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라
김한영 박사
논의의 시작
신약의 중심 주제
신약의 선포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이고 특히 공관복음은 전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주제에 의해 지배된다. 예수의 선포의 첫 마디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였고, 그의 선지자 세례요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하나님의 나라 혹은 천국, 천국, 혹은 나라라는 용어가 마태복음에는 56회, 마가복음에서는 21회, 누가복음에서는 46회나 나타난다. 예수의 설교의 중심은 하나님의 나라였고, 그가 사용한 설교법인 비유로 그는 주로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과 본성에 관하여 가르치셨다.
메시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에 오심이 곧 하나님 나라도래이기 때문이다. 그가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 의하여 세례를 받았을 때 성령으로 셰례를 받으므로, 메시야 곧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임명되셨다. 그의 성령의 세례는 메시야 임직식이였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메시야 곧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일을 시작하셨으므로 그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특별한 의식을 가졌다.
따라서 그의 이해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가 그의 인격에서 실재가 되고 영적 실체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예수의 인격에서 친히 다스리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였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친히 다스리기 시작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사탄의 왕국을 파멸하고, 죄를 제거하므로 하나님 나라를 확립하셔야 했다. 그가 자기의 죽음과 부활로 죄과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완전하게 확립하기 전에도, 그는 사탄의 권세를 제어하고, 마귀를 추방하며, 사탄의 권세로 당하는 질병 등의 고통을 해결해 주시므로, 사람들을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하셨다.
뿐만 아니라 그가 친히 죄를 사해 주고 새 생명을 주었다. 그의 권세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입적하였다. 즉 사탄의 권세와 그의 나라는 궤멸되기 시작했고, 하나님 나라는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사 세상 죄과를 속량하시고 나라와 백성들과 종족들 가운데서 사람들을 사시사 하나님 아버지께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시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본격적으로 확립 되었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으로 성령께서 사람들 가운데 오시므로 하나님께서 실질적으로 백성들을 소유하시고 직접 다스리기 시작하셨다.
이 모든 일은 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야 곧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서 하신 일이고 또 하실 일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도래하였고, 그의 구속의 사역으로 확립되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사도 요한과 다른 서신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개진하였다. 이것이 바울과 다른 신양 부분들에 하나님 나라의 언급이 적은 이유이다. 그래도 신약에 하나님 나라, 천국 혹은 나라들의 용어가 162회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논의의 배경
‘하나님의 나라’가 신약의 중심 주제를 이루고 특히 공관복음을 지배하여도 신학계의 주의가 하나님 나라에로 옮아 온 것은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엽까지이다.
19세기의 지배적인 예수의 연구와 예수상은 윤리적 종교적인 측면의 강조였다. 예수는 이상적인 윤리의 교사요 또 천재적인 종교가였다. 그는 특히 사랑의 화신이었으므로 우리가 본받고 모방할 이상으로 우리 앞에 서 있다. 즉 19세기 말엽까지 예수의 이해는 서구의 기독교화 된 문명의 세계에 통용되고 적용될 수 있는 내재적인 이해이고, 서구 문명 세계와 동일 선상에 서는 그런 예수상이였다.
이런 윤리적이고 내재적인 예수의 이해에 반동이 생겼다. 그것은 1892년 종말론적 운동의 아버지라고 할 요하네스 바이쓰(Johannes Weiss)의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예수의 선포(Die Predgt Jesus Vom Reiche Gottes)란 책의 출판으로 시발되었다. 이것은 릿출(Albrecht Ritschl)이 가르쳐온 하나님 나라의 관념에 대한 반대로 시작 한다. 릿출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는 예수가 설립한 윤리작 종교적 공동체였고, 법을 시행하기 원하는 모든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참조; Herman Ridderbos, the comming of the Kingdom,lnho du cfi on, Xii) 이 하나님의 나라는 완전히 내재적이고 인간의 활동과 진보에 의해 진보하는 그런 나라였다.
그러나 바이쓰와 그의 후계자 슈바이쳐(Albert Sscheitzer)에 의하면 예수의 선포에는 종말론적인 긴장이 지배하였다. 예수는 통상 생각해 오듯 그런 친숙한 존재라기보다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생소한 사람으로서, 종말론적인 급박한 기대 속에 산 사람이었다. 그는 후기 유대주의적 묵시 문학적인 배경 속에서 살았던 사람으로서, 예수의 이해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는 순전히 미래적이고 종말론적인 사건으로서 햔 세계의 질서가 붕괴되고 도입 될 새 세계이기 때문에, 릿츌의 내재적인 神國이해는 배척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슈바이쳐도 예수를 그의 종말론적인 생소함과 긴장 중에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구체적인 역사적인 인물로서 예수를 우리 시대에는 낯선 사람이다고 슈바이쳐는 주장한다.(Abert Schwietzer,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401) 예수는 알려지지 않는 이로 우리에게 오신다고 주장한다.(Ibid, 403) 예수는 이처럼 종말론적인 분위기 속에 산 인물이었다. 세상 끝이 임박한다는 기대 속에 살았다. 그러나 이 기대가 충족되지 않자 자기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종말의 새 세계를 도입하려고 하였다.
