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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집, 모음

1968년 안양역 모습

by 해찬솔의 신학 2007. 5. 4.

 

                                                                                                                           김한영 교수

1. 삼위일체의 뜻(요10:30)

 

(1) 성부.성자.성령은 각각 하나의 하나님(엡4:5)

(2) 한 본체에 삼위로 실존하시는 하나님(마3:16)

(3) 하나에 셋, 셋이 하나, 즉 셋인 하나(마28:19)

 

2. 삼위일체의 동일성

 

(1) 본질상의 동일함(빌2;6)

     A. 성부 하나님(고전8:6, 엡4:6)

     B. 성자 하나님(요1:1,18, 롬9:5, 요일5:20)

     C. 성령 하나님(요15:26, 고전2:11)

 

(2) 능력상 동일함(요일5:20)

     A. 천지 만물 창조하신 성부 하나님(창1:1, 히2:10)

     B. 창조당시 함께 계신 성자 하나님(창1:26, 요1:3)

     C. 창조 때 운행하신 성령 하나님(창1:2, 롬8;16)

 

(3) 시간상 동일함(히13:8)

     A. 태초에 계신 영원하신 하나님(창1:1, 신33:27)

     B. 태초에 계신 영원하신 예수님(요1:1, 히7:24)

     C. 태초에 계신 영원하신 성령님(창1;2, 히9:14)

 

3. 삼위일체의 예증

    (1) 태양 - 본체, 빛, 열

    (2) 물 - 고체, 액체, 기체

    (3) 나무 - 뿌리, 줄기, 열매

    (4) 곤충 - 알, 애벌레, 나비

    (5) 꽃 - 본체, 색갈, 향기

    (6) 사람 - 영, 혼, 몸

    (7) 사과 - 껍질(보호역할), 살(맛), 응어리(씨)

    (8) 심리적 합일 - 지, 정, 의

    (9) 논리적 합일 - 정, 반, 합

   (10)형이상학적 합일 - 주관, 객관, 주객관

   (11)전기 - 빛, 열, 힘(동력)

 

4.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

   (1) 인간을 만드실 때 함께 역사(창1:26)

   (2) 예수 세례 받으실 때 성부.성령 함께 사역(마3;16)

   (3) 세례 때 성부.성자.성령의 이름으로 사역(마28:19)

   (4) 축복 기원할 때 삼위의 이름으로 사역(고후13:13)

   (5) 성부.성자.성령은 같은 능력으로 사역(요14:16)

 

 

1. 삼위일체 하나님

1. 삼위일체 예증

 

 참된 신인 하나님은 `삼위가 일체'임을 성경은 가르쳐 주고있다. 하나님의 본질(속성)은 하나이지만 3개의 다른 인격을 가지고 계신다(마28:19). 이 삼위일체에 대한 말은 자연계 속에서나 우리 인간의 머리로서 잘 표현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되지만 비슷한 예를 몇가지 들고자 한다.

 

   (1) 전기 - 전기는 "열"이 있고 "빛"이 있고 "힘"이 있다.

이와 같이 전기는 하나이지만 세가지 각각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물 - 물은 "액체"와 "고체"와 "수증기" 즉 "기체"로 각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형태도 다르다. 그러나 물이다. 물이 수증기가 되었다가 얼어서 얼음이 되면 고체가 되기도 하고 녹으면 액체인 물이 된다.

이와 같이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삼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2. 삼위일체의 뜻

 하나님은 한 분인데 위가 셋이라 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하나님을 셋으로 하는 것이 아니냐? 성부, 성자, 성령 셋이 모두 신이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니다.

여기 삼위의 "위"라는 말은 라틴말에서 온 것인데 그 뜻은 극장에서 배우들이 쓰는 "탈"과 그 탈을 쓰고 연극을 하는 "배우"의 둘을 말하고 있다. 어떤 배우가 때로는 "아버지"의 탈을 쓰고 역할을 할 때가 있고, 어떤 때는 "아들"의 탈을 쓰고 역할을 할 때가 있고, 어떤 때는 "아들"의 탈을 쓰고 역할을 할 때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은 세가지 다른 방법에서 보여주신 하나님 곧 성부.성자.성령으로 보고 믿어야 한다.

 

3. 삼위일체 역할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은 한 분, 예수도 한 하나님, 성령도 한 하나님이라는 세 분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람에게 보이실 때에 세 가지 다른 방법으로 보이시고 사람들은 또한 자기들의 처지에서 한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세 가지 다른 방법에서 경험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교리이다.

그 역할은 성부는 창조와 통치의 주역(창1:1)으로, 성자는 구원의 완성과 속죄의 죽음(요3:16, 6:40, 10:30)으로 성령은 교회의 형성과 가르치는 활동(요14:16-28, 15:26, 16:13-15)으로 역사 하신다. 이 세분이 한 하나님이시다(딤전2:5, 신6:4, 고전8:6).

 

3. 삼위일체 하나님의 복 (고후13:5-13)

바울은 그의 윤리적 훈계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강복선언으로 끝을 내리고 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로 혹독하게 나무란 후 자신의 방문이 불쾌하게 되지 않기를 바라며 자신들을 돌아보아 참된 믿음안에 거하는지를 살피고 서로 사랑하며 평안을 얻으라고 강권한다. 그리고 삼위일체의 하나님 이름으로 그들이 비록 서로 다툴지라도 충만한 복을 그들에게 선언해 주고 있다

 

1. 전체 하나님의 완전한 복(13)

 우리는 전부를 원한다. 일부분에 얽매여서는 안되며 부분적인 것이 전체인냥 보여서도 안된다. 하나님의 전체 진리와 사랑을 원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전적인 관심을 요구해야 한다.

김소영 목사님이 얼마전 공보논단에서 한 말이 새롭게 생각이 난다.

"우리나라의 교회는 성부적 교회가 있고, 성자적 교회가 있고, 성령적 교회가 있다. 성부적 교회는 권위를 강조하는 교회요, 성자적 교회는 고난.자유.해방.정의 등을 외치고 성령적 교회는 성령충만.성령세례 등만을 강조한다. 이는 기독교의 진리인 삼위일체 진리에 전혀 왜곡된다."고 하신 말씀이다.

 

2. 온전하신 하나님의 역사

경우에 따라서 우리는 주일 설교가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 그날 밤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을 부르시면 그만이다. 모든 설교가 우리들에게 마지막 설교처럼 되어야 한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말하노니"라는 표현을 썼다. 우리가 이 말씀을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면 마지막으로 들어야 할 말씀은 무엇인가?

   (1) 성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2) 성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 "하나님의 사랑"

 

(3) 성령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 "성령의 교통하심"

 

3. 신앙의 온전함

우리 신앙의 온전함을 위해 완전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체험하고 받아들여 순종해야 한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믿음을 갖지 말자.

