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적인 사회를 향하여
저자 :허버마스
출판사: 종로서적
Ⅰ.들어가는 말
허버마스( Jurgen Habermas )는 베버의 합리성의 개념을 근거로 하여 현대 사회에 있어서의 비판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다. 즉 그는 서양에 있어서 근대성 또는 현대성을 어떻게 이해 할 것이며, 오늘날 심각한 난점을 드러내고 있는 근대성의 테제를 어떻게 극복 발전시킬수 있겠는가 하는 철학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사회에 대한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한편 허버마스의 근대성과 합리성의 주제를 서양의 지성사적인 맥락에서 생각을 하여 보면 그의 관심을 가까이에서 살펴 볼수 있다.
합리성의 개념을 사회 분석의 유용한 도구로서 본격적으로 이용한 사람은 베버( M
ax Weber ) 였다. 그가 관심을 가지고 해명하려 하였던 것은 서양 문명의 주된 흐름으로서 삶의 점진적인 합리화라는 주제 였는데, 이를 그는 ‘세계의 탈미신화’ 라 명령하고 있다. 베버에 의하면 삶의 합리화는 인간 생활과 사회구조의 세속화와 비신화 현상을 초래 하였는데, 이는 서양사의 독특하고도 지배적인 경험이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인 사실은 합리화의 진전 과정이 이성 자체와 계몽의 진보에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았다는데 있다. 오히려 형식적 합리성의 증가와 비 합리성의 심화 사이에는 밀접한 상호 연관이 있다는 것이 베버의 생각이었다.
프랑크프르트 학파의 이론가들(특별히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베버의 이러한 주제를 계승하여 ‘이성의 도구화’ 라는 낱말로 비슷한 사회 역사적 상황을 표현한다. 즉 근대를 기점으로 하여 이성은 그 본질적 포괄성을 상실하고 도구화 되어, 형해화된 형태의 도구적 이성이 삶의 모든 영역에 깊이 침투 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계몽사상에 의해 표현된 이성의 개념의 복합적 구조에 관한 칸트( Immanuel Kant ) 의 분석은 깊은 의미를 지니는데, 그에 의하면 이성은 원래 규범적 목표들을 판단하고 목표들 사이에 충돌을 조정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미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는데 가장 효율적인 수단을 극대화시키는 기능적인 성격도 지니고 있다고 본다. 이성의 이런 두 긴장 관계는 완전한 합리적인 사회의 실현을 지향했던 계몽사상의 퇴락을 이해케한다. 프랑크프루트학파는 근대적 이성 안에 내재해 있는 이러한 긴장관계를 ‘계몽의 변증법 ’이라 부르면서 포괄적 이성에 대한 도구적 이성의 우위가 근대 서양의 행로를 특징짓는다고 주장한다.
이와같은 서양사의 흐름 속에서 허버마스는 베버와 프랑크푸르트학파 학자들이 근대성에 수반된 합리화 과정의 일면만을 바라보았기에 합리성에 대하여 비관적임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이 지적 하고 있는 것과 같이 부정적인 합리성이 지배적인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한, 문명의 앞날에 대한 체념과 비관에서 헤어날 수 없음을 지적한다. 여기에서 허버마스는 근대성의 인간소외, 역리, 관료화의 문제등 문제를 이어받아 베버, 프랑크프르트학파등 일련의 학자들을 극복 하면서 비판 사회이론을 정립하고 있다.