이들 종말론적인 대변인들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는 시간의 끝에 나타 날 미래의 실체이다. 이들 종말론 운동의 대변자들에 의해 사람들의 관심이 하나님 나라로 오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의 선포의 종말론적 특색에 다시 전통적인 자유주의의 윤리적인 교훈의 이해가 복합되었다. 현, 세상을 긍정하고, 그 안에서 살 윤리적 지침과 이상을 재정립하였다. 그리하여 종말론의 개념이 시간과 역사의 끝으로 이해하던 데서 초시간적인 개념으로 바뀌었다. 역사 끝 역사의 도식이 역사, 초역사 혹은 시간 초시간의 도식으로 바뀌고, 종말은 언제든지 개인에게 임하는 것으로 보고, 따라서 결단에의 촉구로 보았다. 이 순간이 각 개인에게 종말이기 때문이다. 이 역사, 초 역사의 종말도식은 발트와 불트만 등의 변증신학자들에 의해 20세기 중반 이후까지 진행되고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신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종말에 하나님에 의해 최종적으로 도입되고 완전하게 설립될 것이지만, 그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죽음과 부활로 현 세상에 도입되었고 설립되었다. 이 나라가 결코 인간의 노력과 진보에 의해 설립왼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통치는 현 인류 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통치의 확립이 역사의 시작부터서 하나님께서 경륜하시고 목표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되고 진행된 하나님의 나라의 논의가 20세기를 신학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논의가 그 특색이 되게 하였다. 전통적으로 진행된 신학적 논의가 신약의 본문의 가르침에서 이탈하였어도, 사람들의 주의를 하나님 나라에 집중되게 한 공을 이루었다.
하나님의 창조의 경륜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므로 창조주가 되셨다. 그가 자기의 영원한 경륜 가운데서 창조를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는데, 이 작정을 실현하사 무한대한 우주를 생산해 내셨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 손으로 이루신 창조가 자연 세력으로 남아있게 하신 것이 아니고, 창조가 계발되어 문명화 되므로 하나님 나라가 되게 작정하시고 섭리하셨다. 창조의 세력들이 계발되어 문명화 되므로 창조주의 지혜와 권능이 찬란하게 현시되게 하시기로 하셨다.
그리하여 창조주의 창조 방식이 모방되게 하셨다. 그러기 위해 창조주는 자기 창조에 놓으신 무한한 보화와 가능성들이 계발되게 작정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지식의 깊이가 어떠한지 조명되게 하셨다. 또 창조의 구성과 그 운영을 알므로 하나님의 통치의 방식이 반복되는 것을 기뻐하셨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지으신 창조의 운명과 그 진행과정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이 진행되게 하셨다. 그리고 창조와 관련된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예견하고 예언하게 되기를 바라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고 준행하게 되기를 바라셨다. 그리하여 자기 창조를 내실 때 정하신 목적이 이루어지게 하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창조가 그 조물주를 기리고 찬양하며 예배하여, 그의 크신 덕과 영광을 기리며, 그 베푸신 모든 은혜와 창조를 인하여 감사하게 되기를 바라셨다. 이 목적 때문에 하나님은 창조를 성전 구조로 조성되게 하셨고, 만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가대가 되게 하셨다. 현시된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지 아니할 존재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창조는 그 전체로 조물주를 경배하고 찬양하는 목표로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종말에서 창조는 조물주를 기리는 경배의 공동체로 설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모든 창조가 역사의 과정을 겪어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를 창조주는 바라셨다. 그러므로 창조가 처음 이루어졌을 때부터 창조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길에 들어섰다.
하나님은 이렇게 창조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수행할 대행자를 지으시기로 하셨다. 무한한 지혜와 권능으로 지으신 우주를 관활할 자이어야 하므로 하나님은 그 조물은 특별한 조물로 지으시기로 하셨다. 많은 면에 있어서 하나님을 닮고, 반영할 그런 영적이고 이지적인 존재를 만드시므로, 하나님의 복사물이 되는 그런 존재로 지으시기로 하셨다. 이 조물이 특별한 일을 맡을 자이므로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다. 이런 조물로 자기의 창조의 대리 통치자(代理統治者) 삼으시기로 하셨다. 하나님은 이런 특별한 조물을 만드시고 그를 아담이라 혹은 사람이라 이름 하시고, 그에게 자기의 창조를 맡기셨다.
이런 특별한 조물을 지으시고 하나님은 그에게 큰 축복과 함께 우주의 통치를 위탁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위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셨다. 이렇게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책임을 위임하셨다. 이 위임으로 그는 창조를 계발할 책임을 맡았고, 하나님의 창조를 다스리는 대리통치자의 책임을 맡았다.
그리고 시간의 진행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을 해석하고 선포할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창조가 하나님의 것이므로 이 창조를 다시 하나님께 성별해 드리고 모는 창조물들의 찬양을 하나님께 바쳐 드리는 책임을 위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이 이 책임을 강제 아래 억지로 수행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기쁘게 수행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와 언약을 맺으시고 기쁘고 자발적인 순종으로서 일하도록 하셨다. 하나님과 약정을 맺은 언약의 당사자로 일하도록 하셨다. 그리하여 행하는 모든 일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책임있게 하셨다. 이 약정으로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위에 통치자로 정식으로 임명하셨다. 이 언약 관계 때문에 아담의 결정과 행동은 우주의 운명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특별한 조물을 위해 하나님은 특별한 처소를 하나 만드셨다. 하나님을 모시고 살므로 늘 기쁨이 있는 곳이여서 에덴이라고 이름 하시고, 거기에 모든 생활의 부족이 없이 오히려 넘치는 풍요 속에서 자기의 사명을 잘 감당 할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마련한 풍성한 식탁으로 부족함 없이 하나님을 섬기며 창조주로 부터 위탁받은 책임을 감당케 하셨다.
이렇게 위임 받아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 세워진 아담은 낙원에서의 풍성한 삶 때문에 무위도식하고 지낸 것이 아니라, 즉각 일을 시작하여 자기 주변에 있는 모든 식물들과 동물들, 바다와 고기들과 공중의 새들의 이름을 지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예리하고 탁월한 지성으로 사물들의 본성을 규명하여 이름을 지었다. 그가 짓는 이름들은 그 생물들의 본성에 상응하였으므로, 그 이름으로 모든 생물들을 잘 어거하였다. 동물들 뿐 아니라 식물의 본성도 잘 규명하여, 그의 상응하게 그 이름을 명명하였다. 이 이름들로 그는 식물들도 그 필요를 따라 잘 활용할 수 있었다.
