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에 대한 서구적 이해와 대책 글 : 김한영
기독교와 고난은 불가분리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복음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에 근거하고 있으며,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십자가의 길과 고난에의 참여가 필수적으로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상황은 어떠한가? 고난의 신학 대신 영광의 신학 또는 번영의 신학이 군림하면서, 한국교회에는 축복과 영광과 번영을 약속하는 복음들로 넘쳐나고 있다. 십자가와 고난은 모두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지셨으니, 이제 그리스도인에게는 영광과 축복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고난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이단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의 소명이 있다고 가르친다: “이를[고난을]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실로, 오늘날 수많은 교회는 ‘다른 복음’을 팔고 있으나 그것은 현세에서 실현될 수 없는 종교적 기만이다. 기독교가 한국에 도래한 시기는 우리 민족이 고난으로 진입하는 때였으며, 이조 말과 일제 아래에서, 그리고 한국동란과 전쟁 이후의 비참한 상황에서 기독교는 고난을 수용하고 극복하는 힘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이토록 고난을 거부하는, 자연종교와 유사한 형태로 전락하게 된 데에는 60년대 이후 한국경제의 급속한 성장과 풍요, 그리고 물질주의와 향락주의라는 시대정신에 점령당한 교회의 세속화 때문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와 쾌락주의라는 서구문화의 도입과 지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왜 서구화가 반기독교적 결과를 가져왔는가? 그 이유는 서구교회의 세속화가 선행되었으며, 그 결과 문화적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고난에 대한 몰이해는 지역과 문화를 초월한 보편적 현상이며, 서구문화는 구조적으로 기독교 사상에 근거하고 있지만, 본고에서는 현대의 서구문화가 고난을 거부하고 쾌락을 추구하게 된 사상적 원인에 대해 집중적으로 그리고 비판적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 고난을 거부하는 교회 ]
서구교회는 자체를 완전복음화하고 기독교문화를 건설하였으며, 전세계에 선교한 기독교의 모체이며 중심이다. 그리고 비서구 교회가 급성장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신학과 목회방법론의 근원이며, 모든 연합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그러나 서구교회는 심각하게 세속화되었다. 복음주의 지도자인 제임스 패커(J. I. Packer)는 현대의 서구교회를 ‘호화탕 종교’(hot tub religion)라고 규정한다: “행복주의(eudaimonism)는 행복이 최상의 가치이기 때문에,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현세의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불행으로부터 보호해 주기를, 또는 만일 우리에게 불행한 일이 발생하면, 그렇게 되는 것이 결코 그분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거기서 즉시 구해 주기를 기대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것이 호화탕 종교의 원리이다.”1) 그는 그것이 분명히 그릇된 원리인데도, 이러한 쾌락주의(hedonism)가 서구 기독교의 지배적 현실이며 기독교 제자도의 도덕적 본질을 상실하도록 유도한다고 진단하였다. 서구교회가 고난을 거부하게 된 것은 오랜 세속화 과정의 결과이다. 독일교회의 양심이었던 디트리히 본회퍼는 그런 과정이 본격적으로 계몽주의운동에서 시작되었다고 분석하면서, 그 결과 서구 기독교가 너무 합리화되고 문화화되어 십자가와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연종교, 원형적 기독교와는 본질적으로 이질적인 다른 종교로 전락하였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아마도 고난을 이해하는 동양으로 성령의 촛대를 옮기지 않겠느냐고 한탄하였다.2) 십자가로 성취한 값비싼 은혜가 값싼 은혜로 오인되어 오로지 번영과 쾌락만 추구하는 서구교회의 몰락을 예견하면서, 서구교회를 자연종교로부터 고난을 이해하고 참여하는 교회로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긍휼을 간절히 소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동양의 교회도 오늘날은 서구화로 인해 더 이상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 쾌락주의, 어디서 기원했나 ]
그러면 왜 서구인들이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는가? 서구사상은 두 가지의 원천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에서 발생한 헬레니즘과 유대에서 발생한 기독교사상이 그것이다.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기 이전에 지배적이었던 헬레니즘이 기독교에 문화적 주도권을 상실하였으나, 르네상스를 통하여 다시 부흥되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반기독교적인 계몽주의 운동의 출현과 함께 표면에 부상하였다. 물론, 헬레니즘이 그리 단순하지 않지만, 서구인들에게 고난을 거부하도록 만든 대표적인 사상이 이 흐름에서 발생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쾌락주의 사상이다. 