 

3.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

어거스틴이 바닷가를 거닐면서 삼위일체에 대해 고민을 했습니다.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없어 계속 고민하며 걸어가는데 자기 앞에 어느 어린 아이 하나가 바닷가에 앉아 장난을 하며 놀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퍼서 자기 앞에 파놓은 조그마한 구멍에 붓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은 물었습니다. 󰡒너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니?󰡓 어린이가 대답하기를 󰡒바닷물을 다 퍼서 여기 넣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어거스틴은 깨달았습니다. 내가 어리석은 생각을 했구나 다시는 삼위일체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어거스틴이 바닷가에서 본 것은 환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계시했느냐 이것이 문제지 합리적이냐. 이치에 맞느냐 하는 이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어느쪽이 사실이냐 그것만 문제가 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셨으면 오신 것으로 끝난 것이지 이것이 가능하냐 아니냐. 내 마음에 드느냐 안드느냐. 이치에 맞느냐 안맞느냐가 무슨 상관입니까? 오직 믿음으로 묻지 말고 믿어야할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의 격언 중에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갈까 말까 하는 길은 가지 말라. 먹을까 말까 하는 음식은 먹지 말라. 할까 말까 하는 일은 하지 말라. 죽을까 말까 할 때는 죽으라󰡓입니다. 우리에게 좀더 새로운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지성, 우리의 판단이 다 충족된 다음에 무엇을 하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맙시다.

 

4.삼위일체 강의

 

제 1 장 삼위일체(三位一體)

 

삼위일체란

 이 세상에는 말로나 입으로 다 설명(說明)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믿는 기독교(基督敎)의 진리(眞理)인 삼위일체 교리(三位一體敎理)역시 인간의 지력(智力)으로 완전히 이해(理解)하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교리(敎理)는 성경전서(聖經全書)에서 가장 난해(難解)한 교리이므로 충분한 설명을 기대할 수 없다. 특히 삼위일체 교리(三位一體敎理)는 인간이성(人間理性) 영역밖에 있으므로 사람의 지혜(知慧)로는 측량하기 어렵다.

인간이 성경에 계시된 외에는 하나님의 대해서 전부(全部) 알 수 없듯이 삼위일체도 전부 알 수 없으며 또한 삼위일체에 대한 충분(充分)한 이해와 설명을 시도(試圖)하려고 하는 것은 마치 찻잔으로 큰 바다물을 되어보려는 것과 같은 어려운 신비의 교리이다.

어거스틴(Augustinus)의 거작 De Trinitate 마지막에 그는 말하기를 ‘주 우리의 하나님이여,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이신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이 삼위일체가 아니라면, 진리는 가서 세례를 베풀고......운운 하는(마28:19)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기억합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주여, 한 분 하나님이신 당신이여, 성 삼위일체시여, 내가 한 분이신 당신의 영감으로 이 책에 기록한 모든 것을 삼위이신 당신이 받아 주소서. 만일 그 속에 나의 생각이 포함되어 있거든 한 분이시면 삼위이신 당신이 그것을 간과해 주소서’ 어거스틴의 이 말은 참으로 아름답고 기억해 둘만한 가치가 있다. 또한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이 말씀을 하고 있으므로 설명을 다 못하나 믿을 수 밖에 없다고 하였다.

삼위일체란 말은 성경에 나오는 용어(用語)는 아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라는 용어로 표현된 역사상의 교리를 비성서적이요 비기독교적인 것으로 보아서는 않된다. 성경에는 삼위일체라는 말이 직접(直接) 표현(表現)된 곳은 없으나 삼위일체를 나타내고 있는 성경구절(聖經句節)들은 많이 있다.

삼위일체란, 하나님의 한 본질(本質) 안에 구별(區別)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삼위일체는 삼신(三神)을 뜻하는 것도 아니고, 세가지 양태(樣態)나 세 부분(部分)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신격(神格)에는 삼위(三位)가 계시는데 이는 성부(聖父)와 성자(聖子)와 성령(聖靈)이시며, 이 삼위(三位)는 한 하나님이시고 본체(本體)도 하나이시고 권능(權能)과 영광(榮光)도 동등(同等)하시다.

삼위(三位)는 세가지 모양(模樣)이거나 가면(假面)이 아니다. 그렇다고 어떤 직분(職分)이나 기능(機能)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즉 한 사람이 세가지 기능(機能)이나 직분(職分)을 의미(意味)하지 않는다.

삼위(三位)는 ‘세위격’(三位格) 또는 ‘세격위’(三格位) 세분의 인격적(人格的) 존재(存在)를 가리킨다. 삼위(三位)는 세분이라는 뜻이다. 한 분이 아니시고 세 분이시다. 이것은 상식(常識)이면서도 지극히 성경적이다. 삼위(三位)는 세 분이 계신다. ‘본체는 하나이나 세분으로 계신다’가 아니고 세 분이 계시는데 그 세분의 신성(神性)은 단일(單一)하시다. 왜냐하면 모두 동질(同質)이시기 때문이다. 삼위(三位)가 다른 질(質)의 신성(神性)이시면 세 하나님들이지만, 신성(神性)이 동질(同質)이시므로 한 하나님이시다.

삼인격(三人格)이 일체(一體)란 것은 우리 이성(理性)의 지력(智力)으로 이해하려고 볼때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신비다. 그러나 기독교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를 이해(理解)하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전서가 그렇게 계시(啓示)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1. 삼위일체 증거에 관한 잘못된 견해

 

1. 오리겐(Origenes)

오리겐은 185년경에 알렉산드리아(Alexandrian)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기독교인으로서 202년 레오니데스(Leonides)의 대 박해시에 순교하였고, 오리겐은 어머니와 6인의 제매(弟妹)의 생활을 위하여 필경(筆耕)도 하고 학생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8세 때 스승인 클레멘트의 뒤를 이어서 신학교를 주관하게 되자 암모니어스 삭카스(Ammonius Saccas)에게서 철학을 배웠다.

오리겐은 일생동안 성경 연구에 노력을 기울였고, 성경을 중히 여겨 성경을 신학의 기초로 하였다. 다만 그는 우화(寓話)적인 해석법(Allegorical Interpretation)을 잘 썼다.

특히 오리겐은 그리스도의 교훈을 문자 그대로 실행하고자 스스로 상하여 고자가 되었고 그는 자신 스스로의 준엄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신학 사상에는 많은 문제점들이 있다. 그는 삼위일체론에 있어서는 종속설(從屬說)설을 세웠고, 영혼 선재설(靈魂 先在說)을 주장했으며, 십자가 구원 외에 구원의 다방면을 생각하였다.

또한 죽기 전에 깨끗하게 되지 못한 영혼은 내세(來世)에 가서 영혼(靈魂)을 깨끗하게 하는불이 있어 깨끗해진 후 구원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상(思想)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러한 오리겐의 사상은 연옥설과 비슷하여 연옥설(煉獄說)의 시초가 될 수 있었다. 오리겐은 악인도 사후(死後)에 시련을 통하여 그 길이 멀기는 하나, 마침내는 다 깨끗하게 되어서 만민이 다같이 구원을 얻는다고 믿었다.

오리겐은 말하기를 ‘로고스는 아버지와 하나이며 같은 본질을 가지고 계시나, 다른 한 편으로는 그는 하나의 존재하시는 분이며, 특별한 인격이시다. 아버지와 로고스는 두 인격이시며 한 하나님이시다. 같은 뜻을 가지시고, 같은 일을 하신다’ 오리겐은 아버지와 로고스는 성품이 같은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오리겐은 성품이 같은 아버지와 로고스 사이에 있어서 차별을 말하며 종속설(從屬說)을 세웠다.