아담이 이름을 지을 때 자료들을 수집, 비교 관찰하고, 실험하므로 이름을 지은 것이 아니라 지성의 최고 단계의 활용이라고 할 직관으로 그렇게 하였다. 그는 보므로 자기 주변 사물들의 본성을 바로 파악하였고, 그 파악된 본성에 따라 이름을 붙였다. 그 이름은 그 사물들의 본성의 파악이므로, 그 이름으로 사물들을 잘 어거하고 통제하여 활용할 수 있었다.
아담은 자기 주변의 다른 사물들과 자기 주변의 환경에서 작용하는 체계들을 탐구하고 파악하기 시작하였다. 아담은 이처럼 바쁜 일과를 진행하여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대리 통치자로서의 임무를 잘 수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창조의 첫 안식에도 동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일도 잘 수행하였다. 하나님의 창조와 그의 영광을 인하여 창조주를 찬양하고 감사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베푸신 모든 특권과 호의로 인해 감사하고 찬양하였다. 그리고 자기의 눈앞에 전개되는 보든 찬란한 삼라만상에서 빛나는 창조주의 지혜와 권능과 영광을 보고 그 창조주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 드렸다. 이처럼 아담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의 직임도 잘 수행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권 위임에서 이 창조로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가 무엇인지를 잘 깨닫고 있었다. 하나님은 자기가 지으신 세계에 자기의 나라를 설립하시려는 분명하고 확실한 뜻을 갖고 계심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경륜을 바로 해석하고, 창조의 목표와 운명을 바로 해석하고, 廣布해야 했다. 죽 역사 과정의 진행 목표가 무엇인지를 바로 설명하고, 그 하나님의 뜻에 아담은 잘 순응했어야 했었다. 이 창조는 지금 하나님의 나라를 목표로 하고 시발하였고 진행하고 있음을 잘 인지 하였다. 아담은 창조가 하나님 나라가 되는 일에 잘 수종을 들었다. 또 창조주께서도 자기의 경륜대로 일을 잘 진행하고 계셨다.
역사 과정의 격변과 하나님의 대응
그런데 이 순조로운 하나님 나라에 로의 진행이 갑자기 멈춰지고, 그 궤도에 크게 이탈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갑자기 창조에 큰 반란이 발생하였다. 온갖 호의와 은사와 특권을 가득히 부여 받은 하나님의 대리통치자가 악한 자와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는데서 돌아서서 자기가 하나님을 대신할려고 하였다. 하나님의 선악 판단을 절대적으로 알고 살던데서 자기의 판단을 긍극적으로 삼는데로 나아갔다. 참과 거짓을 하나님의 결정에 따라 하던데서 자기 이성을 진위 결정의 긍극적인 표준으로 삼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해 놓으신 해석을 따라서 해석하는 것을 그치고 자기 해석을 구성적이고 창조적인 것으로 삼았다. 또 하나님께 모든 순종의 의무를 지닌 언약 당사자의 자리에서 떠나 자기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하기로 하였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던 삶에서 돌이켜 자기를 위해 살기로 전환하고, 목표를 바꾸며,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자기의 나라를 세우기로 한 반란을 일으켰다. 너무도 금찍한 반란이고 큰 배은망덕이었다.
이 반란을 성경은 타락이라고 명명하였다.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의 반란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에 죄와 사망과 고통과 어두움등의 적대 세력들을 도입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창조의 대리 통치자였기 때문이다. 창조가 갑자기 어두워지기 시작하였고, 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을 반사하던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기능을 상실하였다.
그의 지성이 어두워지고, 감정이 비뚤어지고 얽히게 되었으며, 도덕적 바른 판단과 방향을 상실하게 되었다. 아담은 영혼과 육체의 심한 분열 의식을 갖게 되었고, 둘은 하나로 조화 통일할 수가 없게 되었다. 죄의식과 함께 심한 죄책감이 지배하였다. 자주인이고 독립적인 왕이 되기를 바랐는데 죄에 매인 종이되고 따라서 피조물에 종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던데서 피조물을 섬기게 되었다. 그러므로 더 이상 통치자로서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의 호의가 철수되고 진노와 저주가 임하여 왔다. 즉각적으로 낙원에서 추방되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격리되었다. 즉 생명의 원천에서 절단되었다. 사망이 도입되고 고통과 자연에 해악이 발생하였다. 사망이 창조의 세계의 법칙으로 도입되었고, 고통과 고난이 삶의 방식이 되었다. 또 후회와 한탄과 탄식이 일생의 반려가 되었다. 그리고 부패가 창조의 자연스런 과정으로 도입되었다.
아담 자신도 그 죄 값으로 죽어야 했고, 도 그렇게 판정되었다. 그러나 아담의 반란에 놀라신 하나님께서 그래도 은혜를 베푸시사, 그 반역의 죄 값에도 불구하고 당장 아담을 죽음에 이르게 하시지는 않았다. 그 죄의 벌로써 마땅이 당장 사행이 집행되어야 하였지만, 그의 사형집행을 유예하셨다. 하나님의 이 호의 때문에 아담은 930세까지 생존하며 자녀를 낳게 되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와 그의 후손들에게 왔고 또 동물과 식물계에도 왔다. 그리고 노쇠가 부패를 촉진하는 여러 현상들과 체계들이 도입되고 진행되었다. 그리고 동물들이 유순한 순종의 자리에서 무서운 대적이 되는 맹수들로 변하게 되었다. 그리고 죄악은 역사하여 창조의 분열과 분리, 해체 작용을 계속하였다.
이 죄의 역사의 진행을 막지 않고 계속되게 한다면 창조의 분리와 해체 뿐이어서 마침내 창조 자체의 존속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창조 경륜을 낭패케 하실 수 없으셨다. 하나님은 자기의 창조 경륜을 이루시어 죄와 사탄의 계교위에 승리하시고 영광을 받으셔야 했다. 그리고 자기의 경륜을 따라 창조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셔야 했다.
