한 밑받침으로 언급한 적이 없다. 예수는 언제나 자기 자신의 직접적인 권위를 토대로 하여 말하고 행동했다. 에수의 공적 사억은 어떠한 예비 단계도 거치지 않고 수세시에 개시되었고 이삼년 후에 소멸되었다. 이는 예수의 사역에 관한 이후의 기사에 대한 해석적인 서론 역할을 하는 기독론적 요약의 성격을 띤다.

 

2 장 하나님 나라의 도래

5. 예수의 선포와 동시대인들에게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

1) 요약문들

1:14, 4:18-21, 4:23, 9:35, 4:43, 8:1, 4:17, 10:7, 3:2, 3;3, 4:15. 역사적으로 세례 요한의 설교의 지향점은 오실자의 오심이었던 반면에 예수의 설교의 지향점은 하나님의 오심, 즉 하나님의 주되심이었다. 상당수의 말씀들과 비유들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를 변형된 형태로 발견하게 된다.

2) 용어의 변용례

마태복음에서 하늘나라는 하늘에 있는 나라 또는 하늘로부터 오는 나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분의 나라를 의미했다. 하늘의 세계로서 경건한 사람들이 죽어서 가는 것이라는 통속적 개념은 신약에서 찾아볼 수 없고, 이것은 유대 묵시 문학과 다른 형태의 영지주의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 나라와 하늘나라는 동의어로 사용되었을 것이며, 그 언급이 예수 자신에 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것은 그 용어가 공관복음서 이외의 곳에서는 극히 희소하게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는 1> 이 용어가 팔레스타인 유대교에 그 어원학적 뿌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헬레니즘 세계의 사람들이 그 용어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2> 이 용어는 회중내에서 신학적 이유로 그 사용이 억제되기도 하였다. (고전16;22, 20:22의 마라나타가 하나님 나라 도래를 위한 간구와 함께함)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와있다고 선포한 것이 아니라 지금 도래하고 있다고 선포했다.

3) 구약의 전례들

구약에서 하나님은 왕이라는 상상을 통하여 표현되지만 왕과 통치가 결합된 하나님의 통치라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는다. 2:44, 4:31, 7:13, 7:27의 묵시 문학의 언어와 표현이 가깝다. 이 구절들의 네가지 개념적 범주를 보면 1> 이 개념의 뿌리는 시47,93,96-99까지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역사속에서 관찰될 수 없지만 제의 공동체의 신앙 고백속에 표현되었고, 이것은 예루살렘과 다윗의 선택에 그 뿌리를 두고있다. 2>송영의 신앙고백 속에서는 Y의 주권적 섭리가 이미 현재의 사건들 속에 드러났다고 자주 언급하였다.(44:1-5, 145:1.13, 146:10) 3> 여호와 -왕 전승은 예언 전승에서 제2이사야에 의해 종말론적 통치의 성격을 보여준다.(45:18-25, 52:7-10) 4) 하나님의 미래적 -종말론적 통치와 하나님의 현재적 주관(자연 질서)사이의 차이는 A.D. 200년 이후의 묵시론으로 하여금 상대적으로 이원론적인 성격을 취하게 하였다. 이원론적 방향으로의 치환의 2가지 이유는 첫째, 혼합주의적 헬레니즘 세계와 이스라엘 세계의 차별성에 대한 확실한 경계 요구와 둘째, 이란 전승들이 그 사고양식과 언어 양식들을 제공해 주었다는 것이다.

4) 유대교의 전례들

(1) 유대 묵시 문학에서는 다니엘서와 사24-27장의 경향을 더욱 확장하였다.(에녹11:3-9, 시빌 신탁서3:46-,767-, 모세승천기10:1-) 후기 묵시 문학에서 이원론은 두 세대론이라는 옷을 입고 나타났다.(바울 묵시록, 에스라47:30-, 다가오는 세대라는 사고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사고를 대신한다.)

(2) 바리새파 -- 랍비적 유대교는 역사적 구도내에서 메시야적 왕 기대와 묵시문학의 우주적-초월적 종말론의 요소들의 두 개념을 조화하려는 시도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랍비적 종말 기대에서 하나님의 통치는 율법의 관점으로부터 보아졌다.

랍비의 하나님 통치의 正式

1> 하늘의 통치라는 멍에를 스스로 지고있다.: 율법의 권리 주장, 쉐마 반복 순간 하나님의 통치가 일어남.

2> 기도문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18개의 기도문 중 11번째 간구와 축도 역할의 기도문인 카디쉬(Kaddish)형태의 기도.

(3) 에세네파의 종말 기대는 두 메시야적 인물의 출현에 촛점을 맞추었다.(하나님 나라와 벨리알 나라와의 전투에 촛점을 맞춘 이원론 적인 본문들 안에서 언급) 그러므로 미래의 하나님의 통치 개념은 모든 집단들에게 다 알려져 있었지만 예수처럼 자주, 중심적인 용어로 사용한 유래가 없다.

모든 유대인의 일치점

1> 하나님의 통치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주되심이라는 면에서 아직 이루어지고 있지 않지만, 종말론적 사건으로서의 최후의 심판이라는 호된 시련 속에서 성취될 것이다.

2>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 지면 새로운 역사적-우주적 상황이 전개될 것이다. 예수에게도 하나님의 통치는 오로지 종말론적 차원이었다. 그리고 유대교의 모든 입장들이 그랬던 것처럼 율법에 대한 복종, 하나님 권능의 시현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예수는 어느 특정한 사상학파의 견해, 특히 묵시론의 견해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예수는 주기도문에서 18개의 기도문과 카디쉬를 그 문체 및 내용 면에서 사용하였다. 기도문의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다.”는 표현이 예수 선포의 핵심으로 삼았던 것이다. “나라가 임하옵시며라는 표현 방식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예수는 미래에 관해서만이 아니라 현재적 도래에 관해서도 말하고 있었음을 분명히 알게 된다. 율법의 권리 주장을 통하여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나라가 현재와 미래에 동시에 도래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것이 바실레이아에 관한 예수의 말씀들에 의해 제기되는 핵심적인 문제이다.

6)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도래와 현재적 도래

(1) 연구사 개관

1> 자유주의 신학의 관점

리츨은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도래는 유대의 묵시론에서 빌어온 것이고 현재적 도래만이 독창적인 것이라 하여 그것들만을 중요시 했다.(17:20) 인간의 관점에서 사랑을 통한 인류의 공동체, 13장의 씨앗 비유에서 역사적 발전을 통하여 지나간다는 하나님 나라의 설명은 칸트적 사고임이 분명하다. Kant에 의하여 하나님 나라는 미덕의 율법들에 따라 조직된 인류이다.

2> 역사 실증주의 학파의 바이스(W.Weiss)

그의 해석학적 원칙을 바탕으로 하여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유대 묵시론에서 빌어왔다는 명제를 발전시켰고,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종말론적이고 초월적인 차원으로 보았다. 가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차원에 대한 예수의 말은 예언자적 열정에 잠깐 사로잡혔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하나님 나라가 오로지 미래적 견지에서만 기대된다면, 예수의 모든 선포는 미래적 전망으로 이동된다. 예수의 윤리적 명령들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들이 되고 현재적 에스카톤에 대한 표현들이 아니다. 이 견해를 연구사적으로 일관된 종말론으로 지칭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슈바이쩌의 영향으로 확대되었고, 그의 명제는 인류의 도덕적 진보에 관한 펠라기우스의 자신만만함에 종지부를 찍었다.

3> 불트만과 디벨리우스는 즉각적 종말론이라는 명제를 발전시켜 자유주의 신학을 밀어내었다. 불트만에게 있어 예수는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을 묵시론에서 빌어왔으며,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에 관하여 한번도 얘기한 적이 없었다. 세계 역사에서 임박한 전환점에 대한 신화적인 선포는 실존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4> 불트만 제자들의 수정

1] 콘첼만-- 예수는 언제라는 질문을 불필요하게 만들었다. 예수의 부르심을 들은 사람은 누구나 즉각적인 회개 이외에는 해야할 아무것도 없다.

2] 케제만-- 예수의 선포는 묵시론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았고, 예수는 언제인가에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도래가 즉각적임을 선포했는데 그것은 요구라기 보다는 제안이었다.

3] 윙엘-- 씨앗의 비유는 그 미래적 관점으로부터 현재를 이해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친 것이다. 이미 현재에서 시작되고 있는 가까운 미래로 이해된다. 미래(도래하는 하나님 나라)는 예수를 통하여 만나게 되는 하나님 사랑의 제안을 통하여 현재로 투사된다.

5> 대부분 앵글로 색슨 계열의 연구는 하나님 나라가 예수에게 현재적 의미로 도래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1] 도드는 미래적 도래에 관한 것들을 거의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예수의 사역을 실현된 종말론”. 즉 전례가 없고 반복될수 없는 실제로 지금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다가올 세상의 힘들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으로 표현한다. 그에게 하나님 나라는 힘이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 모든 악을 누르고 신적인 주권을 분명하고 효력있게 단언하는 것이다.

2] 예레미아스는 도드와의 토론에서 싫현과정에 있는 종말론이라는 표현을 제안하였다.

3} 킴멜은 정확한 전승 비평적 분석을 통해 역사적 개연성이라는 견지에서 예수는 하나민 나라의 미래적 도래 및 현재적 도래를 모두 말하였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2)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도래

1>종말론적 미래에서 다른 종착지

그날의 의미와 예수 전승 개념의 결합

1] 1:12, 10:15을 통해 예수가 역사를 종말로 이끌 심판때에 하나님이 출현할 것임을 선포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2] “그날은 인자의 오심과 결합되어 있다.(17:22-37, 24:27,3,37,39) 마태복음에서 인자의 임함(parousia)라는 말은 헬레니즘 세계에서 신들 및 통치자들의 오심을 의미했다. 파수시아는 인자의 오심이지 귀환이 아니었다.

3] “그날은 막14:25에서 하나님 나라와 결합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심판, 인자의 미래적 도래는 나란히 선포되었지만 체계적인 형태로 결합되지는 않았다. 개별적인 진술들은 거듭거듭 직접적으로 현재에 적용되었고, 그 의도는 현재로 하여금 미래에 참여케 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미래는 역사의 성장, 발전, 연속성의 무엇이라기 보다는 역사와 맞서있는 그 무엇으로서 역사와 만난다.

2> 임박한 도래(소위 임박한 기대)

(10:9.11, 10:7)에서 의미의 문제

1] 도드 -- “현존하다”, 공간적 견지에서의 근접성을 표현할 수도 있다.

2] 큄멜 -- ‘엥기켄의 완료시제가 신약에서 언제나 가까이 왔다.”를 가리킨다.(13:30)이 일은 마지막 때의 사건을, “이세대는 이 세대안에 종말이 이를 것을 덧붙여 말하고 있다.

위와 같은 개관에 대한 답변

a.임박한 기대에 관한 진술은 그 수가 결코 많지 않지만 아마도 예수는 자기 세대에 세상의 종말이 도래하리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였을 것이다.

b. 예수는 묵시론적 견지에서 말하지 않았고, 묵시론의 특징이 되었던 시대 구분의 계산들을 거부했고 따라서 역사 진행에 관하여 묘사하지 않았다.

c.예수는 사람들을 회개로 부르기 위하여 사람들돠 하나님의 오심 사이에 간격을 제거해버리고 계산할 수 없는 도래앞에 사람들을 정면으로 세워놓았다. 기간의 유예는 오로지 제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제시된 것이었다.

3> 깨어 기다리라는 도전

13:22 및 다른 곳에서 예수는 세계 역사의 시간 계산을 철저히 거부하였다. 따라서 종말의 징조들은 신자가 응시해서는 안되고 이 모든것들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오직 주의 오심을 깨어 기다리고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를 충성스럽게 수행하는 것만이 중요했다. 24:43-25:30의 네 비유, 12:36-39의 비유들은 파루시아의 지체를 말해주고 있다. 이 비유들의 원래 의도는 무엇인가? 예기치 않은 돌연한 재림을 만나서 회계할 때 시험에 통과하려면 맡겨진 일을 잘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 지금 절대적인 명령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비유들은 일차적으로 제자들을 향한 말씀이었다. 7:24, 6:47의 비유의 핵심은 맡겨진 것이 아니라 집을 세우는 것, 즉 예수의 제안에 대한 응답이다.

4> 요약

1] 의심할 여지없이 예수는 집중된 미래적 종말론을 발전시켰다. 그것은 가까이 왔지만 시간적으로 미래의 일이며 아직 오늘이 되지 않은 날이다.

2] 이 선포는 유대적 환경의 종말 기대들과 구별되기는 했지만 공통점들을 갖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율법에 대한 복종을 위해 결단과 그 지속이 요구되지만 예수는 자신의 요구와 약속들에 관한 결단 이상의 것을 요구했다.

3] 예수에게 특징적이었던 것은 장래의 올것의 내용이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의 구원이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수수께끼처럼 들리는 말: 하나님의 통치는 벌써 현재에 도래하고 있지만, 이 현재적 도래가 사실 미래적 도래는 아니다.