쾌락주의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에피큐로스(B.C. 314~270)는 데모크리토스의 제자로서, 쾌락주의는 원자론의 논리적 귀결이다. 원자론이란 세계가 단순한 물질적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유물론으로서, 신이나 형이상학적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고는 자연히 형이상학적 이성을 부정하는 감성주의를 결과한다. 에피큐로스에 의하면, 모든 인식은 단순히 감각적인 지각에 지나지 않으며,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오로지 감각적인 지각만이 참되며, 그것은 항상 참되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가치와 비가치는 감각의 문제다”라고 규정하고, 선이란 감각적 쾌락을 주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러한 사상적 구조에서, 우리는 유물론적 세계관이 무신론과 더불어 쾌락주의를 결과한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 실로, 모든 것이 단순한 물질이며 영원한 존재나 절대적인 가치가 없다면 무엇을 위하여 고난을 감수할 필요가 있겠는가? 현세가 모든 것이라면, 쾌락과 행복 이외에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 이와 같은 고대의 유물론이 현대에 마르크스주의와 자본주의라는 형태로 부활하였으며, 이것은 자연히 가치관에 있어서 쾌락주의를 동반하였다. 19세기에 유럽 정신이 세속화됨으로써 종교적 사회가 비종교적 사회로 전락하였으며, 20세기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두 형태의 물질주의가 외적으로는 대립하였지만 내적으로는 동일한 가치관을 추구하면서 전세계를 지배하였다. 그렇게 하는 동안, 인류는 물질주의와 쾌락주의에 종속되었고, 교회도 이런 거대한 흐름을 거부하지 못한 채 고난을 거부하고 축복과 영광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 홉스와 니체가 끼친 반기독교 사상 ]
서구사회가 고난에서 영광으로 전환하게 되는데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 반기독교적 사상가를 든다면, 토마스 홉스와 니체를 생각할 수 있다. 이 둘의 공통점은 목사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고난의 의미를 철저히 부정했다는 점이다. 과거나 현재나 목사의 길은 고난의 길이며, 특히 목사의 가정에서 자라나는 자녀들이 그러하다. 이들은 그러한 고난에 적응하지 못하고 기독교 신앙에서 떠나 기독교를 비판하는 데 앞장서게 되는 비극을 초래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수용하고 인내하는 고난에 대하여 근본적인 무의미를 주장하고 힘의 논리를 전개하였다. 토마스 홉스(1588~1679)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적 유물론을 추종하여, 인간은 물체일 뿐이며 동물과 정도의 차이밖에 없는 본능적이고 감각적인 존재라고 이해하였다. 그와 동시대인이었던 데카르트가 사유의 절대 이성을 주장하였을 때, 그는 존재와 사유의 이원론을 부정하고 철저한 유물론적 일원론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는 객관적인 진리나 윤리를 부정하고 동물적 투쟁과 이기주의를 옹호하였다. 홉스에 의하면, ‘인간은 인간에게 이리’(Homo homini lupus)이며 ‘만인은 만인에 대한 전투’(bellum omnium contra omnes) 상태에 있다. 더 많은 소유와 쾌락을 얻기 위한 투쟁과정에서 고난이란 약자가 당하는 패배의 결과일 뿐이다.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는 신의 죽음과 반도덕주의를 외치며 모든 전통적 가치와 규범의 전복(Umwertung aller Werte)을 시도하였다. 그는 도덕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도덕가들 전체가 자기에게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자기를 ‘반도덕가’(Immoralist)라고 불렀다. 그에 의하면, 도덕이란 항상 당하고 패배하는 약자와 노예들이 자기를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 낸 허구적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니체에게 있어 이상적인 인간상은 모든 규범과 도덕을 거부하는 영웅적 인간이다. 강자의 횡포와 공격과 지배, 그리고 약자의 억압과 고통은 극복되어야 할 불의가 아니라 부정할 수 없는 삶의 본질이다. 그는 칸트의 이성이나 당위 개념을 철저히 부정하고, 오로지 힘에 의한 지배를 부르짖었다. 그와 동시대인이었던 다윈의 진화론이 그에게 미친 영향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그가 다윈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그가 인간을 동물의 한 종으로 본 것이나 약육강식 혹은 적자생존의 원리를 사상적 중심원리로 채택한 것은 그의 사상적 구조가 다윈의 진화론적 체계를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유물론적이고 진화론적인 인간이해는 결국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하였으며, 그를 허무주의자로 전락시켰다.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부정한 동물심리학자 스키너의 생각도 인간을 동물로 본 논리적 귀결이었다. 실로, 만일 아무런 절대적 진리나 윤리가 없다면, 그리고 단순히 동물적 투쟁만 있다면, 의미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실로 모든 것이 허용된다면, 아무것도 의미가 없다. 모든 것이 본능적이라면 자유도 없고, 결국 운명론에 빠지고 만다. 그러면 운명은 무엇이며 왜 우리가 운명에 끌려 다녀야 하는가? 그리하여 운명론은 결국 허무주의와 비관적 염세주의라는 절벽으로 추락하거나, 아니면 아무 원칙도 의지도 없이 되는대로 살아가는 방임적 쾌락주의에 귀결하게 된다.