이 일을 위하여 본격적인 구속 경륜을 집행하시기 전에 하나님은 몇가지 예방 조치를 취하셨다. 그 첫 번째 조치가 죄의 과격한 역사를 약화시키고 막는 일이였다. 하나님은 일반은총의 역사로 죄의 과격한 역사를 약화 시키고, 창조가 자기 과정을 따라 운동되게 하시므로 창조를 보존하고 유지되게 하셨다. 죄에도 불구하고 창조가 그 존재와 운행을 계속하게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목표로 하신 하나님께서 아담의 사형 집행을 연기하시므로 그로 인류의 조상이 되게 하셨다. 비록 죄와 사망에 종속한 인류이여도 그에게 많은 자손이 출생되어 나오게 하셨다. 그들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며 하나님의 창조를 탐구하고 계발하게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조금 더 적극적으로 죄악을 억제하는 방책들을 내셨다. 그 중에 제일 큰 방책이 정부 제도의 수립과 운용이었다. 정부는 칼로 무질서와 혼돈을 제거하고 질서를 세우므로 사람들이 함께 살며 인륜사회를 이루고 자연을 계발하여 문명사회가 되게 하는 기본 제도이다. 정부가 칼의 세력으로 폭력과 죄악을 억제하므로 사람들은 서로 화평하며 살수있게되었다. 정부가 칼로 악을 억제하고 선을 장려하고 포상하므로 무법천지가 되지 않고 법과 질서가 서므로, 죄의 파괴적 성향이 억제되는 것이다. 정부가 칼의 권세로 악을 벌하고 선을 상주며, 질서를 세우고 폭력을 억제하므로 사람들의 마음이 의식이 있고 지각이 있어서 자기의 삶을 살고 재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만인이 만인을 대항하여 마주서는 살벌한 자연 상태가 될 것이다.
17세기 영국의 철학자 토마스 홉스가 설파한 것처럼 정부가 없는 상태에서의 인간은 이리떼가 서로 마주서듯, 만인이 만인에 대하여 대적이 되는 그런 상태이다. 다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고, 자기의 욕망충족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제거하기 위해 자기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를 완전 자유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사람들이 정상적인 자기의 삶을 도저히 영위할 수가 없고, 각자가 서로를 향해 싸우는 전쟁의 상태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정부는 악을 제거하고 죄를 감소시키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좋은 도구이다. 정부는 그 공권력으로 그 본래의 제도를 바로 수행하면 하나님 나라의 봉사자이다. 정부과 공권력으로 악과 폭력을 억제하기 때문에 질서가 세워지고 사람들이 죄악의 구조에서 이렇게 담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한 정부라도 무정부 상태 보다는 오히려 낫다고 할 것이다. 정부가 그 손에 쥐어준 칼의 권세로 정부 통치력이 미치는 지역 내에서 악을 억제하여 질서를 세우고, 사람들로 선을 행하게 하며 적나라한 욕망을 억제하여 윤리적인 사회가 되게 하며, 사람들로 자기들의 재능을 발휘하여 창조의 보화와 가능성들을 계발하게 하면, 그 정부는 하나님의 나라에 봉사자이다.
그러나 이런 악의 억제 방식으로는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여, 창조를 완전히 하나님 자신에게로 회복시키지 못함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창조에서 죄를 완전히 제거하시므로 다시 창조에 하나님의 영광이 찬연히 빛나고 창조주께서 왕으로 완전히 다스리시며, 창조에 충만히 거하사 萬有 안에 萬有가 되시기로 하셨다.
구속경륜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의 창조에서 죄를 완전히 박멸하시기로 하셨다. 이 죄의 완전한 제거로 창조를 자기에게로 회복시키는 구속경륜을 진행하셨다. 이 죄의 박멸을 위해 하나님은 인류역사에서 이 일을 시작하셨다. 구체적으로 일하사 한 민족을 내시고, 그 민족을 위해 부단히 강대국들의 역사에 개입하시사 그들을 인도하셨다. 그리하여 그 민족에서 세상의 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구세주가 나게 하셨다. 이스라엘 역사의 숱한 곡절에도 불구하고, 세상 구속주의 출생을 잘 예비 하고, 그의 출생의 태반이 되었다.
죄에서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세주는 바로 이스라엘에서 출생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스라엘의 모든 존재 목적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의 준비였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모든 죄와 거기에 연결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구속주로 삼으셨다. 이 예수 그리스도로 세상의 모든 죄의 문제를 다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은 부단히도 인류 역사에 개입하시고 그들을 주관하사 마침내 일을 이루어내셨다.
하나님은 세상의 구속주로 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죄 때문에 죽게 하시므로 모든 죄과 문제를 다 해결하시기로 작정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로 십자가에서 피 흘려 화목제물로 죽게 하시므로 세상에서 죄를 제거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모으시고 생산해 내셨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람들을 새 사람으로 만드시고 또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백성이 되도록 훈련을 받게 하신다. 이 세상의 구원의 역사를 하나님은 종말까지 계속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 구원이 다 이루어질 때 창조를 완전히 정화하실 것이다. 이 때 완전히 죄가 제거되어 하나님이 萬有 안에 萬有가 되신다. 이 상태가 바로 성경이 목표하는 하나님 나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한 창조의 완전 정화 이전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세상의 죄 문제를 해결하므로 하나님으로 하여금 직접적으로 세상을 다스릴 수 있게 하였다.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이 죄와 사탄에 의해 지배받던 세상을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시는 세상이 되게 하셨다. 이 통치가 종말에서는 완전해져서 세상나라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의 인격에서 그리고 그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에 도래하였다.
하나님 나라의 정의
이제까지 해 온 하나님 나라에 관한 서론적인 고찰에서 본론에로 돌아올 때 맨 처음 제기될 수 있는 질문은 ‘하나님 나라’가 무었을 뜻하는가 하는 질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 것인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수 없이 들어왔고 또 사용하여 왔는데, 도대체 하나님 나라가 무엇이냐고 질문을 받을 때 곧장 대답하는 것이 쉽지 않다. 특히 하나님 나라를 그 선포의 중심주제로 삼는 신약도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재공하지 않으며, 또 구약은 “하나님의 나라’도 잘 언급하지 않는데서 그 이유를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구약이 하나님 나라를 언급하지 않아도 신약은 구약의 가르침에 뿌리박고 있다.