허버마스는 오늘날 만연되는 지적 상대주의와 회의주의적인 사조 속에서 합리성을 굳건히 근거지울 수 있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토대를 정초하려는 대표적인 이성주의자이다. 다시 말하자면 합리성의 개념을 근거로 사회의 합리화를 위한 논리 정연하고 설득력 있는 대안을 허버마스는 제시 하려한다. 이를 위하여 그는 ‘보편 화용론’을 전개 하였고 근래에 와서는 이 이론을 발전시킨‘의사소통 행위의 이론’을 개진하고 있다. 이들 이론은 의사소통에 있어 사람들 사이의 역학관계를 의도적으로 해소 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대화자 상호간에 구조적으로 왜곡된 의사소통의 상황을 극복하는 것을 뜻한다. 이는 서양 근,현대의 합리화 과정에 있어 주도적인 역활을 담당한 도구적 합리성이 빚어낸 부작용과 피해를 교정, 극복하기 위함이였다. 그렇다고 하여서 의사 소통적 합리성과 도구적 합리성이 상호배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양의 근대성 의미를 보다 정확히 포착하기 위하여서는 상호 보완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주로 생활 세계 안에서 구현되며 도구적 합리성은 경제나 관료행정 같은 체계안에서 구체화되는 경향이있다. 허버마스에 의하면, 도구적 합리성이 그자신의 고유한 영역이 아닌 생활 세계로 자꾸 침투하여 들어감으로 하여 서양의 근, 현대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는 것이며, 이위기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제자리로 복권시킴으로 극복될수 있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보는것과 같이 허버마스는 계몽 사상에 의하여 대변되는 서양 근대성의 원래 의도를 오늘의 세계에 맞게 재활성시키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 서양 근대성이 배태한 병리를 비판하면서도, 그는 근대성의 근본 이념인 사회의 합리화와 인간 해방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의 관점에서 보자면 상대주의와 비합리주의는 서양 근대성의 이념을 전면적으로 폐기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합리성을 기초 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그의 저서 이성적인 사회를 향하여에서 그의 이런 생각은 잘 드러나고 있다.
Ⅱ. 몸되는 말
1). 과학적인 정치와 여론
1.
정치의 과학화는 아직 실현돼 있지 않지만, 그러한 경향을 보이는 현실적인 증거는 있다. 여기서는 전문 지식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세가지 모델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근대 국가는 민족경제 및 지역 경제의 발생에 따른 시장 형태와 연관된 중앙 재무 행정의 필요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법률적으로 훈련된 관료의 전문지식에 의존했다. 따라서 첫번째 형태는 막스 베버( Max Weber)가 관료적인 지배의 발달을 기초로 이해 하였던 ‘합리화’의 발달된 형태로서 기술 관료적인 모델을 들수 있다. 그러나 이 모델의 약점은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즉 그것은 기술적인 진보의 내적적인 필연성에 대하여 말을 하고 있지만, 그 기술적 진보라는 것은 단지 사회적인 관심이 그 안에서 작용하는 방식인 무반성적이고, 무계획적이고, 수동적으로 적응하는 자연사와의 연속성을 통해서 얻을 뿐이다. 륍베는 말하기를 기술 관료들이 현실의 논리에 비추어 본다면 참으로 정치적인 문제에 대하여 은폐하려 한다고 비난한다. 사실 순수한 정책 결정에 있어서 정치가는 기술적인 수단으로 정책을 대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기술관료들은 허구적인 정책을 결정할 따름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확대된 정책결정 모델이라 할지라도 모호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비록 대중 민주주의 그리고 과학적인 정보에 의거하여 결정을 내린는 방법이라 할지라도, 새로운 가치들은 변화된 이해 관계적인 상황에서 비롯된 새로운 기술들과 함께 이룩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치와 생활의 문제를 개관적인 필연성의 문제로부터 분리시키는 정책 결정론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는 모호한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즉 이용 가능한 기술과 실천적인 결정 사이의 관계에 대한 실용적인 탐구와 합리적인 토의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정책결정론자들은 이런 관점을 무시하고 있다.
실용주위적인 모델에서는 전문가와 정치가의 기능 사이의 엄격한 분리가 비판적인 상호 작용에 의해 대치된다. 이렇게 하여 새로운 기술은 부분적으로 확증되고 부분적으로는 기각되며, 명료해지고 재구성되든지, 또는 이데올로기에 의한 변형되고 강제된 특성을 벗게된다.
2.