 

3 장 요구로서의 회개(예수의 윤리학)

예수님은 이 세상에 살면서 도래하는 나라를 맞는 사람을 어떻게 이해하였는가? 회개라는 말은 사실상 도래하는 나라를 기다리면서 인간 편에서 해야하는 모든것을 가르키는 말이다. 용어 사용에 대한 예비적 고찰: “회개라는 용어의 사용에 관하여 회개는 주로 예수님이 사람들이 행하기를 원하시는 것을 요약하기 위하여 복음서 기자들이 사용한 집합적 용어이다. 회개라는 용어를 구약 예언 또는 공동체의 선교적 케리그마의 의미로 이해한다면 이 용어는 믿음과 제자도, 가난하게 되는 것과 전적인 순종 모두를 포괄한다.

8. 죄를 지적하며 회개로 부르심

종교적 상류층(바리새인과 서기관)과 부자들에게 예수님은 위협적인 경고를 하신다. 그들의 회개를 위하여.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회개하여야 하는가?

1) 회개로의 부르심과 물질적 소유를 통한 안심

예수님의 비판은 사회의 모든 계층을 포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향해졌음이 분명하다.

(1) 이 세상에서 부를 축적하는 사람들에 대한 정죄(누가 특수 자료)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를 이미 받았도다.” 누가가 말하는 부요한 자는 어떤 자인가? 에비온 주의자들이 말하는 부자(부자는 그저 부자라는 이유 때문에 저주받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저 가난하다는 이유 때문에 복이 있다고 말함)인가? 아니다. 왜 아닌가? “... 너희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라는 구절 때문이다. 이 구절은 그들이 부자이기 때문에 화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이미 자기 상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위의 부요한 자는 어떠한 자인가? 부자가 되는 것 이외에는 다른 그 무엇도 구하지 않았던 자이다. 왜 이러한 자들에게 화가 있는가? 부에서 만족을 발견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 “... 부자와 나사로...” 여기서 부자가 자기의 부로서 안전을 보장받으려고 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자기의 영혼. 그는 왜 어리석은가? 하나님을 자기의 계산속에 넣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그의 계산 전체가 전혀 잘못된 방향으로 향해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소유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였다. 누가는 자신이 부라고 샐각한 모든 것들이 예수가 이끌어오고 있는 새로운 셰상에 들어가는 것을 어떻게 방해하고 있는지를 보았다.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할수 없다면 그들은 새로운 세상의 도래도 구하지 않을 것이다.

(2) 마가복음 10:17-27의 부자를 제자로 부르심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회개는 제자도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구체적인 형태로 표현된다. 그런데 영생을 얻기 원했던 이 부자는 왜 제자가 되지 못했을까? 여기서 고펠트는 레위(세리 마태)를 죄인, 부자를 팔레스타인적 의미의 의인이라고 하며 선명한 대비를 한다. 고펠트의 입장에서 위의 질문은 조금 각색하면, 왜 의인(팔레스타인적 의미의)은 영생을 얻지 못하고 죄인은 영생을 얻는가? “네게 오히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예수님의 부자에 대한 이 도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도전은 실제로 부자에게 부족한 어떤 요소를 드러내 주는것이 아니었고 그 부자의 모든 행동의 지향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의 행동의 지향은 무엇인가? 레위인은 문제거리인 소유들을 버리고 좇았지만, 부자는 자신의 의로움의 댓가로 생각했던 자신의 부를 버릴 수 없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부와 함께 자신이 그동안 획득한 의도 버려야 했다. 그러나 그는 버리지 않음으로 하나님을 자신의 고상함에 대하여 기계적으로 상을 주는 자동 기계 정도로 만들어 버렸다. 이 말씀은 누구에게나 적용된다. 제자들도 두려워 떨면서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하고 물었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만이! 그러나 누가 그런일을 하나님께 할 수 있을까? 대답은 너무나 뻔하게 들렸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수 있느니라”(10:27). 하나님이 어떻게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셨는가? 예수님은 제자도를 제안했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스스로 그것을 결단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값비싼 진주를 발견했으며 하나님이 감춰진 것을 자기에게 드러내셨다고 말한다.

(3) 보물을 쌓아두는 것과 염려하는 것을 질타하는 하나님의 말씀들(6:19-34, 12:16-31)

보물은 사람들이 눈독을 들이고 거기서 안정을 구하고 위로를 찾는 그러한 모든것이다. 염려는 미리 예견하며 필요한 것들을 적절하게 비축하는 것이 아니라 장래를 염려하는 충동에 이끌려 소유물 속에서 삶의 안정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궁극적으로 보면 보물을 쌓아두는 것에 대한 금지 명령은 염려하는것을 금지하는 명령과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통치안에서 회개로 부르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회개는 제자도를 통하여 현실이 된다.

(4) 당시의 상황에서 부와 가난에 대한 예수의 입장

모든 부한(자기 삶의 안전을 이미 하나님의 통치 이외에서 찾는) 사람은 예수가 가져오고 있는 것을 부여잡고 스스로 가난한 사람이 되어서 모든 결핍을 채워주는 하나님 나라에의 참여를 허락받아야 한다.

 

4 장 하나님의 통치의 선물로서의 회개: 구원의 새 질서

11.율법의 구원의 질서: 그 인정과 효력 정지

1) 응보의 질서의 인정

(1) 응보의 개념

예수의 제시한 모든 요구들은 구약에서 온 것이든 자신에 의한 것이든 특정한 표제 아래 있는 것으로 그것들은 하나님의 요구였고 하나님은 요구들을 준수하느냐 무시하느냐에 따라 대응하였다. 1> 구약에서 하나님의 계명은 언약의 영역에 있는 것으로 언약은 계명을 준수하느냐에 그 성취 여부가 달려있으나 은혜에 기초한 것이었다.(19:5), (20:5). 2> 유대교에서의 응보의 개념은 개인의 율법 준수의 충실도에 따른 종말적 심판에의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모습을 띠고 있었고 아울러 조상들 덕분으로 자비를 입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또한 이 세상에서의 응보도 기대하였는데, 그러나 경건한 사람들의 이 세상에서의 심판은 내세에서는 오로지 상만을 받는 일도 있다고 생각했다. 3> 예수도 역사의 실존의 모든 것이 저울에 달아질 최후의 심판을 기대하였느데, 인간의 행위가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도 그 날에 진지하게 다루어질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2) 예수와 응보의 질서

예수와의 관계를 통한 구원은 예수의 심판 기대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아울러 심판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기도 했다. 그리고 예수 심판의 기대는 구약과 유대 전승을 사용하고 그것을 변용한 상과 응보에 관한 강화들 속에 잘 나타난다. 상과 응보에 관한 강화들은 플라톤에서 칸트에 이르는 철학속에도 잘 나타나는 바, 의란 그 자체로 상을 지니고 있으며 선은 그 자체로 행해져야 한다고 했는데, 이러한 사고는 인간의 자율성의 개념을 깔고 있는데 이것은 성경적 사고에서 볼때는 자기 기만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창조주와 동료 인간 존재와의 관계하에 있기 때문이다. 구약의 응보와 상은 사람들이 운명의 꼭두각시가 아니며, 하나님이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책임있는 인격체로 만든다. 하나님의 찾아옴은 이스라엘에게는 상이었다. 시내산 언약이 그 성취를 조건으로 만든 이래로 사람들은 이를 잘못 사용할 가능성이 생겼다. 계명의 성취를 자신의 성취로 잘못 생각하고 업적들에 대한 대가를 요구할 수 있었다. 이것은 분명한 왜곡이었으며 율법에 대한 잘못된 해석과 아울러 예수에게는 단호하게 거부되었다.

2) 율법의 구원의 질서의 중지

율법은 업적의 존재 근거로 귀결되는 언약의 조건과 규례로 이해되었으나, 예수는 종말론적으로 이 두 방향으로의 율법의 효력을 정지시켰다. 인간은 자신의 행위로는 살아남을 사람이 없지만, 응보의 질서를 통과한 즉시 하나님 나라에의 참여가 선물로 주어졌다.

(1) 하나님 나라에의 참여가 가져올 결과는 마20:1-15의 포도원 주인의 비유에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은 곧 인간의 공로에 의존한 구원을 이야기 했던 언약이 중지되었음을 의미했다. 모든 형태의 권리 주장은 기각되었고 그 근거도 없어졌다.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선물을 거져주시는 선물로 보는것이 더 중요했다. 바리새인, 세리, 탕자의 비유는 예수의 선하심을 알아차리는 것이고, 이러한 비유는 구원의 서약, 믿음의 부르심을 인지하도록 격동시켰다. 그리고 개인과의 만남속의 서약은 팔복의 가르침에 나오는 약속들에 포함되었다.

(2) 팔복에 나오는 제안들은 누구를 대상으로 한 것인가? 6:20-23의 네가지 복은 박탈당한 자들을 가리키고, 5:7-10에만 나오는 두번째 그룹의 네가지 복은 선을 위해 핍박받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전자를 에비온주의자적으로 후자를 도덕적 견지에서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두번째 그룹의 긍휼히 여기는 자는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풂으로 예수가 도움을 주는 방식을 기쁨으로써 응답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며 그들만이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할 수 있었다. 즉 팔복의 가르침의 의미에서 행한 사람은 팔복에 대한 가르침으로 부터 자신의 미래를 기대할 수 있었다. 두번째 그룹들을 이렇게 이해할 때 그 출발점은 예수 자신에게 거슬러 올라간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게하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이 예수의 사역의 주요한 관심이었기 때문이다.어쨋든 팔복의 가르침은 조건으로서의 율법의 성취보다 종말론적인 구원의 말씀을 주었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참여와 나란히 회개를 제공하였다.

(3) 그러면 이와같은 방식으로 이웃사랑을 나타낼 사람들이 하나의 현실로 나타날 수 있는가? 말씀만으로 가능한가? 이에 관한 답변은 마11:6에 따르면 팔복에 대한 가르침은 가난한 자와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 적용되지 않고 예수와 관련하게 하나님에게 신뢰를 둔 사람에게 적용되었다. 그들은 제자도 안에서 예수를 따르고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 구원 사역은 유대 사회에서 죄인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에게서 시작되었다.

12.죄인들을 위한 구원

예수의 구원 사역은 죄인과 의인을 구별하였고 예수는 자신의 회개에의 부르심을 의인으로부터 시작했지만 먼저 죄인에게 관심을 가졌다고 말한다.

1)죄인들

유대 사회에서 죄인으로 간주된 사람은 율법에 익숙하지 않거나 율법에 열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이유로 유대의 여러 분파들은 율법에 대한 자신의 이해에 따라 죄인들의 무리를 구별하는 여러가지 선을 그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알지 못하는 무리에세네파에선 토라에 대한 자신의 이해 및 실천을 공유하지 않은 사람들이 죄인이었다. 세리, 창기 그리고 이방인들이 주로 죄인으로 간주되었다. 이와 다르게 예레미아스는 눅5:8의 예를들어 죄인들을 정직하지 못한일에 개입했거나 부도덕한 삶을 영위한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용은 예수의 케리그마적 의도와는 분명하지 않게 된다. 예수는 어느 한 부류를 명시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꼭 들어맞는 본보기를 통해 자기가 죄인들에게 무엇을 보여 주고 있는 지를 생생하게 말하려 했던 것이다.

2) 죄인들과 어울림

예수의 죄인들과의 접촉은 삭개오 이야기, 세리들과의 식사에 관한 이야기에 잘 나타나 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에게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 가고 물었는 데 예수는 일부 문제가 있음을 시인 하면서도 죄인들의 의원이 되기 위하여라고 답한다. 즉 죄인들을 하나님의 통치로 부르는 것이 예수의 사명이었고 이는 회개하라는 말에 잘 나타난다. 바리새인들은 죄인들의 무리를 피함으로서 사회적인 압력을 가하였다. 예수는 이러한 신성한 권위로 덧씌워진 교육적 사회정치적인 척도가 수행할 수 없었던 것을 자신을 던져 수행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3)예수와 죄인들의 어울림에 대한 해명

잃은 양, 드라크마, 아들에 관한 비유는 죄인들과 예수의 교제를 의인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의도되었다. 이 비유들의 핵심은 죄인들을 위한 예수의 노력을 향하고 있다. 그러면 실제로 죄인들은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위하여 얻어졌는가? 이 문제는 탕자의 비유를 통해 알수 있는데, 이는 예수가 자신의 설교를 예시하기 위한 예화로, 또는 예수 자신의 행동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전자는 불트만-하나님에게서 오는 말씀으로 보았다-에게서, 후자는 브라운-인간 예수를 통한 받아들임-에게서 나타난다. 그러나 둘은 결합되어 있다. 이 비유는 예수와 죄인들과의 어울림을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 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예수는 죄인들의 의사가 되었다. 따라서 잃은 양, 드라크마, 이들의 비유는 예수의 지상사역의 핵심을 나타내며, 예수가 죄인들과의 교제를 허락했을때 거기에는 하나님의 죄사함이 일어났다. 죄사함은 죄의 도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말적인 통치의 삶으로의 받아들임으로서 교제의 회복과 창조주에 의한 피조물의 회복을 의미했다. 교제로의 귀의는 곧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의 회개였다. 회개는 예수에 의해 받아들여짐으로 죄용서로 나타나고 이는 예수의 비유들속에 말로 표현 되었다.