구약은 하나님의 사역의 목표를 하나님의 통치의 확립과 인류의 구원이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의 확립과 인류의 구원을 일치시킨다. 즉 하나님의 통치 확립이 인류구원이 된다.
신약이 관설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은 구약의 이 가르침에 기초하고 있다. 바로 이 배경에서 주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언급과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왕으로 자주 고백되고 찬양되었다. 특히 시편에 하나님은 왕으로서 백성의 다스림을 강조하고 고백되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통치>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사사시대에는 사사들을 세우시사 다스려도 실제 다스리시는 이는 하나님이셨다. 그러므로 400여년의 사사시대는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는 신정시대였다. 사무엘을 마지막으로 사사로 해서 왕을 세우게 될 때 사사인 사무엘 자신이 왕정제도의 설립을 싫어하고 반대하였지만 실제로 왕을 요구하므로 배척 받으신 이는 저들의 왕이신 하나님이셨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린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셨다.
그리고 백성들의 요구를 좇아 사무엘이 이스라엘 최초의 왕을 세울 때에도 그 왕정제도가 하나님의 통치를 위임 받아서 하는 것으로 백성과 약정이 맺어지므로 허락되었다. 왕은 언약서를 옆에 두고 그 언약을 좇아 정치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 말씀에 순종해서 정치하는 위임 통치 형식이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시고, 그가 다스리시며, 이스라엘 왕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통치자였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이 실패한 것은 이 하나님의 통치권을 자기의 왕정에서 분리하여 자기의 세속적 왕권을 세우려한데 있었다. 이스라엘 왕은 여호와 하나님이셨는데 자기가 배척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시고, 그에게 벌을 내리시사 그와 그를 이어 왕 될 자들을 손에 의해 멸살되게 하셨다. 사울의 죽음에서 다시 확인 된 것은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이시고, 사람으로 왕 된 자는 하나님의 위임 통치자라는 진리였다.
다윗은 이 면에 있어서 크게 성공한 왕이었다. 다윗은 그의 치리기간에 있어서 하나님의 왕권을 성실히 인정하고 그의 왕 되심을 늘 확인해 드렸다. 다윗의 통치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늘 고백하고 자기는 이 하나님의 왕권을 수종드는 자임을 명백히 하였다. 그가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수도를 예루살렘에 정하고서 한 첫 번째의 조치가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는 일이였다. 그리하여 자기의 왕권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인정해 드렸다. 그는 하나님의 통치권과 자기의 왕권을 일치시켰다. 자기는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하여 세워진 왕이여서 자기가 자기의 보좌에 대해 전권적이고 세습적인 권리를 주장할 수 없음을 잘 이해하였다. 자기가 왕됨은 하나님의 은혜였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에 순종해 드리는 것 뿐이였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기의 왕권을 굳게 세우려기보다 하나님의 왕되심을 더욱 굳게 하였다. 다윗은 하나님의 통치권에 성실히 봉사해 드리는 것으로 만족하였고, 거기에 자기의 영광이 성립함을 보았다.
다윗은 지금 하나님께서 자기를 왕으로 세우사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시고 계심을 잘 보았다. 하나님은 다윗의 손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땅의 약속을 성취하고 계심을 보았다. 여호수아도 가나안 땅을 다 정복하여 그 땅을 백성들에게 다 분배하지 못하였고, 사사시대의 족장들도 땅을 다 정복하지 못하였다. 사울 왕도 땅을 다 정복하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의 생존에 결정적인 위협이 된 불레셋을 다 정복하지 못하였다. 이제 하나님께서 다윗의 손을 의탁하사 미정복한 땅을 다 정복하시고 불레셋을 제압하시므로, 조상들에게 하신 땅에 대한 약속을 이루시므로 그 백성들에게 평안을 선사 하시려는 것을 잘 알았다. 이 일을 위하여 이스라엘 역사에서 다시없는 대 용사들을 다윗에게 위탁하셨음도 다윗은 잘 깨달았다. 이처럼 다윗이 하나님의 통치권을 크게 확대하고 견고히 해 드리므로 하나님께서 도 다윗의 왕권을 굳게 하셨다. 이제 다윗의 후손으로 다윗을 이어 왕이 될 자들이 끊어지지 않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다윗의 재위 기간에 다윗이 범죄하여 가정의 근본법이 다 깨어지게 되어 더 이상 왕이 될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은 다윗을 왕위에서 끌어 내리시지 않으셨다. 다윗의 왕 됨은 하나님의 은혜였고 그의 공로가 아니었음으로 범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왕으로 일하게 하셨고, 다윗의 왕권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서 그 범죄 관계에서 맺어진 아내에게서 나온 아들을 다윗 왕의 후계자가 되게 하셨다. 사울이 왕 됨에도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자기의 왕권을 세우려 하므로 배척되었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잘 알고 하나님의 왕권을 더욱 견고히 해드리는 수종자 노릇을 하였고 이 수종자 됨에서 오는 영광도 하나님께로 돌려드렸다. 이와 같이 하여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자기 마음에 합한 한 사람을 통하여 자기의 일을 다 이루시기로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지금처럼 다윗을 통하여 다스리는 이스라엘 나라의 왕 되심만이 아니고 메시야를 통하여 모든 인류 종족을 다스리는 하나님나라의 왕 되심을 다윗의 왕권에 연결시키셨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다스리는 것을 목표로 하셨는데, 이 온전히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 되심을 다윗의 왕권에 연결시키셨다. 하나님 나라의 왕 메시야 곧 그리스도가 다윗의 혈통에서 나게하셨다.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왕의 조상이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한 집을 세우시겠다고 약속을 하시고, 다윗의 씨에서 나온 자들로 다윗의 위에 영구히 앉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이스라엘의 왕은 정령히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세계의 모든 종족의 왕도 여호와 하나님이셨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도 하나님의 통치권을 잘 인정해드렸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중심 예루살렘에서 다스림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그는 성전을 자기 궁궐 건축에 선행해서 건축하였다. 그리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 되심을 분명히 하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중심에 좌정하시고 다스리시니 성이 요동치 않고 평화왕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치세, 기간에 모든 이스라엘에게 평화를 선사하셨다. 그것을 솔로몬이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사전 표상이 되게 하셨다.