위 단락에서는 전문지식과 정치의 관계에 대하여 세가지 모델을 설명하였다. 또한 실용주의 모델만이 민주주의에 관계된다고 허버마스는 주장한다. 이는 정책 결정에 있어 전문가와 지도자 사이에 책임과 권력의 분립이 행해 진다면, 일반 시민은 여론을 통하여 정당화하는 역활을 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산업 사회의 기술 관료적인 통제는 어떠한 민주적인 정책 결정의 과정이라도 목적이 없는 것으로 만들 위험이 있다. 헬무트 쉘스키에 따르면 “ 인민의 정치적인 의지는 인간이 과학 및 노동으로써 생산해 내는 외적인 강제에 의해 대치될 것이다” 고 지적 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실용주의 모델에 따르면 전문가들과 정책 결정 기관 사이의 의사 소통은 실천적인 욕구에 대한 전통적인 자기-이해에 입각하여 기술적인 진보의 방향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의사 소통은 따라서 필연적으로 주어진 사회적인 생활세계의 사회적인 이해 관계 및 가치 지향에 뿌리를 박아야 한다. 실용주의에서 고려되는 전달이란 정치적인 실천을 과학적이게 하는 것으로, 전 과학적인 수준에서 언제나 진행되고 있는 의사 소통과 독립적으로 발생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와같은 의사 소통의 유형은 시민 공동체 사이의 공적인 토의라는 민주적인 형태로 제도화될 수 있다. 여론과 과학과의 관계는 정치의 과학화의 일부분인 것이다.
그러나 과학적인 토의가 대중적인 기반위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오용될 위험성에 대한 비판은 오히려 권력 구조가 가지고 있는 자기- 반성의 능력이 둔화됨으로 발생되는 이데올로기적인 위험성을 더 지적 하여야 한다고 허버마스는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과학적인 부분에 연류된 사람들의 자기-이해에 있어서나, 기술적인 자문과 계몽된 결정 사이의 분업의 논리는 필연적인 것이다.
3.
정치적인 권위를 지닌 계약체결 기관과 거대한 연구 기관에서 일하는 과학자들 사이의 의사 소통은 실천적인 문제를 과학적으로 공식화된 문제로 번역하고 또한 과학적인 정보를 실천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재번역하는 데 대한 임계(臨界)지대를 드러낸다. 두 부분 사이의 의사 소통은 실천과 과학 사이에 펼쳐저 있는 합리적의 토의의 그물과 같은 것이다. 만일 특정한 기술이나 전략이 개발되는 동안이라면 이 그물을 파기 하여서는 않된다. 하지만 오늘날 기술적인 진보의 방향은 아직도 사회생활을 재생산 하려는 강제적인 충동으로부터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나는 사회적인 관심에 의하여 결정된다. 사회적인 관심은 반성되지 않은 체 사회 집단의 공표된 자기-이해에 직면하여 있다. 결과적으로 생활이라는 기존의 무방비적인 영역 속으로 새로운 기술적인 잠재력은 침투하여 들어 온다.
따라서 정치가들은 사회적으로 가능한 기술적인 지식과 역량에 관계된 자신의 관심과 목표에 대한 자기-이해를 개몽하여 주어야 한다. 동시에 기술적인 지식 및 역량을 앞으로 어떤 방향에서 발전시킬 것인가를 실천적으로 판단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논의는 필연적으로 순환하게 된다. 왜냐하면 기술적인 잠재력을 인식하면서 우리는 주어진 상황속에서만 앞으로 기술적인 잠재력을 어떠한 방향으로 어느 만큼 확장할 것이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4.