즉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났으므로 아버지에게 복종하며 아버지에 속한다는 것이다. 오리겐은 아버지와 아들 외에 제3의 인격으로서 성령을 더했다. 그렇지만 오리겐은 성령이 하나님이심을 논중하지는 않았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에서 미루어 성령을 생각하게 하였다. 성령이 아들에게 종속(從屬)되었음을 말했는데 이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종속됨과 같다고 했다. 또한 성령은 아버지가 아들로 말미암아 처음으로 지으신 것이며, 이 삼위(三位)의 하나님은 그 지배하는 영역(領域)이 다르고, 원리(原理)가 되는 것은 성부(聖父)하나님이시며, 이성이 나오는 곳은 로고스 성자(聖子)이고, 성결케 하는 것은 성령(聖靈)이라고 한다.

오리겐의 삼위일체론은 종속론(從屬論)이다. 이러한 오리겐의 주장은 두 위(二位)의 본질적(本質的)신성(神性)을 떨어뜨렸다.

 

2. 사벨리안주위(Sabellianism)

A.D.2-3세기의 사벨리안주의의 선구자들은 노에투스(Noetus), 프락세우스(Praxeus), 에피고누스(Epigonus), 그리고 클레오메네스(Cleomenes)이다.

사벨리안주의는 하나님의 독재 (獨裁)흑은 독점적 지배를 옹호하는 독재론자들이다.

독재론은 동적 독재론(Dynamistic Monarcanism)과 양식적 독재론(Modalistic Monarchianism)의 두가지 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1) 동적 독재론 (同的 獨裁論)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의하여 선택되고 영감(靈感)되고 높임을 받은 단순한 인간이었으며 그리스도는 동정녀(童貞女)에게서 나서 세례를 받을 때에 영이 임하여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으며 부활 하므로 높임을 받게 된 것이다.

동적 독재론자 중에서 가장 뛰여난 이는 시리아 안디옥 감독이었던 사모사타 바울이었다. 사모사타(Samosata)는 안디옥의 동북 유브라데스강변에 위치한 곳에서 출생하여 260년 이래 안디옥의 감독을 지냈다.

그는 하나님은 온전한 한 인격이라고 생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로고스 흑은 아들, 지혜 흑은 성령은 하나님의 속성(屬性)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신적 이성 흑은 로고스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에게 속해 있던 것이며 비 인격적인 세력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동정녀에게서 탄생한 예수는 하나님의 로고스적 세력을 충만히 받은 한 인격이었다. 이처럼 위로부터 내려온 신적 지혜의 내주(內住)로 말미암아 인간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것이다. 이러한 지혜의 내주는 예언자들에게서도 올 수 있으나 하나님의 성전이신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독특(獨特)한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단순히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도덕적(道德的) 결합을 나타내는 데 불과한 것이다. 예수는 성령에 감화(感化)와 의지의 일치에 의해서 확고하게 하나님과 긴밀한 연합을 이루었으며 그리하여 기적을 행하는 능력과 구속자(救贖者)로서의 자격을 확보하였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과의 항구적(恒久的)인 일치에 도달하게 된것이다.

사모사타 바울의 가름침은 이상과 같다 그는 자기의 견해를 보급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찬미하는 찬송의 노래를 제거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264-269년 사이에 세 차례의 종교 회의가 개최되는 동안에도 정죄를 면하고 존속되었다. 왜냐하면 사모사타 바울은 자기 견해의 이단적 성격을 교묘히 은폐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어기 때문이다.

세번째 종교 회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능숙한 변론가요, 수사학자였던 장로 말키온(Malchoin)은 논쟁에서 사모사타 바울의 정체를 폭로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회의에세는 동질(Homoousios)이라는 말이 배격되었는데, 그 이유는 사모사타 바울이 하나님과 로고스를 한 인격으로 지칭하는데 이 말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사모사타 바울은 그리스도의 역사적 인간적 인격으로부터 출발하여 그리스도를 단순한 인간으로 전략(轉落)시켰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神性)을 단순한 능력(能力) 흑은 세력(勢力)으로 간주하여 예수의 인성(人性)이 신격화(神格化) 되었다고 본다. 그러므로 동적 독재론자들은 역사적 그리스도의 인격성(人格性)을 보존하고 그의 본질적인 신성(神性)을 희생시켰다.

 

2) 양식적 독재론(樣式的 獨裁論)

 양식적 독재론자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양식(mode) 흑은 현현이라고 생각하였다.

사벨리우스(Sabellius)는 모든 양식론자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유일의 진정한 양식론자였다.

사벨리우스는 기원 215년경에 로마에서 가르쳤다. 그는 삼위일체론적 개념(槪念)에 있어서 그의 체계는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하나님은 단일한 실체(μονας)이다. 하나님의 존재 안에는 구별이 없으며, 단일체(單一體)인 하나님은 세가지의 상이(相異)한 양식(樣式) 흑은 형태(形態)로 자기를 나타내신다. 자기를 창조주(創造主)로 나타내신 것은 아버지요, 구속자(救贖者)로 나타내신 것은 아들이며, 정결(精潔)한 자로 나타내신 것은 성령이다.

그러나 이것은 세 실체(三實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한 인격에 의에서 행하여진 세가지 역활(力活)이라고 하겠다. 다른 말로 하면 이들 삼자(三者)는 모두가 하나이며 동일(同一)한 인격(人格)인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무대의 배역에 비유하여 설명할 수도 있다. 즉 한 사람은 연극 배우자가 관중 앞에서 세 가지의 다른 성격 흑은 역활을 맡아 출연다고 하더라도, 그의 진짜 인격은 오직 하나뿐인 것이다.

사벨리우스의 삼위일체 체계의 근저를 이루고 있는 것은 가정(假定)된 동일성이다. 결국에 가서 사벨리우스는 파문을 당하고 그의 가름침은 배격되었다. 그러므로 사벨리우스주의의 하나님은 세 가지의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단일(單一)한 실체(實體), 단일(單一)한 인격이었다. 그리고 성부, 성자, 성신의 신성을 확인하나 삼위간에 모든 구별(區別)을 사라지게 했다.

양식적 독재론자들은 위격(位格)의 삼위성(三位性)을 부인(否認)하고 연속되는 계시의 삼위성으로 대치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 자신이 태여났고, 고난 당하셨으며, 죽으셨다고 함.

성부, 성자, 성신은 같은 하나님 같은 하나이고 같은 존재에 대한 세가지 이름이라고 한다. 이 이름을 세 개의 연속적인 에너지 또는 양태들에 차례로 다 적용했다. 하나님은 처음에 창조주와 입법자(立法者)로는 성부의 위격, 성부의 나타남, 또는 성부의 양태(樣態)로 나타났다가 그는 후에 성유신(成肉身) 때부터 승천하실 때까지는 구속주(救贖主)로서 성자의 위격과 얼굴로 나타났으며 마지막으로서는 생명(生命)을 주시는 이로써 성신의 위격과 얼굴로 나타났다고함.