그러나 솔로몬이 그의 말년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들을 섬겨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 되심을 경홀히 하고 방해함으로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서 나라를 하나님이 빼앗으시로다 하셨다. 그러나 다윗에게의 약속 때문에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 솔로몬의 제국에서 10지파를 떼어내사 작은 나라로 남게하셨다. 그러나 남방 유다 나라는 다윗의 후손들로 하여금 그 왕위를 이어가게 하시사 하나님의 구원 섭리가 이루어지게 하셨다.
그러나 북방 이스라엘 나라는 10지파로 된 큰 나라였지만, 하나님께서 그 왕권을 오래도록 세습되지 않게 하셨다. 저희들의 범죄를 인해 계속해서 왕됨을 못하게 하셨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예후는 특별한 왕이었다. 그는 우상을 극도로 섬기는 오므리가의 아합 왕과 그 자손들을 완전히 소제하고 왕이 되어 엘리야도 못하던 바알신의 제사장들을 전멸한 특별한 왕이었다. 그러나 그도 3대에까지 밖에 왕이 되지 못하였다. 그가 우상숭배자들을 징벌하고 또 철저히 소제함도 잘 하였지만 그러나 그는 그 왕권으로 하나님의 일을 도모하지 않고 자기의 일을 추구함으로 하나님의 왕되심을 견고히 하지 못하였다. 그가 왕됨도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가 아합왕 밑에서 장군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엘리사 선지자의 생도를 통하여 왕으로 임직되었다. 그러면 그 왕권으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통치권의 확립을 위해 노력했어야 할 것이다. 그는 가장 교만해지기 쉬운 자기의 일을 추구하였다. 그러므로 3대만 임금되는 것을 예후가문은 끝났다.
유다의 역사에서 역대 왕들이 위기에서 만나는 시험은 하나님의 왕되심의 확인문제였다. 강대국들이 발흥하고 자기들의 생존을 위협하는데, 생존을 위해서 대국에 의지해야 하겠는데, 선지자들은 와서 굳게서서 하나님의 다스리시니 하나님만 의지하라 하였다. 이런 경우 인간의 게산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라고 하니 보통 큰 시험과 시련이 아니었다. 당장 큰 예물을 바치고 외교정책으로 문제를 매듭지어 생존을 지탱해야 했는데 왕이신 여호와만을 의지하라고 촉구 받는다. 이 큰 시련과 국가적인 위경에서 많은 왕들이 실패하여 넘어지고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였다. 그러나 이런 큰 위기에 하나님의 왕권을 굳게 의지한 유다의 왕이 하나 있었다. 그는 히스기야 왕이었다. 앗수르 제국의 대군이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있는데, 선지자 이사야가 와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의 말씀을 믿으라고 하였다. 큰 시련과 위기의 때였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의존하고 세상 외교정책을 추구하지 안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신뢰하여 여호와로 하여금 이스라엘 곧 유다의 왕이 되게 하였다. 그러므로 열왕기는 히스기야의 행적을 여러장에 걸쳐 기록하였으며, 그가 죽었을 때 다윗의 묘실의 높은 곳에 장사하였다. 그러나 이와 정반대로 북방 이스라엘 왕국에 있어서 오므리 왕가는 7,80년간 왕 노릇을 하였어도 그들에게는 성경 몇 줄로 충분하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셨고, 그 나라를 다스리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들을 통하여 다스리심은 장차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계의 모든 족속들을 다스리실 것의 표상이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저들의 왕이시고 또 그러므로 다스리신다는 사실이었다. 이스라엘의 역사의 의의는 하나님의 통치권의 확립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큰 변혁을 겪었다. 8세기 말엽 곧 주전 722/3년 북방 이스라엘의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하여 지상에서 영구히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남방 유다는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망하고, 페르샤가 강대국으로 중동지역을 통일하였다. 이 페르샤 제국에 의해 해방되어 유다에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을 쌓고 하나의 종교 공동체로 살면서 페르샤 제국의 속국으로 있었다. 그러나 결코 하나의 자립적은 정치적인 단위가 되지 못하였다. 오랜 세월 페르샤의 속국으로 있다가 알렉산더 대제의 세계 정복 정책에 따라 페르샤가 망하고, 희랍제국에 합병되었다. 2세기 초엽 마카비가의 항쟁에 의해 독립을 쟁취하여 지내오다가 로마제국의 등장으로 그 세력권에 들어가게 됨으로 독립을 잃고 이방 에돔의 피가 섞인 헤롯이 왕이 되어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
이 긴 유대의 강대국들 밑에서 속국으로 지내는 동안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문제는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권의 확립의 문제였다. 하나님의 통치권이 확립되면 이스라엘이 독립을 다시 획득 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메시야를 기다렸다고 그가 외시면 이스라엘이 독립할 확신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오직 그들에게는 메시야 소망뿐이고, 메시야의 오심만이 그들이 살 길이었다. 이 소망에 선지자들이 크게 공헌하였고, 또 저들의 묵시문학이 기대를 더욱 부풀게 하였다. 메시야만 오시면 새 세계가 도입되어 이스라엘의 독립은 물론 이스라엘이 세계 위에 왕 노릇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메시야가 오시면 하나님의 왕권이 확립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적인 상황 속에 살고 있는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가르치셨다. 하나님 나라를 듣는 백성들은 하나님의 통치권 확립과 그 왕권이 시행되는 영역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 백성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가르치실 때 하나님 나라를 정의하실 필요가 없었다. ‘하나님 나라’의 발설자나 청취자들이나 그 기본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해의 공동 지반에 서있었다. 성경적 이해의 배뎡을 가진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로 하나님의 통치와 그 통치가 시행되는 영역으로 이해하였다.