결국 과학과 정치 사이의 번역 과정은 여론에 관계된다. 이러한 관계는 마치 여론이 일반적인 한정규범을 고려해야 할 문제인 것처럼, 여론에 대하여 외부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기술적인 지식 및 역량을 전통에 제약된 자기-이해와 마주치게할 필요성을 제기 받는다. 전통에 제약된 자기-이해는 그 가운데 욕구가 목표로 해서 해석되고 목표가 가치로서 구체화되는 지평을 형성한다. 기술적인 지식과 자기- 이해에 도달하는 해석학적인 과정을 통합하는 데는 언제나 예측적인 요소가 포함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반 시민으로부터 고립된 과학자들 사이의 토의에 의하여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 의지를 계몽하는 이러한 단계의 결과는 시민들의 의사 전달 안에서만 효과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기술적인 지식에 준한 문제는 정치가들 자신의 의식 속에만 확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유보된 조건에 대하여 전문가들은 역사철학에서 사유를 하면서 유보된 조건을 벗기려하지만 사유는 실험적인 것과, 전통의 이데올로기와 도그마를 나누어 가지지 못한다. 정치의 과학화는 정치로부터 해방된 과학이 과학과 정치 사이의 의사 전달 이라는 조건을 보장할 수 있을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한 고려를 한다할지라도 실용주의 모델의 응용을 위한 경험적인 조건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은폐하여서는 않된다. 지배체제는 대중의 탈 정치화와 정치제도로서의 공공 영역의 쇠퇴를 이용하여 실천적인 문제들을 공적인 토의에서 배제하려한다. 따라서 우리는 더이상 지배체제가 일반 공중 사이에서 공적인 토의를 보장하여 준다는 기대를 하여서는 않된다. 다른 한편 대규모적인 연구의 전문화 및 관료화된 권력기구는 서로를 보강하여 공중을 정치 세력에서 배제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문제를 삼고 있는 것은 지식의 생산적인 집합체가 단지 통제를 목적으로 하는 기술적인 조작에만 관계하는 사람들 손에 넘겨지는가 혹은 의사를 소통하는 개개인이 언어를 소유하는 것처럼 동시적으로 소유하는가이다. 과학화된 사회는 과학과 기술 공학이 시민들의 마음을 통하여 생활 관리와 함께 매개되는 정도까지만 자신을 합리화 시킬 수 있을 것이다. 기술적인 지식이 실천적인 지식에로 발전 하기 위하여서는 정치 권력의 과학적인 합리화가 가능하여야 한다. 정치의 합리화는 그 기술적인 잠재력에 대한 교육과 상호 관련된 정치 의지의 계몽을 통해 이루어 지는 것이다.
2). 인식과 관심
1.
쉘링은 이론에 대한 개념을 독일 관념론의 말로 표현하였다. 즉 “사변 앞에서의 두려움, 이른바 이론적인 것으로 부터 단순한 실질적인 것에로의 도피는 지식에 있어서도 당연히 천박함을 초래한다. 엄격한 이론 철학의 연구는 즉시 우리로 하여금 이념을 신뢰 하도록 만들었고, 그리고 오직 이념만이 행동에 무게와 윤리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고 지적하고 있다. 한편 이론이라는 말은 종교적인 근원을 가지고 있다. 즉 the oros는 공개 축제극을 위하여 대표자를 선발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로서, 이론( Theoria )이란 낱말은 우주의 관찰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론이란 삶의 현실에 있어서 우주의 질서 정연한 운동에 영혼을 동화 시키는 방법이다. 즉 이론은 자신의 삶 위에 투영하고, 삶 속에 나타난 태도와 관습에서 자신을 반성한다.
이와같이 철학은 그의 발달 이래 이론과 이론 속에 있는 삶의 개념을 규정하여 왔다. 호르크하이머는 이런 전통적 의미에 있어서 이론과 비판적 의미 사이의 구별을 함으로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한편 훗설은 호르크하이머의 논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응답을 한다. 과학적인 문화를 생산하는 것은 이론의 정보 내용이 아니라, 이론가들 가운데 있는 신중하고 계몽된 기질 자체임을 지적하고 있다. 즉 그는 학문들 속에 있는 위기들을 문제 삼지 않고, 학문을 하는 자신의 위기를 문제 삼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의 곤궁 속에서 이 학문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하여 주는 것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훗설은 유럽 정신의 방향이 과학문화의 성립을 목표로 삼고 있는 이런 경향에 대하여 위험시 하고있는데, 이는 위험이 밖에서 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오는 것이라고 확신 하였기 때문이다.
2.
현실적인 학문들의 모습을 보면 학문들의 실증주위적인 자명성과 고대적인 존재론 사이에는 아주 원만한 관계가 이루어 지고 있다. 즉 경험적-분석적인 학문들은 그들의 이론을 철학적인 사고의 출발점과 자유롭게 연결되는 자각속에서 발전되고 있다.이 학문의 영역은 우주의 있느바 그대로를 서술하려는 우주론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다.