4) 치유-죄사함-믿음

2:1-12의 중풍병자의 치유에 대한 비유는 죄사함과 치유의 결합으로 예수에게 전형적인 것이었다. 예수는 자신에게 나아옴으로 믿음을 보인 중풍병자에게 먼저 믿음을 수여하고 다음에 치유를 전하는 말씀을 하였다. 이것은 죄사함은 전인격적으로 온전케되는 것이며 역으로 예수의 치유는 죄사함에 의한 하나님의 관여를 함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예수의 행동은 서기관들의 항의를 불러 일으켰는데, 구약이나 유대교에는 죄사함을 나눠주는 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참회하고 죄사함을 얻는 체계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항의에 대해 예수는 자신의 직접적인 권세를 가지고 이야기 했다. 이것은 곧 예수의 인격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고 자신의 이 논쟁이 죄사함과 치유의 수여가 믿음과 결합된 이유를 밝혀 준다. 죄사함은 여기서는 믿음과 결합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15장에서는 회개와 결부되어 있다.

5) 죄사함-회개-믿음

15:710절의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에서 회개하는 죄인에 관한 언급이 나와있다. 이는 외부에서 볼 때는 회개의 관점에서, 직접적으로 관여된 사람에게는 믿음의 관점에서 말했다. 이 두 용어는 치유와 관련하여 동일한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예수를 거부한 사람들에게 회개하지 못했다고, 대조적으로 예수의 도움을 구했던 사람들은 믿음의 관점에서 말했다. 이 두 용어의 혼용은 실질적인 내용에서 서로 거의 일치했다. 따라서 믿음은 행동을 통한 회개의 근본적인 표현이었다. 믿는다는 것은 더이상 자기의 가능성을 부인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죄사함과 후원에 맡기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6) 회개를 드러내 보임

예수로 부터 교제를 허락받은 죄인들이 진실로 회개했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어떠한 방식을 통해 인식될 수 있는가? 그것들은 표지들을 통해서만 인지될 수 있었다. 표지는 사회적 행위의 변화, 사랑을 드러내 보임, 제자로 좇음 등이었다. 치유도 마찬가지였다.

7) 죄사함과 이웃 사랑

죄사함의 보유는 죄사함을 받는것과 마찬가지로 자기자신을 이웃에게 개방함으로 가능하다. 이 비유는 마18:23-35에서의 충성치 못한 종의 비유에 나타나 있다. 예수의 죄사함은 하나님과의 친교를 개인적인 수준에서 가능하게 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다른 측면에서 남들과 동떨어져 있을 때는 바로 이러한 죄사함은 상실되었다. 하나님의 죄사함과 이웃 사랑은 호혜관계가 아니라 유통체계였다.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사랑의 유통적인 흐름은 후자가 붕괴될때 파괴되고 만다. 예수의 죄사함은 어떤 조건도 없었다. 이러한 예수의 죄사함은 일반적인 사면으로 선포되었던 것이 아니라 변함없이 개개인과 인격적으로 어울리는 것과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죄인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죄인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의인에 대한 관심이 표명이었다.

13. 예수의 죄사함과 의인들

죄인의 받아들임=의인의 실패와 기회 (15;25-32)

1) 실패

(1) 탕자의 환영잔치는 형의 율법의 준수 동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었다. 그는 아들이 아니라 임금 노동자로서 일했으며 이는 아우와 같았다. 아우를 향한 그의 태도는 아버지를 향한 태도와 같았다. 그는 계명을 성취했음에도 하나님과 이웃사랑을 부인하였다. 죄인을 받아들인것은 하나님과 의인 사이의 위기를 불러 일으킨 것이다.

(2) 예수의 죄사함이 어떻게 의인에게 위기로 전환되었는가? 형은 자신의 실존을 지지해주는 것들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의인이 제거할 수 있었던 상대적인 성취는 하잘것 없는 것이었고 시내산 언약은 효력이 중지 되었다.

(3) 예수는 의인의 실패를 어떻게 생각했는가? 1>의인은 죄인과 다른 방식으로 실패했다. 의인들은 형과 같았다. 그들은 계명의 울타리 안에서 그 세세한 부분까지 계명들을 준행했다. 예수는 죄인괴 의인들을 진지하게 구분했다. 2> 그러나 서로 구분되는 각자의 행실에는 공통적인 실패가 도사리고 있다. 둘 모두 아들로서 살지 않았다. 자신들의 피조믈적 성격과 이스라엘의 언약을 부인하였다. 3> 의인의 이러한 실패는 예수의 사랑과 구원 사역에 대한 그들의 항의속에서 표출되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십자가 처형에서 드러났다.

(4) 예수는 이러한 실패를 오직 심상들로만 말했을 뿐 새로운 신학적 용어로 말하지 않았다. 바울이 이에 대한 새로운 신학 용어로 표현한 최초의 인물이었다.-1: 죄인들의 특질, 2: 의인들의 특징, 3:새로운 용어인 사용

2) 의인들을 향한 구원의 제안

예수의 비유는 아버지의 초대로 끝맺고 있다. 이 비유는 의인에게도 예수와의 교제에 동참하도록 초대하는 것이다.

(1) 예수는 동일한 의도를 가지고 속으로 죄인에 대한 환영에 분개하는 바리새인에게 두 채무자의 비유,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통한 구원의 제안을 한다. 이렇게 함으로 그들도 동일한 기쁨의 회개로 불림을 받았다. 그러나 의인은 자신의 비참함과 부정함만 아니라 자신의 의로움도 버려야 했기에 한층 더 어려웠다.

(2) 예수는 의인들에게 또 다른 길을 제안하고 있는것은 아닌가? 1> 어떤 말씀들은 의인들에게 회개는 불필요하며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의인을 부르러 온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수사학적으로 과장된 발언. 2> 팔복의 가르침은 예수의 초대는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미쳤지만 그 한계를 벗어나 있는 사람들에게는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며 특히 지도자들에게 대한 경고이다. 마태는 이 비유를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 결부시켰고, 누가는 후속적인 초대를 이스라엘의 가난한 자와 이방인에로 나누어 확장함으로 의인과 죄인들과의 연결을 삽입하였다. 이것을 통해 교회의 출현을 상기시키고자 했다. 3> 누가는 의인들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견지, 마태는 의인은 기회를 놓쳤다는 것을 전제로 두 아들 비유- 첫째 아들; 아버지의 지시 불이행= 의인들의 초상, 둘째 아들; 처음엔 거부 나중엔 회개= 죄인의 초상-를 하는데 이는 의인에 대한 초대라기 보다는 협박이다. 그러나 이러한 묘사는 예수의 실제의 행동이라기 보다는 주후 70년경의 마태의 바리새인들과의 경험과 일치한다. 따라서 예수의 제안은 의인들을 포괄하였다. 비록 그 제안이 죄인들과 다를지라도 그 반열에 합류하는 회개와 같았다. 예수의 죄사함은 제사장의 속죄의식과는 달리 이 세상의 상황에 종말론적으로 새로운 것의 동터옴을 개식시키려는 것이었다. 아울러 윤리적 종교적 행동의 갱신만이 아니라 육체적 역사적 실존의 갱신도 추구했고 이는 이적에 의해 잘 나타난다.

 

5 . 종말론적 갱신의 표현으로서의 예수의 구원의 사역

14. 이적 이야기들의 역사적 분석에 대하여

1) 이적 기사들과 그 비판

복음서의 예수와 관련된 이적은 예수의 구원 사역을 설명하는데 있어선 주로 그가 행했던 이적에 일차적 촛점을 둔다. 그 이적은 관례에 의하면(1) 육체적 질병의 치유,(2) 귀신 들림의 치유,(3) 방금 죽은 사람의 소생,(4) 자연에서의 이적 등으로 나뉜다. 이에대해 합리적인 사람들은 기적을 행했다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는가?고 반론을 제시한다. 켈수스- 주후 160년경의 기독교를 반대하는 철학자-는 역사적 측면에서, 실질적인 측면의 내용에서 의문을 제기하였다. 르네상스 이후의 신학은 신약의 탐구에 있어서 순전히 역사적인입장을 취했다. 이는 문제의 단순화, 조직 신학에의 반영 태만을 가져왔는데, 이 입장은 현재의 합리적 사고로 보아 불가능한 것은 무엇이나 역사적으로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였다. 이러한 전제와 맥을 같이하여 사건이나 이야기의 출현을 단순화된 역사적 재구성을 통하여 이적에 관한 이야기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였다. 1> 이적에 대한 첫번째 설명은 18c 말엽의 신학적 합리주의로 이적이 합리주의로 설명 가능했던 사건들에 대해 제자들이 받았던 주관적인 인상들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주장

2> 다음은 신화적으로 표현했다고 하는 것으로 화자들이 예수의 의미를 창출해 내기 위하여 구약의 이적 기사들로 부터 가져온 요소들을 예수에게 부과했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단슨화된 힙리주의가 거듭되었으나 연구 방법론은 실질적인 내용에 대한 비평과 역사적 비평 양면에서 고도로 차별화 되었고 정교하게 되어왔다. 그러나 적절한 평가는 고대인들의 세계관에서 이적이 가지는 중요성에 대한 인식에 좌우된다.

2) 예수 당시의 세계관에서 이적들

예수의 이적은 고대인에게는 당연한 것이나 현대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라는 말은 과거의 역사적 현실을 간과할 수 있게 한다.

(1) 신약시대의 헬레니즘의 세계: 이 시기는 이적에 의한 치유와 의학적 시술을 나누는 경계선이 엄격하게 그어지지 않았던 시기이다. 고대의 세계관은 현상들의 합리적이고 자연적인 측면과 비합리적이고 신화적인 측면이 융통성있게 서로 교차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이러한 환경은 그 둘을 구분하는 오늘날의 세계관과 달랐고 이는 헬레니즘적인 이적 이야기의 배경을 제공해 준다.

(2) 예수 당시의 유대 상황: 이스라엘 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마술적인 세계관을 몰아냈다.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말씀이 어느 정도 왜곡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의 말씀에 따라 세계의 사건들을 이루어 간다는 것이 예수 당시의 유대상황 이었다. 이런 이유로 치료의 주된 수단은 기도였고 의술은 부차적인 보조 수단으로 인정되었다. 치유가 중보 기도를 통해 이루어진 것에 대한 이야기가 나돌았다. 그러므로 공관 전승이 예수의 치유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은 유대 환경에서는 그 유비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이는 엘리야와 엘리사에 관한 구약의 이야기들을 통해서만 유대인에게 친숙하였다. 이런 배경에 비추어 복음서의 이야기들은 전승사적 검토를 받아볼 필요가 있다.

3) 전승 비평에 관하여

이적 이야기에 관한 거의 모든 학문적인 주석이 전승 비평적 분석에 관심을 갖는데 볼트만의 입장만큼 철저한 회의를 바탕으로한 분석이 없다. 이 입장을 통해 전승 비평에 관한것을 전개해 보면, (1) 전승 관정에서 이적 이야기들은 중복과 이본을 통하여 여러 종류로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마가로 부터 마태와 누가로 그 전승이 옮겨가는 과정에서 관찰될 수 있다. (2) 사람들은 전승에서는 이적적인 요소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고 이야기 한다. 9:35와 같은 부분은 예수의 치유를 일반화하고 있다. (3) 부활절 현현에 나오는 요소들은 때로 부활절이전의 시기로 투사되었던 것임에 거의 틀림없다. 그러나 부활절 이야기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변화산 사건의 도출은 불가능하다. (4) 예수의 말씀들이 이야기로 변화되었다. (5)예수의 환경이전에 있던 이적 모티브들을 어느 정도 받아들여서 그것을 예수에게 적응했느냐 하는 문제들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나 예수의 이적에 걸맞는 구약의 유비는 거의 없다. (6)전승 비평의 결과: 1> 이적 이야기의 형성과 전승 과정에서 적지 않은 증보와 치한이 일어났다. 2> 귀신들린 사람이나, 병에 걸린 사람들에 대한 치유를 세례 요한이나 쿰람의 의의 교사에게 전가하지 않았다. 3> 자연 이적에 참여한 사람들은 제자들이었으며, 오직 그들만이 기적적인 사건에 대해서 우리들 가운데는 놀라워 하는 어떠한 말로 들리지 않는다.

4) 내용 비평 (Sachkritik)에 관하여

(1) 자연과학적 입장에서 가능하지 않은 것은 역사적으로 일어날 수 없다는 원칙은 아주 제한적인 의미로서만 적용될 수 있다. 자연과학들 속에 이적들을 위치시키기 위하여 자연과학들의 간격들을 부여잡는 것은 더 한층 잘못된 것이다. 이 문제는 철학적 신학적 반성을 필료로 한다.