이런 성경적 배경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통치이고 하나님의 치가 이루어지는 사회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는 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성행하는 외적 악만을 얼마만큼 제재하는 세상 왕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를 통해서 설립되고 시행되게 되었다. 이제 하나님의 다스림은 메시야를 통해서 시행되게 되었다. 그러니 메시야의 오심이 곧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까이 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통치의 구현자이고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메시야가 와 계시기 때문이다. 메시야가 사람들 중에 와 계시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 중에 임하여 와 있다. 그러므로 가까이 왔다는 말을 현재 완료형( γγθκεν)으로 사용하였다(마3:2; 4:17).
메시야가 사람들 중에 와 계시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 중에 결정적으로 임하여 왔다. 이스라엘의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통치의 완전한 구현자이시다. 그 이전의 왕들은 이 메시야의 그림자였지만, 메시야는 하나님의 통치의 실행과 실현의 완전하고 참된 구현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할 때는 그 나라의 왕으로 오셨다. 하나님이 그를 자기 나라의 왕으로 임명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백성들에게 나타내시기 전에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받으시고 이어서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하나님 나라의 왕 곧 메시야로 임직되시고 선포되셨다. 물세례 직후 성령으로 세례받으심을 메시야로 임직되었고,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나의 왕으로 선포되었다. 즉‘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도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7).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아 메시야로 임직된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의 권능으로 오셨고 그러므로 성령의 권능으로 다스리게 되었다. 성령의 권능으로 다스리기 시작하신 하나님 나라의 왕은 그 권능으로 사람들의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추방하고 죄를 사하며, 기사와 능력을 행하셨다. ‘즉 사탄의 권세와 그의 왕국을 궤멸하여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리시고 죄를 해결하여 하나님을 사람에게 오게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듣은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자기들의 나라의 해방과 독립에 연결시키고 그리고 원수의 나라를 제압하고 세계를 지배하는 세상적 왕권을 생각하였다. 유대인들은 예수의 기적 행사에서 이스라엘의 자주 독립과 이스라엘의 영광을 생각하였다. 특히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독립의 가능의 능력을 보았다. 그러므로 그 기적후에 사람들은 예수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로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세상 나나의 회복과 하나님 나라를 일치시키지 안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와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로 각각 다른 내용을 생각하였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통치로 이스라엘의 독립과 독립국가 이스라엘의 확립과 영광을 생각하였다. 그들은 옛날 다윗왕이 다스리던 세상의 재판과 그 복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로 죄가 사해지고 제거돼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오시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신령한 나라를 뜻하셨다. 그러므로 성령의 권세로 병이 치료되고, 귀신이 추방되며 사죄가 이루어졌다. 이 나라는 신령하여 이스라엘 한 나나에 국한할 수 없고 전 세계 족속들을 포용하는 보편한 나라가 될 것이었다. 더욱 결정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인격으로 죄고의 문제가 해결되어 하나님께서 세상과 화해하시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결정적으로 수립될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때에 성령께서 인류들에게 오시기 때문이다.
세상을 구속하여 보편한 하나님의 나를 이루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와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세상적인 독립과 영광을 바랐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신령한 나라 곧 보편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려 오셨다. 그는 죄 문제를 해결하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려 하였는데. 유대인들은 정치적인 해결 곧 세상적인 나라를 추구하였다. 그것은 당대 세계 최강국가 로마가 추구하던 목표였고, 또 그 목표와 동일하였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목표와 유대인들의 목표가 달랐으므로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의 기적 행사에서 걸려 넘어지고 반감을 갖게 되었다. 하루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된 자를 고쳐 주셨다. 사람들은 다 이 일이 하나님의 역사로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 곧 메시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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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통치>
그러면 여기서 제기될 수 있는 질문은 천지 창조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이후에는 다스리시고 그전에는 다스리지 안했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신약이 제시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과 다른 통치방식을 말할 수 밖에없다. 하나님께서 천지의 창조주로서는 이 세상을 지배하시고 보존하시며 섭리하시며, 인류종족들을 인도하심에 있어서는 창조주로서 왕이시다. 그러나 죄가 인류를 지배하고 있는 한은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들에게 흘러들어오지 못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의 법이 사람들 중에 그대로 세워지고 순종되지 못하였다. 즉 하나님의 권위가 주권적으로 인정되고 준수되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의 법들이 인간 사회의 법과 질서로 세워지고 준수되지 못하였다. 또 죄가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한 하나님께서 계실 수 없었고, 또 그들 마음에 실제로 오시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왕이시지 못하였다. 인류가 죄 아래 있고 하나님과 함께 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참 생명에서 단절되고 이렇게 모든 문제들과 악이 흥성하게 되어 세상이 파멸의 위기들을 수없이 겪어오게 되었다.
<죄의 제거>
하나님의 통치에 있어서는 죄가 선결되어야 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문제의 해결없이 설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상에 자기의 나라를 세우실려고 할 때 죄를 제거하는 일을 먼저하셨다. 따라서 인류 역사는 하나님께서 죄와 투쟁하시는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죄가 해결되기 전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자기의 나를 세우려고 하심을 창조 때부터 목표하셨다. 왜냐하면 그가 인간세계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나라를 세상 백성들 중에서와 세상 나라 위에 세우시려는 일을 창조시 부터 목표하셨지만, 아담의 죄에로의 타락이 범죄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위에 세우는 일을 가로막아서 하나님의 지으신 창조로 하여금 더 쉽게 말하면, 요한계시록 11장 15절의 말씀대로 이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게 하는 것을 못하게 하였다.