[ 문화의 세속화, 진리의 혼돈에서 초래되다 ]
아마도 현대의 극도로 경쟁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홉스나 니체의 약육강식적 투쟁이론이 가장 실제적이고 효율적인 인생철학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현대철학의 실증주의, 실용주의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도 이성을 약화시키고 감성을 강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감성주의는 쾌락주의를 정당화하고 고무시킨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성의 해체와 불신을 조장하고 감성주의를 부추기는데, 감성의 규범인 이성을 부정함으로써 아무런 규제장치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검열과 규제와 제한의 철폐를 주장하며, 모든 가치와 규범이 힘과 정치의 논리일 뿐이라고 정죄한다. 동성애나 변태적 성을 옹호하는 성 정치학을 주장한 푸코(M. Foucault)도 이에 속한다. 결과적으로, 현대사회는 모든 규범을 점차 철폐하고 아무 규범도 없는 무윤리적 사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서구사회가 성경적 가치관이 지배하던 기독교 사회에서 이처럼 무윤리적 사회로 전락하게 된 과정을 살펴보면, 신으로부터의 점진적 이탈에 그 원인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한 사회가 무종교적 사회로 진입하게 되면, 문화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신관과 진리 혹은 윤리라는 규범은 깊은 내적 연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신이 진리의 원천이기 때문에 유신론은 진리의 존재를, 무신론은 진리의 부재를 전제하고 귀결한다. 유일신론은 유일한 진리를 인정하고, 다신론은 다수의 진리를 인정하는 다원론을 결과한다. 허무와 무의미가 피곤하고 외로운 현대인을 엄습하는 것도 신의 상실 때문이다. 종교는 문화의 영혼이기 때문에, 신의 부정과 무종교적 경향이 문화의 허무와 혼란을 야기한 것이다. 이것을 문화의 세속화라고 하며, 현대문화의 근본적 결함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신을 부정하면 절대규범을 부인하게 되고, 절대가치가 없으면 고난에 의미도 있을 수 없다. 바로 임마누엘 칸트가 이 점을 잘 지적하였다. 그러나 신의 명령도 자의적 규범에 포함시켜 거부해 버림으로써 그가 그토록 절대적 자체규범으로 수호하려고 했던 이성은 그 논리적 기반을 상실하고 불신을 당하게 된다.