(2) 신학적 문제 제기 방식의 표명도 허용되어야 하는데, 신학적으로 실제로 무엇이 문제가 되는가? 실제로 복음서의 이적 이야기들은 하나님에 관하여 숙고해 볼 기회를 제공하여 왔다. 이에 대한 지성의 제물은 잘못된 것이다. 세계의 수리화가 가능하다는 합리적 사고 방식과 믿음에 의한 하나님의 대항적 현실에 개방되어 있는 합리적 사고 방식은 구별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대항적 현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에 관한 이적들 속에서 만날 수 있는가? 외부로부터의 역사적-철학적, 신학적-체계적 문제 제기 방식에서 내부로부터의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 예수에게서 그 이적들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15. 예수의 이적들의 신학적 의미

1) 용어 사용에 대하여

복음서들이 이적을 어떻게 이해하였냐는 이적들을 가리키는 명칭을 고찰해 봄으로써 부분적으로 알 수 있다. “이적”-semeia,terata,dynameis 1) 신약에서 이 용어들은 칠십인역으로부터 빌어왔다. “to teras"는 신들의 경고 또는 격려 표지(prodigium)를 의미했고 이는 항상 세메이온과 결부하여 하나님의 이례적인 사건들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 따라서 테라서는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이례적인 사건들을 가리킨다. 이를 우리는 간단히 이적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세메이온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사건, 특히 하나님이 도울 준비가 되어있는 사건을 말한다. “표적이라는 말을 통하여 의미를 재현할 수 있다. “뒤나미스는 역사를 형성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었다.신약에서는 하나님의능력있는 행위라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2) 복음서에는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가? “세메이아 카이 테라타라는 정형적인 표현은 한번 발견되며 막13:22par은 거짓 선지자들의 이적과 기사에 대해 말한다. “세메이온은 유대인들이 예수에게 요구했던 표적을 지칭했다. 이 용어는 공관 복음서에는 부정적으로 요한에서는 긍정적으로 사용되었다. “뒤나메이스는 말씀과 설화들속에서 예수의 이적들을 말했다. 따라서 예수의 이적들은 역사속에서 구원을 수행하고 구원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표현되었다.

2) 이적들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

(1) 예수는 자신의 이적 사역을 구약 예언의 말씀으로 기술하며 베일에 쌓인 언어로 주장하였다. 구원의 때를 위한 약속은 이적과 설교를 통해 나타나지만 이를 객관적인 것으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구약의 엘리사에 관해 말하는 것 이상이 아니었다. 이는 예수의 이적은 엘리사의 이적들 이상의 어떤 의미가 있는가?

(2) 예수와 엘리사의 이적은 근본적으로 두가지 점에서 다르다. 1> 예수의 이적은 형벌의 기적은 없다. 이는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가져왔다는 것과 일치하며 자신의 종말론적 구원을 처리하는 방식과 일치한다. 2> 예수는 자신의 이적사역을 믿음과 결부시켰다. 이는 전시용 이적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곤경에 처한 자들을 돕는 이적도 믿음을 도입하였다.

3) 믿음과의 관련성

(1) 배경: 슐라터는 신약의 말씀들은 예수에게서 연원한 것이며 종교사적인 전례가 없다고 했으나, 자유주의 및 종교 사학자들은 초기 기독교를 직관적인 통찰 또는 경험에 따라 이해하였다. 볼트만은 특히 바울에게서의 믿음이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하였으나 바로 이런 점에서 믿음이 예수의 결정적 선물임이 밝혀진 것은 역사적 예수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였다.

(2) 전승사적 분석의 발견들

믿음에 관한 진술들 중 공동체의 전형적인 언어와 유대적 상황과 구별되는 예수에게로 소급되는 진술들이 있다. 예수가 오로지 믿음에 대해서만 구원을 약속한 것은 새롭고 유일무이한 것이었다. 구약도 모든 구원이 믿음에서 올것이라고 하였으나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고 했더라도 표현이 달랐다.

(3) 예수의 사역과의 관계

믿음에 대한 예수의 독특한 언급은 자신의 전 사역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공적인 설교의 결과보다 예수의 인격과의 직접적인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서만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이 믿음을 통하여 예수의 전 사역을 통하여 추구하였던 바로 그것이 현실로 되었다. 믿음은 예수의 사역에 심장부 였다 이것의 이해는 내용 및 그 토대를 자세히 살펴보면 알 수 있다.

(4) 믿음의 내용

예수는 경건한 유대인들의 고지식함, 객관적인 지식, 확신의 상태를 믿음이라고 보지 않았다. 개인이 구체적인 상황에서 자기로부터의 도움과 보장을 버리고 예수안에서 도움을 바라고 발견하고자 했을때 믿음은 처음으로 나타났다. 믿음은 현상을 깨뜨려야만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깨뜨림도 하나님을 지향한 믿음이 아니라면 아직 믿음이 아니다. 에벨링에 따르면 믿음은 하나님과 결부되어 있지만 인간의 의식의 변화를 의미했고, 믿음의 내용을 채우는데는 어떠한 특권도 허용되지 않았고 믿음은 확신, “구원 자체였다. 이 믿음은 자신을 향하는 (pistis)가 아니고 상대방 앞에서 그가 약속한 것을 믿는 믿음으로(he' emin)이었다. 이는 이간 실존의 전환점이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행위는 이러한 신뢰를 통해 나타났다.

(5) 믿음에 관한 말씀들의 토대와 출현

믿음이 이러한 식으로 제한이 가해질 때 그러한 것이 예수를 통하여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도 분명해진다. 에벨링에 의하면 이것은 자신의 설교와 실존에 반영되어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예수 자신의 확신을 통하여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하나님으로 부터 인간 존재에게로 사랑의 통치가 이루어진다.

4) 믿음- 이적에 의한 치유- 하나님 나라의 도래

(1) 예수는 자신의 치유 사역이 행동을 통한 성취 또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믿음이 출현한 곳에서 모든 것이 온전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은 결정적으로 실현되었다.

(2) 이와 관련해 육체의 치유가 꼭 필요했는가? 질병과 치유는 내용적으로 믿음과 아주 근사하다. 질병의 체험을 통하여 사람은 죄와 사회적 배척을 통해서 자기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사람임을 깨닫게 된다. 믿음의 출발점은 혼란한 체험이며 육체적 측면의 온전케하는 예언에 의하면 필수 불가결한 요소다.

(3) 예수의 지상 사역에서 육체적 구원은 새로운 차원의 베일에 쌓인 표지였다. “새로운 것”(novum)-하나님의 나라-은 그 사역속에 현존하고 있었다. 이에 덧붙여 지상사역에서의 예비적인 상징적 이적들은 부활절 이후의 공동체를 향하여 무엇을 이야기해야 했던가?

5) 이적 이야기들의 케리그마적 의미

이적 이야기들이 부활절 이후의 공동체에 대하여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1)이적 이야기들은 본보기을 통하여 믿음으로 이끄는 역할을 하였다. 사람들은 본보기를 통하여 믿음이 어떻게 나타나며 믿음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알게되고 자신의 변화된 상황속에서 스스로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게 된다. 부활절 증언은 믿음으로 이끌었으며 믿음에 관한 말씀은 교회의 출현속에서 성취되었다. 또한 제자들이 자기들에게 주어진 약속에 따라 행할 것이고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역사하실 것이기 때문에 제자들은 화평을 가져올 것이다.

(2) 두번째 케리그마적 효과는 공동체속에서 자신의 성령을 통하여 활동하고 계시는 분이 누구인가를 표현하고 있다. 아울러 예수가 믿는 자들에게 구주로 자기 자신을 계시하였다는 것을 보아야 했다. 공동체로 하여금 비록 형태는 달라도 동일한 방식으로 승귀하신 분으로부터 자신들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을 깨닫게 하였다. 이는 예수의 어떤 사람이기를 원했는가? 라는 물음으로 귀착된다.

 

6 장 예수의 자기 이해

16. 예수의 자기 이해에 대한 연구사

예수는 약속된 메시야라는 것을 독일에서는 종교사학파와 그 뒤를 이은 불트만 학파의 저술들속에서 의문시되어 왔다. 예수의 메시야 의식은 한편으로는 하나님 나라와 관련하여 또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메시야 개념들과 관련하여 문제가 되어 왔다.

1)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와 예수의 관계

예수는 자신의 존귀한 위치를 자기 메시지 가운데 따로 구별되는 주제로 삼지 않았다. 그는 전승 속에서 그에게 돌려졌던 메시야에 관한 명칭들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스스로에 대하여 주장하지 않앗다. 물론 메시야적 개념들은 그에게 적용되었지만, 그는 그 모든것을 기각하였고 실제로 실망으로 끝나게 하였다.

2) 예수와 구원을 가져오는 자에 대한 구약 및 유대의 기대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종교사학파는 구약 및 유대의 메시야 개념들의 척도에 의해 판단해 보면 예수의 지상 사역은 메시야적이 아니었으며, 그 명칭들도 자기에게 적용하지 안았고, 이러한 평가의 근거로 초기 기독론의 형성과 공관복음서 전승 비평을 들고 있다. W.Wrede는 메시야 비밀과 초기의 기독론, 그리고 예수 자신의 입장을 세밀하게 검토하였다. 하지만 이와 관련된 어떤 것도 만족할 만한 해명을 주지 않았다.

17. 예수와 그에게 붙여진 명칭들

1)랍비

(1)예수는 근본적으로 서기관들의 논의-할라카-를 기각하고 자신의 명령들을 율법과 대치되는 위치에 놓고 율법의 효력을 중지시켰다. 그는 개혁을 통해서가 아니라 종말론적 성취를 통해서 율법의 효력을 중지시켰다. 쿰란의 의의 교사와는 대조적으로 토라를 급진화했을 뿐 아니라 예언의 성취가 시작되었다는 전제위에서 행동하였다.

(2)예수는 추종자들을 얻는 방식조차도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랍비를 추종하는 자는 자신의 스승을 스스로 선택하였다. 하지만 예수의 추종자들은 유대적 환경 속에서 전례가 없었던 한마디 명령, 나를 좇으라를 통하여 부름을 받았다. 그 목표에도 예수의 추종자들은 랍비의 추종자들이 자연스럽게 랍비가 되는 것과는 달리 예수와 같은 랍비가 될 것이 아니었다. 예수가 유일한 선생이었다. 예수의 제자도는 이후에 유대교에서 랍비 제도를 알지 못하는 분파였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가장 초기의 공동체에서 표준적인 인물은 예수의 대표자이자 증인인 사도가 되었다. 이후에 기독교 선생들은 랍비에 비견될 수 있는 기능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예수는 랍비라 칭함을 받는 데 동의하였고 어느 정도는 서기관의 특징들을 지니고 사역을 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충분한 명칭이 되지 봇했고, 기독교 공동체는 그에 걸맞는 어떠한 명칭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예수는 가르쳤을 뿐 아니라 널리 선지자로 생각되었다.

2)선지자

(1)공관복음서 전승에 보면 예수는 엘리야, 세례요한, 옛 선지자 중의 하나였다.

G.Friedrich는 원래 사람들은 예수를 당대의 선지자들 중의 하나로만 생각하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2)예수와 세례요한의 이야기에서 예언은 세례요한에게서 절정과 목표에 도달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에 하나님의 통치가 도래할 것이었다. 그렇다면 예언을 이런 식으로 되돌아보고 있는 인물인 예수는 누구였는가?

(3)“요나보다 큰 이즉 선지자들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 회개로 부르고 있고, “솔로몬 보다 큰 이즉 솔로몬을 대신한 하나님의 지혜의 계시가 여기에 있다고 하고 있다. 구약 및 유대전승에 잘 알려져 있었던 해석학적 원리, 소위 모형론이 그 말씀들 배후에 자리를 잡고 있다. 종말의 때는 과거에 선포된 구원의 때를 완성하는 갱신을 가져올 것이다. 예수는 자기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는 종말 때의 선지자라고 공식적으로 주장하지 않았다는 점이 특징이다..오히려 베일에 싸인 독특한 어법으로 예수는 자신의 사역의 정수에 관하여 말함으로써 문제의 진실을 드러내었다.

3)다윗의 자손

(1)“다윗의 자손은 종말 때의 구원의 왕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였다.

(2)예수는 이러한 개념들을 스스로에게 적용하였는가? 메시야는 다윗의 자손인가, 다윗의 주인가? 예수는 시110:1에 따라 메시야는 다윗의 주가 되어야 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3)신약 기자들 가운데 마태만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명칭에 강조점을 두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변증의 목적을 가지고 오랫동안 기다렸던 메시야가 예수를 통해 왔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회당에서 지배적으로 사용되었던 약속된 자에 대한 명칭은 예수의 지상사역에서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마도 에수는 이따근 외부인에 의해서 이런 호칭으로 불렸을 것이다.