이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희생시키지 않고 기독교적인 유일신앙을 유지하는 일이 그들의 관심이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성부와 동일시 하거나 하나님의 자기 현현의 한 양식으로 간주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한편 성부 자신의 고난을 당하고 죽었다고하는 성부 수난설(聖父受難說)에 이르게 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가현설(假現說)에 이르게 되었다.

 

3. 아리우스(Arius)

 아리우스는 리비아 사람으로서 신학자 루씨안(Lucianus-312년경에 죽음)에게 배우고 알렉산드리아에 와서 바우칼리스(Baucalis)라는 교회를 담임한 장로가 되었다.

아리우스는 325년 콘스탄티 대제에 의해 소집된 니키야 회에서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와 신학적 논쟁 기독론에 관한 그리스도의 신성(神聖)과 인성(人性)을 부인함으로 이단으로 정죄되어 일리아지방으로 추방되었다.

아리우스는 성자는 성부의 최초(最初)의 피조물(被造物)로, 성령은 성자의 최초 피조물이라고 주장하여 성자와 성령의 신성(神性)을 모두 부정한다.

아리우스는 성부만이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성자는 만물중 첫째가는 분이자 가장 위대한 분으로 무에서 창조되었고 성령은 성자에 의해 존재하게 된 모든 피조물 중 첫째이자 가장 위대한 분이라고 한다.

그리고 성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피조물이므로 성자는 신적 본질을 취하지 않았으므로 성자는 성부와 동일본질(同一本質)이 아니고 좀 수정된 의미에서 하나님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성자는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으며 성자는 성부의 창조로 지상에 내려와 친히 인간의 몸을 취하신 제이의(弟二位) 존재자라 주장하므로 성자의 신성을 부정하고 또한 성자는 그의 몸에서 ‘로고스’가 인간의 지성(知性)이나 영적인 원리(原理)를 취하셨기 때문에 완전한 인간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즉 그리스도는 완전신(完全神)도 아니고 완전인(完全人)도 아니라고 했다. 이는 성자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다.

만일 아리우스가 주장하는 대로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등한 영원성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고 또 진정한 인간도 아니라면, 그는 노스틱주의의 창조신(demiurge)과도 비교할 수 있는 중간적 존재 흑은 반신 반인간의 존재다. 그렇다면 우리는 피조물을 경배하는 결과가 된다. 이러한 중간적 존재가 어째서 전능하신 창조주에게 필요했던가 ?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과 직접 접촉하기에는 너무나 오만했기 때문이었던가 ?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만일 그가 중간적 존재 없이는 세계를 창조할 수 없었다면, 중간적 존재 없이 아들을 창조하는 일도 불가능한 일이다.

 

2. 잘못된 삼위일체 유추(類推)의 예증(例證).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해 보려고 초대교회부터 여러가지 원천에서 인출된 유추(類推)에 의하여 모순 없이 밝혀보려고 여러 예증(例證)들로 시도해 보았다.

그러나 이 모든 유추들은 삼위일체의 논의에 약간의 이해와 도움은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모두가 다 불안전하며 불충분하다.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고 하며, 무슨 형상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분만 아니라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자연계나 인간의 정신 구조에서 찾아 설명하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지 못하고 헛된 일에 불과하다.

 

1. 나무의 뿌리, 줄기, 가지의 유추

 ‘성부는 나무의 뿌리고 성자는 나무의 줄기이고 성령은 가지이다. 따라서 한 나무이지만 뿌리, 줄기, 가지가 있는 것처럼 삼위일체 하나님도 그러하다’.

성경에 내 아버지는 농부이고, 나는 포도나무라고 한곳은 있어도, 그러나 성령은 그 가지라고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우리 신자들이 그 가지라고 하였다(요15:1-8).

하나님의 신격에는 삼위가 계신다. 이 삼위는 한 하나님이시고 본체도 하나이시고 권능과 영광도 동등하시다. 그러나 뿌리, 줄기, 가지는 기능이 다르다. 뿌리의 기능이 다르고, 줄기의 기능이 다르며, 가지의 기능이 다르다. 줄기가 뿌리의 일을 할 수 없고 뿌리가 줄기와 가지의 일을 할 수 없다. 그리고 뿌리, 줄기, 가지는 동질이 아니다.

 

2. 태양의 유추

 태양의 열과 빛은 동등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열과 빛은 인격적인 존재일 수도 없고, 태양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예증을 위한 비유이기 때문에 인격 또는 무인격을 논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약간의 비슷한 비유는 있어야 한다. 더욱이 이것은 성경 어느 곳에도 언급한 곳이 없기 때문에 타당하지 못하다. 성경에 “나는 빛이요”라는 말은 있다. 그러나 내 아버지는 태양이고 성령은 열과 같다는 말은 없다.

 

3. 물의 유추

 물질계에서 취해온 삼위일체에 대한 유추들이 많이 있다.

특히 물의 운동에 있어서 샘물, 시내, 강 또는 습기, 구름, 비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예증들은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어둡게 만들고 있다. 무엇 때문에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물, 얼음, 기체와 같다고 설명할까 ?

성부가 물이고 성자가 얼음이고 성령이 기체와 같다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하는 것은 하나님은 한 분이나 세 형태로 나타난다고 하는 양식적 단일 신론(單一神論)를 후원하기 쉽다.

 

4. 클로바(Clover)잎의 유추

 아이렌드에서 성 패트릭은 클로바잎과 같은 토끼풀로 삼위일체 교리에 사용했다.

그는 그것을 청중 앞에 들고서 ‘이것이 무엇냐 ?’고 물었다. 청중들은 ‘토끼풀이요’라는 대답을 했다. 다음에 그는 토끼풀의 한 판을 따버리고 ‘이것이 무엇냐 ?’하였다. 청중들은 ‘토끼풀이요’라는 대답이 다시 나왔다. 세판이 각각 같은 대답으로 묘사되었다.

이것은 한 명사(名詞)가 힌 의미로 하나인 것에 관설(關說)하고 다른 의미로 셋인 것에 관설 할 수 있다.

그러나 토끼풀 예증은 이보다 더 멀리 예증으로 추진(推進) 되어서는 않된다. 잘못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을 머리가 셋 달린 괴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진리는 사람의 이성으로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三人格이 一體란 것은 우리 이성으로 인식하기에는 불가사이하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설명을 우리 주위에 있는 자연계나 정신계(精神界)의 구조에 의하여 예증 할려고 하는 것은 위험하고 바람직하지 못하다.

하나님과 같은 존재나 비슷한 것은 전연 없다.“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하며 무슨 형상으로 비기리요”사40:18.

성부도 참 하나님, 성자도 참 하나님, 성령도 참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세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 하나님으로 있음이 아니고 하나님은 유일하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어느 유추로 예증하기에는 불가능한것이다.

 

3.삼위일체의 성경적 증거(證據)

 삼위일체 교리는 인간의 이성(理性)이나 경험(經驗) 또는 철학적 사색(哲學的思索)의 산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특별계시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교리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超越)하는 신비의 교리이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으로 완벽하게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교리의 목적은 인간으로하여금 완전히 알도록 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류(誤謬)로 빠지는 것을 방어라려는 데 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삼위일체에 대한 출발과 그 증명도 특별계시인 성경에 의거해야 한다.