범죄는 어두움과 참패와 죽음과 고통등의 적대세력을 창조에 도입하여 창조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에서 떠나게 하여 창조 곧 우리 인간 사회와 세상 나라들이 파멸에 직면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창조주는 자기의 창조 목적을 낭패케 하실 수 없기 때문에 타락한 창조를 간섭하시고 섭리하셔서 보존하신다. 창조를 타락과 범죄로 인해 방치해버리시고, 또 그 죄과를 물어 심판을 집행하셨다면, 하나님의 창조가 보존되고 존속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창조주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려는 창조 목적과 경륜을 가지셨으므로 이 타락한 세상을 간섭하시고서, 이 창조를 본존하시기 위해 모든 창조가 부패의 길로 가는 것을 억제하셨다. 이 창조의 보존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때문에 가능하게 됐고, 또 그 구속을 인해 보존하시기로 하신 것이다.
죄는 그냥 내버려 두면 모든 것을 다 분리하고 분열케 해서 마침내 모든 것을 소멸하게 한다. 바로 이것이 죄의 특성이다. 구약 시편에 보면 범죄한 악인들에게 평안함이 없고 쉽게 세상에서 그 자취를 감춘다고 했는데, 그것은 범죄한 사람들이 그 인격에 분열을 겪고 또 범죄하고도 질병을 갖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죄가 사람으로 하여금 그와 같이 그의 인격에 분열을 일으키고 부패하게 할 뿐만 아니라 파괴해서 그 사람의 생명을 쉽게 단축케 한다.
이처럼 창조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것은 이 세상이 타락하므로 온 세상이 다 어둠에 의해 감싸이게 됐고, 부패에 이루게 되어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권능으로 지어진 창조가 파괴되고 소멸되게 되었다.
그러나 창조주는 처음에 창조를 이루실 때 자기의 권능과 영광을 발현하고 발휘하셨고, 또 그 목적으로 창조를 만드셨다. 그 보다 더욱 바라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 자기의 나라를 세우시므로 자기 백성들 가운데 자기의 영광이 수천수만 배로 찬양되므로 더 큰 영광을 보시고, 자기의 인자와 긍휼과 권세가 백성들에 의해 찬양을 받으시려고 하셨다. 이 목표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의 창조를 파괴하는 죄를 그냥 방치해 두신 것이 아니고 이 타락한 세상에 간섭하셨다.
<하나님 나라의 복원>
아담이 타락하므로 죄와 저주, 고통과 해악, 사망과 소멸 등의 적대적인 세력들이 인간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런 창조세계에 하나님께서 간섭하셔서 죄와 저주, 사망과 고통을 창조세계에서 제거 하시려고 하셨다. 죄와 악을 억제하기 위해 일반은총이 역사하게 하셨고 기타 여러 방어 방치 제도들을 많이 두셨지만 그런 것들로는 죄악과 고통과 사망을 결정적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결정적인 섭리를 이루셨다. 그것은 곧 자기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구속주로 세우신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 아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며 구속하신다.
세상을 구속하신다는 말씀은 죄 때문에 우리의 모든 질병과 고통과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마지막인 죽음, 그리고 부패와 해체가 왔는데 이 모든 것들을 창조에서 제거하시고, 창조를 하나님께로 돌려 그의 영광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케 하는 것이다. 즉 피조물을 다시 하나님의 피조물로 복원시켜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이루시기로 하셨고 마침내 일을 이루시며, 종말에서 모든 것을 완전하게 회복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경륜과 섭리를 따라 마침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사 죄값을 지불하게 하시므로 악한 자의 권세에서 창조를 구출해 내신 것이다. 그리고 이 구속과 함께 마침내 모든 만물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셨다. 완전한 통일은 종말에 이루어질 것이어도 현재도 창조가 질서있는 세계 곧 코스모스로 있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통일케 하는 역사와 붙드심 때문이다. 구속이 완료된 창조는 완전히 조화 통일되는 유기체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 이전까지의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그리스도의 출생의 예비였다. 하나님은 아담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당장 형을 집행하여 사망에 이르게 하신 것이 아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여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형벌 곧 사형을 집행 유예하셨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 앞에 책임 규명을 받기 위하여 호출되었을 때, 변명하기를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고 책임을 전가하였다. 그 책임전가는 여인에게로 돌린 것 같지만 실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여자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살며시 책임을 하나님께로 돌렸다.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책임을 물으셨을 때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고 답하였는데, 하나님께서 만드셔서 선악을 아는 나무에 가까이 있어 지나게 하신 뱀이 꾀므로 먹었다고 답하므로, 이 모든 것의 책임을 간접적으로나 화살을 하나님께로 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따먹은 인류를 당장 죽이지 않으셨다. 심판은 선언하셨어도 심판을 당장 집행하지 않으시고 집행유예를 하셨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시는 경륜을 가지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는 아담의 후손들에게서 계속되었다. 노아에게 역사하사 죄악이 극에 달한 세상을 물로 심판하셨지만, 구속주의 오실 준비로 자연의 질서와 현상계가 더 이상 과격한 변동 없이 그 궤도를 달려서 창조가 운용되고 보존되게 하셨다.
하나님은 더욱 본격적으로 인류 역사에 개입하시사 아브라함을 택하시사 그의 후손에서 구세주가 출생되게 섭리하셨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야곱의 열두 아들에게 역사하시고, 특히 요셉을 사용하시사 애굽에서 430년간 이스라엘 자손이 번창하여 한 민족을 이룰 수 있게 하시고,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하고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게 하시고 광야 40년을 지난 후 여호수아로 역사하시사 가나안에 정착하여 살게 하시고, 또 다윗 왕조를 세우신 후 솔로몬으로 성전을 짓게 하시고 하나님을 섬기며 구속주를 기다리게 하시기를 세례요한 때까지 하게 하셨다. 이 모든 것은 다 그것 자체들로 의의와 목적을 가진 것이라기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을 준비하게 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 세상의 구속주의 출생 준비였고, 그 때문에 존재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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