4)메시야

(1)구약 이후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기름부음 받은 자는 왕의 시편들에 대한 종말론적 해석에 힘입어 종말 때에 구원을 중보하는 자를 가리키는 호칭이 된다. 그것은 이중의 의미로 일반적으로 다윗 계열의 구원의 왕이었다. 드물게는 종말 때에 구원을 중보하는 자를 의미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2)복음서 기자들은 때때로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1:1,12:35,베드로의 신앙고백,예수의 재판 장면)

(3)“그리스도에 대항하는 소송 절차에서(14:61 PAR.) 예수의 대답이 역사성의 논의가 있다. 하지만 그러한 것과 무관하게 예수가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 즉 구원의 왕으로 나타내고자 했다는 의심을 받았고 이에 따라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것은 여전히 기정 사실이다.

(4)베드로의 신앙고백에서 중요한 것은 에수가 그 신앙고백이 표현하고 있는 바와 같았느냐의 여부이다. 마가는 예수가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현재에 도래하게 하고 있는 분, 자기를 통하여 약속을 성취하고 있는 분이라는 이유때문에 그 신앙고백을 자신의 복음서 한 가운데 놓았던 것이다. 이 본질적인 고찰은 역사적 개연성에 관한 판단에 의하여 밑받침되고 있다. 예수는 부활을 통하여 메시야가 되었다.

5)메시야 비밀

(1)마가복음의 복합체들은 세 부류의 침묵 명령(1:25,1:44,8:30)과 수수께끼 같은 강화(4:11)가 있다.

(2)마가의 전승 자료에 독특한 메시야 비밀의 그 개념의 핵심적인 내용은 비밀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믿음에 대한 지식이었다. 비밀에 대한 지식은 대중에게는 은폐된 주제를 포괄하고 있었지만, 빋음에 대한 지식 자체는 언제나 의심과 싸워야 했다.

(3)수수께끼 강화에서 비밀이라는 용어는 유대교 및 초기 기독교의 언어 용법에서 종말의 때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가리켰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하나님 나라의 종말적 도래의 양태였다. 예수 전승에서 이 비밀은 하나님 나라의 임박한 도래가 아니라 예수의 사역 속에서의 그 현재적 도래 및 그 본질적 의미였다. 이 비밀의 인식은 실제로 제자들에게만 하나님에 의해 주어졌다”. 예수의 사역의 본질적인 의미, 하나님 나라의 임재, 에언의 성취, 약속된 분에 관한 가장 오래된 전승층에 나오는 모든 진술들은 특히 베일에 싸여있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에 수수께끼 같은 강화라는 특징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을 통한 구원의 게시라는 이 은폐는 예수의 지상 생애 동안에 수수께끼 같은 강화를 통한 은폐라는 사실을 조건지웠다.

(4)마가는 메시야 비밀과 그 전승으로부터 제자들에게 예수의 메시야됨을 알게 함, 침묵 명령, 예수의 승귀 때까지의 오해라는 구도를 발전시켰다. 이러한 구도의 도움을 받아 마가는 복음서라는 장르를 형성하였고 그와 아울러 독자들에게 어떤 사람이 예수를 약속된 분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개인적인 성취의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발견하도록 한 선물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18. 인자

1)공관복음서에서 70번 가량 사용했다. 하지만 그 것은 를 나타내지는 않았다. 그 것은 유대의 묵시론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었던 것처럼 공관복음서에서 종말의 때에 구원을 가져오는 자를 가리키는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요한복음에 12, 스데반의 죽음 때에 독자적으로 1, 다니엘서 7:13로부터의 인용문으로 두번, 시편 8:6(2:6)으로부터의 인용문으로 한번 나온다.

2)전승사적 기원을 보면, 분명히 인자라는 호칭은 헬레니즘적 교회의 기독론에서 사용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호칭은 주후 100년경에 쓰여진 요한복음에 나타난다. 공관복음서 이외에 인자에 관한 몇몇 진술들은 모두 예언적 환상들(VISIONS)이었다(7:56; 1:13ff.; 14:14). 그러므로 인자 기독론은 오로지 원래 초기 기독교적 예언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3)말씀들의 부류 및 그 기원에 관한 논의에서 보면, 공관복음서의 인자의 개념은 가까운 미래에 세상의 심판자로서 나타날 것이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 죽음을 겪고 부활하여야 할 것이다. 그는 다가오는 고난의 선포의 주인공이었다. 또한 인자는 완전한 권능으로 또는 겸비속에서 이미 현존하고 있다. 불트만에 따르면 최초로 예수를 인자와 동일시한 것은 공동체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공공연하게 선포되었지만, 인자의 오심은 제자들에게 직접적으로 고해졌다. 어쨌든 본질적인 출발점은 다니엘 7장에 따라 도래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묘사하였던 묵시문학적 인자였다.

4)인자는 기능상 세상의 심판에서 증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한 심판자였다.

다니엘서 7장에서 세상에 대한 통치권이 수여되고, 에녹137-41장의 비유적 강화에는 종말에 세상의 통치자로서 뿐만 아니라 세상의 심판자로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되어 있는 선재하는 하늘의 인물이었다. 에스라 4서에서는 다니엘서처럼 다시 한번 기본적으로 묵시문학적 환상의 인물이었다. 공관복음서에서 인식되는 인자는 어떠한가? 제자도로 들어갔던 사람에게서 세상의 심판자는 그 제자를 아는 자로서 자리를 잡을 것이다. 제자도 안에서 끝까지 견디는 자들은 누구나 영원히 구원을 받을 것이다. 예수는 자신이 인자 개념을 모델로 사용하여 그것이 자신의 사명의 핵심적인 표현이 되도록 내용을 채웠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5)현재적 인자에 관한 말씀에서, 불트만은 막2:28,2:10의 두 진술을 인자의 원래 호칭이 아니라 에 대한 완곡어법으로 보고, 콘첼만은 이 두 말씀은 예수에게 특유한 권세를 의도했다고 올바르게 말을 했다.

6)인자의 고난은 수난을 통한 자신의 생애 완성을 가리키고 있다. 이것은 마가에서만 강조되고 Q자료에는 결여되어 있었다.

7)예수의 고난과 죽음은 약속된 자에 관한 성경의 예언과 일치한다는 것이 열심히 가르쳐졌다. 그런데도 성경에 나오는 그에 걸맞는 진술들은 거의 확인될 수 없었다. 약속된 자의 고난이라는 개념은 예수 당시의 유대교에 전혀 친숙하지 않은 것이었다. 에녹1서와 에스라4서에 나오는 인자의 심상들은 고난에 대한 언급을 전혀 포함하고 있지 않았다.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순교당하는 선지자에 관한 묘사는 메시야적으로 해석되지 않았다. 약속된 자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고난받아야 한다는 개념은 예수 당시의 환경에서는 생소한 것이었다. 이것은 예수가 고난의 길로 가는 것을 제자들이 완강하게 저항하는 것을 통하여 생생하게 볼 수 있다(8:33). 고난 예고들은 예수의 인생 역정이 하나님의 구원 게획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예수는 하나윔(’anawim)’, 특히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그 길을 따라 갔다. 예수가 스스로를 하나윔으로 이해하였던 것만큼이나 그의 인생역정은 여러 가지 개념들로 미리 묘사되었다. 예수는 시편 22, 이사야 53장을 자신에 대한 예고로서 적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나 기본적으로 예수는 그것들의 도움을 받아 모든 경건한 이스라엘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인생 역정을 성경에 비추어 이해하려고 하였다. 그는 성경에서 한 구절도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인생 역정을 성경에 준거하여 말하였다. 다가오는 고난 예고들은 재난의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한 예고들이 아니었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의 인생 역정이 하나님의 구원의 뜻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항 방식이라는 것을 이해시키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8)대속으로서의 예수의 죽음은 예수의 모범적인 행실 즉 섬김의 견지에서 설명되고 있다(10:45,20:28). ‘섬기다라는 동사 ‘diakonein'은 교회에서의 행실과 관련된 전문용어가 되어 있었다. 또 그 기본적인 의미와 동일하게 식탁에서 시중드는 것을 의미하였다(1:13, 31; 15:41). 이 심상에 따라 공동체에 사는 사람은 섬겼다”. 사람들은 힘과 권리를 사용하여 지배하려 하지 않았고 사란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필요에 따라 다른 사람들을 도왔다. 예수는 권리와 자기 자신을 세우기 위해 힘을 사용하지 않았고, 사람들을 믿음으로 이끌어 하나님의 통치속으로 포용하기 위하여 유일무이한 권세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었다. 이것은 특히 예수가 식탁교졔를 허용한 방식을 통하여 뚜렷이 드러났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의 통치에 속하는 것은 오직 섬김을 통해서만 그 의미와 효력을 가질 수 있었다. 10:45의 말씀에 따르면 그의 죽음 자체가 섬김의 행위였다. 예수의 죽음은 섬김에 바쳤던 자신의 일생 가운데서 최후로 주는 행위였다.

많은 사람”(52:14f, ; 53:11f.)과 막14:24, 26:28에 따르면 이 두 경우 모두에서 그 의도는 예수는 하나님의 종과 마찬가지로 모든 인류를 위한 속죄로서 대신 죽었다는 것이었다. 예수의 죽음은 그 핵심적인 구조의 견지에서 모든 사람을 위한 속죄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죽음으로써 그도 모든 사람의 불의에 대해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을 스스로 짊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는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헌법적인 기준인 율법의 거룩을 굳게 세웠다.

그러나 그러한 속죄의 개념은 예수가 자신의 지상 사역 동안에 사람들에게 허용하였던 단순한 죄사함과 모순되는 것은 아닌가? 진지하게 자기 잘못을 뉘우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으며 속죄의 희생적 죽음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홀츠만의 평가에 많은 사람은 의견을 같이 했다. 하지만 예수는 참회를 요구하는 것과 같은 어떠한 전제 조건들을 두지 않으면서 스스로 개개인을 돕고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중보함으로써 죄사함을 허락하였다. 이런 이유로 예수의 죄사함은 그의 인생 역정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드려서 죄사함을 수행하고 보증하였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과 백성을 위하여 동시에 중보 기도를 한 선지자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그이 모든 사역은 하나님과의 유일무이한 관계에 의해 수행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자기 이해에 관한 묘사를 이 관게에 대한 고찰로 끝내야 한다.

9)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공관 전승에 따르면 예수 스스로 말한 적이 없었다. 이 호칭은 귀신들을 쫓는 기사에서도 동일한 의미로 등장하였다. 수세와 변모에서 하늘로부터 드려온 음성에 따르면 예수는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왕, 경건한 자, 메시야적 왕과도 구별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는 하나님과 독특한 언약 관계 속에 서있었다. 일부는 편집을 통해 전승층들에 삽입되었다.

이상의 것을 고려해 볼 때 오직 몇몇 예비적인 단계에서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그의 지상 사역 동안에 예수에게 적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호칭의 사용이 구약에 표현된 하나님과의 관계의 구조를 토대로 하고 잇엇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가 이 하나님과의 독특한 유대 관계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기도 속에서의 아바’(abba)라는 호칭은 자녀가 친밀감과 신뢰감을 가지고 아버지를 부르는 말이었다.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부름으로써 예수는 독특하게 친밀한 유대 관계와 헌신을 증거하고 있었다. 예수는 이러한 관계를 제자들에게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내 아버지너희 아버지를 예수는 구별함으로써 아버지에 관한 예시적인 말을 좀더 나아가게 했다.

절대적 용법:“아들아버지”. 11:27 및 그 병행구에 따르면 예수는 자기가 무제한적인 권한 위임과 하나님에 대한 독점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 전제 조건으로 주장하였다.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예시적으로 말한 그 독특한 방식은 부활절 이후의 기독론의 실질적인 토대가 될 수 있었고, 특히 곧 등장하였던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는 신앙 고백을 의미심장하게 채울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이 심상으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구약 전승으로부터 가져왔다.

 

7 장 예수와 교회

A.Loisy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예고했고, 이것은 교회였다.” 예수는 교회를 세우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가?

19. 제자도와 하나님이 통치하는 백성들

1) 예수의 목표: 모든 사람들의 회개

예수는 자신의 사역 기간 동안에 하이레시스’(hairesis, 학파 분파, 15:5, 26:5) 또는 분파를 세우려는 시도를 결코 하지 않았으며, 요한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이스라엘을 통하여 사역하고, 그는 모든 사람을 회개로 불렀고, 모든 사람을 도래하는 하나님의 구원으로 초대하였다. 하지만 그는 주도적으로 어떤 집단을 형성하지 않았다. 예수가 하나님의 통치를 위하여 요구했던 회개는 제자도 또는 예수가 개개인들과 인격적으로 어울리는데서 비롯되었던 믿음속에서 실현되었다.

2) 예수의 목표: 제자도와 믿음

(1) 회개와 제자도

예수는 독특한 명령을 통해 사람들을 모아 지속적인 교제의 삶을 살도록 하였다.

나를 따라오너라.”--아콜루데인, “따르다자기와 함께하자는 예수의 도전은 자기의 문도가 되라는 초청의 의미로 이해될 수 있었다. 이속에 새 의미와 사역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알렸다.