두번째 발견될수 있는 영역은 역사적- 해석학적인 학문들로 단순한 상식의 영역을 다룬다. 이런 학문의 방식이란 하나의 구조적인 현실을 이론적인 입장에서 서술하는 것이다. 한편 역사주의는 정신 과학의 실증주의가 된다. 실증주의 학문들은 철학적인 두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는데 첫째는 이론적인 관점으로 방법적인 의미이고, 둘째는 인식자와 독립된 세계구조의 존재론적인 근본 전제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플라톤에서 훗설에 이르면서 이론과 우주, 모방과 관상적인 생활의 종속적인 관계는 사라졌다. 언젠가 이론이 실천적인 활동으로 완성되어야 한다면, 앞으로는 방법론적인 제약들은 없어질 것이다. 우주를 겉으로 본 조화에 대한 영혼의 저 모방적인 동화는 이론적인 인식 규범을 내면화 하도록 하였으며, 그 결과 이론적인 인식의 정당한 과제는 소외되었다.
3.
허버마스는 훗설의 현상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을 한다. 첫째는 그가 학문의 객관주의 지향한 점이다. 이들에게는 대상의 세계가 법칙적인 관계를 서술적으로 파악 할 수 있는 사실의 세계로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겉에서 보이는 객관적인 사실의 세계에 대한 지식은 과학 이전의 세계에 기초하고 있다. 과학적으로 분석 가능한 대상들은 미리 우리의 원초적인 생활 세계의 자명성을 보이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현상학은 단순한 의미 구성적인 주체성의 과제를 이 차원에다 부여할 뿐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훗설은 이러한 행동적인 주체성을 하나의 개관적인 자명성의 가면 속에서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학문은 최초 삶에 세계의 관심 상태로부터 과감히 해방될수 없기 때문이다.처음 부터 현상학은 엄밀하고 관조적인 입장에 입각하여 소박한 견해와 싸웠으며, 궁극적인 인식을 이해관계로 부터 해방시켰다. 마지막으로 훗설은 그가 하나의 현상학적인 기술이라는 이름을 부여한 실험적인 자아-반성을 순수이론과 전통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이론과 동일시 하였다.
결국 현상학은 칸트적으로 말하면 순수 이성의 보편적인 법칙들을 서술 하였으나, 그것에 따라서 자유의지가 방향을 얻을 수 있는 실천이성의 보편적인 법칙의 규범들을 서술 하지는 않았다라는 것이다. 즉 그는 그가 정당하게 비판한 실증주의와 그가 무의식적으로 이론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을 빌려 왔던 존재론과의 관계를 들여다 보지 못하였다라는 비판이다.
한편 현상학은 자각 한다는것 그자체가 그러한 관심을 해방하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순수이론이라는 칭호는 현상학에 알맞는 평가이다. 그러기에 현상학의 오류는 인간세계의 질서를 위한 원형을 우주론적인 관점에서 발견하려 하였기에 삶을 통과하여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훗설의 현상학을 통하여서는 인간의 문제에 대한 교육의 과정을 기대할 수는 없게 되었다. 단지 현상학을 통하여 얻을수 있는 것은 우주론적인 내용에 대한 고전적인 이론을 선험적으로 순화하고 이론적인 입장과 같은 그 무엇을 겨우 추상적으로 고수 할 뿐이다.
4.
허버마스는 제 과학의 자기 성찰을 철저화 시키는 노력을 전개한다. 이는 근대 실증주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 작업의 목표는 전술한 현상학에 대한 순수지식이라는 환상을 깨는데 있고, 다음으로는 비판 사회이론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함이였다. 따라서 지식 일반의 가능조건에 대하여 탐구한 이후에 허버마스는 하나의 과학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인식관심에 의하여 이끌려지는 세가지의 과학적 탐구유형을 발견할수 있다고 보고있다. 이때 인식관심이 의미하는 바는 현실을 파악 인지하는 데 있어 인간의 인식활동을 특정한 형태로 구조 짓는 경향을 상징한다.그에 의하면 학문의 논리적, 방법적 규칙과 인식관심 사이에 연관성을 세가지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첫째로 기술적 관심에 의하여 유도되는 경험적-분석적인 과학. 둘째는 실천적 관심에 의하여 유도되는 역사적- 해석학적인 과학. 그리고 세째는 해방적 관심에 의하여 정립되는 비판적 과학이 있다고 지적을 한다.
5.