 

1.구약의 증거(舊約의 證據)

초대교회 교부들과 후대 신학자들 중 어떤 자들은 하나님의 계시의 점진적인(啓示漸進的) 특성을 무시하고 삼위일체 교리가 구약에 완전히 계시되었다고 가르쳤다. 그런가하면 소시니안파와 알미니안파에서는 이 교리가 구약에서는 전연 발견되지 않았다는 견해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둘 다 잘못된 견해(見解)이다. 그 이유는 신약에서와 같이 구약에서도 이 교리에 대하여 충분(充分)하지는 않지만 분명(分明)히 계시(啓示)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계시의 점진성(漸進成)으로 인하여 구약이 신약만큼 이 교리를 구체적(具體的)으로 증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 및 섭리와 관련하여 추상적이기는 하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다양한 증거가 구약에 포함되어 있다.

 

1)엘로힘(מי󰕙ל󰔟<하나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여기서 “...하나님이...”‘엘로힘’은 복수형을 가리킨다. 이는 복수형으로 위엄하신 하나님, 창조주와 통치주 하나님으로서의 일반적 면을 지시한다.

‘מ󰕙ל󰔟’(엘로힘)은 하나님의 속성(屬性)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이 명사는 삼위(三位)를 가리킨다. 물론 히브리어에서 명사들을 복수형으로 사용되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מ󰕙ל󰔟’(엘로힘)은 하나님 안에 있는 인격적(人格的) 구별(區別)을 의미하고 있다.

 

2)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우리’라는 복수형을 말씀하셨다.

 

① 우리의 형상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창1:26

인간 창조시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셨다. 이 말씀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구약적 증거이다. 이러한 사실은 후대(後代)의 발전(發展)된 계시(啓示)에 의해 뒷받침될 뿐 아니라 창1:2절에 나타난 성령의 활동과 그리스도께서 태초에 천지창조(天地創造) 사역에 동참(同參)하셨음을 분명히 밝힌 요한복음 기자의 증거(요1:2-3)에 의해서도 입증된다.

 

② 우리가 내려가서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창11:7

‘우리’라는 표현과 더불어 태초로부터 삼위(三位)의 하나님, 즉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님의 신성(神性)으로 존재(存在)하고 계셨음을 암시(暗示)하는 말이다.

 

③ 누가 우리를 위하여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6:8

여기서 이사야를 소명(召命)하시는 주체(主體)가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분명(分明)히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신을 위해 일할 일군을 파송하실 때 ‘우리’라는 복수형을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영원한 지혜(知慧)와 능력(能力)이신 아들과 성령과 함께 만물에 대한 구속 계획을 의논하시는 모습이다.

 

3) 하나님은 성자를 ‘나의 신’ 성령을 ‘그 신’이라고 증거했다.

 

① 나의 신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사42: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여기서 하나님의 종으로 택함 받은 사람은 이위(二位)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 이유는 사42:2-4절의 내용이 충분히 뒷받침해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본절의 내용을 신약 마12:17-21절에서 인용하고 있음을 찾아 볼 수 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육체(肉體)를 지니시기도 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신성(神性)을 지닌 완전한 신적 존재이시다.

 

② 그 신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 신을 보내셨느니라” 사48:16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언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 신을 보내셨느니라’라고 말했다.

“나와 그 신”을 분리(分離)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서 ‘나’는 본서의 저자인 이사야를 가리키며 ‘그 신’은 하나님의 신(神)이신 삼위(三位)성령을 뜻하는 것이다.

(참조:사63:14;창1:2;6:3;삿3:10;잠1:23;켈3:12;욜2:28;학2:5;슥4:6)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우리의’‘우리가’‘우리를’‘나의 신’‘그 신을’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 안에 하나 이상의 인격(人格)이 있음을 인정(認定)하는 표현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스스로 ‘우리’ ‘나의 신’ ‘그 신’라는 인칭 대명사(人稱代名詞)로 부르신 사실이 삼위의 존재를 암시(暗示)한다.

 

4)구약에서 인간들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는 그리스도의 현현이다.

 

① 여호와 사자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웠는고 함이라” 창16:7-13

구약의 역사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가 일일이 구속사(救束史)에 간여하셨다. 그러므로 하갈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는 그리스도의 현현(顯現)이다.

그리스도의 현현으로 보는 이유는

첫째. 여호와의 사자가 자신을 스스로 여호와와 일치(一致)시키고 있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

둘째. 성경은 여호와의 사자를 여호와라고 분명(分明)하게 증거하고 있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여호와의 사자는 출3:4절에서 ‘여호와’와‘하나님’으로 표현되었다)출3:2.

 

2. 신약의 증거(新約의 證據)

 신약에서도 삼위일체 교리는 구체적(具體的)이고 조직적(組織的)인 설술(說述)에 접근하지 않고 구약에서와 같이 하나님은 유일신(唯一神)이라는 것과 성부, 성자, 성령이 각각 다 하나님이 되심을 인정하고 삼위의 동열(三位同列)들이 서술되어 있다. 특히 신약에서는 성자의 성육신(成肉身)과 지상 사역(地上使役)에 대한 서술과 제삼위 성령의 강림과 사역이 묘사되었다.

 

1). 하나님은 유일(唯一)이시다

 

① 유일하신 하나님

요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약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엡4: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구약에서 하나님은 참 유일(唯一)하신 분으로 가르침은 물론이고(신6:4;사44:6 등) 신약에서도 절대적인 유일신 신앙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의 유일성은 구약의 기초적인 원리인 동시에 신약에 근본적인 가정(假定)이다.

 

2). 삼위가 다 각각 하나님이되심

신약은 유일 참 하나님을 말하는 동시에 성부, 성자, 성령을 각각 인격적인 존재인 하나님으로 인정한다. 뿐만 아니라 삼위는 서로 인격적인 교재와 사랑을 하신다.

 

①성 부

고전8: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갈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엡4: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참조:마 11:25;요 6:27;벧전 1:2;빌 2:11 요 20:17; 막 14:36; 요11:41; 17:11)

 

②성 자

 롬9:5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딛2: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요6: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참조:골2:9;요1:1)

 

③성 령

 행5:3,4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을 얼마를 감추었느냐 당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 가 없더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고전2: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요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④ 삼위의 인격적(人格的) 교재

 신약은 성부, 성자, 성령을 상호인격적 교재의 대상 즉 판이한 인격들로 제시한다.

신약에서 삼위(三位)가 1,2,3인칭 대명사(人稱代名詞)로 서로 말씀하셨고, 상호 사랑하고 영화롭게 할 뿐 아니라 성자는 성부께 기도하고 성자는 성령을 보내는 존재로 묘사한다.

 

1,2,3 인 칭

 마17:0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 하는지라

요17:0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16:28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⑤).삼위는 서로 사랑하시며 영화롭게 하심

 요03: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요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16: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4).성부는 성자를 성자는 성령을 보내신다

 

① 성부는 성자를 보내심

 마10: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요17: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② 성자는 성령을 보내심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요16:0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5). 삼위동열(三位同列)의 구절

 신약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삼위 인격이 각각 동등한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고있다.