1> “나를 따라오너라는 접근 방식은 랍비의 방식도 아니고 오직 구약에서 선지자들을 부르신 것과 비견될 수 있었다. 그러한 부르심은 어떠한 학파의 설립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새로운 형태의 교제로 이끌었다. 2> 그 부르심 자체가 회개에 대한 요구의 전체 중량이 집약되어 있었다. 제자가 된 사람은 자기 십자가’(8:34)를 졌다. 즉 자기 자신을 사망 선고 받은자로 여겼다. 이런 사람은 역사적 실존으로 부터 놓여나서 종말론적 실존으로 불림을 받았다. 3> 이 부르심은 단지 절대적인 요구로서만이 아닌 절대적인 은혜의 시현(示顯)이었다. 그러므로 제자도는 하나님 나라로 이끄는 좁은 길이었다. 공관복음서 전승은 예수의 인격과의 관련, 제자도 혹은 믿음을 통하여 전달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에의 참여에 관하여 알지 못했다.

(2) 제자도와 교회의 출현

예수가 시간과 공간에 묶여 있는 동안에는 그의 사역의 성격은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이었기 때문에 그 사역의 목표는 역사 무대의 주어진 상황내에서는 달성될 수 없었다. 예수의 지상사역은 그 자체를 넘어 모든 사람들이 예수의 인격과 연결될 수 있는 때를 가리켰다. 실제로 이것은 예수는 교회를 셰우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결정적인 답변이다. 예수의 사역은 그 자체를 넘어 자기의 죽음 직후에 모든 사람들이 눈으로 분명히 보게 될 하나님의 통치의 극적인 도래가 아니라 교회의 때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러한 결론은 예수가 제자들의 무리에 대해 의도하였던 것에 관하여 예수 스스로 시사적으로 말했던 것과 일치하였다.

3)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의도

예수의 의도는 두 전승 복합체에 시사되어 있다.

(1) 열둘이라는 숫자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용어

마태복음 19:28은 이스라엘의 열두지파와의 관련성을 도출하였다. 26:7에서는 이스라엘을 열두지파를 가진 백성으로 비유적으로 언급하였다. 따라서 제자들에게 열둘이라는 숫자는 두 가지를 의미할 수 있었다. 1> 예수는 전체 약속의 백성을 하나님의 통치로 불렀다. 2> 예수는 열두 지파로 된 새로운 백성을 창출하기를 원했다. 백성이라는 개념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통치의 일부였다. 예수는 열두 제자 속에서 하나님 백성의 선포 또는 일종의 상징적 예표를 보았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예수의 생애 동안과 마찬가지로 그 이후에도 하나님의 통치는 제자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의 사역을 통해서만 나타내었다.

(2) 위탁과 사도직

위탁의 모델은 랍비 문도의 서양식이 아니라 비종교적인 제도의 모델 즉 법적인 거래에서 위임장으로 한 개인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1> 6:7,30, 10:2- 열둘이 사도로 지칭된다. 2> 누가복음 - 사도와 열둘을 동일시 하였다. 3> 고전15:3-7전승 - 사도들의 숫자가 원래 열둘을 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전승 자료들은 예수가 자기 제자들과 관련하여 이중의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1] 예수의 제자집단은 모든 사람들을 포괄할 하나님의 통치의 나라를 상징적으로 가리켜야 한다. [2] 제자 집단은 개인을 대표하는 일을 부여받은 수임자라는 의미에서 예수의 사역을 수행하여야 한다. 그렇지만 이 두가지 측면은 실제로 암시만 되어있기 때문에 절대적인 확실성은 결여되어 있다고 하겠다. 이 두 측면은 베드로를 향한 말씀에 표현되어 있다.

4) 베드로를 향한 말씀

16:17-19은 원래 예수로부터 유래하였다고 할 수 없다. 이 말씀은 아람어를 모델로 하고있다. 그 용어 사용은 이 말씀이 초기 팔레스타인 교회의 시기에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말씀 자체는 예수 자신의 기대에 관한 정보가 아니라 가장 초기의 회중의 자기 이해에 관한 정보를 전달해 준다.예수 사역의 지속과 선포는 최후의 만찬에서의 진술들로 부터 도출되어야 한다.

20. 약속으로서의 최후의 만찬

1) 최후의 만찬에 관한 전승사적 분석에 대하여

(1) 14:22-25, 26:26-29, 고전11:23-25, 22:15-20 문헌적으로는 고전 11장 기사가 가장 오래된 것이고 전승사적 견지에서는 마가가 오래된 것.

(2) 이 기사들의 삶의 정황은 예수의 지상사역에 관한 교리문답이 아니라 성만찬을 거행하는 전래였다.

(3) 이 전승은 고전 11:23에 따르면 A.D. 50년 경에 바울은 이 전승을 공동체에 전해주었다. 다메섹 회심 직후의 바울 자신은 그 전승을 전해받았을 것이다. 역사성의 문제에 대한 의문 제기

1> 불트만- 문자적으로 성례적 친교를 의미한다고 주장. 이것은 신비종교들의 헬레니즘적 경건으로 부터 한 요소를 취해온 것이다.

2> H. Lietzmann- 2:46 예루살렘의 유대공동체는 그 예배의식에서 종말론적 기쁨을 주조로 하는 성찬을 매일 거행하였다고 한다. 반면에 식사에 대한 바울전승은 예수의 죽으심에 의해 형성되었다. 초대 공동체의 성찬 거행과 바울의 성찬과는 다를 유형의 식사였다.

3> 하이트 뮐러와 불트만- 고전11장 전승은 헬레니즘적 교회에서 나온 원류가되는 제의 전설이었으며 바울은 그것이 기원했던 공동체인 안디옥에서 빌어왔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4> 예레미아스와 쿤(K.G.KUhn) -어원학적으로 팔레스타인 유대교로 부터 유입하였다.

(4) 마가는 그의 기사 도입부에서 예수의 최후의 식사는 유월절 식사였다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이러한 언급과 반대되었다. 역법상의 차이로 해명될 수 있다. 예레미아스는 마가의 입장을 논증하지만, 쿤은 그 증거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러므로 성찬 기사들이 유월절 식사라는 일반적인 배경을 전제하였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결정적으로 입증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5) 이 전승은 네가지 전승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1> 종말론적 말씀 2> 떡에 관한 말씀, 3> 잔에 관한 말씀, 4> 반복 시행의 명령(고전 11:24, 22:19) 독립적인 종말론적 말씀부터 살피고자 한다. 이 말씀이 예수로 부터 유래했다는 것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2) 종말론적 말씀

(1) 종말론적 말씀의 식사의 구조속에서의 위치 막14:25, 26:29은 끝에, 22:15-18에서는 유월적 식사의 첫번째장과 관련하여 처음에 나온다.눅은 주의 오심에 대해 종말론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2) 14:25의 선포는 예수와 제자들이 함께 모인 이 식사를 완성때의 식사를 가리키는 고별 식사로 규정하였다. 후자는 중간기 이후에 올 가까운 미래에 기대되었다.

(3) 중간기에서의 예수와의 교제는 어떻게 유지되는가? 종말론적 말씀속에 새로운 종류의 공동체를 함축하고 있었다.

3) 중간기의 문제

예수는 중간기에 대한 프로그램을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종말론적 말씀에서 이것을 언급하였고, 종말론적 말씀에서 본질적인 것은 새로운 종류의 교제일 것을 약속하였다. 실질적으로 예수의 전체 사역은 자기 죽음 이후의 파루시아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예수에게 붙어있는 것이 가능한 중간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러므로 식사전승은 바로 예수사역이 막바지였다. 왜냐하면 예수죽음 이후에 지상의 예수와의 식탁교제를 대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4) 새로운 자기 헌신

(1) 떡에 관한 말씀 앞에는 간단한 도입문이 나와있다. :유대 가장처럼 행동함. :“이라는 용어의 의도-()소마 바사르 : 인간존재. 사람을 의미. 사람. 지체. 따라서 이러한 이해를 적용하면 :사람인 나, 역사적 실존으로서의 나, 나는 제자들이 먹고 있는 ”. 즉 떼어서 나누어준 떡이다. 주어질 것은 방금 선포된 죽음 이후에 만나게 될 바로 예수 자신이었다.

(2) 잔에 관한 말씀 앞에 있는 도입문 (14:23 26:27): 유대 관습에 따라 흘리는 바 피는 희생당한 피, 즉 죽음이었다. 그것은 많은 사람을 위한”,즉 모든 사람을 위한 죽음이었다. 53:12에 준거하여 형성된 이 표현은 보편적인 구속을 선포하였다. 더욱이 그 죽으심은 언약”,즉 사람들을 자기와 특별한 관계에 놓기 위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것을 전달하였다. 예수의 구속적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자기와의 새로운 유대관계,“언약에 놓았다.(31:31) 고전 11:25도 약속된 새 언약이었다. 고전10:16의 전승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 즉 십자가에 못박힌 자로서의 그에 참예함은 잔을 통하여 전달되었다. 그러므로 떡과 잔에 관한 말씀들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선물, 즉 예수 자신을 제공하였다. 전자는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를 후자는 그의 섬김의 사역이 목표로서 도달한 바 죽음을 더 강조하였다. 주어지고 있는 것은 그의 지상 사역 및 무엇보다도 그의 죽으심을 통하여 자격이 주어진 예수 자신이었다.

(3) 두가지 해석

1> 불트만 - 헬레니즘적 공동체를 배경으로함. 십자가에 못박힌 몸.

2> 예레미아스 - 예수는 그의 죽으심의 구속하는 능력에의 참여를 주었다. 지상 생애 동안에 죄사함을 허용했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주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죽음 이후까지 연장되었고 죽은자로서 자신을 줌으로써 죄사함을 주는 교제를 허락하였다. 주어진 것은 하늘에 속한 몸도 아니었고 영적인 실체도 아니었다. 주어진 것은 구속의 능력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은 자로서의 예수였다.

5) 자기 헌신의 양식

(1) 예레미아스는 떡과 포도즙을 상징적으로 해석하였다.“-이다의미한다를 뜻한다.

(2) 예수는 그가 식탁 교제로부터 배제될 것임을 알렸다. 이 말씀들은 예수가 새롭게 알려질 자기 자신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약속하였다. 식탁교제는 친교의 수단이 되었고 성례적성격을 띠었다.

(3) 불트만은 이것은-이니라는 표현과 함께 그 행위의 성례적 해석을 표현하였다. 이 성례적 의미는 신비종교들의 헬레니즘적 경건으로 도출하여 거기에 따라 이를 해석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 말씀들은 팔레스타인으로 부터 나왔으며 그 핵심적 내용은 예수의 배신의 밤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예수는 비록 인간의 합리성의 연속성 상에서 인간존재로서 서있긴 했지만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유대의 합리적인 전제들의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제공하였다.

(4) 이 사건을 유대의 유비들에 의존하여 이해할 수 없었다. 식탁교제 이후로는 새로운 방식으로 알려질 자기 자신을 제공할 것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말하였다. 부활절 현현후에 예수는 성령을 통하여 역사할 것이었다. 그들에게 임한 성령의 체험은 성례적 친교의 개념을 낳았다.

(5) 최초의 공동체에 의해 거행된 독특한 예배의식은 의례적 식사였다. 부활절 이후에 제자들은 일상적인 식탁교제에 부활하신자의 임재를 상기한 것이 아니라 배신의 밤에 그들에게 주어졌던 약속에 따라 그의 오심을 기다린 것이라고 결론을 내려야 할 것 같다. 그러므로 떡과 잔에 관한 말씀들은 히브리적 사고에 일치되는 것으로서 배신의 밤에 예수의 행동과 관련된 확실한 약속, 다가오는 고난 예고의 내용을 예상하고 기다리는 것이었다. 성만찬을 반복해서 시행하라는 명령은 이 약속을 공동체 식사의 제도로 변화시켰다.

6) 성만찬을 반복해서 시행하라는 명령

고전11:24 이하와 눅22:19에만 나온다 .반복 시행되어야 하는 것은 그 의미로부터 나온 결론이었다. 이러한 헌신을 통하여 예수의 구원 행위는 선포 되었고 현재적으로 효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정기적인 식사제도는 헬레니즘 상황에서의 계약의 규례들과 오직 외관상으로만 조화되었다. 요한복음13-17장의 고별 강화들은 그 전반적인 의미를 발전시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함께 오시게 될 예수의 재림을 약속하였다. 이 고별식사 후에는 겟세마네 기도가 나온다. 만족스러운 설명을 요구하는 우리에게 예수의 수난이 그 자체로 매우 복잡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부록

 

신약신학 분과: 그 역사와 연구 범위

 

23. 연구의 경과

1. 신약 신학의 출현

18c에 시작된 신약 신학은 성경에 대한 역사적 탐구의 한 분과로서 기독교가 현대의 성찰 기법들과의 가장 직접적인 만남을 통하여 생겨난 산물이기에 신학사에 있어서 매력적인 주제이다. 이러한 성경 신학이 출현되기 까지를 알아보면 ---

(1) 초기교회

2c말경에 형성되었던 초기 카톨릭 교회는 예배 의식을 위한 성구집의 형태로 전해져온 사도적저작들을 유일하게 지정하고 규범적인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로 받아들였다. 이 저작에 대한 여러가지 해석의 여지가 있었으므로 초기 카톨릭 교회는 카드홀렌 텐 겐”(전세계에 있는 ) 교회에 의해 받아들여진 가르침과 동일하다는 원칙을 발전시켰다. 이것은 곧 어느 곳에서나 언제나 누구에 의해서나 믿어져 왔던것 이었다. 이 표준은 이단의 모든 주장들에 맞서서 천년이 넘게 확고한 위치를 고수하였으나 교회 전승의 관점과 조화되게 그리고 그 후원하에서 끊임없이 읽혀졌다.