하버마스는 지식의 사회적 성격을 해명하려 시도한다. 먼저 경험적-분석적 학문의 연구 양태는 가능한 경험 과학적인 서술들의 의미를 미리 결정하려는 방향에서 시도된다. 따라서 첫째로 이 이론의 탐구 과정은 자신에게 경험적으로 의미있는 법칙가설에서 유도하여 명제들에 대한 가설적-연역적인 관계 속에서 해석한다. 즉 이 법칙가설은 주어진 출발 조건에 있어서 예보를 허락한다. 경험적-분석적인 지식은 어디까지나 가능적인 예보적 지식이다. 또한 기술적인 이용 가능성은 우리가 현실에 대한 이론을 응용하는 규칙들로 부터 나온다. 둘째 탐구는 주관적인 부가물이 하나도 없도록 정확성과 신뢰성을 유지 하도록 한다. 세째 허용할 수 있는 표현 체계의 논리적인 상부 구조와 검사 조건의 유형이란 두 요소를 묶으면, 경험 과학적인 이론을 체계화 시킬수있기 때문에 한 보편 명제가 가장 정연한 이론 체계로 통전 된다. 바꾸어 말하면 경험적-분석적인 과학은 기술적으로 이용 가능한 지식 생산을 목표로 하며, 객관화된 과정에 대한 기술적 제어라는 관점에서 대상을 파악 하는 경향이 있다.
역사적-해석학적 학문들은 그들의 인식은 다른 방법론적인 영역에서 얻는다. 즉 이 방법은 학문에 타당한 의미를 기술적으로 처리하는 관계 체계에서 수행되지 않는다. 형식화된 언어와 객관화된 체험의 지평들이 아직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학문의 영역에서 이론이란 연역적으로 형성되지 않기 때문이며, 조작의 결과에 따라서 경험들이 조직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상에의 접근은 관찰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이해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노동을 해야 생존해갈 수 있다는 삶의 필연적 명제로 부터 기술적 관심이 생성되는 데 비해, 실천적인 관심의 연원은 그와 비슷한 정도로 심층적인 사회, 문화적 삶의 보편성이다. 그리고 사회적인 존재의 생존 여부는 노동 못지 않게, 언어 생활에 있어서도 신뢰할 수 있는 상호 주관성의 구축에 의존하는 것이다. 의사 소통의 흐름이 끊길 때에 생존의 존건이 흔들리며, 따라서 제약 받지 않는 합의와 자유로운 상호 주관성을 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않된다. 역사적-해석학적 과학의 상이한 관심 구조 때문에 그 영역에서의 탐구의 논리는 경험적- 분석적 과학의 논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특정한 삶의 구조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역사적-해석학적 과학은 열려진 의사소통과 개방된 주관성을 유지 하려는 실천적 관심을 지닌다.
마지막으로 비판적 과학에서 체현되는 해방적 관심은 경험적-분석적 과학과 역사적-해석학적 과학에서의 인식과 관심의 교류를 규제하는 일종의 초관심이라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해방적 관심은 전술한 두 과학과 그 세계 이해에서 비롯되는 왜곡을 시정하는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6.
경험적-분석적 과학의 대표적인 예인 자연과학과 기술은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정치, 사회적 목적을 위해서도 쓰여질 수 있다. 불행히도 우리의 역사는 이를 증명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역사적- 해석학적 과학도 오용되면 의사 소통의 왜곡과 잘못된 권력을 합리화 시키는데 이용당하고 만다. 우리가 본바와 같이 철학적 해석학은 스스로의 이런한 오용 가능성을 막는데는 미흡하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수 있다. 경험적-분석적 과학과 역사적-해석학적 과학이 사회적으로 쓰이는 데 있어서 규범적인 지침이 자체의 체계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허버마스는 기술적 관심과 실천적 관심의 위상은 이성적이 성찰이라는 해방적 관심과의 연관성 속에서 탐구되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는 인식과 관심에 대한 다섯가지 명제를 밝히고 있다. 첫째 선험적 주관의 활동은 인류의 자연사 속에서 그 토대를 갖는다. 둘째 인식이란 그것이 단순한 자기-보전을 초월하는 정도의 자기- 보전의 도구라는 것이다. 세째 인식은 노동, 언어 그리고 지배의 매개 속에서 형성된다. 네째 자기-반성의 능력에 있어서 인식과 관심은 일치 한다. 다섯째 인식과 관심의 통일은 억압된 대화의 역사적인 흔적에서 억압된 것을 재건하는 어떤 변증법에서 그 진실이 입증된다고 주장하고 싶다.