삼의일체 교리를 법식적 신경적 진술(法式的信經的陳述)로 해석한 성경구절은 없으나 특히 신약은 삼위(三位)을 동열(同列)에 기명(記名)하여 그들의 통일성(統一性)과 판이성(判異性)을 명확히 표시하는 여러 구절이 있다.

 

①대사명(大使命)의 말씀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대사명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레를 주라 하신 말씀이다. 이것은 지금 기독교의 입교의식(入校儀式)에 있어서 신도들의 마음눈 앞에 삼위일체의 교리를 신앙의 근본적 원리(根本的原理)로 제시하고 있는 성경교훈이다. 교회의 모든 신앙적 의식과 사업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즉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②사도축도문(使徒祝禱文)

 고후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

이 축도는 삼위일체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과 사랑의 계시가 드러났고, 그로 인해 사람은 하나님의 자비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이는 죄악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성자)를 보내어 인간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

‘성령의 교통하심’이란 죄 많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친교와 모든 성도들과의 교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성령의 활동과 임재로 말미암아 교회가 설립되고 또한 유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축도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상호 유기적으로 역사하시어 인간의 구원을 이루고 계심을 보여 준다.

그리고 이 축도에는 하나님 안에 있는 각위(各位)의 신성이 동등한 사실로 인정이 되며 하나님은 삼위로 존재하시고 그 삼위는 실재에 있어서 하나니시요 권능과 영광에서 동등이시라는 것을 의미한다.

 

③ 그리스도의 세례 기사

 마03:16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마0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성자의 세례받으신 기사에서도 삼위일체의 실재에 관한 명확한 교훈이 발견된다. 성경에서는 비들기를 주로 성령을 상징한다(눅3:22). 실로 성령은 비들기같이 성결된 모습으로 성자께 임하셨다. 성자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셨을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성부께서 성령과 더불어 성자의 공적 사역에 있어서 메시야로 인정하셨다.

 

④ 성탄의 예고

 눅01: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

눅01:3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마0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마01:19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마0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마0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01: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마01:23 보라 !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함이라

 

제 2 장 삼위일체론

 성서에는 '삼위일체'라은 말이 없다. 그러나 이것이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표현된 역사사의 교리를 비성서적이요 비기독교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삼위일체론적 신 개념은 성서적 구속사에 있어서 기초적이요 지배적인 사상이 되어 있다. 더우기 삼위일체 신앙은 교회의 교리적 체험을 나타내는 것인데, 그러산 신앙의 필요성은 여러 세기의 교회생활을 통해서 경건의 실제적 요청에 의하여 입증되어 왔다.

 

문헌상 처음으로 삼위일체라는 말을 사용한 사람은 안디옥의 테오필루스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삼위로 명확하게 표현하여 'trinitas'라는 말로 삼위격체론(hypostasianism)을 주장한 사람은 터툴리안 이다.

 

삼위일체론은 동.서방에서 각기 다른 양태로 논쟁되었다. 동방에서는 오리겐 이후 수 많은 논쟁을 거쳐 다메섹의 요한(A.D 754년경)에 의해 최종적으로 정리되었고, 서방에서는 비교적 원만한 과정속에서 힐라리가 집대성한 것을 어거스틴이 종합하여 완벽한 체계를 이루었다. 사실상 그 완성은 이미 콘스탄티노플의 종교회의에서(381년) 이미 채책된 교리였다.

 

본 논고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을 신학적 입장에서 취급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서방의 신학자이다. 그런데 서방에서는 별 논쟁없이 이찌기 터툴리안에 의해 삼위일체론이 확립되었기에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의 신학적 평가를 위해서는 어거스틴 이전의 삼위일체론 자체가 자신의 논쟁자들과의 논쟁의 와중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모든 동.서방의 삼위일체론적 논쟁이 종결되고 난 다음 그 논쟁을 회고 하면서 정리한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삼위일체론은 그의 저작 "De Trinitate"(On the Trinity)인데 이것은 그가 399년과 419년 사이에 다른 여러 날짜에 종합한 논의였다. 이것의 특징이라 할 것은 그라 아무데서도 그것을 증명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이 교리의 이해불가능성을 인정하며 인간 용어의 빈약성을 인정하면서 신앙의 문제로 돌린다. 그러나 여기에는 위대한 신학자의 학문적인 체계가 있으며 신학적인 논제들이 들어 있기에 연구의 가치가 있다.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교리

이론을 신학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장과 장에서 어거스틴 이전에 니케아 교회 공의회에서 잠정 확정된 삼위일체 교리의 내용과 신학적 논쟁점을 살피고, 그리고 그것이 다시 문제를 일으켜 어거스틴에 이르기까지 학문적, 신학적, 정치적 싸움이 되었던 주요 내용들의 신학적 견해들을 살펴서 그것들과 어거스틴의 신학의 특징들이 무엇인지 알아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장에서는 어거스틴 이전의 서방의 삼위일체론을 연구한 뒤 장에서 어거스틴 삼위일체론의 구성을 파악하고 장과 장에서 어거스틴 삼위일체론의 신학적 특징과 의의가 무엇인지 고찰하고 결론에서 종합 평가하려고 한다.

 

1. 니케아 전기시대

성령론에 대한 교리는 1)세레형식,2)사도신경,3)찬양과 기도문들,4)초기 교리적 오류에 대한 교회의 자극적 반응등에 의하여 여러 신학자들을 (클레멘트,스미톤,이레니우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터투리안)통해서 증되었다.

 

2. 니케아 시대 (313-580)

이 시대는 A.D.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즉위에서부터 590년 그레고리우스 1세의 즉위까지를 말한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604년 그레고리우스 1세가 죽은때까지를 경계로 삼는 사람도 있다. 그는 라틴 교부의 마지막 사람이며 첫 교황이다.

313-590 년 (최초의 세계적인 회합인 니케아 회의가 있었으므로 이렇게 부름)

성령에대한 아리우스의 사상을 배격하고 성령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확정 공포함.

***** 니케아 회의의 삼위일체론

 

동방에서 삼위일체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오리겐이었다. 오리겐은 3세기 동방신학의 신학계를 독점하였다. 그는 폭이 넓으면서도 다양하게 여러면에서 그의 영향력을 발휘했다. 삼위일체론에서도 그러했다. 오리겐은 성자의 출생에 대해 성자의 '영원한 출생'을 말하는가 하면, 성자를 "제2의 하나님" 혹은 "피조물"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모호한 가르침 때문에 그의 제자들은 크게 둘로 나누어 지게 되었다. 우파의 대표적 사람은 그레고리우스 타우마투르고스인데 그들은 오리겐의 가르침에서 성부로 부터 성자의 영원한 출생을 받아들였고, 좌파의 학문적 대표는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인데 이들은 호리겐의 가르침에서 성자는 성부보다 못한 제2의 하나님 혹은 피조물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런 교회의 분열은 제국의 통일을 원하는 콘스탄틴 황제에게는 크나 큰 도전이었다. 그도 처음에는 가볍게 보았으나 그의 고문 감독이었던 코르도바의 호시우스의 진언에 따라 황제의 명으로 325년 6월 니케아에 최초의 세계적 종교회의를 열었는데 300명에 이르는 감독들이 모이게 되었다.