(2) 현대 카톨릭교

전승이라는 개념이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카톨릭에 있어선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긴 했으나 성경을 교회전승과 동일시하는 일은 지속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전승은 교회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영적인 특질을 지니고 있다. 이와같이 진화적인 전승의 개념이 20c중엽의 학문적인 성경연구의 길을 터 놓았다. 현대의 역사적 사고구조는 교회의 목소리가 성경에 대한 역사적 연구를 허용하게 하였고 이 입장의 채택 후 카톨릭의 성경연구는 급속한 발전을 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교회의 전통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주석학적 성서 탐구를 학문적인 추구에 대한 제한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슈나켄부르크는 카톨릭 주석학자들은 자신의 가장 내밀한 싱학적 확신의 견지에서 교회의 권위있는 해석을 필요로 하지만, 그는 문자적 의미를 탐구해 나갈 때 방법론의 의미로서 그러한 것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에게 연구방법론이 아니라 해석학적 토대, 규율하고 측정하는 기구로서 봉사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오늘날의 대표적 견해이다. 카톨릭 최초의 신약 신학은 본시르벤과 마이네르츠의 책들이었고 연구과정에서 개발된 접근방식과 방법론을 제한없이 사용한 책은 슈나켄부르크의 신약신학이었다. 역사적 발전과정이 아니라 신학적 주제들을 독창적으로 조직한 것은 쉘클레의 것이었다. 이 맥락에서 슈라이너에 의해 편집된 개별 신약저작들과 전승층 들의 신학적 의도들에 대한 입문서도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이밖에 독어로 된 카톨릭 최초의 학문적인 신약 주석 총서인 헤르더 주석의 신학적 추기들도 상당한 가치가 있다. 이로서 학문적인 성서 연구는 카톨릭 신학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3) 종교개혁

종교개혁은 18c의 학문적 성경 연구에 중요한 기동력을 제공하여 주었다. 교회의 가르침에 반하여 성경에는 결정적인 타당성이 부여되었고 이 타당성은 계몽운동의 반정립 또는 확장 선상에서 수용되었다. 루터는 당시의 교회의 가르침에서 성경에 접근하였고 몇몇 근본적인 분야의 모순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 모순속에서 성경의 편에서 주석학자로서 자신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는 성경주의자는 되지 않았다. 전통을 비판했으나 거부하진 않았다. 2c이후의 성경과 전통의 관계를 역전시켰다. 전통과 교회의 선포가 아니라 성경이 교회안에서의 정당한 관심의 촛점이 무엇인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양한 성경의 해석이 있는데 어떻게 규정을 정할 수 있는가? 성경이 요구하는 두가지 해석학적 원칙의 적용이 가능하게 되는데, 1> 성경은 성경을 통하여 해석하여야 한다. 2> 성경은 그 중심 그리스도로 부터 해석되어야 한다. 이는 종교개혁의 원칙이 되었으나 이에의한 종교개혁의 해석학은 그 뿌리를 한편으로는 성경의 자기 이해에, 다른 한편으로는 회중의 신앙고백에 두었다. 루터의 해석학적 원칙은 성경은 성경의 유비에 따라 해석되어야 하고 신앙의 유비에 따라 해석되어야 한다. 그러나 신앙은 성경 중심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다. 신앙고백적 진술들과 성경과의 관계는 성경이 최종적인 권위를 가진다. 이러한 실존적인 의미에서 성경은 유일한 준칙이자 규범이었다. 그러나 초기 개신교 신학은 성경신학을 낳지 않았다. 교의학이 학문적으로 탄탄해졌고 이에 반대하여 경건주의가 성경의 타당성을 새롭게 하고자 했으나 여전히 성경 신학은 탄생하지 않았고 성경주의적 교의만이 탄생하였다.

(4) 계몽운동의 시대

성경에 관한 종교개혁의 원칙이 계몽운동 및 그 역사적 사고의 범주들과 접촉 하였을 때 성경신학은 최초로 생겨났다. 역사적 사고는 역사적 어원학적 연구 이상을 의미하였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역사적 사고는 주로 18c와 계몽운동의 산물이었다. 현재를 전통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하여 현재를 과거로부터 분리해 내었다. 이러한 인식과 성찰의 차원으로부터 성경에 대한 역사비평적 탐구의 강령적 관심들이 일어났다. 이것은 곧 성경 저작이 현재에 대한 권리 주장으로서의 말씀이 아니라 과거의 역사적 문서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당시의 문서들과 동일한 방법론에 의해 연구되었다. 그리고 성경 본문이 현재에 의미를 갖느냐 하는 것은 자율적인 이성의 해석에 의하며 해석의 전개의 출발점은 당시의 철학사조, 특히 역사 이해에 의한다. 본문에 대한 역사적 분석과 철학적 해석은 교회 전통에 감추어진 신약의 내용을 전달해 주어야 했다. 이 해석 프로그램이 요구하는 것은 <일반적인 역사 과학의 도움을 받아 본문들을 신학적 과제로 분석하고 현재를 위한 철학적 해석을 행하라>이다. 이는 18c의 제믈러, 19c의 바우어, 20c초의 트뢸취에 의해 토대화, 고전화 그리고 완성되었다. 그러면 이 프로그램의 의의는 무엇인가? (1) 성경이 역사적 문서의 위치로 자리를 잡았고, 신학적인 간접성은 역사적 간격으로 대체되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새로운 성경의 타당성이 해석을 통하여 현대를 위하여 출현할 것이라 소망하게 되었다. (2) 성경에 대한 역사적 탐구속에서 현대의 사고방식은 성경의 메시지와 정면으로 맞서게 되었다. (3) 문제제기 방식은 상당부분 성경 자체에 의해 요구되었다. 성경은 언제나 역사적 맥락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다. 이로 인해 순전히 역사적인성경 연구의 발전 과정의 추적이 필요하다.

2. “순전히 역사적인문제 제기 방식의 전개 과정과 그 결론들

성경에 대한 순전히 역사적인탐구에서 해석학적 문제들에는 세 가지 주요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분석할 때 그것에 대한 윤곽이 잡힐 것이다.

(1)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

새로운 문제 제기 방식의 일차적인 중요한 목표는 교의상의 예수를 역사적인 예수상의 이해로 대체하는 것, 즉 예수를 전기적으로 묘사하려는 것이었다. 이의 출발은 라이마루스의 역사적 성경 연구의 해석학적 원칙의 설명에서인데, 예수의 상을 역사적으로 알기 원하는 사람은 신-인에 관한 개념들을 뒤로하고 제자들이 예수에 관하여 말한 것을 기각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종교 개혁의 해석학적 원칙과 완전히 결별하는 것을 말한다. 다음과 같은 이중부정이 함축되고 있다. ‘신앙의 유비’(analogia fidei), “교리문답도 아니고 성경의 유비’(analogia scripturae sacrae), “사도들도 아니고, 그 대신에 역사의 유비’(analogia historica),“유대적 상황이 있다. ‘역사적 예수 탐구에서 순전히 역사적인 탐구의 과정을 극적으로 묘사한 사람은 슈바이처였다. 이 연구의 제목은 [라이마루스 에서 브레데까지]였는데, 이는 예수의 진정하고도 영속적인 위대성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결과적으로 예수의 생애 탐구의 역사는 실패의 역사였다. 예수의 각각의 심상들을 자료들과 끊임없는 역사 비평에 의해 시험했을 때 거듭 원점으로 돌아가야 했다. , “예수의 생애를 자료들에 의해 쓰는 것은 예수의 역사적 사역의 묘사를 불가능하게 하였다. 개별적인 말씀과 치유들, 소수의 업적들 그리고 종국의 처형! 그것들의 의미와 연관관계는 역사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

(2) 교회의 초창기에 대한 역사적 심상

사도행전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세부적인 사항들을 주목하였으나 역사적 전개 과정에 대해 생겨난 재구성물은 일관되게 역사적이지 않았다. 이는 철학적 가설들의 도움을 받아 생겨난 것이었다.

(3) 신약 및 초기 기독교의 본질적인 내용

역사적 탐구의 집중되 관심은 역사로부터 도출된 초기 기독교의 본질적인 내용은 현재와의 관련성에 비추어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다양한 신약신학의 구조적 분석들을 낳았다.

1> 18c의 합리주의 시대에서 관심은 나사렛 출신의 사람 예수였다. 이에 대한 묘사는 후기 계몽운동의 합리적인 전제들에 따라 역사적 실존을 평가하는 것에 의해 양산되었다.

2> 19c전반의 역사적 철학적인 초기 기독교 탐구는 바우어에 의해 개념화 되었고 튀빙겐 학파에 의해 대변되었다. 초기 기독교는 예수라는 단일한 차원으로는 공정하게 나타나기 힘들고 전체 역사의 지평으로 부터 전체의 영역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견해에 의하면 가장 초기의 기독교는 예루살렘 사도들의 유대주의와 바울의 보편주의와의 대립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150년 경의 카톨릭에 의해 해소되었다고 보는데, 역사적 고찰들의 지지를 받은 이 인상적인 견해는 헤겔 철학에 의해 고무되었음이 분명하다.

3> 다음 세대에서 리츨(A. Ritschl)은 역사적 실증주의를 적립하였다. 이 학파는 초기 기독교 - 특히 예수- 종교적인 개성들을 묘사하려 했다. 이 개성은 변화를 위한 결정적인 기동력이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하르낙(A.Harnak)에 의해 다듬어졌다. 이 방법에서는 예수에 대한 신앙이 아니라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 영혼의 영원한 가치를 믿는 것이라는 개념이 등장할 수 있다. 바로 이점이 모든 윤리적 행위를 위한 동기 유발로서의 사랑과 아울러 자유주의 신학의 혼과 얼이 있다. 신칸트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은 초기 기독교에 대한 이러한 견해를 형성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4) 19c의 바우어와 리츨의 역사적 신학 탐구와 관련하여 초기 기독교를 당시의 철학의 안경을 통하여 보았다고 비난하며 나타난 브레데의 신약신학의 과제와 방법론에 대하여는 신약 저작들은 일관되게 역사적인 방식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초기 기독교에 대한 역사적 묘사는 비평, 유비, 상호 관계의 원리를 따라 행해져야 한다. 이에 반해 바우어와 다른 옹호자들은 신약 저작들로 부터 교훈적 개념을 수집하려고 하였다. 이 접근은 신약신학을 신학 체계들의 연속적인 발전이 아니라 고대의 유물에 대한 종교사 안에서의 한 장으로 묘사하였다. 브레데의 방식은 신약의 종교사학파의 강령을 도출해 내었는데 그 이전에 궁켈은 구약 연구를 통하여 이러한 접근 방식에 길을 준비해 놓았다. 부세(W.Bousset)주 그리스도라는 책에서 신약신학의 핵심인 기독론과 관련하여 이 강령을 실천에 옮겼다. 이를 통해 그는 초기 기독교의 전체 구조에 관하여 순전히 역사적인 묘사를 산출하고자 하였다. 종교사적인 견지에서 초기 기독교에 대한 이러한 분석은 엄청난 역사적 업적 이었다. 그러나 순전히 역사적 서술방법론으로는 유대교와 헬레니즘으로 부터 초기 카톨릭까지의 이질적 간격을 메우기 힘들었고 전체를 적절하게 묘사할 수 없었다. 이와같은 방법으로 이 견해는 초기 기독론을 이해하는 데에 상호 관계라는 역사적 원칙의 규정을 따랐다. , 종교적 세계의 구속자 신화들이 예수에게 이식되었다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를 바라보는 이러한 방식 및 그 본질적인 내용의 범위는 순전히 역사적이라는 것이 객관적인 과학적 방법론을 의미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는 곧 우리는 자기 시대의 합리적인 전제들에 결박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 방법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가 1920년대에 생겨나기 시작한다. 이 변화는 역사적 탐구의 진보와 철학적 사고의 고양에 의해서 만이 아니라 신학적 지향의 근본적인 변화에 의해 촉진되었다.

3. “순전히 역사적인문제 제기 방식의 신학적 확대

(1) 칼 바르트(K.Barth)

내가 말하는 진정한 이해와 해석은 루터가 자기의 주석에서 직감적인 확신을 가지고 행했던 창조 에너지를 의미한다. 그것은 칼빈의 체계적인 해석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두가지 해석학적 준칙

a. 단순히 역사적으로 멀리 떨어져서 관찰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들려오는 말씀의 차원을 추구하나 b. 전제들이 없는 외관상의 중립성을 견지한 채 연구를 진행하지 말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지 인간이 아니라는 중심적인 문제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연구를 진행하라.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라. 칼 바르트는 이처럼 순전히 역사적인 연구에 반대하였고 그의 자발성의 원칙은 역사적 간격을 뛰어 넘어 신약의 역사적 성격을 정당하게 다루지 못했다. 하나님의 말씀 즉 logos만을 전달하려고 했기에 성경이 구체적 상황과 결부된 가운데 육체 안에서역사적 형태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너무도 경시하였다.