[ 고난, 그것은 수동적 수난이다 ]
인간이든지 동물이든지 어떤 존재도 고난을 좋아하거나 원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만일 고난을 좋아한다면, 기쁨이나 행복을 느끼는 감성구조에 심각한 혼란을 야기하게 된다. 그래서 손봉호 교수는 고난이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나 과정으로” 또는 “과거에 이미 일어난 사건의 불가피한 결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3) 따라서 고난은 역사의 전 과정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되고 해석될 때 긍정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뿐, 그 순간 당하는 고통 자체는 부정적 경험일 수밖에 없다. 그 고난이 미래의 행복과 자기발전을 결과하며 과거를 극복하고 보상한다면 당연히 보람있고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는 고난의 도덕적 의미가 인과응보, 또는 상선벌악이라고 하는 역사의 합리성에 있다고 규정한다.4) 그런데, 현세만으로는 그것이 완전히 실현될 수 없기 때문에, 칸트가 지적한 대로 신과 그의 완전한 심판을 논리적으로 요청하게 된다. 그러므로 신의 존재 그리고 그의 주권적 역사 섭리와 완전하고 종합적인 심판이 고난의 의미를 수용하는 필수적 전제조건이다. 그러나 모든 고통과 고난이 의미 있는 것은 아니며, 모두 동일한 것도 아니다. 성경에 의하면, 고난에는 크게 세 종류가 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19~20). 선행을 하는 과정에서 오해나 미움을 받아 당하는 의로운 고난이 그리스도인의 정당한 고난으로서, 하나님의 칭찬과 미래의 영광이 보장되어 있는 의미 있는 고난이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육체에 채우는 명예로운 고난도 포함되는데, 그리스도께서 시작한 구속사역과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고 완성시키는 과정에서 당하는 거룩한 고난이다. 그러나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여(벧전 4:15) 그 악행의 대가로 고난을 받는 것은 아무 긍정적 의미도 없으며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애매한 고난이 있다. 선행이나 악행의 결과가 아니라 타자의 잘못이나 우주의 구조적 악화로 인한 우발적 고난으로서, 그 의미 여하는 거기에 대한 고난받는 자의 긍정적 태도에 달려 있다. 고난은 우리가 능동적으로 취득하거나 자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지 않지만 받고 당하는 수동적인 것이다. 그래서 고난은 수난(passion)이다. 물론, 이 세계에는 악이 존재하며 흑암의 세력이 강력히 포진하고 있어서, 선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세계의 변화와 구속은 우리에게 고통을 부여하는 저항과 공격을 당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영적 구도를 분명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을 예상하지만 그것을 원하거나 의도적으로 유발시키지 않는다. 고난은 우리가 의도하는 선행의 반작용이며 부정적 결과일 뿐이다. 만일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선행이 필연적으로 고난을 유발시키지 않는다. 그런데 고난을 능동적으로 원하는 사상이 서구에서 개발되고 발전되었다.
[ 고행주의, 왜 잘못인가 ]
불완전한 세계에서 완전한 세계를 갈구하던 그리스 철학자들은 육체노동을 천시하고 정신적 사유와 관조를 통하여 진리에 도달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를 추구하며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해방되려는 사고를 전개하였으며, 이는 육체를 포함한 물질적인 것을 죄악시하는 경향을 유포하였다. 그의 이원론적 사고는 오르페우스 종교에 영향받은 것인데, 헬레니즘의 주요한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오르페우스 종교는 다른 세계에 살던 인간의 영혼이 범죄하여 이 세계로 축출당했으며, 육체의 감옥에 갇혀 감각의 노예생활을 하는 형벌을 받고 있어서, 다시 이상적인 세계로 돌아가려면 육체와 감각을 벗어나야 고통의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사상은 인도 종교들이나 조로아스터교에서도 발견되는데, 공통적인 세계관은 이원론과 육체의 죄악시로서, 육체를 괴롭힘으로써 정신적 자유에 도달한다는 고행주의(ascetism) 사상의 원천이다. 이러한 헬레니즘의 영향이 기독교에도 나타났는데, 그것이 바로 금욕주의와 수도원운동이다. 초대교회의 이단이었던 몬타누스파도 이원론적 사고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중세교회의 이단이었던 카타리파도 이원론적 세계관과 함께 물질을 죄악시하고 윤회설까지 믿음으로써 사실상 오르페우스 종교와 거의 일치한다. 