즉 두 인식의 관심들이 깨닫고 있지 못하는 스스로의 선험적 기반을 이성적 성찰이 해방을 해준다는 것이다. 해방의 인식 관심이 바로 그 역활을 담당한다.
7.
학문들은 철학으로 말미암아 순수이론의 가상(假象)을 가진다. 즉 학문들 그들이 방법론적으로 무엇을 하여야 하는지 알지 못하므로 문제가 발생되지 않는 범위안에서 방법적인 진보의 규율이 그만큼 확실한 것이다. 거짓된 의식은 일종의 방어적인 기능을 가진다. 왜냐하면 자기-반성의 지평 위에서 학문들에게는 인식과 관심의 관계로 단번에 만나게 하는 모험적인 수단이 결여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객관주의에는 한계가 있다. 객관주의는 훗설이 믿었던 것처럼 학문들이 삶의 현실에 개입하는 것을 결코 방해하지 않는다. 학문은 삶을 적절하게 보충하여 준다. 그러나 객관주의의 실천적인 활동은 곧 행동이 증대되고 있는 삶의 현실을 합리성이라는 면에서 발전시키지는 못하였다.
법칙론적 학문들의 실증주의적 자명성은 오히려 기술을 통한 계몽된 행동을 하도록 도와준다. 해석학적 학문들의 객관주의적인 자명성은 많은 성과를 얻었다. 그러나 객관주의는 반성적인 동화의 과정을 단절하였으며, 그리고 그대신에 역사를 박물관 속에 봉쇄해 버리고 말았다. 만일 비판이 그 자신의 자유로운 인식 관심과의 관계를 순수이론을 위하여 무비판적으로 부정된다면, 이런 역사 철학은 오직 눈먼 결정론의 어두운 면이 될것이다. 또한 개관주의가 표방하는 가치의 중립성이라는 이름은 관료주의적으로 조직된 당파성과 잘 조화를 이룰 것이다. 따라서 허버마스는 주장하기를 객관주의는 이론의 힘으로 파괴될수 없고 오직 인식과 관심을 통하여 은폐된 것을 증명함으로 파괴될수 있다. 결국 철학은 그가 그의 전통을 포기 함으로써만, 그의 위대한 전통에 충실히 머무를 수 있는 것이다.
Ⅲ. 맺는 말
경험적 분석적 과학의 과도한 팽창과 지배현상을 목도 하면서 허버마스는 그 과학의 목적적 모형을 해부함으로써, 기술적 관심이 생활 세계의 역사적 총체라는 후기 산업 사회의 병리적 명제에 대하여 고발을 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에서 이성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는 ‘기술적 이성’에 대하여 호르커하이머는 ‘이성의 부식현상’이라 비판하며, 또한 마르쿠제는 기술적이성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를 가르켜 일차원적인 사회라고 매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경험적 분석적 과학의 본질적 가치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에 서있던 반면에 허버마스는 그 방법론이 가져다준 산업화와 자연과학의 진보가 인간 해방을 위한 필수적인 첫단계임을 올바르게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강조 하고 있는 문제는 기술적 관심과 경험적-분석적 과학이 억압과 왜곡으로부터의 인간 해방을 추구하는 해방적 관심에 의하여 이끌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산업 사회에서 과학 기술에 대한 맹신이 하나의 이데올로기화 되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오늘날 만연되고 있는 과학 지상주의의 뿌리를 밝히는 허버마스의 사회 인식론은 따라서 이데올로기의 비판으로서 정치, 사회적 의미를 강력히 노정하고 있다. 즉 그는 지배적인 과학 지상주의와 기술적 관심 자체가 점차 그 세력을 확대하고 있는 형식적, 도구적 합리성이 서양사를 잠식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또한 그는 이런 조류에 대항하여 해방적 관심의 변증법적 기능을 되살리기 위하여 이성적인 성찰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위치를 조명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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