(2) 불트만(R Bultmann)

불트만은 성경의 역사적인 측면과 로고스로서의 성경의 특성을 케리그마로 해석하여 신학 연구에 새로운 경향을 형성하였다.

a. 발생학적으로 세가지 접근방식을 결합하였다. 1> 사상면에서 순전히 역사적인학파, 즉 종교사학파의 후예, 구체적으로 일관된 종말론이라는 개념에 영향을 받은 분파의 후예이다. 2> 철학면에서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철학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3> 바르트의 신학적 원칙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b. 어떻게 이 세가지 접근방식의 결합을 해석학적으로 해내었는가?

1> 그는 본문탐구를 순전히 역사적인분석으로부터 시작하였다. 2> 그는 본문이해에 있어 실존주의적 해석의 열쇠를 사용했다. “본문에 대한 해석은 그 본문이 인간실존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을 포함하며 그러한 이해는 자기 자신의 실존에 대한 주석자의 인식에 좌우된다.” 이러한 실존주의적 해석은 신약을 비신화화 하는능력을 가져왔다. 3> 그의 분석과 해석으로부터의 결론은 무엇인가?;불트만에게 예수의 설교의 핵심은 결단으로의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 그에게 신약의 본질적 내용은 케리그마였고 특히 이것은 예수 자신이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최후의 말씀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예수의 제자들은 십자가의 빛 아래서 이것을 새롭게 고백해야 했고, 그들은 부활절 케리그마에 표현되어 있는 부활신앙을 통해 바로 그렇게 했다. 이것은 불트만에게 지상적 예수가 아닌 부활절 케리그마가 신약신학은 물론이고 신약 메시지의 출발점임을 의미했다.

(3) 불트만 도식에 대한 평가

불트만의 해석학적 문제는 실제로 성경연구가 역사적 분석과 신학적 이해를 결합하는 과제에 직면하게 했다. 이러한 결합의 긴장관계에 있어 다음의 3가지 요소를 적절히 조화시켜야 한다.

1> 현대의 합리적인 전제들 2> 역사적 분석의 원칙들 3> 문서의 독특한 주장.

고펠트의 견해: 불트만은 1>2>의 요소를 지나칠 정도로 3>위해 정적인 전제들로 변환시켜 버렸다 1>2>3>즉 계시라는 문서들과 끊임없이 비판적인 대화를 전개해야 했다.

슐리어(H Schlier)의 반론: 불트만의 제자였던 그는 말한다. “로고스는 말씀이 된것이 아니라 육체가 되었다여기서 케리그마의 실질은 실질이 결여된 역설이 될 위험성이 있다. 더욱이 믿음의 결단으로의 부름은 율법이 될 위험성이 있다.

3) 불트만 사상의 이후의 발전: 그의 학파의 분열

많은 학자들은 역사적 예수에 의거하여 케리그마의 문제점을 해결하려고 다양한 시도를 하여왔다. 그러나 케리그마와 역사적 예수가 서로 연관되는 방식에 관하여 불트만 학파의 구성원들은 각자의 길을 걸어 왔다. (1) 케제만-역사의 예수에 대한 탐구에 기동력을 제공하였다. 예수의 역사는 실제로 그 타당성을 갖는다. 그에게 케리그마는 십자가에 못박힌 주님을 의미했다. 우리에게 낯설고 우리와 다르기는 하지만 우리의 상황과 관련이 되는 역사의 차원을 먼저 경청하여야 한다. (2) 푸크스와 에벨링-그들에게 역사적 예수는 케리그마의 토대가 된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 믿음의 토대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과적으로 부활절 케리그마 그 자체는 비신화화가 가능한 후보자가 되었다. (3) 브라운-하나님 자신이 비신화화의 과정에 포함되었다. 신약에 대한 역사적 분석을 계속해서 극단적인 입장에 도달하였다. 신약의 기독론은 너무도 들쑥날쑥하며 신약에서 유일하게 일관된 요소는 인류학이였다. 일관된 것은 유일하게 신자들의 자기이해 뿐이다. 신자들 자신의 실존이 무조건적인 나는 해도 좋다” “나는 해야 한다허용화 의무의 상태에 의해 결정된다고 이해했으며, 이런 이해에 따라 참여하는 곳마다 하나님은 거기에 계신다고 하였다. 그의 JESUS(1969)에 따르면 예수 설교의 유일하게 본질적인 내용은 바로 이 일관된 요소였다. 예수에게 특이했고 그의 사상에서 최고였던 것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를 돕는것과 관련된 그의 윤리적 명령들 뿐이었다. 하나님은 단지 한 개인을 진정으로 인간이 되게 하는 인간의 만남의 사건에 대한 환유였다. 브라운의 JESUS는 역사주의의 길을 그 극단까지 몰고감으로써 신약 신학이 그 존재 자체를 상실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의 제자들은 개인의 인도주의적인 사랑의 윤리학을 뛰어넘어 정치적 성향을 지닌 인도주의의 하나님의 죽음신학으로 옮겨 갔다. 그것은 한 시대의 종언을 의미했다.

4)새로운 충동들

역사에서 진정으로 결정적인 것은 개개인을 능가하는 사회구조들이다. 하지만 불트만은 신약으로부터 개인주의적이고 인격적인 결단의 에토스만을 도출해 내었다. “삶이 사회적 영역의 총체성이라는 요구가 학문적인 해석학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은 불트만학파의 주석자로 하여금 새로운 두가지 접근방식을 발전시켰다.

(1)쾨스터와 로빈슨

역사적 탐구의 방향을 맹렬히 공격하여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신약연구는 오직 히해 추구의 해석학적 측면으로 하여금 때를 위한 날개를 기다리도록 허용해줌으로써만이 현재의 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약 연구는 신약 저작들의 구체적인 영향의 역사를 배제해서는 안되고 이해에 기여하기 위한 해석이라는 과제를 배제해서도 안될 것이다.

(2)슈툴마허(P.Stuhlmacher)

역사에 대한 실존주의적 이해의 위기의 영향속에서 우리는 역사에 대한 새로운 애해로부터 또 새로운 이해를 위해 신약을 재평가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주로 종교사학파에 의하여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전해져온 방법론들을 재검토해야 한다. 첫번째 프로그램은 순전히 역사적인입장으로, 두번째 프로그램은 불트만의 입장을 넘어 또다른 입장, 구원사라는 입장 가까이로 우리를 데려다 준다. 이 사이에 있는 대안적 입장인 역사 실증 주의적 입장을 고찰하고자 한다.

4. 역사 실증주의적 입장

이 연구 방법론은 순전히 역사적인입장에 대한 반정립으로 생겨났다. 이 대안적인 접근 방식은 전승들을 실증적으로 그리고 역사적 변증을 통해 주로 성경의 예수 묘사에 그 바탕을 두었던 경건 주의적신학의 토대들들 보호하려고 하였다.

(1)초자연주의

합리주의에 대항하여 예수의 이적들을 옹호하려고 하였다.

(2)현대 실증주의적 입장

바리스와 바리슐라그는 19c후반에 보수적인 중보신학과 온건한 비평에 의한 역사탐구를 결합하였다. 성경신학은 역사 비평적 학문이 아닌 역사 기술적 학문이라고 바리스는 진술한다. 신앙신학은 일련의 교훈적 개념들”, 즉 신학적 체게들로 서술하였다.

(3)슈타우퍼(E.Stauffer)

그도 신학적 주제에 따라 신약신학을 체계적으로 배열하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역사신학이라는 규정하에 내용을 배치, 서술하였다. 인본주의적인 자유주의의 방식으로 예수와 바울을 서로 대비적인 관계로 놓았다. 신약의 본질적인 통일성의 묘사는 예수의 지상사역이 주로 버려졌기에 가능 했다. 그러나 신약신학은 세로줄을 따라서만 적절하게 서술될 수 있다. 신약의 통일성은 공통적인 출발점과 그 발전에서의 기본적인 방향의 일치에서 찾아져야 한다.

(4)예레미아스와 큄멜

예레미아스의 역사실증적 연구는 역사적 반비평을 발전시켰다. 따라서 순전히 역사적인 입장은 사학적으로 활동하게 되었고, 경자주의적 입장은 이제 역사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와 제자 콜페는 무엇보다도 예수전승의 역사적 신빙성 및 종교사적 독특성을 정립하려고 하였다.

a.예레미아스

그는 자신의 (신약신학)<1971>의 첫번째 권 전체를 예수의 선포를 탐구하는데 할애하였고 그가 인정한 전승의 모체는 지나치게 유대계에 적용된 유비의 원칙을 따라 해석된 감이 있고 그 결과 예수의 사역은 본질적으로 유대적 현상으로 머물게 되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역사내에서의 하나님의 임재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성도 뜻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예레미아스는 거의 알지 못했다. 예수가 진정으로 누구인가 하는 것은 역사적 현상을 실증하는 것을 통해서 결정될 수 없고 이것은 제자도와 믿음을 통해 파악될 수 있다. 따라서 예수 말씀은 문자적 정확성으로 전해지지 않았고 부활절 관점으로 부터 해석 되어 보였고 전해졌다.

b.큄멜

그의 신약신학(1969)은 균형잡힌 비평적 주석을 토대로 그의 수많은 다른 간행물들을 생각나게 하는 문체로 신약의 주요한 주제들을 다시 설명하려 하였지만, 흔히 해석의 문제들을 개방하여 놓는 일이 많았다.

5.역사적 성경 연구의 구원사적 입장

(1)호프만과 잔

a.호프만은 에를랑겐 신학의 공동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루터의 종교개혁의 원칙들을 재발견하였다. 이것을 토대로 그는 현대의 사고 구조, 역사적 탐구, 신학적 이해의 종합을 얻으려고 했는데, 이것은 불트만이 시도했던 것과 정반대의 순서였다. 그는 신약을 인류의 일반적인 지성사안에 위치시킨 것이 아니라 구약이라는 그 자신의 역사적 맥락, 구원사의 맥락안에 위치시켰다. 해석학적으로 볼때 여기서 종교개혁의 근본적인 원칙-성경은 성경에 의해 해석되어야 한다-과 현대의 역사적 이성의 합일이 얻어졌다. 또 종교개혁의 다른 원리인 신앙의 유비를 역사적 탐구의 핵심으로 취했다.

b.잔은 호프만의 뒤를 이었고 하르낙의 최대의 논적이었다. 그의 저작들은 역사적-어원학적 분야에서 비상한 재능을 보였으나 역사적 보수주의에 지나치게 함몰되었다.

(2)슐라터, 키텔, 슈니빈트

a.슈라터는 신학에서 무신론적 방법론들의 책에서 기독교의 출발을 하나님의 개념에 의거함이 없이 순전히 역사적인 방식으로 설명하려 하였다. 그는 신약신학을 축약된 교의학으로 바꾸지 않았다.

b.키텔은 신약신학사전”(TDNT)을 기획하였다.

C.슈니빈트는 불트만의 비신화화라는 프로그램에 대한 높이 평가받는 반박을 통하여 신약계에서 일약 일인자의 자리로 올라섰다.

(3)쿨만과 폰 라드

a.쿨만은 신약의 구원사적 성격을 옹호하였다. 그의 그리스도와 시간”, “역사에서의 구원저서에서 불트만이 역사가 결여된 실존의 역사성과 소망이 결여된 종말론을 통해 그의 신약 연구로부터 멀어졌다고 말했다.

b.폰 라드의 접근 방식은 우리가 구약을 그 본지에 따라 해석하려 한다면 모든 어원학적이고 종교사적인 내용을 모두 고려한 후에 마지막으로 그것을 그 내재적 목표인 그리스도에 비추어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구약신학에서 구약은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첫번째 명제는 그리스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을 필요로 한다는 두번째 명제보다 현재의 신학에 의해 덜 도전을 받고 있다.

(4)전망

전체로서의 신학이 하나님과 역사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면 맞출수록 신약과 구약의 관계는 신학 전반에서 더욱 더 중요한 문제로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구약의 하나님을 자신의 출발점으로 삼아 스스로를 신약에서 하나님의 최후의 계시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해석학적 원칙을 미리 靜的인 관계로 고정할 수 없다. 그 대신에 우리는 우리의 해석햑적 원칙을 의도와 과제로 정의할 수 있을 뿐이다. 신약은 구약의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함과 아울러 예수를 그 중심에 갖고 있는 성취 사건임을 입증하기를 원한다는 것이 신약의 자기이해에서 근본적인 것이라고 저자는 생각한다. 영속적인 가치가 있는 결정을 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가 우리 앞에 펼쳐진 모든 가능성들을 고려하기 위하여 당대의 논의와 편협한 견해들의 담 너머로 우리의 시선을 던질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출처 : 김한영 박사의 신학 이야기
글쓴이 : 해찬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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