 

그럼 여기서 논의된 삼위일체 교리의 신학적 논쟁들과 거기서 채택되어 작성된 신조의 내용을 교리적 측면에서 살펴 보겠다.

 

A. 신학적 논쟁점

니케아 회의는 세 파로 나누었다. 알렉산더와 아다나시우스가 영도하는 동질론자들(Homoousians)과 아리우스를 따르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 그리고 상황을 잘 모르는 화평을 희망하는 자들로 가이샤라의 유세비우스였다.

 

결국 니케아 회의는 아리우스주의와 알렉산더 사이의 신학적 논쟁이었다. 여기에서 아리우스주의는 배격되고 이단으로 정죄되어 알렉산더의 신학을 따르는 반아리우스적인 신앙고백이 채택되었다.

 

아리우스는 그리스도를 노스틱주의의 창조신(demiurge)과도 같은 한 신화적 표상 -반신(반신) 반인간(반인간)의 존재 - 으로 설명하였다. 그는 참으로 신적이지만 그러나 성부와 동등하지는 않다. 성부와 성자사이에는 본질적 차이가 있다. 홀로 아버지만이 진정한 신족 존재이며 아들은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아들은 세계의 창조를 중개하기 위하여 그리고 세상에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하여 시간과 공간이 있기 전에 창조되었다. 이것은 종속설을 말하는 것 이었다.

 

여기에 대항한 알렉산더의 니케아 신조는 '그리스도인 예수는 육을 입은

반신(반신)이 아니며 피조물의 계열에 있어서 최고의 피조물도 아니고 그는

신이다. 그는 아버지와 동질( s, homoousios)인 하나인 실체이다'

라는 것으로 니케아의 결정적 명제는 [아버지와 동질](아버지와 한 실체)이

라는 표현에 있다.

 

B. 신조의 내용

니케아 신조의 신앙고백은 이렇게 시작된다 "우리는 전능한 아버지, 유일한 하나님,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모든 것의 창조자를 믿습니다."

<볼 수 없는 것>이란 말은 플라톤의 <이데아>와 관계를 가진다. 신은 그저 단순히 지상의 모든 것의 창조자일 뿐 아니라, 플라톤 철학속에 나타난 <본질들>의 창조자이기도 하다.

 

니케아 신조는 이렇게 이어진다. "그리고 우리는 유일한 주 예수 그리스도, 아버지께서 낳으신 하나님의 아들, 아버지의 본질에서 낳은 외아들, 하나님의 하나님, 빛의 빛, 참 하나님의 참 하나님, 낮아지고 만들어지지 않은, 아버지와 동질[하나인 실체, homoousios]인 분을 믿습니다. 이 주님에 의해서 모든 것 곧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만들어졌습니다.

 

주님은 우리 인간을 위해, 우리의 구원을 위해, 강림하시고 육체를 입으시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서 하늘에 오르셨으며 거기서부터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을 믿습니다." 그리고나서 이 신앙고백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그리고 주께서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들, 또는 무로부터 만들었다거나, 다른 실체나 사물로 부터 만들었다고 말하며 신의 아들은 피조물이며, 변화되고 변질된다고 말하는 사람들, 이들은 성스런 사도의 교회에 의해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신조에 기록된 신앙고백이다.

 

3. 니케아후기시대

 

첫째시기--325년 니케아 후기때부터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 때까지(성령의 인격성에 대한 교리적 불확실성의 시대)

둘째시기--381년부터 칼케돈 회의 때까지(성령의 신성의 교리에대한 증언이확대된 시기였다

 

4. 니케아 회의 이후의 삼위일체론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우스주의를 정죄했지만, 논쟁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고 그후 50여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일부 감독들이 니케아 신앙형식에 대해서 진지한 의문을 제기하는데 있었고 또한 황실의 정책이 돌변하는데, 즉 콘스탄틴 황제의 정책의 유동성 - 제국의 통일을 위하여- 때문이었다.

 

니케아 신조의 형식에서는 '성령을 믿는다'고만 긍정하였을 뿐 신성 안에서의 성령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공개적인 논쟁은 없었기에 이것이 논쟁점이 되었다. 이 선조를 반대하는 반니케아 주의자들은 세파로 나누어지게 되었는데 즉 동일본질(homoousios)를 반대하는 자들로, 첫째 극단적 소수의 아리우스주의자인 상이본질파(Anoimoeans:상이본질), 둘째 다수의 보수적인 유사본질파(homoiousian:유사[homoiousios]본질), 세째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정치적인 아리우스자인 동류본질파(ho-moeans) 이었다.

 

이들 중 극단적 아리우스 주의자들은 알렉산드리아와 다른 몇몇 곳에서 그 세력을 확대하였으나 중립적인 다수의 보수주의자안 유사본질파와 동류 본질파들은 358년 앙카라에서 열린 회의에서 그 모습이 드러나는데 이들은니케아파보다도 극단적 아리우스를 더 적대시 하게 되어 마침내 보수파들은 아다나시우스파와 연합하였다.

황실 정책의 유동성 때문이라는 것은 콘스탄틴 자신이 제국의 결속을 다지는데 목적을 둔 만큼 한때는 니케아파를 지지하다가 돌변하여 반대하기도 하였다. 그가 죽자 그의 아들들은 가지각색이었다. 콘스탄틴2세는 콘스탄틴을 이어 니케아파를 지지하고, 그가 죽자 제국은 동.서로 나뉘어 동방정부의 콘스탄티누스는 아리우스주의를(반니케아파) 지지했고 서방정부의 콘스탄스는 니케아파 즉 아다나시우스를 지지하므로 두 형제 황제 사이는 우호적이지 못했는데 350년 마그넨티우스가 콘스탄스를 살해하므로 명실공히 콘스탄티누스가 전 제국의 황제가 되므로 잠시 아리우스주의가 정치적으로 진전됨에 따라 아다나시우스는 이런 와중에서 5차례에 걸쳐 추방살이를 하였다.

 

361년 콘스타티우는 사망하고 그를 계승한 황제들은 교회정치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고 373년 아다나시우스가 사망하자 이를 계승한 신(신) 니케아파가 나타났는데 이들이 카파도키안인 가아샤라의 바질, 나찌안주스의 그레고리, 니사의 그레고리였다. 378년경에 나찌안주스의 그레고리가 아리우스주의의 반박을 위해 콘스탄티노플에 간 뒤 379년 니케아 신앙의 추종자 데오도시우스가 즉위하여 381년 콘스탄티노플에 동방교회 회의를(제2차 전체공의회) 소집하여 신조를 최종 확정했다.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니케아신조를 그대로 채택하고 다만 니케아신조에 덧붙인 저주의 말을 제거했다. 그래서 이 신조는 니케아신조를 대신해서 오늘날까지 그냥 "니케아신조"라고 불리워진다.

 

A. 아다나시우스의 삼위일체론

아다나시우스가 삼위엘체론 형성에 있어서 크게 공헌한 것은 니케아 신조에도 잘 명시되지 않은 성령의 위격에 대하여 성령이 완전히 신적이며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공동실체적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니케아신조에서 자세히 논의되지 않았던 삼위일체론적 도식을 완성하였다.