그뿐 아니라 기독교의 고행주의 전통은 구조적으로 육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예수께서 부유한 청년에게 준 말씀, 즉 “네가 완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마 19:21)는 충고가 보다 더 완전하고자 하는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에게 매력적이었으며, 독신의 권면도 그러하였다. 그 결과, 자의적 가난과 독신이 고행주의 전통에 있어서 완전의 원리가 되었다. 카타리파가 기독교인을 완전한 자(perfectus)와 믿는 자(credentes)로 구분하였는데, 이것이 사실상 로마 가톨릭교회의 내재적 구분이다. 270년경 안토니로부터 시작된 고행주의는 급격히 확산되어 수도원운동이 중세교회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고, 이것은 종교개혁에서 정죄되고 거부되었다. 성경이 가르치는 고난은 수동적인 수난이며, 결코 자기 스스로 자기에게 부과하는 고통도 아니며 육체를 괴롭히는 것도 아니다. 가난한 자들을 도운 결과 가난하게 되는 것은 건전하지만, 자기를 괴롭게 함으로써 영적 상승에 이르고자 의도적으로 가난을 추구하는 것은 잘못이다. 바울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것”이 신앙성장에 “유익이 조금도 없으며”, 단지 세속적인 “철학과 헛된 속임수”이며 “사람의 유전”일 뿐이라고 강력히 비판하였다(골 2장). 기독교는 결코 고난을 능동적으로 추구하지 않으며 수동적으로 당할 때 인내하라고 가르친다. 세상의 죄악적인 구조 때문에 현세적인 고난은 불가피하지만, 내세의 영광을 추구한다. 비록 고행주의가 성화와 수련을 위해 고행을 한다고 하지만, 영적 교만과 성도의 구분, 그리고 도피주의와 외식을 결과한다. 물론, 수도원운동의 긍정적 측면도 부정할 수 없으나, 자의적 고행은 결코 권장될 수 없다.
[ 정신적 혼란의 증상, 사디즘과 마조키즘 ] 이러한 변태적 고난 이해는 현대 서구문화의 병리현상에 널리 나타난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와 <투우사>와 같이 야만적인 경기를 즐기는 서구인들은 오늘날에도 권투나 레슬링을 비롯하여 과격하고 난폭한 경기를 즐기는 폭력적 문화를 확산시키고 있다. 타인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쾌감을 느끼는 인간의 죄악성이 서구의 실제적 혹은 가상적 게임을 주도하고 있으며, 잔인한 공포영화나 파괴적인 헤비 록음악 혹은 포르노 필름과 같은 것을 서구의 대중문화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비록 동양에도 잔인하고 변태적인 반문화가 없지 않으나, 오늘날 변태적 쾌감을 조장하는 반문화들이 거의 모두 서구에서 발원하여 수입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서구가 고난과 쾌락을 혼돈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 문화의 세속화와 진리의 혼돈 ] 실로, 현대인은 시장경제의 광고 전술과 유행 조작을 통하여 철저히 통제되고 있어서 자기가 진실로 필요로 하고 기뻐하는 것을 모른 채 기업가들에 의해 끌려 다니며 향유를 강요당하고 있으며, 그와 같이 강요된 물품을 구매하고 소비하기 위하여 정신없이 돈을 만드느라 피곤한 노동을 지나치게 강요당하는 불쌍한 인간들이다. 더욱이 소비의 가장 아름다운 대상으로 육체를 재발견하여 육체 숭배가 현대인의 이데올로기가 되었고, 시장구조는 육체와 아무 관련 없는 상품들을 육체와 연관시켜 판매를 증대시키는 ‘인위적 가속장치’로 사용하고 있다.8) 고난을 거부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현대인은 끝없는 고통 속에서도 자기의 실상을 모른 채 의미 있는 고난이 아니라 무의미한 고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십자가의 신학을 회복하라 ]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제 ‘십자가의 신학’(theologia crucis)을 회복하여야 한다. 영광의 신학과 십자가의 신학이 역사적으로 교차되었는데, 지금 한국교회는 너무 번영과 영광의 신학으로 가득 차 있다. 고난은 핍박받는 시기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든지 교회가 말씀을 충실히 순종하고 세속적 힘들과 타협하지 않으면, 고난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고난이 없다면 역으로 용기 있는 순종과 참된 경건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본회퍼가 절규한 대로, 하나님은 아마도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는 교회에서는 촛대를 옮기실 것이다. 이정석·미국 칼빈신학교(M. Div., Th. M.)를 나와 화란자유대학(Drs. Theol., Dr. Theol.)에서 공부했다. 「세속화시대의 기독교」 등을 썼으며 지금은 국제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로 있다. 주(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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