 

아리우스는 성령을 하나의 위체로 간주하였으나 성자의 본질이 성부의 본질과 전혀 같지 않은 것과 꼭 같이 성령의 본질도 상자의 본질과 전혀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다나시우스는 논증을 위해 '성자'와 '신앙의 표준'에서 권위를 찾았는데

 

성경 전체에 걸쳐서 일치된 점은 성령이 피조물과 공통된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고 '성삼위 안에 있는 신성에 속하며 그 신성과 하나이다'라는 것임을 증명하고 그는 성삼위가 영원하고 동질적이며 분할 할 수 없다는 것과 성령이 성삼위의 일원이기 때문에 그분은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공동실체적일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아다나시우스는 마태복음 28:19의 '세례의식문'을 통해서 성령이 피조물일 수 없다고 하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아다나시우스의 삼위일체신학이 갖는 큰 약점은 삼위일체의 다양성과 통일성을 동시에 설명할 수 있는 확정된 용어가 결어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삼위의 숫자적 동일성을 표현하기 위해 동일본질(homoousios)이란 말을 많이 쓰지 않고 '성부의 본질에 귀속된 이라든가 '실체에 있어서 마찬가지'라는 등의 표현으로 만족한다. 그는 성부와 성자의 존립체를 품격으로 표현할 자기 자신의 용어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는 와 s의 차이를 별로 혹은 전혀 식별하지 못했던 같다. 그의 기본 입장은 무한하고 단순하고 나뉠 수없는 신적인 가 동시에 성부와 성자라는 것이다.

 

B.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삼위일체론

감독이며 동시에 신학자였던 세 사람이 4세기 후반부의 신학계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활약했는데 일반적으로 이들을 가라켜서 세 사람의 위대한 카파도카아 교부들이가고 부른다. 즉 카파도카아 지방의 가이샤라의 대 바질(Basil, the Great), 그의 동생이며 니사에서 감독으로 있는 그레고리(Gregory), 그리고 이 두 형제와 다같이 친분을 나누었던 나찌안주스의 그레고리이다.

 

세 사람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나찌난주스의 그레고리였는데 그는 교부들 주의 신학자였다. 그는 삼위일체교리를 위해 결정적인 도식을 만들어냈다. 이를 위해 아다나시우가 못했던 여러가지 개념을 구별 지었다. 그들은 두 계열의 개념을 사용했다.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신성>, <하나의 본질 또는 존재>,<하나의 본성>을 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 실체hypostaseis> 또는 <특성> 또는 <위격 Prosopa, personae>을 들고 이것을 앞의 것과 구별한다.

 

나찌안주스의 그레고리는 신적인 품격들의 통일성이 참된 것이어서 몇몇 사람의 순전히 '관념상의' 통일성과 반대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로보건

대 그들은 신성에다가 숫자의 범주를 전혀 사용하고 싶지 않았던 듯하다.

그들은 물질적인 것만을 분할 할 수 있다는 옛 아리스토텔레스식 교리를 받아들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는 모든 자연의 발전의 텔로스(telos)[곧 내적목적]는 개체적 사물이다. 이 입장에서는 세 위격 또는 세가지 신적 개시(현현)는 독립적인 존재의 힘 또는 독립적인 페르소나(personae)이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개체를 중요시하는 유명론적 경향이 사고를 지배하게 되자 아들과 성령은 특수한 개체적 존재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일조의 삼신론(삼신론)이 나올 가능성이 되었다.

 

4. 중세기

교리적 논쟁과 이단적 요소를 강력히 나타낸 시기로서 펠라기우스와 코엘레스티우스의 추종자들을 정죄함으로 결말을 봄.

 

5. 종교개혁 이전시대

로마 교회의 쇠퇴시대(1303-1517)

14세기와 15세기에 걸쳐 일어난 르네상스는 종교 개혁과 아울러 세계 역사의큰 변혁운동이었다. 동방과의 접촉으로 그리이스와 라틴의 고전 문학이 부흥됨으로써 시작되었고 그 결과

(1) 권위에서 반항하고 도리를 비평하며

(2) 개인주의 세력이 선행하였고 (3) 자연미를 동경하고 현세 향락을 추구하는 등의 여러 가지 특징을 가진 사건이다.

6. 프로테스탄트 개혁시대 (1517-1648)

1) 개혁의 필요성

(1) 교회의 부패...교직 매매,고급 성직자의 부도덕한 생활,음행.

(2) 교황의 세속화...교회의 권위 추락.

2) 개혁의 원인

(1) 교회의 타락...교직의 타락으로 휴머니즘의 발생.

(2) 개혁 전 개혁자의 위클리프,후스 등의 개혁론의 영향.

(3) 교황 레오 10세의 속죄표 판매에 대한 루터의 봉기.

3) 개혁의 형태

(1) 루터파...독일과 동북 유럽.

(2) 쯔빙글리파...쮜리히를 중심으로 독일어를 사용하는 스위스와 남부 독일.

(3) 칼빈파...제네바를 중심으로 불어를 사용하는 프랑스,스코틀랜드,네덜란드

(4) 영국 개혁파...영어를 사용하는 민족.

(5) 제세례파...서부 유럽의 대부분.

(6) 예수회...구교 운동으로 반종교 개혁 운동

6) 신학 사조

(1) 구교와 일치점...하나님,그리스도,성령,

(2) 다른점...교회,성경,구원,내세관 등.

a. 전설,가경을 배격. b. 교회내 구원,예전 반대.

c. 연옥설,속죄표,미사.화체설 반대

d. 루터,쯔빙글리는 개척,칼빈과 멜랑히톤은 조직.

7) 예배 의식.

(1) 지방어로 설교,교육 부흥,미사 분향 제도 폐지.

(2) 성일,성자,유물,성상 숭배,사자 위한 기도,성지 순례 등 폐지.

초대교회가 세기를 통해서 서부교회의 교리로 전승되어온 성령의 인격의 교리를 형성함에 기여한것처럼, 종교개혁은 유효적은혜, 중생 영적 능력부여, 성경의 조명에 있으서의 성령의 사역을 체계화 하였다.오늘날 교회는 대체로 이같은 개혁자들의 공헌에서 더 이상 크게 향상하지 못하고 있다.

 

7.종교개혁 후기시대

***. 아르메니우스파의 신학론과 도르트레히트 회의

(Dordrecht = 도르트.Dort)

1) 아르미니우스 (Arminius,1560-1609)

(1) 1560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출생.

(2) 제네바에 유학한 후 1588년에 암스테르담 목사가 됨.

(3) 학시과 웅변이 탁월하였다.

(4) 코오른허트 (Coornhert) 설을 논박해 달라는 관의 위촉을 받고 연구

하다가 여기에 탁월하였다.

(5) 1603년 라이든 대학 교수가 되어 칼빈의 예정론을 반대함.

 

2)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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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 제 Calvin 파 Arminius 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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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 간 완 전 타 락 자유 의지 의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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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정 무조건 예 정 예지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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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 죄 제한된 선택 구원 무한 선택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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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 총 불가항적 은총 가향적 은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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